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그저 지나치기엔 아쉬워서

오늘 휘모리님의 페이퍼를 읽다가 갑자기 . 

가끔 책들을 읽다 보면 그 안에 누군가 시를 지었다든가, 혹은 누군가의 시를 인용했다든가 하는 부분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시들이 소설보다 더 가슴을 울릴때도 있다. 

 

내게는 무척 재미없었던 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도 시가 나오는데 이 시는 이 소설 한권보다 도 훨씬 좋았다. 

 

 

떨리는 한숨이 가슴을 채우고
두 손이 우연한 만남에 떨리고
두 사람의 맥박과 신경이
감미로운 통증으로 두근거릴 때,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치던 두 눈이
서로 수줍어하며 눈길을 피하다가
황홀하고 의식적인 합일점을 찾을 때,
이 흥분과 깨달음은
하늘의 천사가 부르는 사랑의 전주곡인가?

아니면, 달빛 아래 숨 쉬는 모든 것들이
그토록 쉽사리 배울 수 있는 속된 가락인가?
-아서 H.클러프, 제목 없는 시(1844)
(p.321)

나는 시 조차도 빨리 읽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감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시집을 읽어도 감흥이 덜하곤 한다. 그런데 가끔 읽고 있는 소설 속에 이런 시 들이 나오면, 내게는 시집 한권보다 더한 느낌을 준다. 아마 그 시가 나오기 전과 후의 내용들을 파악하고 읽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시 속에 담겨진 감정을 짐작할 수 있을테니. 

계속 이어서, 이 책에는 이런 시도 나온다. 

그대를 볼 때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내 혀는 비틀거리고,
가느다란 불길이 내 팔다리에 스며들고,
내면의 천둥 소리가 내 귀를 멀게 하고,
내면의 어둠이 내 눈을 멀게 한다.(p.325)

자, 나는 X를 좋아한다. 그러나 X는 좀처럼 내 서재에 와주질 않는다. 그러나 X는 Y의 서재에는 종종 간다. 나는 Y도 좋아하지만, 아주 가끔은,  X의 글을 보고 싶고, X의 흔적을 발견하고 싶어서  Y의 서재에를 간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 안에 인용된 시 들을 보고 짜릿해 하는건, 마치 이와 같지 않은가!  

 

소설 속에 인용된 시 들을 보며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A.S. 바이어트의 [소유]이다. 

  

 

여자들은 변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대는 변화 가운데서도 늘 변하지 않습니다.
샘물에서 나와 마침내 잔잔한 웅덩이에 안기는
떨어지는 폭포수의 수많은 물방울들처럼
그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 새로 태어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이옵니다
그리고 그대는 그 형태를 움직이고 유지케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R.H. 애쉬, 『아스크와 엠블라Ⅷ』(하권, p.56)

위의 시를 지은 애쉬는 이 책속의 남자 주인공이다. 그는 이미 결혼한 남자인데, 자신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전기 충격과도 같은 흥분이나
대지 내부의 뜨거운 불길이
화산 폭발로 분출되며 발하는
천둥 소리와 같은 굉음,
그 이상이 아닌가요?
우리는 자동 인형인가요
아니면 천사와 같은 존재인가요?

-R. H. 애쉬 (하권, p.78)

그래서일까, 이 책 속에 인용된 시들도 아름답지만, 문장 자체로도 탄성을 자아낼 만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사람이 쓴 글씨 가운데 어떤 것은 1년이 지나든 5년이 지나든 혹은 25년이 지나든 계속 어떤 이의 마음을 뒤틀리게 만들기도 한다(상권, p.287)
 
   

 나는 몇년이 흐른 지금도 누군가 내게 건네준 어떤 쪽지의 글씨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곤 한다. 

물론, 이 책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이 책을 가장 아름답게 완성시켜 준 문장은 애쉬가 한 소녀를 만나서 전하는 말이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책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면, 이 책속의 애쉬와 소녀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면 제대로 감동할 수 없는 바로 이 문장. 

   
  "네 이모님한테 말 좀 전해 주려무나. 네가 어느 시인을 만났는데, 그 아저씨가 사실은 무정하지만 아름다운 여인을 찾고 있다가 너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으며, 이젠 새로운 곳의 숲과 초원을 찾아 떠나는 중이라고 말이다." (하권, P.536)
 
   

아! 나 시 얘기 하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소유 예찬론으로..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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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1-11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제게 소유는 재미없었어요 ㅎㅎㅎ

다락방 2010-01-11 11:59   좋아요 0 | URL
전 소유 완전 사랑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2010-01-11 13:34   좋아요 0 | URL
그러나 저는 소유를 읽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저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도 읽어보지 않았어요.

