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출근길에 들고 온 책은 '문지혁'의 《중급 한국어》이다.
어제 읽던 책을 다 읽고 이제 뭘 읽을까 한참을 망설이다 한 권 골라 읽기 시작했는데 영 내 타입이 아니었다. 이건 안읽고 팔아버려야겠어, 라고 생각했다. 섹스 꼰대인 나에게는 읽을 수 없는 책인 것 같았다. 그렇게 중도포기한 책을 덮고 자고 일어난 오늘 아침, 한나 아렌트의 책을 들었다 놓고 이번달 같이읽기 책 도서인 《성의 변증법》도 들었다 놓았다. 나는 왜 매번 내가 책 선정해서 같이 읽기를 진행하면서, 왜 매달 선정 도서 읽기 싫은 걸까. 자꾸만 미루고 미루게 된다. 성의 변증법 빨리 시작해야 할텐데 … 각설하고,
최종 선택은 중급 한국어.
《초급 한국어》에서는 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지혁씨가 《중급 한국어》에서는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서 시간 강사를 하며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고. 시간 강사의 월급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어쨌든 세시간 운전해가며 지방에 가 여섯시간 수업을 하는 일주일 중에 하루를 보내는 지혁씨의 학교-업무- 이야기와 자라고 있는 아이의 이야기가 보여진다. 그리고 나는 이런 문장을 보게 된다.
2주 차 수업에서 나는 앞으로 다시 말할 기회가 많지 않을 글쓰기의 기본 원칙들을 강조한다. 그중 하나는 문장부호에 관한 것인데, 이를테면 느낌표(!)나 물음표(?), 말줄임표(……), 심지어는 쉼표(,)조차 너무 많이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맥을 통해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부호를 통해 손쉽게 '말해 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복하거나('!!!!!') 섞어 쓰는 것('?!?!')은 당연히 더욱 좋지 않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글의 수준은 처참해질 수밖에 없다. -p.49
네?
지혁씨, 지금 저 저격하시는 거예요?
완전 난데?
내 글을 그동안 봐왔던 사람들이라면 알겟지만 내가 얼마나 반복을 많이 하던가. 문장 부호뿐만 아니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의 반복 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의 반복도 미친듯 쓰고 있는데, 아아, 이렇게 반복하는 내 글의 수준은 처참한 것이었어!! 아아, 반성합니다. 그러고보니 지혁씨의 말이 틀린 거 하나 없네요. 문장부호와 자음 혹은 모음을 반복하는 내 행위는 문맥을 통한 의미 보여주기가 아니라 손쉽게 말해주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반복함으로써 읽는 사람들은 내 감정을 손쉽게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내 글이 쉽게 읽히는 것이었고. 아, 여러분은 처참한 수준의 글을 읽고 계셨습니다. 이 문장 오늘 아침에 지하철에서 읽고 아, 내 얘기다, 내 얘기야, 지혁씨가 나를 저격했다!! 아아 얼마나 찔렸는지 당신은 모르실거야 …
나도 문맥을 통해 뜻을 보여주는 고급진 글을 쓰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글쓴 시간이 몇 년인데 처참한 수준에 머무를 순 없지. 고급진 글, 고급진 글을 생성하자!! 어휴 … 피곤하다.
어쩌면 우아함이 나와 거리가 멀듯이 고급짐도 나랑 거리가 먼 거 아닐까?
지혁씨가 아이들에게 수업하는 과정중에 여러 책들이 언급되는데, 그중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애러비>도 있다. ㅋ ㅑ ~ 지혁씨 수업 나도 좀 듣고 싶네요. 내가 애러비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여러분, 애러비 읽어 봤어요? 짝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애러비 꼭 읽어봐요. 애러비, 기가 막혀요!!
매일 아침 나는 길 쪽 응접실 바닥에 누워 그녀가 사는 집 대문을 지켜보았다. 블라인드가 문턱에서 2센티미터도 안되게 낮게 드리워져 있었으므로 내 모습을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녀가 계단으로 나오면 가슴이 뛰었다. 나는 현관으로 달려가 얼른 책가지를 낚아채고 뒤를 쫓아갔다. 갈색옷을 입은 그녀 모습을 내내 눈에서 놓지 않았고, 서로 길이 달라지는 지점이 가까워지면 걸음을 재촉하여 그녀를 앞질렀다. 이런 일이 아침마다 계속 되풀이되었다. 몇마디 의례적인 말 말고는 제대로 말을 걸어본 적도 없지만, 그녀의 이름은 나의 어리석은 피를 온통 끓어오르게 만드는 소환장 같은 것이었다.-제임스 조이스, 애러비, p.113
그리고, 천사.
에피파니(epiphany)라는 말은 원래 종교용어로 쓰이던 말입니다. 우리 말로는 현현 또는 신현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신학에서 사용하던 개념이죠. '무언가 나타나는 시간,' 즉 신을 만나는 순간이랄까요. 한번 상상해보세요. 길을 가다가 하나님을 만난다면? 마트에서 천사와 마주친다면? 어떻겠어요. 당장 식당에서 지도교수님만 만나도 깜짝 놀랄 텐데, 당연히 굉장히 당황스럽고 어떻게 보면 거룩하고, 조금은 두렵기까지한 그런 시간이겠죠. -p.72
마트에서 천사와 마주친다면, 이라는 문장에서 나는 갑자기 '나윤선'의 <천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천사는 나를 오래전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러니까, 그를 처음 만났던 그 때로.
