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가까스로 말일까지 다 읽었네.
굉장히 맹렬하다는 인상을 받으면서 읽었는데 마지막에 저자의 후기 보면 자신이 맹렬하게 썼다고 되어있더라.
구절구절 굉장한 분노가 느껴지는데 그러다 곧잘 자기 모순과 맞닥뜨린다. 이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주 만나게 되는 문제이다. 그녀에게도 그게 다를 바 없는데, 왜 다나카 미쓰의 그 맹렬함과 자기 모순이 더 힘들게 느껴졌을까. 나는 다나카 미쓰가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거나 혹은 세상의 다른 문제를 자각할 때 자기 분열이 심하게 일어나는 사람 같다고 느껴졌다. 그 누구보다 맹렬하게 남자의 그간 삶과 또 그런 남자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여자들을 비난하지만, 그러나 다나카 미쓰에게서 나는 어마어마하게 사랑을 갈구함이 느껴졌고, 그게 굉장히 나를 힘들게 했다. 왜이렇게 타인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지. 그런데 이 책의 2장 개인사를 읽으면서 어떤 어른이 되느냐 혹은 어떤 성격이 형성되느냐는 정말 어린 시절의 영향이 크다는 생각도 하고, 그런 한편 그런 성향을 불편하게 느꼈던 나인지라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은 정말 뭐지.. 싶다.
맨얼굴이라도 그걸 충분히 자기 긍정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젊은여자들이 자신의 맨얼굴에 대한 자신감의 연장선상에서 '맨얼굴혁명적'이라는 논리를 갖고 와서 그 부분에서만 자신의 혁명성을 과시하려한다. 더군다나 그런 여자들의 비난 섞인 눈초리에서 '나는 화장하면 좀 더 예쁘거든.' 하고 생각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자신은 문제시하지 않는 모습이 참 싫다. -P.75
몇십년전에 쓰여진 글이지만 위의 구절은 지금 이곳의 탈코르셋 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왜이렇게 젊은 여성들의 탈코르셋을 안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건지, 본인들이 탈코르셋 운동을 함께 참여하지 않을거면 그 운동을 비난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서도 탈코르셋 운동한다니 '너네들은 남자가 되겠다는 거냐', '남자처럼 잘 씻지도 않을려고 하네' 라는 비난을 하는걸 보고서, 대체 왜 꾸밈노동을 멈추겠다는 것에 안씼겠다는 거냐로 되받아치는걸까? 궁금했다. 그들은 화장을 해야만 씻는걸까? 그런데 다나카 미쓰의 저 구절에서 '맨얼굴을 충분히 자기 긍정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이라는 부분이나, '나는 화장하면 좀 더 예쁘거든 하고 생각하는 모습' 이라는 부분은, 정말 이건 아니지 않나 싶다. 왜 그렇게 꼬아서 보는걸까?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를 한다고 하면 간혹 여성주의가 뭐냐고 묻는 남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대신 그 질문을 그냥 무시해버린다. 그리고 다나카 미쓰의 이런 글을 읽는다.
걸핏하면 "여성해방이 뭐냐?"고 묻는 남자들이 있는데, 남자들이 스스로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끓어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은 그 질문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남자에게 평가받는 것이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되어 버린 여자들의 역사성이, 입을 벌려 남자의 물음에 답하려는 모습이 내 속에도 보여서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혼자서 꿀을 빨고 싶어 하는 나를 보기 ㄸ대문인데, 나는 한 번 남자를 외면하고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를 외면하고, 말문이 막힌 채로 있는 나의 그런 '엉망인 상태'가 바로 내 현재이며, 내 '진짜 속내'이다. 즉 나는 그렇게 답하지 않는 상태로 여성해방이 여성해방인 까닭을 남자에게 알리고, 알릴 수밖에 없는 사람, '지금 여기에 있는 여자'인 것이다.
(중략)
자기 속내를 딴 데다 두고 어디까지나 스스로 노예 우두머리로 있으려고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여성해방이 뭡니까?"라고 묻는 남자들에게 나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걸인의 마음"이라고 중얼거린다. -P.89
다나카 미쓰와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나에게 그걸 묻는 남자들이 여성주의가 뭔지를 정말로 제대로 진지하게 알고 싶어서 묻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그렇다해도 내가 그걸 그에게 알려줄 의무도 없고. 알고 싶으면 얼마든지 자기가 알아서 공부하면 될 일이다. 다른 책 다 읽으면서 여성주의 책은 안읽고, 그러면서 여성주의가 뭐냐고 묻는 그 심뽀 징그럽다. 상대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다.