다락방 2010-01-11 13:36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은 어쩐지 [프랑스 중위의 여자]도 읽고 재미있다고 하실 것 같아요! [소유]는 더 말할것도 없고!

레와 2010-01-11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귀들이 하나같이 전부, 내 가슴을 퍽퍽 때리요.

=.=

다락방 2010-01-11 17:07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 적으면서 [소유]를 다시 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불끈!

습관 2010-01-11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유"

무척 재밌게 읽었었으며, 책이 어느 책 꽂이에 있는지도 잘 알고 있는데,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이건 뭐란 말입니까??

ㅎㅎ

다락방 2010-01-11 17:07   좋아요 0 | URL
습관님, 저는 그런책이 한두권이 아닙니다만. ㅋㅋㅋㅋㅋ

비로그인 2010-01-11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유, 무척 고통스럽게 읽었는데 참 좋았어요. 너무 좋으면 전 리뷰를 쓰질 못하는데 소유가 그랬어요. 그 부분들을 정말 예리하게 짚어내셨군요. 심지어 저는 `난 하찮은 일을 하러 가야 해'라고 그 남자의 부인, 발이 말하던 그 대목까지도 좋았어요. 그런 한숨섞인 자조적인 목소리에서 나오는 둘의 관계가 슬퍼서요.


그리고 이 소설을 알게 된 건 순전히 다락방 님 덕분이었지요. 리뷰를 써보라는 권유에도 못쓴 것은, 순전히 `너무 좋아서', 책과 나 사이의 간격이 사라져버려서, 였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중위의 여자, 재미없던가요? 정말요? 저 정말 미친듯이 감동하며 읽었어요 흐흑

다락방 2010-01-12 08:39   좋아요 0 | URL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리뷰를 보니 다들 재미있다고들 하던데, 저는 너무나 너무나 지루한 책읽기였어요. 다 읽고 나서 만세를 외칠 지경이었다니깐요. 대체 왜 그런건지...Jude님이 감동하며 읽으셨다니 윽, 제가 뭘 놓친걸까요? ㅠㅠ

[소유]를 다 읽으셨군요! 선물하고서도 혹 고통스런 책읽기가 되면 어쩌나 마음 졸였거든요. [소유]를 몇몇 친구들에게 선물했는데, 사실 다들 잘 읽지를 못하더라구요. 팔랑팔랑 넘어가는 책장은 아니라서 그럴지도요. 읽으셨다니, 좋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얼쑤~ 히히

비로그인 2010-01-12 08:50   좋아요 0 | URL
그런 책이 있어요. 고통스럽고 즐거운 독서. 아주 술술 넘어가지 않는데, 문장 하나하나가 발목을 잡고 늘어지기 때문이지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그랬고 바람의 그림자도 그랬어요. 오로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나를 뜨겁게 만드는 독서. 그래서 참 고마웠는데, 뒤늦게(정말 늦죠!) 고맙다는 인사를 남깁니다.

다락방 2010-01-12 08:54   좋아요 0 | URL
아~ 이 세상에 읽을 책은 얼마나 많은가요! 아 막 의욕이 불타올라요. 바람의 그림자 어서 읽어야지. 만들어진 신도 어서 읽어야지. 소유는 다시 읽을까? 프랑스 중위의 여자도 다시 한번 읽는게 낫지 않겠어? 아흑, 전 뭘 어째야 할까요.

마노아 2010-01-1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행기에 싸들고 갈 책으로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고르려다가 저번에 재미 없었다고 하신 게 생각나서 제외시켰어요. 안 그래도 긴 시간 동안 화딱지가 나면 어쩌나 싶어서요.^^ㅎㅎㅎ
전 이 책의 리뷰를 읽은 적도 없는데 중고샵에서 보고는 그냥 충동 구매했어요. (>_<)

다락방 2010-01-12 08:35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위에 ▲ Jude님이 쓰신 댓글 좀 보셔요.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미친듯이 감동하며 읽으셨대요!! (전 재미없어 했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마노아님, 그러니 신중히 선택하세요. 마노아님의 공항에서의 긴긴 시간을 알차게 채워줄 만한 책을 잘 고르셔야 할텐데 말이죠!

