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참지 못하고 곁길로 새서 자꾸 다른 책을 사서 읽긴 했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고소진에는 변함없이 애쓰고 있는 중이다. 오늘 또, 재고 소진할 리스트중인 한권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비밀의 숲』을 목표달성했다. 이 책은 에세이고 짧게짧게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데, 그러니 금세 읽을 수 있었는데, 사실 지난번 재고소진과 이 책 사이에 '토리 헤이든'의 『한 아이 1,2』를 읽었고, '샬레인 해리스'의 『죽은 자 클럽』을 읽었다. 에, 그리고 재고소진 리스트에 포함되있진 않았지만, 방출하려고 했던 책 '베로니크 올미'의 『비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도 다시 한번 읽고(내용이 기억나질 않아서)난 후에야 아프락사스님께 보내드렸다. 그건그렇고,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여행길의 책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됐다.
여행길에 어떤 책을 가지고 가느냐 하는 것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아마 누구나가 고민하는 고전적인 딜레마일 것이다. 물론 사람은 각기 독서 취향이 다르고, 여행의 목적이나 기간이나 행선지에 따라 책을 선액하는 기준도 달라진다. 따라서 일반적인 결론을 내리기란 좀처럼 어렵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언제 어떤 여행길에도 오케이'인 만능적인 책을 한권 갖고 있다면, 인생은 상당히 편안해질 것이다.
내게 그런 책은 중앙공론사에서 출간된 <<체홉 전집>>이다. 왜 <<체홉 전집>>이 여행길에 가지고 가는 데 가장 적합한 책이냐 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게는 상당히 명확하다.
(1)단편 소설 중심이어서 단락을 짓기 쉽다.
(2)어느 작품이나 질이 높아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 거의 없다.
(3)문장이 읽기 쉽고 소탈하면서도,
(4)더욱이 내용은 풍부하고, 문학적 향기가 가득 차 있다.
(5)사이즈도 손에 쥐기에 알맞고 무겁지 않으며, 표지가 두꺼워서 구겨지지 않는다.
(6)만약 누군가에게 제목을 보여주더라도, '체홉을 읽고 있는걸 보니 별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군.' 하고 여겨질 확률이 높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지만.
(7)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어도 싫증나지 않고, 오히려 읽을 때마다 새로운 조그만 발견을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여행을 할 때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 <<체홉 전집>>을 한 권 가방에 넣어 간다. 이제까지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유일한 문제는 다 읽고 나서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 정도일까(대개 남겨놓고 온다).(pp.254-255)
언젠가 Jude님이 쓰신 페이퍼에서 여행때는 언제나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을 챙긴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또다른 언젠가 브론테님은 먼 도시를 여행하면서 들고 다녔던 책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서점에 들렀던 이야기도.
나로 말하자면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을 제외한 다른 글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여행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지 여행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다른 지방에 사는 친구들을 방문할 기회가 곧잘 있어 기차를 좀 자주 타는 편이다. 장시간 기차를 타는 내게 책은 필수다. 나는 그때마다 내가 언제나 그때 읽고 있던 책을 챙긴다. 그것이 무슨책이든. 분량이 조금 남았다면 한권 더 챙기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여행길에 오른다고 해서 딱히 정해놓은 책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루키의 이 에세이를 읽고 나니 나도 무언가 굉장히 소중한 책을 한권 꼽아놓고 여행할 때 기차안에서 읽어볼까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것이다. 이 작은 일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일상생활의 작은 행복정도랄까. 그렇다면 그 책은 어떤걸로 골라야 할까?
아무래도 단편집이 나을까? 그렇다면 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단편집인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를 고를까? 아니면 뭐하나 버릴 것 없이 단편의 대마왕임을 증명해주는 '피츠제럴드'의 『피츠제럴드 단편선』을 골라볼까? 아니면 어느 부분을 펼쳐놓고 읽어도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오르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선택할까?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어떨까? 하루키의 글들은? 셰익스피어의 글들은? 아흑, 나도 뭔가 하나 딱 찜해놓고 싶다는 생각에 온몸이 다 근질근질 하다.
그러나 일단 오늘 남은 오후는 『체호프 단편선』을 좀 읽으며 보내야겠다. 하루키는 어느 부분을 좋아했을까?
아, 그전에 일단 세수부터 해야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