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차일드'의 신간 [방문자] 의 스포일러가 조금 .. 있습니다. )


자, 이 페이퍼의 시작은 몇 주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그 날, 나는 친구와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만났다. 우리는 서점에서 한참이나 수다를 떨다가 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그 날 수다를 떨면서, 우리는 어김없이 잭 리처 이야기도 했다. 친구는 내게 '잭 리처가 가버 장군 딸하고 인생 사랑 이잖아' 라는 이야기를 해서, 뭐라고? 난 모르겠는데? 라고 말했다. 친구는 마치 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나에겐 너무 낯선 이야기였으며, 그렇다면 그것은 친구는 읽고 나는 읽지 않은 잭 리처 시리즈 중 하나겠구나 싶어서 얼른 읽고 싶어졌다. 내 기억에는 내가 가장 최근에 사두고 안 읽은 책은 신간 [방문자] 외에, [처단] 이 있었다. 그래, 처단이구나, 처단을 읽어야겠어. 가버 장군 딸이라고? 인생 사랑이라고? 


[처단]이라면 아마존 프라임에서 잭 리처 드라마로 이미 내가 보았더랬다. 대학생 소년을 구해줬다가 그 집에 잡히게 되고 그렇게 마약 범죄 뿌리 뽑는 내용... 이며, 그 과정에서 그 사건을 맡았던 FBI 여성과 섹슈얼 텐션 터졌던 ... 거였는데, 책에서는 다른 내용이 있단 말인가? 무려 가버 장군의 딸을 원래 사랑하고 있다는, 그런 내용이??? 얼른 [처단]을 읽자!!


그런데 나는 얼마 안돼서 [방문자]를 읽는 알라디너가 잭 리처에게 여친이 있고 집이 있다...는 댓글을 달아주신 걸 보게 됐다. 네? 여친이라고요? 잭 리처에게 집이라고요? 오 마이 갓.. 그건 안돼, 그러지마!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아! 그래서 처단을 읽겠다는 생각을 뒤로 제쳐두고 방문자를 읽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읽고 그게 그게 아니잖아!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차분하게 계속 읽어보시기 바란다. 틀린 내용은 이내 다 바로잡게 될것이니..)


그렇게 방문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아니 세상에, 우리 잭 리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 조디 라고, 가버 장군의 딸이며, 그녀는 뉴욕의 변호사이다. 게다가 겁나게 유능해서 곧 파트너 변호사가 될 것 같다. 게다가 겁나 아름다워. 그러니까 영화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런 여성인 것이다. 하여간 그녀가 잭 리처의 여자친구인 것이고, 잭 리처는 아주 자주 그녀의 집에 가서 그녀와 시간을 보낸다. 잭 리처는 이제 차도 있고, 가버 장군이 유산으로 남겨준 근사한 집도 가지고 있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여자친구도 있는 잭 리처 되시겠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대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잭 리처에게 여자친구가 있는건지, 어떻게 집이 생긴건지 궁금해져서 너무 그 스토리를 읽고 싶었다. 나는 방문자를 다 읽기도 전에 얼른 [처단]을 찾아두기로 한다. 저기, 잭 리처 시리즈 몇 권이 보이는데, 거기엔 처단이 없다. [인계철선]이 보이는데, 저건 내가 읽었지, 자 처단을 찾자. 그런데 잭 리처 뭉탱이에도 없고,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고.. 하... 나 산 줄 알았지만 안샀나? 나는 알라딘의 구매기록을 확인해본다. 샀단다. 내가 산 게 맞다. 일년도 더 전에 샀단다. 하... 다시 찾아본다. 저 책장 앞에서 둘러보고, 이 책장 앞에서 살펴보고, 밑에를 살펴보고, 위를 살펴보고...


초조해진 나는, 당장 처단이 읽고 싶어진 나는, 잠깐 유혹에 흔들린다.


'못찾겠는데...걍 다시 살까?'


그러다가, 그렇게 돈지랄 하면 안돼(나는 백수닷!!), 차분하게 다시 찾아보자, 하고는 다시 처음부터 샅샅이 훑는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냈다! 만세. [처단]을 찾았다! 그렇게 나는 처단을 꺼내둔 채로 방문자를 마저 읽으러 간다.