비로그인 2010-01-12 08:51   좋아요 0 | URL
저거 재미있다니깐요 재미있어요 재미있어요, 마노아 님 으흐흑(발목잡고 늘어지며 한 팔 뻗고 흐느낀다)

다락방 2010-01-12 08:53   좋아요 0 | URL
아 마노아님. Jude님이 심지어 발목잡고 늘어지며 한 팔 뻗고 흐느끼기까지 하셨어요. [프랑스 중위의 여자]도 한번 고려해보세요. 네? ㅎㅎ

마노아 2010-01-12 12:03   좋아요 0 | URL
아아, Jude님이 이렇게 흐느끼시는데, 제가 어찌 내치겠어요!
제 커리어가 허용할 수 있는 공간이 더 있다면 옷 한 벌 대신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가져가겠어요. 절대 중간에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충성!!(>_<)

다락방 2010-01-12 12:51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마노아님 충성!!

비로그인 2010-01-12 15:06   좋아요 0 | URL
에헤헤헤 저의 추천을 뿌리치지 않으시다니 감사감사. 모쪼록 마음에 드시길(내가 쓴 것도 아닌데) 바랍니다.

뷰리풀말미잘 2010-01-11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시 중의 시는 다락방님의 시. 글씨 중의 글씨는 다락방님의 글씨에요.

2010-01-12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2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2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1-1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댓글들을 위로 쳐다보다가(모두들 다 미남미녀들만 대화를 나누고 있군요! 헤헷 사진의 주인공,본인들은 이 사실, 평싱 모를 거에요)

다락방 2010-01-12 08:55   좋아요 0 | URL
Jude님. 우리는 오늘도 출근해서 일을 하지 않는채로 여기와 있군요! 아, 저 일해야 하는데 말이죠!! ㅎ

비로그인 2010-01-12 09:1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의 이런 댓글이 또 공감하는 댓글 달고 앉은 저는 뭡니까 ㅋㅋㅋㅋ

다락방 2010-01-12 09:27   좋아요 0 | URL
가만히 보면 제 서재에 오시는 분들중에 일 안하시는 분 몇 있는것 같아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전 지금 심지어 머릿속으로 할 일을 그려놓고서는 따뜻한 녹차 마시며 댓글 달고 있어요. 타부서 직원이 준 빵을 좀 먹어볼까 싶기도 하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바밤바 2010-01-1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후배가 사준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보고 있는데. 남자 후배가 사준거라 그런지 그닥 감동은 없네요. ㅎ

다락방 2010-01-12 10:58   좋아요 0 | URL
오, 이런! 제가 만약 남자 후배가 사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면 그 자체로 감동이었을텐데 말입니다. 훗

기억의집 2010-01-12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하루종일 인터넷 하단에 알라딘 띄어놓고 있죠?
전 프랑스 중위의 여자, 영화는 더 잼없게 봤어요. 메릴 스트립만 아니였다면 확 뒤집어 엎어버렸을거야.
그녀를 좋아하다보니, 억지로 억지로 진짜로 억.지.로 졸린 눈을 부며가면서 본 기억이 나네요^^

다락방 2010-01-12 11:03   좋아요 0 | URL
전 지금은 심지어 인터넷창은 알라딘만 띄어놓고 있어요. 머릿속으로는 오전중에 무슨일을 끝내고 오후엔 이 일을 하고, 이렇게 계획하고 있으면서 말이죠.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영화로도 있군요! 명성이 자자해서 영화로 만들어졌던 거겠죠? 그나저나 메릴 스트립이라니! 도저히 안 볼 수가 없잖아요. 저는 책 읽다가 정말 던져 버릴뻔 했어요. 대체 그 지겨운걸 왜 끝까지 읽었나 몰라요 ㅜㅡ

기억의집님, 영화보고 또 글 좀 써주세요, 네?네?

저 기억의집님 글중 [로앤오더]랑 [아바타] 페이퍼는 별찜 되어 있어요!! ㅎㅎ

기억의집 2010-01-13 09:2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새해 시 써 주세요^^ 하핫!

다락방 2010-01-13 12:37   좋아요 0 | URL
아...그....그게 그러니까........시.........써야죠, 하핫 ( '')

2010-01-12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2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0-01-1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X는 마태우스고 Y 는 부리라는 설이 있더군요. 흐음...

다락방 2010-01-12 13:31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굉장히 유력한 설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