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안읽힐 때는 잭 리처를 꺼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이번달 내로 읽어야 하는데 책장이 잘 안넘어가고 게다가 코로나까지 걸려서 약 먹으면 헤롱거리게 되니 아 안되겠다, 하고 오랜만에 잭 리처를 집어들었다. 오리엔탈리즘 읽다가 읽어서 그런건지 책장이 술렁술렁 잘도 넘어가. 게다가 이번에는 얼라리여~ 잭 리처의 인생 사랑도 나와주시는구나. 그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게 됐을 때, 나름대로 마음 속에서 그 순위를 매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다들 그러지 않을까? 그건 잘 모르겠고. 이를테면 내가 사귀었던 남자들을 떠올려봤을 때, 거기에서도 1위가 있고 4위가 있고 뭐 그렇지 않겠는가. 내 경우에는 1,2 위는 있고 나머진 다 똑같아서 인생에서 드러내버려도 된다. 여하튼, 그런 잭 리처에게도 1순위 여성이 있었으니, 잭 리처 읽다 보면 등장했던 '가버 장군'의 딸, '조디' 였다. 조디 나이 열여섯 잭 리처의 나이 스물다섯에 만나 아홉살 차이인데다가 당시에 미성년자이고 또 가버 장군의 딸이니 오빠이며 삼촌 같은 가족의 느낌.. 그래서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었는데, 시간이 흘렀고 지금 조디의 나이 서른 잭 리처의 나이 서른 아홉. 그러니까 서른과 서른아홉은 뭐가 되어도 괜찮잖아요? 그래서 이들은 사실 너를 가족으로 보는게 아니라 이성으로 봐... 이래가지고 그들은 15년간 참았던 섹스를 하게 되어버리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15년간 참았으니 그 보상으로 많이 많이 해야지요. 여하튼... 그래서 아하, 그래 잭 리처도 사람인데, 인생 사랑 있겠지, 마음 속 일순위 왜 없겠어, 하고 보았단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둘이 언제 제일 좋았을까? 뭘 할 때 제일 좋았을까? 그것은 놀랍게도 섹스가 아니라 함께 걷기였다. 나에겐 놀랄 일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놀랄 일일 것 같다.
두 사람은 90분 동안 팔짱을 끼고 약 7킬로를 걸어서 도시의 전통 구역을 한 바퀴 돌았다. 호텔은 밤나무가 늘어선 넓고 조용한 거리에 위치한 중간 크기의 오래된 저택이었다. 반짝이는 검은색으로 칠해진 큰 문과 연한 꿀색으로 칠해진 오크 바닥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P.365
보통 사람이 4킬로를 걸을 때 한 시간이 걸린다. 낯선 여행지에서라면 한시간보다 더 걸리고. 그런데 7킬로를 90분간 걸었다니, 둘다 걸음이 빠른 모양이다. 여하튼 한시간 반을 함께 걸을 수 있다니, 둘의 체력도 같은가보다. 한 때 나보다 체력이 약한 남자랑 걸었는데 얼마 걷지도 않고 몹시도 힘겨워해서 내가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같이 걷는 거, 이거 별 거 아닌게 아니다. 어느정도 속도도 맞아야 하고-상대에게 맞춰야 하고- 체력도 비슷해야 하는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걷는다는 행위를 좋아하고 걷는다는 것을 혼자서도 좋아하지만 또 누군가랑 함께 걷는 것도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걸어? 팔짱을 끼고? 물론 팔짱 안 끼고 걸어도 좋지만, 하여간 나는 '두 사람은 90분 동안 팔짱을 끼고 약 7킬로를 걸어서 도시의 전통 구역을 한 바퀴 돌았'다는 게 진짜 너무너무 자지러지게 좋은 거다. 나는 이런게 좋다. 도시의 전통 구역을 한 바퀴 돌았대. 물론 그렇게 걷고 나서 그들은 예약해둔 호텔에 가고 섹스도 하고 맛있는 저녁도 먹으러 가서 와인도 나눠 마신다. 개꿀. 진짜 인생이 짜릿하고 좋지 않냐. 이런 순간들이 인생에 포함되는 것은 기쁨이다. 너무 좋다. 함께 걷고 함께 웃고 함께 먹고 함께 마시는 거. 이런 거 좋다.
그리고 갑자기 가버 장군 돌아가시면서 잭 리처에게 집을 남겨줍니다.
왓...
집을.. 세상에..
