초등학교 4학년때 다니던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연극을 했는데, 그 때 내가 맡은 역할은 동박박사3 이었다. 아주 작은 교회였고, 나는 그 교회를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또 꽤 수줍음 타는 아이었기 때문에, 더 큰 역할이 주어지지 않은것을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동박박사3은, 아기예수가 태어났을 때 찾아가서 선물만 주면 되는 역할이었다.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늘 연극연습을 하러 교회에 갔는데, 공연을 며칠앞두고 마리아 역을 맡았던 6학년 언니가 마리아 역을 하고싶지 않다고 했다. 그 언니가 동방박사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마리아 역을 단순히 하기 싫어했던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국 그 언니와 나는 갑작스레 역할을 바꾸게 됐고, 나는 6학년 H 오빠를 남편, 요셉으로 둔 마리아로 분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그 오빠와 좀 친해졌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러니까 연극 당일, 평소에 교회에 다니지 않던 어른들까지 불러모아 연극을 무사히 마친 그날 밤에, 연극 후 예배를 보기 전의 그 약간 소란스러운 틈을 타, 3학년 남자아이 한명이 누나, 이러면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전해주었다. H 형이 누나 주래, 라는 말과 함께. 나는 어 그래? 하며 카드를 막 열어보려는데, 6학년 언니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야, 걔가 준거야? 우리는 못 받았는데? 카드 받은 여자는 너 뿐인것 같아, 열어봐 열어봐 등등. (시끄러워..) 그런데 카드를 열자 이렇게 써있었다.
소라에게.
내 이름은 소라가 아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소라가 아니었다. 나는 대수롭잖게, 어, 카드를 잘못 보냈네 나는 소라가 아닌데. 소라한테 가야 할 카드가 나한테 왔네 싶어 다시 봉투에 카드를 넣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6학년 언니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야 소라래, 소라. 소라 아닌데. 하면서. 나는 H 오빠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오빠, 나 소라 아니야. 하고는 돌아서서 다시 내 자리로 갔다. 그리고 엄마 옆에 앉아 예배를 볼 준비를 하는데, 그 작은 교회안이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나는 고개를 들고 소리 나는 곳을 둘러보니, 오, H 오빠였다. 그가 울고 있었다! 으응? 왜 울지?
그 때, 옆에서 그 오빠를 달래주시던 선생님 한분이 나를 손짓으로 부르셨다. 나는 쪼르르 달려가서 왜요? 이 오빠 왜 울어요? 했더니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구석으로 가시며 조용히 얘기해주셨다.
H 가 너한테 카드보냈는데 이름이 잘못 써져 있었다며? 네. 나한테 네 이름을 묻길래, 쟤 장난이 심한 아이니까 또 무슨 장난을 치려나 싶어서 일부러 잘못 알려줬거든, 소라라고. 아, 네... 카드를 쓸 줄은 몰랐어. 네. 카드 들고 와서 니 이름이 소라가 아니라며 막 울기 시작했어. 아.......... 니가 가서 괜찮다고 좀 달래주면 안될까? 네? 나는 울고 있는 오빠에게 가서 오빠 괜찮어, 울지마. 라고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집에 가는 길, 엄마랑 연극에 대해 얘기하다가 그 오빠에 대해 얘기했더니 엄마는 깔깔 웃으시며, 너 벌써부터 남자를 울리는구나, 하셨다. 어, 내가 남자를 울렸어. 뭐, 그게 그게 아니지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말은,
그대의 이름만이 나의 적일 뿐이에요.
몬터규가 아니라도 그대는 그대이죠.
몬터규가 뭔데요? 손도 발도 아니고
팔이나 얼굴이나 사람 몸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에요. 오, 다른 이름 가지세요!
이름이 별건가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건
다른 어떤 말로도 같은 향기 날 겁니다.
로미오도 마찬가지, 로미오라 안 불러도
호칭 없이 소유했던 그 귀중한 황벽성을
유지할 거에요. 로미오, 그 이름을 벗어요.
