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정말로 나 기억 안 나?
- 아니, 기억나.
- 기억난다구?
- 응.
- 뭘 기억하는데?
- 네가 열 살이었다는 거. 네 키는 1미터 29센티미터, 몸무게는 26킬로그램, 네가 1년 전에 유행성 이하선염을 앓았다는 거, 그래서 내가 병문안을 갔던 거. 네가 슈아지-르-루아에 살고 있었고, 기차를 타고 너를 보러 갔을 때 42프랑이 들었다는 거. 네 어머니 이름은 카트린, 아버지는 자크, 너는 캔디라는 이름의 거북을 키우고 있었고, 네 단짝 여자친구는 앙토니라는 모르모트를 가지고 있었어. 너는 초록색 바탕에 흰색 별무늬가 있는 수영복을 입고 있었고, 네 어머니가 네 이름을 수놓은 비치가운을 만들어줬다는 거. 어느 날 아침 네가 울었던 것도 기억나. 네게 온 편지가 하나도 없다고. 캠프파이어 하던 날 네가 양쪽 뺨에 반짝이를 붙였던 거, 그리고 네가 레베카라는 친구하고 '그리즈'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었던 것도...
- 우와, 너 기억력 기막히구나!!! (휴가, 공교롭게도 또 85페이지네)
단순히 기억력 운운할 것은 아닌것 같다. 열 살의 그에게 그녀는 기억될 만한 사람이었던 거지. 열살의 기억을 줄줄 읊어대는 그는 스물세살이다. 십삼년이 지나도 줄줄 읊어댈 수 있다니, 그녀는 그에게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나 역시 어릴적의 일들을, 어릴적의 친구들을, 기억한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훨씬 훨씬 많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시간이 오래 지나서일수도 있고, 내 기억력이 엉망이어서 일 수도 있고, 잊혀질만한 것들이어서 일 수도 있다. 이유가 뭐든간에,
나는 기억력이 좋은 여자사람은 아니다. 당연하다. 뭐, 내가 딱히 남들보다 좋은게 있을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런것들을 기억한다.
버스안에서 스치며 봤던 순대국집 간판 (이걸 기억하고 찾아가자 엄마는 나를 믿는다고 했다. 나는 원래 머리가 좋았다며..)
어릴 때 아빠가 LP판들 사이로 비상금을 감추던 일 (이건 엄마한테 일렀다. 그래서 엄마가 뺏었....내가 너무 어렸어요, 미안해요, 아빠. 지금 봤다면 말하지 않았을거에요. 아빠는 아직도 가끔 이 얘기를 꺼내시며 날 원망하신다.)
내가 좋아했던 남자들의 전화번호 (왜 이따위 것들이 잊혀지지 않는걸까!)
연락해요, 라고 말하던 남자의 전화기 너머의 웃음기있는 말투 (나는 그것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좋다. 상대는 내게 그런말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꼭 쥐고 있던 손 위를 쓰다듬던 그의 손가락, 그 순간 나의 찰나의 떨림 (그도 기억하고 있을까?)
더 쓸라고 했더니 갑자기 심장이 와락 조여와서 멈춰야겠다.
저 위에 링크한 '안나 가발다'의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렸으면 좋겠다』는 뭐, 별로 재미는 없다. 제목은 기가막힌데!
다 비 때문이다. 비가 와서, 멜랑콜리해져서, 이런 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