물론 우리의 잭 리처, 집을 갖게 된다면 그 집을 유지하기 위한 돈이 필요할거고, 그 집에서 생활하려면 생필품이 필요할거고, 생필품 사러 나가려면 차도 있어야 하고.. 하면서 그 집을 큰 부담으로 생각해서 그걸 살아야하나 어째야하나 망설이고 있지만, 하여간 가버 장군이 집도 주고 인생 사랑도 만나고 그런데,
그런데 잭 리처가 로맨스 소설이냐 하면, 그게 아니잖아. 이것은 모름지기 액션이란 말이지. 당연히 사건이 벌어지고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잭 리처도 위험에 노출된다 그 말이다. 그래서 이번엔 어떤 위험에 노출됐냐하면, 세상에나, 총을 맞는 겁니다. 그러면 죽었냐? 아니, 총을 맞아도 원래 주인공은 안죽잖아요? 그래, 내가 그건 알아. 주인공은 안죽지. 그런데 안죽게 된 이유가... 아니, 너무.... 자, 보자. 분명 총을 맞았거든?
의사가 말했다. "바로 이거. 망할 총알은 당신 가슴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흉근이 너무 두껍고 치밀해서 총알을 막아냈어요. 8센티 케블라 방탄조끼처럼. 총알이 근육벽 반대편으로 튀어나가 갈비뼈를 부숴버렸지만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어요." -P.564
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것봐. 근육이 너무 두꺼워서 총알을 막아냈대. 이게 도대체가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되나? 이거... 이게 가능한거야? 말이 돼? 근육이 너무 두꺼워서 총알을 막아냈다니까? 방탄조끼처럼 막아냈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아무리 잭 리처라도 그렇지 이거 너무 판타지 아니야?
그런데 우리의 잭 리처, 가슴 근육만 이렇게 단단할까요?
아니아니죠, 전두엽도 난리났죠. 계속 보자.
"그럼 왜 3주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죠? 리처가 즉시 물었다. "근육 손상이나 갈비뼈가 부러진 것 때문은 아니잖아요. 제기랄, 그런 확실해요. 내 머리는 괜찮은 겁니까?"
의사가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는 손뼉을 치고 공중에 환호하듯 주먹을 날렸다. 그러더니 얼굴 전체가 환하게 빛나며 가까이 다가왔다.
"걱정했어요." 그가 말했다. "정말 걱정했다고요. 중상이었거든요. 난 네일 건(못 박는 기계)이라고 생각했는데, 샷건 파편 때문에 가구에서 튀어나온 거라고 하더군요. 그게 두개골을 관통해서 뇌에 3밀리 정도 박혔어요. 전두엽에 말이에요. 못을 박기에는 제일 안 좋은 부위죠. 만약 내가 내 두개골에 못을 박아야 한다면 전두엽은 절대 첫 번째 선택지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전두엽에 못이 박힌 걸 봐야 한다면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보다 두꺼운 당신 전두엽을 고르겠어요. 보통 사람이었다면 못이 끝까지 박혔을 거고 '다들 고마웠어요, 잘 있어요' 라고 말했을 거예요."
"그래서, 난 괜찮은 겁니까?" 리처가 다시 물었다.
"방금 검사비를 만 달러 이상 절약했어요." 의사가 행복하게 말했다.
"내가 가슴에 관한 소견을 알려 줄 때, 당신이 어떻게 했죠? 분석적으로? 당신 자신의 내부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해 심각한 상처가 아니란 걸 알았고 그걸로는 3주간의 혼수상태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으며, 다른 부상을 기억하고 그걸 조합해 당신이 질문한 걸 물었죠? 즉시, 망설임없이.빠르고 논리적인 사고, 관련 정보의 조립, 신속한 결론, 가능한 답변의 근거에 대한 명쾌한 질문. 당신 머리는 아무 문제 없어요. 전문가의 소견을 받아들여요." -P.564-565
세상에, 전두엽도 두꺼워서 못도 제대로 안박힌대.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결과적으로 총도 가슴 못뚫고 못도 머리 못 뚫어 나는 계속 계속 잭 리처를 만날 수 있게 되어 좋긴 하지만, 아니 그래도 뻥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내가 아무리 잭 리처 좋아해도 이건 좀 아니지. 내가 아무리 잭 리처 좋아해도 아닌 걸 그렇다고 말할 순 없다. 우리 이성 좀 가져가쟈. 가슴근육이 총알을 막아내는 건 총알탄 사나이야 뭐야.. 하여간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에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못하겠어. 특별히 운동하지 않아도 근육질인 건 그래도 내가 눈감고 넘어가주겠다고. 