그대와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에
나를 다 가지세요
이름이 별거 아닌게 아니라는 거다. 이름이 별건가요? 라고 묻는 순간, 줄리엣은 이미 로미오의 이름이 주는 고통을 깨닫고 있었다는 거다. 이름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왜 이름 대신에 '나를 다 가지세요' 라고 말하겠는가. 장미라 부르는 건 장미라 부르지 않아도 장미의 향기는 날 테지만, 장미의 향기가 나는 걸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장미는 더이상 장미가 아닌게 되잖아. 이름은, 그러니까,
누군가의 이름은,
특.별.하.다.
고스란히, 온전히 의미가 되어 다가온다.
이윽고 우편함 중에서 '가와나' 라는 이름을 발견한 순간, 아오마메 주위에서 모든 소리가 일시에 사라진다. 아오마메는 그 우편함 앞에 우뚝 선다. 주위의 공기가 갑작스레 희박해지고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입술은 벌어져 가늘게 떨린다. 그대로 시간이 흘러간다. (중략) 하지만 아오마메는 그 우편함에서 자신의 몸을 떼어낼 수가 없다. '가와나'라는 한 장의 작은 이름표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몸을 얼어붙게 한다. (pp.504-505)
누군가의 이름을 '보는 것' 만으로도 주위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지 않을까. 그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줄 알기 때문에. 혹은 그 이름을 가진 누군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헤어진 옛 연인의 이름을 보는것이 고통스러워 메신저에서 그 이름을 삭제시켰었고, 그 이름으로 오는 메일을 여는 것이 두려워 메일주소에서도 차단시켰었다. 그 이름은 내게 의미가 있으니까. 모두가 읽을 수 있는 단순한 글자의 나열이 아니니까.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메신저창에 로그인이든 로그아웃이든 누군가의 이름을 볼때마다 떨린다. 그냥 이름인데. 고작 이름일 뿐인데. 간혹 손 끝으로 모니터에 드러난 그 사람의 이름을 가만히 짚어보기도 한다. 마치 손끝에서 그 사람을 느낄 수 있을것 같다는 착각을 하면서. 그 이름에 손을 댄 순간 내가 느끼고 싶은건 모니터도 아니고 글자도 아니다. 물론, 그 이름이 잘 생겨서도 아니다. 나는 온전히 그 누군가를 느끼고 싶었던것 뿐이다. 그 이름을 가진 그 누군가를.
언젠가 예쁜 여자후배와 밥을 먹으면서 나 참으로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라는 말을 꺼낸적이 있다. 후배는 언니, 그 사람 이름은 뭐에요? 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 싫다고 했다. 그 이름을 말해주기 싫다고. 왜요? 나는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이 너무 궁금한데요? 나는 싫어, 내가 말하는 거랑 니가 듣는거랑 같지 않으니까. 라고 얘기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은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다. 나 혼자만 알고 싶다. 물론, 그 이름은 세상 누구에게도 불려질 이름이지만, 그 사람이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사람은 계속 그렇게 누구에게든 불려질테지만, 내가 부르는 이름은 그들이 부르는 것과는 다.르.다. 나의 이런 마음은 마누엘 푸익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가 그에게서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그거야. 내 마음속으로 말이야.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날 위해서 이름만은 안 돼. 그걸 말할 수는 없어......」 (p.86)
출근길에 아오마메가 덴고의 이름을 발견하고 이성이 마비되는 걸 본 순간, 이름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졌다. 당신의 이름이 얼마나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지도 얘기하고 싶었다.
크리스마스 당일, H오빠는 내게 다시 카드를 줬다. 추우니까 내 잠바 입어, 라고 말하면서 카드를 잠바에 감춰서 줬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혼자서 읽어, 라고. 나는 아무도 없는 예배당으로 들어가 혼자 앉아 카드를 읽었다. 누구나 봐도 괜찮을 내용, 그러니까 정말이지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름 잘못 알고 보낸것 미안해, 크리스마스 잘 보내. 정말 그게 다였다. 그러나 카드에는 또박또박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며칠 후, 해가 바뀌면서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고, 오빠는 중학생이 되었다. 교회에서는 더이상 H 오빠를 볼 수 없었다. 그 쪼끄만 교회, 나눌 게 뭐 있다고, 오빠는 중등부 예배에 참석해야 한단다. 그래서 나는 교회를 그만뒀다. 내 신앙은 사실 고작 그만큼이었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