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의 어머니 왕비는 가부장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는 전형적인 예다.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눈처럼 하얀 피부, 피처럼 붉은 입술, 흑단처럼 검은 머리를 갖길 원하며 외모에 대해서만 욕망하는 이 여성은 대체 자신의 욕망이 누구의 것인지 알기는 할까? 자신이 갇힌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를 그대로 내면화하면, 자신이 품은 욕망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성의 외모를 아이에게 욕망하면서 어머니 왕비는 그 욕망이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것이 길들여진 채 순응하는 여성의 삶이다. 그리고 순응하는 여자답게 조용히 죽는다. 이렇든 의미 없는 존재는 이야기에서 사망 처리되어 사라진다.
그렇다면 백설공주는 어떤 존재일까? 남자들이 바라는 욕망을 모두 투사해서 태어나, 그 욕망을 고스란히 구현하는 존재다. 남자들이 만든 틀에 맞아떨어지는 존재는 행복할까? -p.32
고백하자면, 내가 이성애 중이었을 때 내 외모에 가장 많이 신경을 썼다.
그렇다고 내가 풀메이크업을 한다든가 빡센 다이어트를 한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지만, 겨드랑이 털이 신경쓰였고 눈밑 지방이 신경쓰였다. 셀카를 찍으면서 내가 잘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사진 하나를 보내기 위해 수차례 찍고 또 찍었더랬다. 연애중인 상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이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예쁘다고 인정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응 받기를 바랐으니까. 그렇게 나는 그의 여자친구이면서 동시에 그에게도 당당한 트로피가 되기를 원하는거다. 당시에는 물론, 그런 내 욕망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으레 그런, 자연스런 욕망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
언젠가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하노이로 혼자 여행을 간 때였다. 그 날 나는 미술관 관람을 하기 위해 나서면서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전까지 나는 볼터치까지 발라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탈코르셋을 외치던 그 때, 그 뜻에 깊이 공감하는 바, 나 역시도 거기에 호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명색이 여성주의 책을 읽으면서 여성주의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건 언행불일치. 언제나 어디서나 언행이 일치할 순 없지만, 가급적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었던 나는, 그 날 하노이에서 전혀 화장을 하지 않은 상태로 호텔을 나섰다. 그렇게 화장을 하나도 하지 않은 상태의 외출은 처음이라서 당연히 좀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내게 일어났다.
미술관에 도착해서 그림을 관람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관람하러 들어왔고 그중에는 당연히 성별이 남자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돌처럼 느껴지는거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남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 날, 전혀 꾸미지 않은 나는,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지극히 자유로운 사람이었던 거다. '늬들이 날 여자로 보지 않을것이다' 라는 확신 같은게 들었다. 그 때, 내가 그동안 해왔던 화장이 사실은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봐주기를 원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전혀 화장하지 않은 나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 대해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그러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을 전혀 신경쓰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거다. 아, 내가 그동안 남들 보라고 화장한 거라서 남들이 봐주길 바란거구나, 남들이 보든말든 안하겠다 해버리면 남들을 신경쓰지 않을 수 있는거였어!!
그 뒤로 나는 화장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회사에도 화장하지 않은 채로 출근하고 친구들을 만날 때도 화장하지 않는다. 처음엔 남사친들 만날 때는 잠깐 갈등하는 시간들이 있었지만, '내가 여사친들 만날 때는 화장 안하면서 남사친들 만날 때는 화장한다면, 그건 상대방을 남성으로 본다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남사친들 만날 때에도 완전한 쌩얼로 나갔다.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이제는 화장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화장품도 없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리고 나는 너무나 자유롭다. 가끔 이성애 중에 내가 외모에 신경썼던 걸 생각하면, 어쩌면 다시 이성애가 들이닥치는 순간 또 외모에 신경쓸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되지만, 그러나 내 성격으로 이만큼 살아온 걸 보건데, 언행일치 집착하는 나를 보건데, 난 그냥 나일 것 같다. 이런 내가 싫으면 말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조이스 박은 이 얘기를 백설공주를 빗대어 하고 있다. 예쁜 아이를 낳고 싶은 거,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되고 싶은 거, 그거 누구 욕망이야? 네 욕망이야? 왜 그게 네 욕망이라고 생각해?? 남자들이 좋아하는 외모를 너 역시도 바라고 있는건데?
크- 너무 짜릿하지 않은가!!
자, 계속 백설공주 이야기를 살펴보자.
일곱 난쟁이가 사과 조각이 목에 걸려 죽은 백설공주를 유리관에 넣어서 전시하는 장면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 시절에 유리가 얼마나 귀했는지 떠올려보면, 이들의 전시욕은 정말로 대단하다. 유리관에 전시되는 여성의 이미지는 트로피와 연결된다. 트로피는 원래 사냥해서 박제해 걸어둔 짐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욕망해서 소유하고 전시하는 행태의 끝판왕이 바로 트로피로 만드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백설공주를 유리관에 넣어서 전시하고 그것이 사랑이라며 슬퍼하는 일곱 난쟁이의 애정을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전시되던 백설공주가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왕자에게 양도되는 것은 어떠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양도는 구원으로 포장되고, 양도에 붙은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면서, 백설공주는 왕자의 키스를 받고 목에 걸린 사과 조각을 뱉어내고는 다시금 살아난다.