그런데 가슴 근육이 총알 막아내고 전두엽이 못 막아내는 건... 좀 아니잖아? 이러지말자 진짜 우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월요일 저녁부터 몸이 이상해 자가키트를 해봤는데 코로나가 아닌 걸로 나왔다. 그래서 병원에 가 약을 지어먹었는데, 그 날 주사를 맞았더니 괜찮아지는 것 같더라. 의사쌤은 코로나 가능성이 있지만 어차피 지금 검사해도 코로나 아닌 걸로 나올 수 있으니 약 먹고 지켜보다 심해지면 다시 와라, 하셨다. 목요일 오전 아침에 자가키트를 하니 코로나 양성으로 나왔다. 다시 해본 건 주사 맞고 괜찮아지는 줄 알았던 몸이 다시 아프고 열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가 양성이라 말하고 다시 주사를 맞았다. 주사를 맞으니 또 잠깐 괜찮아지는 것 같았지만 아팠다. 첫번째 코로나 만큼은 아니었지만 아팠다. 목요일은 두시간쯤 일찍 퇴근을 해 집에 와서 잤다. 다음날은 내 생일이었는데 나는 코로나 ㅠㅠ 생일날은 반차를 내고 집에 와 약을 먹고 잤는데, 엄마가 저녁에 치킨이라도 먹자고 하셔서 치킨을 먹었다. 하여간 혹독한 생일이었다. 생일날 코로나 걸리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겠지... 현실은 생일에 코로나 걸리는데 책에서는 가슴 근육 단단해서 총알을 막아낸대. 현실과 환상의 차이가 이렇게나 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원래 어제는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 먹기로 했다가 나의 코로나 때문에 취소됐다. 어린 조카들에게 옮길 순 없지.
코로나 앓는 동안 아픈 것도 아픈거지만 달리고 싶은데 달리지 못하는게 속상했다. 달리는 건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식구들 모두 달리지 말라고 했다. 마스크 쓰고 달릴거 아니면 사람들에게도 민폐라며. 그래서 꾹 참다가 오늘은 안되겠다, 너무나 달리고 싶다, 일주일이나 못달렸다 하고 달리러 나가야겠다 생각했다. 지난주 금요일 로마가 마지막 달리기여서 벌써 일주일이나 넘었다고. 일어나자마자 문 연 약국으로 가서 자가키트를 사다가 검사를 해보았다. 이번엔 음성으로 나왔다. 좋았어, 달리러 가자! 항생제 때문에 약은 계속 먹어야 하니 빵 한 조각과 약을 먹고 나는 올림픽공원으로 나갔다. 30분 연속 달리기를 하려다가 흐음, 일주일만이니 잘 안될 수도 있을거야,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천천히, 하고 뛰기 시작했다. 십분쯤 됐을 때 달리기를 멈추고 좀 걸었고 걷다가 다시 운동을 시작했는데, 하하하하하, 13분쯤 되는 시점에서 슬라이딩으로 넘어져버렸다. 어, 어, 어, 하다가 쫘악 넘어져버린 것. 화끈거렸다. 일어나서 얼마나 다쳤나 확인하는데 손바닥도 쓰라렸지만 왼쪽 무릎이 크게 까지고 상처가 나서 피가 나고 있엇다. 오른쪽 무릎도 다쳤지만 왼쪽보단 나았다. 달리기 앱에서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운동 멈춤 버튼을 누르고 근처의 벤치에 앉아 상처들을 살펴보았다. 아프거나 쪽팔린 것보다 가장 무서운 건 엄빠의 잔소리였다. 뛰지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뛰더니, 부터 시작되는 잔소리가 재생되었다. 하아- 큰일났네. 나는 그만 뛰고 이대로 집에 돌아갈까 하다가, 다리를 그리고 팔을 움직여보니 사실 뛰는데에는 뭐 크게 지장이 없겠어? 상처부위는 쓰라리고 화끈거리지만 그게 뛰는데 무슨 상관? 천천히 30분 채우자, 하고는 30분을 마저 쉬어가며 채운 뒤 집에 왔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잔소리폭격을 맞았다. 흠흠.
뭐에 걸린 것 같지도 않은데, 계속 뛴 걸 보면 다리에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왜 넘어진건지 모르겠다.
코로나 때문에 먹고 있는 약이 먹으면 되게 졸린데, 어쩌면 이 약 때문에 그런걸까? 하여간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넘어진 적은 없었는데.. 넘어지고 말았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집에 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상처를 보여주고 밴드를 사와서 집에 와 샤워하고 밴드를 붙였다. 무슨 마라톤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매일 열심히 뛰는 것도 아닌데, 고작 30분 뛰면서 뭘 넘어지냐. 하여간 요란하다 요란해..
오리엔탈리즘이나 읽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