잭 리처 시리즈에는 항상 범죄 사건이 나오고 잭 리처가 그것을 해결하며 악당에게 벌을 내린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소소한 작은 범죄를 해결하는 장면들이 애피타이저로 보여지곤 한다. 이번에도 그랬는데, 그것 때문에 FBI 가 찾아오고 경찰이 찾아오고 그러다가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잭 리처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큰 사건을 해결하느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일단 이 범죄 사건에 대해서라면 이번 책에서는 그간 읽었던 잭 리처의 범죄 사건 풀이에 비해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잭 리처의 액션도 딱히 보여지지 않고. 그래서 사건에 대한 부분만 생각하면 '아니 그렇다고 했는데 이건 그러면 말이 안되잖아?' 하고 스포일러가 될까봐 차마 쓸 순 없는 의심도 생긴다. 이번 작품은 좀 트릭도 과하고 억지스러운데, 라고 생각하게 된단 말이다. 그런데,


잭 리처에게 여자친구가 있고 집이 있고 차가 있다. 잭 리처는 물론 여자친구 조디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러나 사건 때문에 거주 중인 지역을 잠깐 떠나야 했을때, 잭 리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서 자신의 현재 삶이 정말 자신에게 맞는 것인가, 이것이 나에게 행복한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가 이동하는 순간 가슴이 뛴다는 걸 느끼는 장면이, 짧지만 좋았다. 왜냐하면, 내가 이동하면서 가슴이 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 낯선 사람들 가득한 곳에 나를 놓아두는 걸 좋아하지만, 집에서 출발해서 공항으로 가는 길,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보안검사를 통과해 면세점으로 들어가는 길, 라운지에 가서 짐을 부려놓고 음식을 먹는 일, 시간이 되면 비행기를 타러 가는 일, 비행하는 동안, 비행 후에 입국 심사를 하고, 짐을 찾고, 그리고 택시를 잡아 호텔로 이동하는 길, 그 모두를 너무나 좋아하는 것이다. 한국에 잠깐 다니러 왔다가 다시 싱가폴에 갔을 때,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나는 이 순간을 너무 좋아해! 라고 깨달았던  때를 나는 잊지 못한다. 혼자서 시간이 다 되어 비행기에 탑승하러 가던 그 순간순간도, 나는 매번 좋아했다. 내가 좋았다. 그 순간을 좋아했고, 그 순간의 나를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이동하면서 교통 수단 안에서 잭 리처가 가슴이 뛴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너무나 이해되는 것이다!! 


자, 문제는 이제부터다.


잭 리처와 같이 일하게 되는 요원들 중에는 당연히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그리고 특히 더 매력적인 여자 '하버'도 있다. 하버랑 함께 보내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면서, 하버에게 성적인 욕망도 생기게 된다. 나는 읽으면서 잭 리처에게 말했다. 안돼 잭 리처, 그러지마, 안돼, 너는 여자친구가 있다. 넌 여자가 있는데, 자꾸 이러면 안되는데...


잭 리처와 여자친구 조디가 아직 결혼한 건 아니다. 그러나 잭 리처가 다른 여자랑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그건 조디를 속이는 것이며 바람피우는 것이 될테다. 그런데 잭 리처는 너무나 이 다른 여성에게 매력을 느낀다. 나는 그가 그녀를 볼 때마다 매력을 느끼고 성적 욕망을 갖게 되는걸 지켜보면서, 잭 리처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말했지만, 또 그동안 내가 아는 잭 리처라면 '그건 좀 안되는 것 같아' 할 때마다 역시 그 안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믿는 부분도 있었다. 너는 아닌 걸 알고, 그래서 하지 않겠지, 라고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말이다. 나 조차도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를 때가 있다. 어떤 순간에는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할 때가 있지 않던가. 나쁜짓인줄 알지만, 나쁜 짓에 내 몸을 맡길 때가 있지도 않던가. 둠칫 두둠칫..