전시되고 양도되는 것은 애초에 비극을 전제로 한다. 남자들이 이상화/대상화하는 대상에 자신을 꿰맞추고는 마치 여신의 제단에라도 올라간 듯 황홀한 도취에 빠지는 여자들도 이고, 이를 동경하는 여자들마저 있다. 매력도 자본이라면서 권력을 얻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P.34
거울에 매달려서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쁜지 안달복달하고 자신보다 예쁘고 어린 여성을 적으로 삼는 한, 계모 왕비에게 구원이란 없다.
성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여신의 제단에라도 오르는 일인 것처럼 착각해서 낭만화의 허구에 빠지면, 백설공주 꼴이 난다. -P.36
백설공주든 신데렐라든 잠자는 숲속의 공주든 요즘에는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쓰이거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일들이 많지만, 그러나 백설공주를 가져와서 '백설공주 꼴이 난다'는 워딩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다. 백설공주를 희망하는 게 아니라 그 꼴이 난다고 그렇게 살지 말자고 말하자니, ㅋ ㅑ 너무 시원하지 않나. 답답한 속을 긁어주는 해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조이스 박은 덧붙인다.
로맨스라는 기제에 기만당하면, 자신의 욕망 대신 남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뼈아픈 현실을 직시했으면 좋겠다. -P.38
구절구절이 죄다 명문이다.
남자들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거치며 영웅으로 성장하는 동안, 여성들은 남자를 기다리는 고정된 좌표로 전락한다. 어릴 때 <솔베이지의 노래>라는 가곡을 들으며 이유도 모른 채 치를 떨 만큼 싫어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호호 할머니가 되도록 어디에도 가지 않고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곤 삶의 의미가 없는 여성의 삶을 지고의 사랑이라고 칭송하는 것도, 다 늙어서 쓸모도 없어진 남자가 "역시 너밖에 없어!"라고 무릎 꿇는 이야기도, 정말 싫지 않은가. -P.40
페르귄트와 솔베이지는 내가 페이퍼에서 가끔 언급하는데, 페르귄트가 세상을 다 돌아다니고 이사람 저사람 만나면서 ㅋㅋㅋ 다 늙어서 죽기 직전 솔베이지를 찾아온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런데 이런 솔베이지의 입장이 되어 만든 노래가 있다. 김광진이 했다. 잠깐 그 가사를 살펴볼까.
뒤돌아 보면 보이는 자리는
그대를 매일 기다리던 곳
쉬어가던 큰 나무 그늘도 그대로
이제는 그대 돌아온다해도
날 알아보기는 힘들거예요
이미 나는 작은 꽃이 되어 시들어
서글퍼 내 운명의 사람 내게 돌아와요
바람이 날 흔든다 해도
그댈 향해 활쫙 피어날꺼죠
그러다 지치면 이 언덕위 땅위에 이내
작은 몸 위하여 노랜 없을거예요
가슴에 담은 내 얘길 까요
매 순간 그대만 사랑했죠
고마워요 기억해 준걸로 된거죠
나 비록 그 순간 잠시만 필 수 있다해도
그대가 돌아오는 길에 그댈 향해 활짝 피어날께요
그러다 지치면 이 언덕 위 땅위에
이내 작은 몸 뉘어 잠이 들겠죠 영원히
처절하다...
사실 솔베이지도 솔베이지지지만, 나는 여자는 한자리에서 기다리고 남자는 자신이 할 일을 맹렬히 하느라 세상을 다 돌아다니면서 그러다가 운명의 사랑을 찾는다는 이야기로써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대표적으로 생각하며 싫어한다. 여자는 집안에만 콕 박혀 있다가 여기저기 떠도는 남자의 우연한 방문으로 인생사랑 만나고 그러고나서 여자는 또 거기 그대로 있고 남자는 떠나버린.... 으..... 너무 내 타입 아니다.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를 펼치면서 깨끗하게 읽고 얼른 팔아야지, 했는데 읽다보니 포스트잇을 너무 많이 붙이게 되어서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연필이며 형광펜으로 줄을 박박 그었다. 이제 팔 수 없는 책이 되어버렸어. 하하하하. 그렇지만 요즘 좀 답답하던 터에 시원하게 읽은 책이었다.
게다가 언급된 작품들 중 읽거나 보고 싶은게 있어 메모도 해두었다. 사실, 책은 벌써 샀지롱 ~ 내일 책탑으로 올라갈 예정.
작품은 애플티비의 드라마인<로어: 선반에 진열된 여자> 다.