책의 말미 해설을 읽다보면 다나카 미쓰가 침구사가 됐다는 걸 알게 된다. 해설을 쓴 '이토 히로미'는 다나카 미쓰가 자신에게 침을 놔준 적이 있다면서
내 몸에서 이물질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은 섹스할 때 페니스가 몸속에서 움직이는 것과 가장 비슷했다. 그런데 페니스는 페니스 크기 정도밖에 자극을 느끼지 못하는데에 비해, 내 몸속에 들어온 가늘고 작은 침은 분명 페니스보다 훨씬 컸다. 큰 봉처럼 크게 움직였다. -P.364
라고 쓴다. 침 맞은 걸 이렇게 표현할 일이야? 나는 좀 어이가 없었지만, 그런데 이 해설을 쓴 사람과 다나카 미쓰는 어쩐지 결이 잘 맞는 사람들일 것 같다. 그나저나 침구사가 됐다니, 침을 놓아주는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아픈 걸 치료해주고 또 정신적으로도 위로를 준다니, 다나카 미쓰가 이 책을 쓰고나서 걸어간 길은 뭔가 독특하게 느껴졌지만, 그런데 어쩐지 맞춤한 길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나카 미쓰는 줄곧 내가 나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참말로 옳은 말이다. 나는 나로 살아야 하고 나로 살아야 하는 건 바로 나인 것이다.
애초에 이 세상을 포르노로 만들어 놓고서는 그때마다 팬티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를 문제시하니 예술인지 외설인지 논쟁을 벌인다 한들 사람들의 눈에는 고발하는 쪽 검사가 가장 외설적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리낌 없는 추악함이야말로 권력이라는 것의 정체이다. 포르노의 총감독이면서 동시에 포르노를 고발할 수 있는 권력, 그 기만성은 바로 결혼이라는 절차를 밟아야만 암컷과 수컷의 성적 결합을 허락한다. 결혼은 이러한 기만성과 표리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결혼은 권력이 보증한 ‘포르노‘이고, 포르노를 상영할 현장을 덮칠 필요가 없게끔 한 절차에 다름 아니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또 결혼식이란, 아내로 엄마로 암컷의 생을 살아 살아 내기 위한 결의를 세상에 알리는 창구이다. 생각건대 공인된 포르노인 결혼은 거리에서 남녀 간 성행위 퍼포먼스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 P62
더욱 우스운 것은 거리를 지나며 그 퍼포먼스를 본 사람들이 누구도 성행위를 보지 않았다고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와 비슷하게 입모아 거짓말을 하는 꼴이다. 이렇게 결혼 포르노가 상연되어 왔다. 그러니까 모두가 결혼이 포르노인 것을 알고 있는데도, 포르노라고 외친다면 이 세상의 중심 뼈대에 금이 갈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이 공인된 포르노 ‘결혼‘이 계속 상영될 수 있다는 소리이다. 이런 속임수를 숨기려고 ‘예술이냐 외설이냐‘ 왈가왈부한다. 마치 결혼 이상으로 외설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하고서 체제를 정비한다. - P63
그러나 문제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성의 주체인 우리이다. 항상 그렇다. 나는 맨얼굴을 뽐내는 여성해방운동가들한테서 자신의 지성과 교양을 모성애로 뭉뚱그려서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고급 노예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다. 이제 세상이 복잡해져서 전처럼 여자가 남자의 분부대로 "예." 하면서 따르는 건 더 이상 유행이 아니다. 전보다 좀더 건방지고 건방지게 된 만큼 경제적으로 자립해 있으면서 남자의 약함을 알고 그것을 채워 줄 만큼 현명한 여자가 요즘 기대되고 선망받는 여성상이 됐다. 그러니까 여성해방운동을 해도 남자한테 제법 인기가 있을 이유가 있게 됐다. 그러나 남자의 서랍에서 밀려나온 것을 받아들여 주는 한, 여자는 진한 화장을 하든지 맨얼굴을 하든지 남자를향한 교태의 역사에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다. 맨얼굴을 한 여자가 뽐낼 수 있는 것은 진한 화장을 한 여자에 대한 경멸의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 P88
남자한테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우리 속에 없애지 못한채 늘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남자를 제대로 만나고 싶은 것인지 남자한테 사랑받고 싶은 것인지 그 경계가 항상 구별이 안 되게 섞여 있다. (??) - P89
여덟 살 아이가 엄마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는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이는 마치 이 세상과 삶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았다. 더군다나 마땅히 그런 공포심을 나와 공유해야만 하는 상대방은 다음달에도 그다음 해에도 우리 집이 필요로 하는 우수한 직원이었다. 그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천연덕스럽게 계속 일했다. 그리고 지금도 추석이나 설에 처자식을 데리고 과자를 사 들고 우리 집에 오고, 의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한다. - P104
