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엔 미카의 콘서트에 다녀와서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아, 1983년생 영국청년의 그 미칠듯 열정적인 무대라니! 물론 당연히 그럴거라 기대하긴 했지만, 아 이건 정말이지.. 나는 미카의 콘서트에 가기 위해 가장 좋아하는 원피스를 입고 꽃단장을 했다. 그리고 내 마음대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다. 나는 꽃단장을 했으니까,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을 가득 메운 사람들 속에서도 단연 미카의 눈에 띌거고, 미카와 눈이 마주치면 우리 사이엔 전기가 흐를거고, 나는 무대위로 올라가 미카의 뺨을 한대 날릴거고, 미카는 내게 "너같은 여자는 처음이야!"하면서 영국으로 데려갈거고, 나는 거기서 미카와 나를 반반씩 닮은 아들 둘, 딸 둘을 낳을거고.. 83년생? 그깟 몇년 나이차이? 흥, 송골매에게나 주라지!



그런데 현실속의 나는 체력이 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원피스는 등에 붙어버렸으며, 겨드랑이도 축축해지고(응?), 미카와는 눈이 마주칠만한 거리에 있지도 않았고, 설사 눈이 마주치고 내가 뺨을 날리는 것에도 성공했다 해도, 내 몸에서는 지독한 땀냄새가 나서 아마 그와 영국에는 갈 수 없었을 것이다. 흑.
금요일에는 술에 취해 허우적거리고, 토요일엔 미카에 취해 질퍽거리고, 일요일엔 에피톤 프로젝트에 취해 흐물거리고.
도무지 책을 한자도 읽지 못하고 너덜너덜 젖은 휴지처럼 지내고 있는데, 그럴때 빡 집중하지 않아도 좋을 책을 집어들었다. 빡 집중하지 않아도 되지만 콕, 하고 찌르는 책.
사진을 찍어 책 안의 그림도 좀 올리고 싶은데, 지금시간은 23:29. 사진 찍어서 올리면 나는 잠을 언제자냐. 그러니까 사진은 생략. 빨리 쓰고 자야되니까. 꿔야 할 꿈도 있고.
자, 그러니까 이 책은 '우리 동네 미자씨'에 대한 이야기다. 나의 동네에도 당신의 동네에도, 하다못해 가끔 출퇴근길의 지하철역에서도 마주칠 수 있는 미자씨 이야기.
미자씨는 혼자다. 철저하게 혼자다. 미자씨 옆에는 아무도 없다. 미자씨에겐 유리로 된 시계도 없고, 피아노도 없고, 흰 가구도 없으며, 가끔은 쌀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돌보아 주는 사람도 없다. 미자씨는 가끔 동네 아이들의 아이스크림을 뺏어먹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미자씨를 싫어하고, 동네사람들은 여럿이 모이면 미자씨 흉을 보기도 한다. 그런 미자씨에게는 주인집조카 성지만이 유일한 친구이다. 성지마저도 미자씨를 보면 화를 내기 일쑤지만. 성지와 미자씨는 투닥투닥 싸우며 잘도 지낸다. 서로가 혼자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상대가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미자씨가 아프다. 홀로 아프다. 홀로 아파서 뭘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뜨끈한 오뎅국물이라도 먹으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수요일이랑 토요일 아침에만 오는 부식 차 아저씨에게서 오뎅을 사다달라고 성지에게 부탁한다. 미자는 부식차 아저씨를 좋아해서 만나고 싶지만 아픈 몰골로 그를 볼 자신이 없다. 성지는 혹 부식 차 아저씨와 미자씨가 사이가 좋아져서 자신에게 관심을 덜 보이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아픈 미자씨를 위해 오뎅을 천원어치 사다준다. 그런데 미자씨가 아프다는걸 안 부식 차 아저씨가 싱싱한 동태 두마리를 보내준다. 뜨끈한 국물을 끓여 먹으면 아픈게 많이 나을거라고.
미자씨는 동태 한마리로 성지와 요리를 해먹고, 동태 한마리는 언젠가 부식 차 아저씨에게 대접하기 위해 냉동실에 얼려둔다. 맛있게 끓여 부식 차 아저씨에게 대접해야지. 드디어 그날이 왔고, 미자씨는 선물 받은 여우목도리를 두르고 이옷 저옷을 입어보다가 부식 차 아저씨에게 가서 저녁 초대를 하려고 한다. 무수히 연습했던 말들을 부식 차 아저씨에게 꺼내려는 순간, 미자씨는 부식 차 아저씨가 한달전에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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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이야. 차 장수는 그냥 보통 남자라고."
미자씨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동태찌개를끓였죠. 동태찌개는 아주 시원하고 얼큰했어요.
"아, 이거 보통이 아닌데."
미자씨는 남김없이 먹었어요. 하지만 배가 부르지 않았죠. 뱃속에 찌개 한 냄비로 채울 수 없는 큰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어요.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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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씨는 바깥을 돌며 노래를 부르고, 성지를 안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미자씨는 남들보다 더 가진게 없었지만 미자씨가 느끼는 감정만큼은 다른사람 못지않다. 나는 피아노도 가지고 있고, 아이스크림을 뺏어먹지도 않으며, 아플때 홀로 있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내가 아침식사나 저녁식사에 초대하려는 상대가 '나에겐 이미 식사를 같이해야할 상대가 있다'고 말한다면, 미자씨와 별 다를바 없는 행동을 보일것이다. 내 앞에 놓여진 음식들을 다 먹어치울것이고, 그리고 나서도 뱃속에 구멍이 뚫린 기분을 느낄것이다. 나는 입 밖으로 노래를 내보내겠지만 금세 눈물을 터뜨릴 것이다. 나에게 뭔가 새롭고 설레임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더는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대체 어느 누가 미자씨랑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미자씨의 여우목도리도, 그 날의 미자씨에겐 소용이 없었다.
작가는 책의 끝, '작가의 말'에서 '내 안에 미자씨가 있다'고 말했다. 미자씨는 작가의 안에만 있는게 아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내 안에도 미자씨는 있고, 지금 내 방 창문 밖에서 시끄럽게 소리지르고 있는 방황하는 청소년 안에도 있고, 20분전에 전화를 걸어 만나줄수 있느냐고 묻는 나의 과거의 남자 안에도 있고, 미카 안에도 있다. 미자씨는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모두 미자씨다. 아닐수 없는 것이다.
23:50
이젠 넷북의 뚜껑을 닫고 침대 위로 올라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