오늘 아침 45분 연속 뛰기 하는 날이었는데 런데이 하면서 처음으로 포기했다. 34분 달리다 아 오늘은 더 못하겠다, 하고 포기. 아... 포기라니... 포기의 원인을 계속 생각해보게 됐다. 금-토 여행 일정으로 피곤했던걸까, 어제 잠실에서 집까지 걷느라 2만보이상 걷고 바로 다음날 아침 뛴 게 무리였을까, 생리때가 되어서 그런걸까, 너무 뜨거울 때 달려서 그런걸까... 그러다 놓친 11분이 아까워서 다시 5분 뛰고 또 힘들어서 한참 걷다가 6분 뛰었다. 결국 집을 나가서 달리기하고 집에 돌아오기까지 세시간은 걸린 것 같다. 갔다와서 씻고 밥 먹고 정신 못차리고 뻗어버렸다. 와 기절해버렸는데. 난 이대로 괜찮은가... 오늘밤은 잠들 수 있나...(있을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책 읽는 거 너무 좋다. 참 좋다. 책은 정말 짱이다.
소네트라는 시의 형식까지 만들어가며 라우라를 찬양하던 페트라르카는 가톨릭 수도자였다. 라우라와 말이라도 섞어보았냐면, 그렇지 않다. 다른 남자의 아내인 멀고 먼 여성을 마치 살과 피가 없는 존재처럼 이상화해서 우러러보고 추앙했다. 이상화도 대상화돠. 살과 피로 된 감정과 생각이 있는 전인적인 존재가 단 몇 가지 요소로 줄어들어 환원되는 것이다. 환원이라는 뜼의 영어 단어가 ‘줄이다‘라는 뜻을 가진 reduce 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 P27
단테는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천국의 장미 방에서 만나는 성스러운 존재로까지 격상시킨다. 단테 역시 베아트리체와 손ㄷ 한 번 못잡아본 사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피와 살이 없고, 영적인 안내자이며, 남자의 구원인 여성의 이미지는 이렇게 굳어진다. - P28
백설공주 이야기는 대상화되는 여성들의 유형이 어떠한지, 여성들이 대상화라는 작용에 어떻게 반응하며 어떤 반작용을 일으키는지 보여준다. 백설공주의 어머니 왕비와 계모 왕비, 백설공주는 모두 대상화된 여성들의 원형이다. 계모 왕비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 평가를 거울에 의존하는 것은 거울이 가부장 권력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외모로만 존재의 가치가 오롯이 매겨지는 심사대에 고분고분 오르는 여자들의 삶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 P31
왜곡된 남성 집단 문화에 길든 남성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예쁜 여자를 얻는다고들 생각한다. 여성을 성공의 트로피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충분히 성공하지 못한 대부분의 남성은 열패감에 젖는다. 이 열패감을 여성에게 돌릴 때 여성 혐오가 나타난다. 진짜 분노할 대상인 상층의 남성 대신 만만한 존재에게 열패감의 탓을 돌리는 굉장히 비겁하고 비열한 기제다. - P55
이 이야기([태양으로 날아간 화살])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남자 주인공 한스가 전형적인 남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동물을 도와주는 다정하고 세심한 성격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에서는 차별받았다. 그런데 한스는 외려 가부장제 남성에게 배척당하던 속성을 발휘해 공주의 마법을 푸고 왕국을 상속받는다. 가부장 마초의 전형에서 벗어난 남성성이 여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다시금 새겨볼 가치가 있다. - P81
[마법에 걸린 공주님]에 숨은 진실은 여자의 내면에 있는 수많은 얼굴 중 가부장 사회가 보여도 된다고 허락하는 얼굴은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얼굴은 베일로 가려서 세상에 내보이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내가 자아를 포기할 수도 있을 만큼 사랑한 남자는 나를 사랑한다면서 수많은 얼굴 중에 예쁘고 연약한 나만 고르고 나머지 내 얼굴은 모두 버린다. - P85
로맨스라는 마법, 그 기제를 바탕으로 여자들을 베일에 가두고 여럿 중 하나만 고르는 권력에 도취되어 여성은 스스로를 전시대에 세운다. 용을 죽이고 공주를 구하는 이야기가 로맨스의 전형이 되면서, 이를 달콤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우리는 마법에 홀린 게 아닐까? - P85
이야기로 존재하지 않는 사건은 현실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를 통해 개연성이 주어지면 현실에서 이룰 수 있다. 이것이 이야기가 가진 힘이기도 하다. - P148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죽이는<손순매아(孫順埋兒)>와 같은 효행담이나, 사회의 안녕을 비는 에밀레종을 주조할 때 아기를 쇳물에 넣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 땅에서는 효라는 명목하에 부모를 위해 자식이 희생당하는 메시지가 유포되었다. 그래서 수천 년에 걸쳐 진정한 의미에서 지배 계층이 바뀐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주장도 있다. - P149
여성의 가치를 외모로 국한하여 평가하는 건 남성이다. 남성들이 감상하는 대상에게 매기는 점수에 따라 권력 쪼가리를 부여해주는 궁극의 권력은 가부장이다. 여성들은 외모 말고는 가치 없는 존재라는 기준에 자신들을 욱여넣고, 이는 목에 걸리 독사과처럼 여성을 압박한다. - P161
<출애굽기>3장 14절에서, 모세는 광야의 가시덤불에서 타오르는 불꽃으로 드러난 하나님을 만난다. 이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자신을 밝힌다. 나는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절대자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칭한 것은, 청자인 ‘너희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라, 타인들에게 비추어 보고서야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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