나는 도덕과 윤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도 도덕적이지 못하고 윤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 적들이 여러번이었다. 젊은 시절, 그러니까 이십대 중반에, 나는 한 남자와 사귄지 얼마 안되었을 때, 그런데 우연히 다른 남자랑 잠깐 만나게 됐고, 그냥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거였는데, 그런데 그 날 밤 키스를 했다. 아직 내 남자친구랑은 키스하지 않았는데, 우린 고작 손잡는게 다였는데, 사귀지도 않는 남자랑 키스를 했다. 그리고 집에서 잠들기 전, 나는 후회를 했다.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그 밤, 남자친구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사귀는 거 없던 일로 하자고. 도저히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사내커플이었고, 아직 회사에선 우리가 사귀는 걸 아무도 몰랐고, 그러니 사귀든 사귀지 않든 어쩔 수 없이 매일,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밤 잠들지 못했고,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회사에 아주 일찍, 새벽같이 출근했더랬다. 그런데 내 남자친구가, 아니지 이제는 ex남자친구가, 그 새벽에 출근하고 있었다. 우리는 회사 건물 앞에서 마주쳤고, 나는 일찍 왔네요, 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잠을 한 숨도 못자서요, 라고 내게 답했다. 나는 미안했다.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며칠간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의 부서 팀장님이 걱정을 했고, 쟤 뭣 좀 먹어야겠다며 부서 회식에 같이 가자고 내게 청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며칠후 내게 전화를 걸어서는 도대체 왜 사귀면 안되는거냐고 물었다. 나는 차마 다른 남자랑 키스했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삼주일이고 세달이고 삼년이고 기다리겠노라고, 자신을 남자로 봐주기를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날은 울면서 음성메세지를 남기기도 했다. 물론, 그는 그 뒤로 나보다 훨씬 어린 여자를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잘 살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남자친구가 있는데, 다른 남자랑 키스한 건, 바람을 피운건가? 다른 남자에게 욕망을 느끼고 키스를 하였기 때문에, 나는 바람을 피운건가? 섹스를 한 건 아니기 때문에 괜찮은건가? 내가 내 애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어디까지 해야 내 애인을 속이지 않은게 되는걸까? 당연히 손잡는 것도 키스하는 것도 안되겠지? 나는 내 애인을 사랑하는데, 어느날 우연히 마주하게 된 사람이 너무 매력적이고 성적 욕망을 느낀다면, 그러면 어떡해야 하나? 당연히 나의 파트너를 속이면 안되니까 내 욕망을 다스리고 가급적 이 낯선 인연을 멀리해야 하나? 나는 애인이 있어, 나는 너랑 어떤 관계도 되지 않을거야, 라고 역시나 내게 매력을 느끼는 낯선 상대에게 말해야 하나? 설사 지금 이 사람에 대한 나의 끌림을 자제한다고 해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텐데, 이런 끌림이 또 나타난다면? 나는 이미 애인이 있으니까 내 욕망에게 닥치고 잠자코 있으라고 하는게 맞는..거겠지? 


잭 리처가 애인 조디가 아닌 다른 여성 '하퍼'에게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도 잭 리처에게 욕망을 느낀다. 아, 욕망이란 무엇인가. 게다가 둘이 함께 사건을 조사하고 풀어과는 과정에서 작은 성취가 있었고, 그 둘은 기뻐하면서 축하의 의미로 키스를 하기로 한다. 잭 리처에게 애인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걸 하퍼도 알고 있으니까, 더 가지는 않고 키스만 하기로 한다. 그렇게 그 둘은 키스를 한다. 그리고 이내 잭 리처는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을 느끼는데, 그런데 또 하고 싶다. 하퍼와의 키스가 좋았다. 또 하고 싶다. 지금 조디와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런데 하퍼는 옆에 있다. 아무리 하퍼가 옆에 있다한들, 그런데 조디가 있는데, 애인이 있는데, 키스..는 괜찮은걸까? 섹스가 아니니까 이정도는 봐줄 수 있는걸까? 잭 리처가 애인이 없었다면, 그러면 하퍼와 어떻게 됐을까?