그 때 나는 내가 '나보다 어린 여자'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했었다. 가방 속에는 만나면 선물해야지, 하고 나윤선의 시디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서 내가 만난 건, '나보다 어린 남자'였고 크게 당황한 나는, 가방 속에 준비한 선물은 주지 않아야지, 생각했다. 이런식으로 남자를 만나러 내가 나온 게 아니었는데, 괜히 선물이랍시고 내밀었다가 상대가 오해를 할까봐 저어되었다. 지금 이 시디를 눈 앞의 이 남자에게 주지 않아도 내가 선물할 친구들은 많다, 가져가자. 실제로 나는 그 시디가 너무 좋아서 여러명의 친구에게 선물했던 터다. 그런데,
1차를 지나 2차에 자리잡고 앉았을 때, 그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시디를 꺼냈다. 나에게 선물해주고 싶다며 시디를 준비해온 것이었다. 어라?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선물을 받고만 있지? 나는 그대로 집으로 가지고 가려던 시디를 꺼내면서 말했다. 나도 준비해왔어요, 하고. 그 때 내가 내민 시디가 나윤선의 <천사>가 실린 시디였던 거다.
천사 속에서 화자는 빈둥대다 출근을 늦게 하게된 상황. 그 때 눈앞에 천사를 보고는 시간을 좀 늦춰달라 부탁한다.
그날은 글쎄 태연하게도
출근도 않고 빈둥빈둥
콧노래 마저 흥얼대면서
덩달아 나도 뚜뚜뚜
시간은 금세 지나가잖아
눈 깜빡 할 새 살금살금
오히려 내가 초조해져
이를 어쩌나 뚜뚜뚜
반짝 머리속에 환한 빛이 반짝
아주 순식간에 눈부시게 빛이
내 눈 앞에 선 당신은 누구?
어디선가 본 낯 익은
하늘 어딘가 살고계시다던 분
말씀 많이도 들었습니다만은
하얀 날개가 무겁지 않으신지
정말 눈이 부셔요 천사
한가지 부탁 해도 될까요?
시간을 잠시 멈춰주시면
제가 오늘 좀 늦었거든요
초면에 죄송해요 뚜뚜뚜
그 날 그와 헤어지는 일은 몹시 힘들었다. 그는 내게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고, 나는 그런 그에게 거절을 말하느라 힘들었다. 내 마음은 클레오가 되어 노래부르고 있었다. 너와 함께 지내고 싶은 밤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ㅋㅋㅋ 이거 아님.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한 나이는 지나 있었다. 그 때 내 나이, **였단 말이다. 성인. 그러나 내가 여기서 그가 원하는대로, 그리고 내가 원하는대로 그와 함께 밤을 보낸다면 나는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오늘 그와 함께 지낸다면, 그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한 번 잔 여자가 될 것 같은 거다. 나는 그렇게 되기가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싫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집으로 갔지만, 그렇다고 그와 손 한 번 잡지 않고 갔겠는가!!
다음날 아침 눈을 번쩍 뜨고나서 아, 망했다. 어제 내가 대체 그와 무슨 말을 했던가, 무슨 행동을 했던가. 나의 이불킥 시간이 시작되었다. 이불킥 이불킥. 미쳤어 미쳤어 정말 미쳤어. 아니 왜그랬어. 이러면서 나의 19금 시간들을 후회했다. 아, 왜 어쩌자고 그런 일을 ㅠㅠ 아마 다시는 나에게 연락하지 않겟지, 다시는 보자고 안하겠지, 아아, 차마 민망해서 연락도 못하겠다. 이러고 시간은 잘도 가고 있었는데, 그날 저녁,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천사를 듣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출근길에서도 그는 지하철 안에서 나윤선을 듣고 있노라 했다. 나는 그와 그 일(어떤 일?)로 연락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게 기뻤고 천사가 정말 천사한 것 같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당연하게도 우리는 더이상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었고 그는 심지어 아예 먼 나라로 가버렸다. 또 오랜 시간이 흘러, 그가 먼 나라에 정착해서 연락이 닿았을 때, 그는 정착하러 오는 먼 길인만큼 대부분의 자기 소유 짐들을 버리고 왔노라 했다. 책도 시디도 다 버리고 왔노라고.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아, 내가 준 나윤선 시디도 버렸겠구나' 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말했다.
"당신이 준 나윤선 시디만 가져왔어요."
그 때 내 마음이 어땠을지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제는, 이제는 버렸겠지. 이제는.
이게 다 지혁씨 때문이다. 지혁씨가 마트에서 천사를 만난다고 해버려서, 월요일 아침에 내가 천사를 떠올렸고, 천사, 를 떠올리면 어김없이 자동연상되는 그를 떠올리고 말았다. 오늘 아침엔 어쩐 일인지 그가 보고 싶어서 엉엉 울고 싶어졌다. 보고싶어 ㅠㅠ 그렇지만, 다 큰 여자는 울지 않는다고 누가 그랬더라. 퍼기가 그랬다.
책을 샀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몇 년전에 구판으로 읽었는데, 어쩐 일인지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다시 샀다. 흠.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들의 후손이다》는 실비아 페데리치의 책. 8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이다.
《지리의 힘》은, 학창시절 한국지리 세계지리 진짜 더럽게 못했기 때문에 샀다.
월요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