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라 브라운'의 소설 중에 '아직' 기혼인 상태의 여성과 미혼인 상태의 총각이 만나는 설정이 있다. 여자는 남편이 전쟁에 나간 후에 생사를 알 수 없어 과부 아닌 과부 상태인 거고 같은 상황의 여성들이 모여 정부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비행기를 탔는데, 그 이야기를 나눌 국회의원이 바로 그 남자주인공이었던 것. 비행기의 난기류에 여자는 힘들어하고 그 옆에서 아이쿠 너 힘들구나 그녀의 두려움을 잠재우고자 했던 우연히 비행기에 같이 탄 남자승객이 그 국회의원. 첫 만남에서 그들은 강하게 이끌리는데 그들이 서로의 상황을 알고서는 남주가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여자를 만나야 할 운명이었다면 왜 하필 거기에서 당신이었을까' 하는 것. 여자는 아직 남편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서로는 강하게 이끌리고 있었으니까.
사랑은 운명일까? 아니면 사랑은 타이밍일까?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는 '진'은 어느날 독자로부터 '나는 남자 없이 혼자 애를 낳았다' 즉 처녀생식을 했다는 편지를 받는다. 신문사에서는 이를 취재하기로 하는데, 독자의 말을 믿어서라기보다 흥미로운 기사가 될 것 같아서였다. 세상 누구도 '나는 처녀생식을 했다'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미친 여자가 아닐까? 하고 진은 그 편지를 보낸 주인공 '그레첸'을 찾아간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레천은 아름답고 지극히 보통의 여성이었으며 남편과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처녀생식을 진심으로 믿고 잇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난거라는 거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레친이 아이를 임신했을 당시 그녀는 몸이 아파 요양원에 있었고 한 병실에 여성환자들 여러명이 있었으며 그들은 늘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간호사가 혹시? 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요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아주는 사람들은 모두 수녀님들이었던 거다. 그러니 요양원에 머물 당시 남자랑 관계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거다.
진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병원의 수녀님과 또 함께 입원했던 친구들을 찾아가본다. 그들 모두 진의 임신 가능성에 대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우리는 남자를 볼 수 없었고, 누구도 혼자 남겨진 적이 없었다는 거다.
이에 과학계에서도 흥분해 어쩌면 그녀가 정말 처녀생식을 한걸까 하고 여러가지 의학적 검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처녀생식이라는 그레첸의 주장이 힘을 받는다. 어쩌면, 정말?
그레첸의 처녀생식이 이 책의 주요 사건, 그러니까 모든 등장인물들을 만나게 하는 사건이라면, 진과 그레첸 가족이 만나는 것은 그 일로 인해 벌어진 부가적인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취재를 위해 그레첸을 만나러 갔다가 진은 그레첸을, 그레첸의 딸을, 그레첸의 남편을 만난다. 일회성에 그치는 취재가 아니라 그들이 마주치는 횟수는 많아지고, 진은 그레첸의 딸을 정말 어여삐 여기며 어느 순간 이 열살 소녀와 엄마의 허락 아래 같이 외출도 한다. 좋은 이모가 되어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레첸의 남편 하워드와 좋은 친구가 된다. 단둘이 지내게 되는 시간도 곧잘 오게 되는데, 그레첸은 불쾌해하기는 커녕 '하워드에게는 여사친이 없으니 니가 좋은 여사친이 되어주면 좋겠다' 라는게 아닌가. 어허라 이것봐라, 이건 어쩐지 둘이 사랑에 빠지라고 등떠미는 것 같은데? 하고 느낄 무렵, 아니나다를까 진은 정말 하워드를 사랑하게 된다. 하워드도 그럴까? 내가 느낀 이 감정, 하워드도 느낀 것 같은데?
자, 내가 답답해하는 지점은 여기서부터다.
진은 결혼하지 않은 거의 마흔이 다 된 여성이고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산다. 어머니는 외출을 일절 하지 않으며 늘 딸과 함께 있고 싶어한다. 딸의 외출조차도 싫어하는데 그나마 직장을 다니는 것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다. 진이 나가서 돈을 벌어와야 먹고살 수 있으니까. 그런 진에게 엄마는 큰 구속이다. 엄마랑 사이좋게 지내려고 생각하다가도 언제나 엄마가 내 옆에 있는 삶, 내가 엄마 옆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하는 삶에 대해 진은 답답하다. 친구를 만나고 싶어도 엄마의 눈치를 봐야하고 외출을 하고 싶으면 그 사이에 엄마에게 친구를 붙여두어야 할 것 같은 삶. 그것은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그런 진이니만큼 직장생활을 하지만, 직장 동료들과 퇴근 후 회식이라든가 식사를 일절 할 수가 없다. 직장 동료들이 오늘 끝나고 술 한 잔 어때? 하면 언제나 거절을 말하고 얼른 집에 들어가 엄마랑 저녁을 먹어야 한다. 어느 순간부터 늘 거절하는 진에게 동료들은 함께 하기를 제안하지도 않는다. 진이 다니는 곳이라고는 집과 직장이 전부이며 간혹 엄마 심부름이나 식료품을 사기 위해 쇼핑하는 것이 끝이고, 의지하고 싶은 여동생은 결혼해 외국에 나가 살고 있다. 엄마를 돌보는 일은 오로지 진의 몫인거다. 집과 직장 그리고 엄마. 이것이 진을 구성하는 삶의 큰 축이자 유일한 축인거다.
