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가? 단언컨대 없다. - P211
나는 내가 평범한 다른 사람들보다 알거나 깨닫는 것이 늦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왜그런가 아이큐의 차이인가 라고 생각했었는데, 최근에야 내가 경험해야만 그걸 습득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나는 내 앎이 대부분 경험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에겐 상상력도 풍부한데, 그건 책이라는 간접경험으로부터 온 것이기도 하겠다. SF 를 읽지 못하고 흥미도 없는 나는 과학상상화 그리기를 못했고, 그것은 언제나 큰 스트레스여서 늘 하늘을 나는 자동차만 그려갔었는데, 그 일에 대해 친구에게 얘기하자 친구는 내게 '너처럼 다른 사람의 입장이 잘 되어보는 사람이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건 말이 안돼.'라고 해주었더랬다. 그 말은 아주 오래전에 들은 말로 그런데 여태 남아있고, 그래서 내게 상상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내게 그나마 상상력이 있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러나 역시 앎과 깨달음에 있어서는 늦는 것 같다. 이별 노래의 가사를 듣고 눈물 흘리는 것은 나의 상상력도 충분히 해냈던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아 이게 이런 말이지 알아 알아, 하는 것은 내 이별 후에 가능해지는 거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처럼, 내가 경험을 통해 앎과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라면, 굳이 경험이 아니어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읽고 듣고 보고 그리고 지켜보는 일만으로도 가능해지는 것. 스스로의 몸을 갈아넣지 않아도 그간 사람들이 적어둔 것만 보아도 습득이 가능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나처럼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아도 알고 깨달을 수 있는 것다. 불에 데어보아야만 불은 뜨겁다는 걸 알기 때문에 화상을 입고야 경험하는 내가 있고, 불은 뜨겁다고 하는데 그런거구나, 라고 깨닫는 사람이 있는 거다.
내가 페미니즘에 늦된 것도 나의 이런 성향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라는 게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해 나는 페미니스트랑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러면서 또한 '다른 여자들과 나는 달라'라고 생각했을 때. 그런 무지하고 빻은 시간들을 오래 보내왔는데, 그런 내 안에도 그러나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것에 대한 감각은 있어서, 내가 하는 말 혹은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면서 말을 하고 행동을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내게는 어쩔 수 없이 여성으로 태어나 살아온 경험으로 인한 페미니즘이 장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내가 최명희의 《혼불》을 읽다가 도대체 여자들 왜 이렇게 고통스러웠지? 페미니즘을 알면 답을 찾을 수 있나? 해서 스스로 페미니즘 책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는데, 그 때 내 나이 어언 …
나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나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직접 모든걸 체험하지 않아도 터득이 가능한 사람. 내가 겪어보고 부딪쳐보고 상처 받은 뒤에야 비로소 알게된 것들을 세상을 목격하며 그냥 알았던 사람. 스물 다섯에 이미 남자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여성혐오가 여성의 생식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건 '여성 괴물'을 읽어봐도 나오고 여기에 나는 이견이 없다.) 결국 여성이 남성들에게 성적으로 어필하기 위한 꾸밈 노동을 그만두자고 했을 때 비아냥 대며 '나는 날 위해서야' 라고 했던 나이든 여성들이 현재에도 있는데, 그런데 스물다섯의 파이어스톤은 이미 그런 종속과 억압과 계급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거다. 여성들의 신분 상승은 남자를 잡아야만 가능해진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몸을 학대해 갈아넣으면서 사랑받으려고 하는 것, 남자들은 사실 여자들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성적 대상으로만 본다는 것, 결혼 후에 그걸 알게된 아내들은 얼마나 빡쳐하는지까지.
여성이 그들의 에너지를 남성에게 쏟기 때문에 남성은 생각하고, 글을 쓰고, 창조한다. 즉, 여성은 사랑에 몰두하기 때문에 문화를 창조하지 않는 것이다. - P184
가장 창조적인 시기의 주요 에너지가 ‘괜찮은 남자를 낚기 위해 쓰여지고 일생의 대부분은 낚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 쓰여진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남성에게 직업과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는 전일근무 직업이 될 수 있다). - P200
여성의 계속되는 경제적 의존은 동등한 사람들 간의 건전한 사랑의 상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여성은 오늘날도 여전히 지원제도 아래서 살고 있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그들은 자유냐 결혼이냐가 아닌 공적 소유가 되느냐 사적 소유가 되느냐의 사이에서 선택한다. 지배계급의 일원과 결합한 여성은 적어도 그의 특권의 일부가, 이를테면, 줄어들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나 남성이 없는 여성은 고아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다. 그들은 권력자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무력한 종속계급이다. 그들이 여전히 계급적 상황에 의해서 (부정적으로) 정의될 때 그것은 자유의 정반대이다. - P201
‘해방된‘ 여성들은 남성들이 따르고 모방할만한 ‘훌륭한 사내들‘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남성의 성적 패 - P209
낭만주의는 여성이 그들의 조건을 알지 못하게 막는 남성 권력의 문화적 도구이다. - P214
남자들과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남자들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자신을 치장하는 여자들에게 파이어스톤의 주장은 듣기 싫은 잔소리 같았을 것이다. 나는 몇해전 불법촬영하지 말라는 '불편한 용기' 시위에 나갔을 때, 남자친구와 지나가던 여자가 우리를 보며 '정신병자들 같아'라고 하는 걸 들었더랬다. 나는 아주 많은 여성들에게 여전히 페미니즘이 불편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알기 싫을 거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페미니즘을 알고 고통스러웠고, '차라리 모를걸' 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그러나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라는 물음에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그런식으로, 억압당하고 차별당하고 혐오당하는 한쪽 성별로 사는 것을 그만두고 싶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살아갈 젊은 여성들이라도 그런 세상에 살지 않게 하고 싶었으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파이어스톤이 살아가던 당시에도 파이어스톤의 주장은 남성들은 물론이고 이성애 여성들에게도 반갑지 않은 주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이어스톤은 파이어스톤대로 삶이 괴로웠을 것 같다. 아직 젊은데 이미 세상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목격하고, 그러나 문밖을 나서면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그런 세상이 펼쳐져있으니 그 세상을 보는 일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스물다섯에 나는 술이나 퍼마시고 나쁜 연애에 빠져들었는데, 파이어스톤은 그런 인생의 실수나 잘못 혹은 진창에 빠지는 일 없이 이미 세상이 똥이라는 걸 보아버린 거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스물다섯에 마르크스를 비판할 수 있다니! 나는 아직도 마르크스를 모르는데!) 잘못된 걸 지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잘못된 세상은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리석게 느껴지고 대중매체도 다 한심해 보이지 않았을까. 이미 모든걸 깨달은 젊은 여성에게 세상은 얼마나 맥빠지는 공간이었을까.
