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주전쯤. 나의 후버까페가 채팅창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는 나에게 뭔가를 묻기 위해 대화를 시작했는데, 그때의 나는 가장 약하고 흐물흐물 해져있던 때라,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러려고 했던게 아니었는데, 그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놓아 버리고 말았다. 말하면서도 멈추어야 해, 라고 생각했지만 한번 쏟아진 말들은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고 말들이 말들을 불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은 약해져 있을 때일수록 더 단단히 자신을 동여매야 하는건데, 그때 나는 차마 매듭을 묶을 수도 없었다. 내가 다스릴 수 있는 힘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민들은 내 입밖으로 다 튀어나오고 난 후였다.
나는 그가 내게 뭔가 해결해줄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말해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고민이란게 그렇다. 고민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의 강도가 좀 약해지는 것이고 잊혀지는 것일 뿐. 그것 자체를 해결하는 일은 시험 문제의 답같은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거였다면 고민 자체가 되지 않았을 것. 후버까페가 내게 해준 말들은 전혀 특별할 게 없는 말들이었다. 내가 하는 고민이란 것이 특별한 고민이 아니었던 만큼, 이 세상의 숱한 남자와 여자들이 겪었으며 겪고 있으며 겪게 될 고민이었던 바, 그가 말하는 방법들은 상식적이고 평범한 것들이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이런 고민을 들었다면, 나 역시 그정도로 밖에 말해줄 수 없는 것들.
그러나 고민을 털어 놓는 것, 그것을 누군가가 들어주었다는 것, 그리고 사실 결정은 본인이 해야 한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는 것 조차도 알면서 뭔가 해결해주기 위해 응답을 해준다는 것, 그 상황들이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나는 초조해져 있다가 그와 대화를 하고 나서는 진정되었다. 초조한 마음이 사라졌다.
2.
영화는 어려웠다. 보다가 어지러웠다. 흐름을 놓치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을 것 같아 정신을 집중했더니, 그게 오히려 역효과였을까, 와- 정말 머리가 아팠다. 그러니까 보면서도 보고나서도 이 영화는 정말 뭔가 대단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고, 이해 자체도 뚜렷하게 되질 않았다. 나는 아직도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것이 이것인지 저것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내가 좋았던 부분들 중 하나는, 알게 된지 얼마 안된 여자가 고민하고 있는 남자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와 그가 연인관계인것도 아니고 또 그녀와 그는 친구라고 부를 수도 없는 관계다. 그가 일을 하기 위해서 그녀가 필요했고, 그녀는 그 일에 흥미를 느껴서 한 팀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할 고민이 있었고 죄책감이 있었으며 그것으로 앓고 있었다. 그녀는 밤마다 대체 그가 고민하는게 무엇인지 궁금해서 그의 꿈속으로 들어가봤고, 그의 문제를 알게 됐으며, 그를 돕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굉장히 큰 일이고 절실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녀가 함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당신이 거기로 가면 '맬'을 만나게 될텐데, 죽일 수 있겠어요? 그가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올 것을 그녀는 믿고 있다. 그는 돌아올 거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타인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것, 타인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 오래된 친구가 좋다는 것은 백프로 옳은 말은 아닌 것 같다.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둘 사이의 관계는 누가 떼어놓을 수 없는 단단한 사이 혹은 끈끈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것이다.
3. 지난주의 어느 하루,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나를 만나기 위해 두시간 일찍 퇴근했으며 내게로 오기 위해 길에다 두시간을 투자했다. 그리고 나를 만나 나의 이야기를 들었고 내가 화를 낼 때 같이 화를 내주었다. 내가 웃을 때 같이 웃어주었다. 내가 술잔을 들면 친구도 술잔을 들었다. 내가 쌈을 싸면 친구도 쌈을 쌌다. 우리는 산사춘을 마셨고 고기를 다 먹고 냉면까지 먹었는데도 아직 날이 훤하다며 신나했다. 그리고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이만큼.
정신없이 마셨다. 마시고 또 마셨다. 그리고 내가 화장실 간 사이, 친구는 이 수많은 맥주값을 계산했다. 천사인걸까? 나는 요즘 좀 외롭고 쓸쓸했고 마치 왕따가 된 기분이었었는데, 흑,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라는 '친구가 화장실 간 사이 술값 내주는 사람'을 친구로 가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왕따가 된 기분은 느끼지 말아야 겠다. 게다가 저 맥주들 옆에는 안주로 시켰던 고로케와, 왕새우구이와, 오사카 짬뽕이 있었다. (아, 둘이서 정말 너무 먹은걸까? ㅜㅜ)
(사진설명: 벽에다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외롭고 쓸쓸한 마음 표현하기.
자매품으로는 '테이블위에다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고개 숙이고 쓸쓸해하기' 가 있다.)
4. 다음주의 어느 하루에는 미녀군단 (이라고 나 혼자 이름붙임) 의 모임이 있다. 그중에 한 명이 남자친구를 데리고 올까 말까 고민이라는 말을 ㅈ 양에게 전해들었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남자를 데리고 오는데 당신과 나만 데리고 올 남자 없으면 좀 쓸쓸하지 않겠어요? 라고 물었다가, 아니 내가 왜 ㅈ 양에게도 남친이 없을거라 생각하는거지? 이런 억측은 실례잖아, 싶어서 다시 급하게 물었다. 아, 혹시 당신은 남자친구가 있나요? 그러자 ㅈ 양은 이렇게 대답했다.
『남자친구는 커녕 남은친구도 없어요.』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웃으면서 울었고 울면서 웃었다. 나는 대답했다. 나도요, 나도요! 나도 그래요! 아, ㅈ 양아, 우리 서로에게 남은 친구가 되어주도록 해요. 우리 서로에게 남은 친구가 되어서 가능한 오래 서로에게 남아있도록 합시다. 남자친구는 커녕 남은친구도 없어요, 라고 말하는 센스라니! 당신은 지독하게 멋진 여자사람이에요. 나는 당신의 사귄 지 얼마 안 된 친구, 그러나 오래 남아있을 친구.
5. 참 이상도 하지. 깊디 깊은 고민을 주는 것도 친구고 그 고민을 들어주며 웃게 만들어주는 것도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