나는 내가 싱글인 상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싱글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때를 떠올려보았다. 바로 잭 리처의 이런 갈등들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다 매력적인 이성을 만나 끌림을 느낄때, 그리고 상대도 그렇다고 생각할때, 그래서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데이트를 하게 됐을때, 나는 내가 싱글이어서, 새로운 매력들을 경험할 수 있어서 너무 짜릿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유가 좋았다. 내가 지금 이 사람과 키스해도 나는 아무에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게 좋았다. 이 키스를 그냥 키스로, 오늘의 키스로 생각해도 되는건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나는, 내가 정착하는 것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제는 날씨가 좋았다. 나는 양재천에서 친구를 만났다.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식당은 대기가 길어 기다려야 했고, 나는 키오스크로 대기 접수를 한 뒤에 바깥의 벤치에 앉았다. 그늘이었고, 약간 바람이 불었다. 혼자 앉아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후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가 옆에 앉았다. 친구가 옆에 앉자, 은은하게 향기가 났다. 친구는 아마도 약간의 향수를 뿌린 것 같았고, 바람이 살살 부니 그 향기가 내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 좋았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실 때는 마주보고 앉았는데, 바람이 내 뒤쪽에서 불어왔다. 나는 팔로 턱을 괴고 친구의 얘기를 듣고 있었는데, 그 순간에는 내 향수 냄새가 났다. 아주 좋았다. 날씨가 완벽하고 나는 여름이 좋지만, 여름이 곧 올거라 예고하는 이맘때도 좋아. 친구랑 나는 둘다 여름을 좋아했다. 우리는 삶에 있어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아주 즐겁게 그리고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내 연애와 데이트에 대해 물었었고, 나는 내가 연애 상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연애 상대와 일년에 한 두번만 만나고 싶으니까. 그러자 친구가 웃었다. 나는 그게 좋은데, 왜냐하면 나는 내 삶을 살아야 돼서, 그래서 그냥 일년에 한 두번만 만나면 좋겠는데, 세상 천지에 그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어, 나는 연애 상대로 적합하지 않아, 나는 여자친구로 좋은 사람이 아니야, 라고 말했다. 



나는 잭 리처가 나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잭 리처는 남자친구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가 남성적 매력을 가지고 있는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성적인 끌림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여자들이 바라는 그런 남자친구는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잭 리처가 조디를 사랑하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건 사실이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 옆에 계속 있을 수 있느냐하면, 그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 바라고 또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 없다. 그건 상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이다. 나를 사랑한다면 그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 라고 묻는다면, 너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바꿀 순 없는 것이다. 나는 잭 리처가 좋은 남자친구가 될 수 없다고, 당연히 좋은 남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잭 리처는 약자에게 좋은 사람이고 또 약간 거리를 둔 사람에게도 역시 좋은 사람이며, 의리가 있는 사람이지만, 그러니까 누가 물어본다면 '좋은 사람'이라고 답할 순 있겠지만, 그는 '남자 친구'로 삼기에 좋은 사람은 아니다. 



칠봉이와 연애하던 시절, 그러니까 나는 칠봉이를 진짜 너무 좋아해서, 칠봉이랑 가끔 안부만 묻는 사이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그런 칠봉이랑 연인이 되었을 때, 그렇게나 그를 좋아했으면서도 그랑 함께 사는 것에 대해서는, 내 미래에 그가 있을 것이라고는 잘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호주에 살고 있었고 그러니까 우리는 만나는 횟수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날 그와 통화중에,  너가 한국에 있었으면 우리가 자주 만났겠지, 하고 내가 말했는데, 그는 내게 '내가 한국에 있었으면 우린 같이 살았겠지' 라고 했다. 그 순간 잠깐 말문이 막혔더랬다. 함께 사는건..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건 잘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뒤로 나는 종종 상상해보곤 했다. 그와 함께 사는 삶에 대해서. 우리 둘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저녁을 함께 보내는 거,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말에 그가 운동하러 나가고 나는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다면, 그러니까 주말이라고 계속 함께 있는게 아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을 간다면, 그에게 나 혼자 다녀온다고 할 것 같다. 나 여행 다녀올게, 하고 다녀올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그랑 붙어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바라는 보통의 평범한 커플처럼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가 한국에 있다면 우린 같이 살았겠지, 라고 말하고나서 내가 떠올린 건, 한국에 있다면 너는 네 집이 있고 나는 내 집이 있고 어느날은 우리가 서로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같이 지낼 수 있겠지만, 다음날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게 낫지 않나, 라고 그에게 말하지 않고 생각했다. 롱디가 힘들지 않냐고 백이면 백이 내게 물었을 때, 나는 사실 딱히 힘들지 않았다. 나는 그를 존재로 좋아했고, 그리고 나는, 자주 만나는게 아니어서 어쩌면 더 좋았던 것 같다. 나는,