그런 한편, 다른 사람들에게 파이어스톤도 불편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보통 소설책이나 에세이 읽고 나는 나와 좀 맞지 않거나 내가 싫어하는 어떤 성향을 가진 등장인물을 보면 '으 개인적으로 알고 싶진 않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거나 글로 쓰곤 하는데, 아마 파이어스톤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이미 세상의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직 세상이 즐거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이미 여성들의 웃음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알고 있던 파이어스톤이었다. 그런 그녀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웃어주는 여자는 아니었을 터. 그런 여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환영 받는 사람이었을 것 같지가 않은 거다.
아마도 내 스물다섯에 스물다섯의 파이어스톤을 만났다면 파이어스톤은 나를 한심하게 봤을 것 같고 나는 파이어스톤을 불만쟁이로 봤을 것 같다. 하-
나는 파이어스톤이 너무 똑똑해서, 그래서 세상을 살기가 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스물다섯에 성의 변증법을 쓸 정도로 똑똑했지만, 그러나 너무 똑똑해서 즐거웠을 것 같지가 않아. 그녀의 똑똑함이 세상의 부조리를 간파하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
『성의 변증법』을 썼을 때 고작 스물다섯 살에 불과했던 파이어스톤은 이 한 권으로 단숨에 1960년대와 70년대에 정점을 이루었던 제2물결 페미니즘의 선구적 이론가로 부상했다. 그러나 베티 프리단이나 글로리아 스타이넘처럼 법적 평등을 최우선시했던 다른 여성운동가들과 달리 파이어스톤은 "생물학적 가족의 압제the tyranny of the biologicalfamily"로부터의 자유를 설파하며 인공생식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공동체 가구에서 키우는 용감한 신세계를 그렸다.
아마존닷컴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보부아르, 엥겔스를 통합한 이 책은 여성을 계급으로 선언하면서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유일한 존재로 강제되는 한 열등한 존재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에 생식수단을 장악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페미니스트 혁명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쟁을 펼친다"고 전한다. 위키피디아는 "그녀는 인공두뇌를 사용하여 실험실에서 인공생식을 담당할 것을 주장하였고 피임과 낙태, 국가지원 양육의확산 등으로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해방시킬 것을 촉구했다. 파이어스톤은 임신을 ‘야만적barbaric‘이라고 묘사하였으며………… 성별 선택과 인공수정 등의 출산 기술들을 예언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파이어스톤은 "경제적 계급의 타파를 위해 하층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혁명을 벌여 일시적 독재를 강제하듯이 성적 계급의 타파를 위해서는 하층계급(여성)이 생식수단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성性이 인류의 생식을 전담해 양성 모두에 이익을 주는 것은 최소한 선택조건으로) 인공생식으로 대체될 것이다…… 아이의 엄마에 대한 의존성(또는 거꾸로의 경우)은 일반적으로 소규모의 타인들에게로 분산될 것이며… 노동분업은 (인공두뇌를 통해) 노동 자체가 아예 철폐될 것이기 때문에 종식될 것이다. 생물학적 가족의 압제는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첨예한 화두가 되고 있는 출산과 과학의 문제를 예고하며 페미니즘의 대표적 저서로 자리 잡은 이 책은 당시 페미니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페미니스트들과 대학의 여성학 강좌 필독서가 되었다. 그러나 책이 베스트셀러로 부상하자 그녀는 유명인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거부하며 대중의 눈에서 사라졌고 이후 정신병원을 들락거리게 되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정신병원 입원 경험은 그녀에게 1998년 단편집 『진공의 공간Airless spaces」을 발표하게 만들었고 그 책의 뒷장에는 그녀의 개인적인 투쟁을 암시하는 글이 실려 있다. "직업적인 페미니스트 저술가의 커리어를 거부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 출간 이래 ‘진공의 공간‘에 갇힌 자신을 발견했다."
2012년 8월 뉴욕의 아파트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 그녀는 오랫동안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으며 사망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책의 작가소개 中
이 책은 재독인데 매 페이지가 새롭다. 오, 놀라운데? 하며 밑줄 그으려고 하면 이미 밑줄이 그어져 있더라. 이미 밑줄 그은 문장에 겹쳐 밑줄 그을 때도 있고 밑줄 긋지 않은 문장에 긋게 될 때도 있다. 처음 부분은 《여성, 인종, 계급》의 내용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는 것 같아서, 역시 책은 두루 많이 읽어두는 게 도움이 되는구나 싶었다. 이 책이 나도 모르는 사이 저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되는 그런 때가 있다.
야근으로 인해 바쁜 날들 속에서도 출근할 때면 열심히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