어둠 편에 있는 여자는 보기 싫어도 남자가 잘 보인다. 남자가 헛도는 꼴이 잘 보인다. 그렇기에 여자는 자칫 헛도는 남자를 안아주고싶어 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현모양처란 아이한테도 엄마, 남편한테도 엄마, 이렇게 두 엄마 노릇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여자가 너그러움을 보이는 가운데 남자는 자신의 자궁 회귀 욕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 P131
서머셋 몸의 유명한 단편으로 <비>라는 작품이 있다. 한 선교사가 매춘부를 깨끗하고 성스러운 생활로 인도하려고 한다. 이제 매춘부가 조금만 더 하면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겠다 싶은 찰나에 선교사는 의문의 자살을 한다. 야단법석이 일어난 가운데 매춘부가 내뱉는다. "남자란 모두 돼지 같아." 매춘부가 돼지라면, 선교사도 돼지라고 알려 준이 실제 같은 허구의 작품은 여자와 남자의 숙명적인 대립의 근원을 밝혔다. - P157
범죄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전부가 다 그렇다고는 단언할 수 없으나, 범죄라 부르는 행위 대부분은 지금 아픈 사람이 그 엉망인 상태를 극한의 형태로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해 이 세상에서는 엉망인 상태가 바로 악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존재의 그러한 본질이 엉망인 상태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P180
[옮긴이] 연합적군파 내부에서 혁명 자금을 아끼기 위해 여자가 생리대를 사는 것을 문제시한 적이 있다. 한편 기업에서의 생리휴가를 살펴보면, 전후 일본의 노동기준법(1947년)은 생리휴가를 생리 당일 여성의 휴가뿐만 아니라 생식 건강에 유해한 업무를 하는 여성이 청구할 수 있는 휴가로 규정한다. 그러나 후자의 조항에 대해 사용자 측은 지속적으로 여성 과보호라는 이유로 폐지를 주장했고, 일본의 노동조합 내여성 조직의 주요한 의제는 생리휴가에 관한 것이었다. - P220
빌헬름 라이히는 저서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개인적인 쾌감(오르가슴)을 대중적인 규모의 쾌감(오르가슴)으로 바꿔차는 조작으로 파시즘의 토대가 생긴다. 대중적인 규모로 쾌감을 바란다는 말은 사회의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개인이 집단으로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집단할복이다. - P231
한 지붕 아래 맞벌이하고 일상을 공유하면서도 남편을 그저 집안일을 돕는 사람으로 삼고, 자신을 집안일의 주체로 삼는 사고방식은 여자가 자신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된 여자다움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탓이다. 다시 말해 남자다움에 대한 여자의 환상 탓이다. 집안일에 협조적인 남편을 두고 기쁨을 느끼는 맞벌이 여자는 남편을 따라 죽기를 강요당하는 여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환상이 있어서 맞벌이 여자는 자신이 대의를 위해 살아갈 남자, 무대 위 배우처럼 살아갈 남자에게 별볼일없는 일상 잡일을 가지고 성가시게 한다는 식으로 부담을 느끼면서 불평하지 않는 온화한 아내가 된다. - P240
주간지에서 운운하는 성의 해방 그러니까 프리섹스란 실은 여자를 변소(성욕 배출구)로 보는 남자들의 더러운 배설욕이자, 당장 눈앞의 것만 신경 쓰고 나중 일은 나 몰라라 하는 남자의 구미에 맞춰 조리한말일 뿐이다. 또 그것은 성에 대한 죄책감을 방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프리섹스는 ‘혼전 성교‘, ‘혼외 성교‘라고도 하는데 이렇듯 어디까지나 결혼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프리섹스‘란 말은 돈을 내지 않고 여자를 안을 수 있는 남자의 자유를 뜻한다. - P262
내가 싫은 것을 말하지 못한 어제였지만 오늘은 내가 싫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는 내가 멋진 것이고, 또 그런 여성을 보면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집합체니까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사회를 바꿀 수 있다." 특히 저자는 여성해방과 사회운동에서 사회적 약자인 주체들의 ‘야만의 힘‘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때 ‘야만의 힘‘이란 나를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들로 인해 느끼는 아픔을 무시하고 자기 안으로 삼켜 버리지 않고, 아픔에서 나온 분노로 맞받아쳐 나온 첫 순간의 말이나 행동을 일컫는다. 저자가 쓴 글 <세계는 ‘야만스러운 힘을 기다린다>(1996년)에 따르면 여성해방은 차별이나 억압을 받으면 그 원인이나 구조를 분석하거나 머리로 따지기에 앞서 ‘야만스러움‘으로 즉각 맞받아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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