여자친구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자꾸 혼자 떠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때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고, 사랑한다고 늘 같이 붙어있을 수도 없는 나는,

여자친구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잭 리처도 남자친구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뭐가 이래요? 15년을 당신 없이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이젠 당신이랑은 못 살겠다는 걸 알게 됐으니." -p.573



좋아하는 사람이 반드시 좋은 연인이 되는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연인이 되는 순간 딥빡침이 몰려올 수 있다. 큰 서운함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잭 리처,


그냥 나랑 놀자..



하, 나는 좋았다. 이 책이 사건 풀어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잭 리처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는 내용이라 좋았다. 떠돌아야 하는 사람,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좋았다. 이동할 때 심장이 뛴다는 걸 깨달아서 좋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내내 붙어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 좋았다.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나는 좋았다. 좋다, 고 생각하면서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려다가, 책 뒷날개에 잭 리처 시리즈 소개에 대한 글들을 봤다. 그런데 어라? [인계철선] 에서 가버 장군 장례식 얘기가 나온단다. 어? 그래? 나 인계철선 읽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나는 얼른 책장으로 가 [인계철선]을 꺼내왔다.















그런데 포스트잇이 두어군데 붙어있다. 


어?


읽었으니까 붙여두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여기 가버 장군 장례식 얘기가 나온다고? 그러면 여기에서 조디 만나는 거잖아? 나는 인계철선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한다. 오, 낯선데? 새로운데? 나는 <IReadItNow> 에서 인계철선을 검색한다. 내가 읽은 책이라고 되어있다. 하... 나는 내가 인계철선에 대한 백자평이라도 써뒀겠지 싶어 뭐라고 썼나 보자, 찾아봤다. 그런데, 헐... 페이퍼가 있었다. 무려 이런 페이퍼였다.



<해도 해도 너무한 잭 리처>



2024년 8월 11일에 작성한 저 페이퍼에는 잭 리처가 인생 사랑을 만났다고, 가버 장군의 딸이라고, 가버 장군으로부터 유산으로 집을 물려받았다고 써있었다. 아니, 내가 썼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나의 머리 스톤 헤드? 친구가 마치 내가 아는것처럼 가버 장군의 딸을 언급했던건, 내가 이걸 읽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내가 '아니, 나 그거 모르는데? 그래?' 라고 한순간, 아마도 친구는 '아, 안읽었나?' 라고 생각했겠지. 미안하다, 친구여... 마이 해드 스톤 헤드 아 임 쏘리.. ㅠㅠ 나는 도대체 책을 왜 읽는 것인가. 어째서 읽는 것인가. 왜때문에... 다 까먹으면서 왜 읽죠? 하아-



그런데 키스란 무엇인가. 

나에게 애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하고 키스해도 되는 것인가 안되는 것인가.

질문을 바꿔 나의 애인이 나에게 '다른 여자랑 키스했어. 섹스는 안했어' 라고 한다면, 나는 괜찮을 것인가. 

키스까지는 봐줄만 한것인가.


도대체 키스란 무엇이란 말인가..







매일 밤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삶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리처의 결정은 옳은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해보았다. 집을 판다. 집을 내놓는다. 집이 매물로 나와 있다. 집이 팔렸다. 그 말을 내뱉자 안고 있던 집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단지 현실적인 무게가 줄어드는 것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긴 했다. 더 이상 배관 누수나 청구서 우편물, 난방연료 배달, 보험 보장 범위 같은 걸로 골머리 앓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해방감이다. 마치 짐을 벗어던지고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 자유롭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상태. 마치 문이 열리며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리처는 웅웅거리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하퍼를 곁에 두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많이 막히는데, 즐거워요?" 하퍼가 물었다.
"내 인생 최고의 드라이브요." -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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