신문에 기사를 쓰는 사람이지만 외부 취재가 아닌 생활의 팁 같은 것들만 기록하는 터라 그녀는 다른 사람을 만날 확률이 전혀 없고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데, 모두가 기피하는 이 처녀생식 취재에 그녀가 배정된거다. 그렇게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는거다.
하워드는 그렇게 만난 남자다. 지난 연애로 상처도 있겠다 남자들은 다 그지같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예의바르고 다정한 남자가 있네? 그렇게 사랑을 느끼는 남자는 그런데, 그레첸의 남편이다. 다른 여자의 남편, 한 아이의 아버지인만큼 이 사랑은 시작되어서도 안되고 그 사람이 성사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그러나 하워드에 대한 마음이 깊어져서 어쩔 수가 없다. 마음이 커진다. 이제 취재보다는 하워드를 만날 생각에 설레고 하워드와 나눴던 이야기를 곱씹는다. 이 감정은 나만의 것은 아닌 것 같아, 진은 생각하고, 살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하워드에게만큼은 저절로 말하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하워드는 진의 사랑, 진의 소울메이트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산드라 브라운의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이 말했던 것처럼, 진이 인생의 이 시점에 사랑에 빠져야 했다면, 어째서 그 남자여야 했던걸까. 왜 하필 유부남이어야 했던 걸까. 왜 하필 ...
왜 하필 그런것이냐면, 그녀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 [스몰 플레저] 를 상찬하는 문구 중에는 '제인 오스틴의 대를 잇는다' 였나, 여하튼 제인 오스틴을 데리고 와 이 책의 작가 클레어 챔버스를 얘기하던데,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 책은 위에서 언급한 산드라 브라운의 로맨스 소설 [내일을 위한 약속] 이었으며, 그보다 더 자주 어쩔 수 없이 떠올린 소설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이었다. 클레어 챔버스가 에밀리 브론테를 닮았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이러지 않았어도' 되는 사랑이 기어코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거다. 물론 사랑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박경리'의 토지 뒷부분에서 여자가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오랜만에 재회하는데 여자를 원망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그런 말을 한다. '당신을 잊는 것은 내 의지이지 내 마음이 아니잖아요' 뭐 이런. 아마 유인실이 말한 대사였나?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랑은 '내가 너를 사랑하겠다'라는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물론 그런 사람도 있다-, 이제 그만 사랑해야지 마음 먹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산드라 브라운 식으로 '왜 하필' 이라는 말을 붙여야할만큼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일이다. 인생의 이 시점에서 나에게 너가 오기로 되어있엇나봐, 가 아마도 사랑의 운명론적 문장이 아닐까.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나는 더 좋아한다. 나는 내 사랑보다 타인의 사랑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다. 그래서 사랑의 특징을 안다. 그런데 내가 왜 답답하냐면,
이 책속의 진이 만난 남자는 그냥 하워드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사랑은, 한정된 공간에서만 일어난다. 집에서 내 하인같이 부리던 히스클리프만 내내 보다가 저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도련님 '에드거'를 만났더니 어머, 새로운 남자야, 짜릿해, 이러고 캐서린은 새로운 사랑에 빠져 에드거랑 결혼한단 말이다.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내가 답답했던 것은, 만약 그 시대에 여성에게 일을 할 자유, 여행을 다닐 자유, 돌아다닐 자유가 있었다면, 그렇다해도 캐서린이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히스클리프 혹은 에드거였을까? 하는거다. 물론 그 시대, 그 공간에 태어난 것은 캐서린이 원해서가 아니었고 어쩔 수 없이 캐서린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히스클리프와 에드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테지.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도 내가 답답했던 것, 외딴 곳에 숨어 혼자 사는 여성에게 찾아오는 사람은 이 남자 아니면 저 남자라는 거다. 그 개울가에는 여자들은 갈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혼자 지내는 이 여자는 자신을 찾아오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바로 그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다른 남자를 모르니까. 게다가 여자 친구들도 없으니까. 지극히 제한된 공간에서 지극히 제한된 사람만이 허락됐는데, 그 안에서 빠진 사랑을 그래도 사랑이라고 한없는 마음으로 축복해줘야 하는거냐, 하면 나는 그 지점에서 답답해지는 거다.
진도 그랬다.
진에게는 가서 말상대가 되어줘야 할 어머니가 있었고 살아가는 공간도 제한적이었다. 회사에 출근하면 동료들을 만나지만 그 동료들과 사적으로 친해질 일이 없다. 퇴근후 동료들과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지도 않으니 그저 동료일 뿐이다. 그리고 집에 오면 엄마. 회사 가면 동료 집에 오면 엄마. 진에게는 남자를 만날 일이 아예 없었는데 갑자기 이 유부남 하워드가 등장한거다. 그런 하워드가 다정하고 예의바르고 자신에게 친근하니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겠는가. 나는 그게 답답한거다. 만약 진이 회사에서 동료들과 퇴근 후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면, 동료와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도, 다양한 남자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고 살았다면 친구들로부터 남자를 소개받기도 했을 것이고, 동료든 친구든 함께 자리하다가 타인과 연결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또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관계들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본 남자와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볼 수 있는 남자는 하워드가 유일했는데, 그런데 하워드랑 사랑에 빠졌어? 나는 이게 너무너무 답답한거다. 그 사랑을 내가 '선택'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이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고 운명이라면, 그리고 타이밍이라면, 그런 운명속에 하워드가 있었던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걸까?
내가 이렇게 답답해하지만, 하워드는 결코 나쁜 남자가 아니다. 아니, 아내와 아이가 있는데 진에 대한 마음이 자라난다면, 뭐 그건 사랑으로 어쩔 수 없고 그렇다고 딱히 좋은 남자라고 볼 수 없는거겠지만, 내 말은 그가 진을 함부로 대하는 남자가 아니라는 거다. 그가 남자친구라면 그는 좋은 남자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남자친구로서 남편으로서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런데 나는 이 사랑이 답답했다. 세상에는 넘쳐나는 불륜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들은 단지 불륜이라고 퉁칠 수만은 없는 숱한 내밀한 사정들을 담고 있다는 것도 안다. [안나 카레니나]도 누가 줄거리만 들으면 불륜이야기라 퉁쳐지지만, 실제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되는 독자들은 '이건 불륜이네 쯧쯧' 하게 되진 않지 않나.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도 사랑의 시작에 유부녀와 총각이 있다. 하워드가 진의 뒤통수를 치는 놈도 아니고 처녀랑 연애나 한 번 해볼까 하는 놈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너무 답답했다. 유일하게 알게 된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그 상황이 너무 빡치는거다. 이 남자도 저 남자도 만나고 그러니까 주변에 보이는 남자가 많은데 '바로 이 남자'랑 사랑에 빠진게 아니라, 아무도 안보고 살다가 딱 한 명 봤는데 그 남자랑 사랑에 빠지는 것, 그게 미치고 팔짝 뛰겠는거다. 유부남을 사랑하는 상황은 물론, 남자 백 명 만났는데 그 중 마음에 드는 남자는 유부남 뿐이었어 일수도 있고,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그걸 타인이 뭐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뒤늦게 진정한 사랑을 만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고로 사람은 타인의 사랑에 함부로 말을 덧대면 안되는 것 아닌가. 덧대면 안된다기 보다는 덧대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달까. 그런데 진이, 만날 수 있었던 유일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버린 게 나는 너무 안타깝고 답답하다.
작가는 이 사랑이 괜찮은 사랑이라고, 이들이 사랑해도 된다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니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면 이들이 서로에게 나타나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 그들이 서로에게 있었어야 해. 어쩌면 그들에겐 서로가 필요해서 신은 운명적으로 이들을 하필 그 시점에 만나게 한 것일 수 있지. 이 사랑이야말로 운명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또 이 사랑은 앞으로도 따뜻하게 잘 진행될 것 같다. 그렇지만,
순전히 내 개인적으로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오고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의 나라는 사람은, 이 사랑이 안타깝다. 남자와 대화도 안해보고 살다가 완전히 제한된 환경에서 만난 유일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 사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뭐, 이건 내 생각이고, 어떤 사람들은 아니, 와, 계속 못만나는 것보다 지금이라도 이 사람을 만났으니 다행이지 뭐야 할 수도 있고, 당사자들은 아무도 없던 삶이 너로 인해 빛나게 됐어 개꿀, 너는 나의 개이득.. 할 수도 있다. 내 인생 그렇게 외로웠는데 너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나봐.
이덕진이 부릅니다.
널 만났다는 건 외롭던 날들의 보상이야..
그래서 나는 맞이하게 된거야 그대라는 커다란 운명..
뭐 그랬다는 거다.
전체적으로 나는 이 소설에서 처녀생식이 등장한 이유를, 그리고 이런 사랑이 진행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 얘기를 왜 한걸까? 이런 생각만 몇차례 했다. 내가 이런 감상을 갖게 된건 어쩌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를 본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참고로, 나는 이 영화 졸라 싫어한다. 극장 나오면서 친구랑 개 욕하고 그 후에 다른 친구들하고 술마실라고 만나서 흥분해서 또 개욕했네. 나는 영화 <그녀에게>를 싫어합니다. 책 <스몰 플레저>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자, 이제 책이나 사러 가야겠다.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