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가 예쁘고 제목도 예뻐서 나는 이것이 고딕소설일거라 생각도 못했고 유령이나 공포에 대해 얘기했을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이디스 워튼이라면 나는 그녀의 장편 소설도 좋아했지만 단편에 있어서도 너무너무 좋아했다. 로마의 열병! 크-
이 책의 첫번째 단편 <편지>는 바로 그 로마의 열병과 징구를 생각나게 했다. 단편 정말 잘 쓰는 작가다, 글 정말 잘 쓰는 작가야, 감탄하며 읽었다.
나는 이 책에 실린 단편중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가난했던 '리지'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의 아버지와 상담을 하던 도중 자신을 위로해주며 손을 잡아주는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집에는 자녀 교육에 신경쓰지 않고 바깥 활동도 잘 하지 않는 아이의 엄마가 물론 존재했지만, 그녀는 실상 보이지 않는 존재이며 보이지 않으면서 그러나 잘못의 원인이요 원망의 대상이 된다. 리지는 유부남일지언정 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신에게 찾아온 게 너무 소중하고 행복하다. 남들 눈에 들키면 안되지만 그래도 이 사랑이라는 감정, 남자와 내가 나누는 이 이성애 감정이 너무 좋고 뿌듯해, 차마 사랑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가난한 싱글여성들을 보며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남자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고, 나는 남자들로부터 그리워하는 편지도 받지, 너는 이런 감정 모르지? 훗. 하면서. 만약 리지가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또 스스로 살아갈 능력도 지금보다 나은 형편이었다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아내를 집 안에 둔 남자'를 사랑할 수 있었을지, 사랑의 대상으로 볼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본다. 그녀가 지금보다 나은 형편, 나은 상황이었다면 그녀는 다른 사회활동을 하고 다른 남자들을 더 많이 만났을 것이니까. 그녀가 만나는 남자가 이 아이의 아버지인 유부남 뿐이었으니 아예 가능성과 시야 자체가 좁았던게 아닌가. 선택이라는 것이 내가 가진 한계 안에서 가능하다고 보았을 때 리지가 선택할 가능성 자체가 많지 않았던거다. 이건 그 순간 그 유부남과-고작 손을 잡고 위로해줄 뿐이었던 것을!- 사랑에 빠진 리지의 형편이었으며,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여성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여자로 태어나서 받아야 했던 교육, 주어진 환경, 가질 수 있는 일자리, 그리고 결혼해야 비로소 좀 더 유복해지는 삶. 리지가 사랑한 남자 디어링 의 아내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그렇게 이어질 줄 몰랐을 것이다. 디어링의 아내를 비롯하여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여자들에게서는 '샬롯 퍼킨스 길먼'의 삶이 겹친다. 지적인 활동을 하지 마시고 집에서만 안정을 취하세요. 집에서만 안정을 취하면 그 여성들은 누구를 만나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이야기들을 하거나 들을 수 있을까? 그렇게 주어지는 한정적 공간안에서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디어링의 아내가 죽고 그는 아내의 남은 재산을 정리한다면서 미국으로 향한다. 그리움에 리지는 디어링에게 편지를 쓰고 또 써보지만 한두번 왔던 답장은 더이상 오질 않는다. 답장이 오지 않는 시간동안 리지는 그를 원망하기도 하고 이해해보려고도 하고 그렇게 그녀 자신의 삶을 사는데, 우연히도 그녀의 먼 친척이 그녀에게 유산을 남겨주어 이제는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거나 결혼을 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에 안드는 남자와 과연 결혼할 수 있을 것인가 갈등하던 그녀 앞에 어쨌든 '잘생기기는 한' 디어링이 다시 등장하고, 그는 '아아 너 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너를 보니 안되겠네 너를 너무 사랑하네 ' 이렇게 되어가지고, 또 우리의 리지는 여기에 홀랑 넘어가서 그랑 결혼을 하게 된다. 재산도 하나 없는 홀아비를 뜨거운 사랑으로 감싸안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살면서 그러나 리지는 남편이 얼마나 '한심한' 남자인지를 차츰 깨닫게 된다. 그의 천성은 너무나 게을렀으며 그의 게으름은 그에게 불편함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를 제외한 주변인들에게 불편함고 괴로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게으름을 개선할 생각이나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남편의 게으름을 보면서 '아 게으른 사람이구나' 하고도 계속 그 사람의 뒷바라지를 해주면서 사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건지 왜 가능한건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겠어. 미국에서 진 빚을 갚지 않고 결국 그걸 아내가 해결하게 하는것도-그러면서도 아내가 그 일을 대신 해준다는 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다-, 미국에서 살았던 당시의 모든 짐도 여태 찾아오지도 않았다가 이제야 아내가 대신 풀어보는 것도,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천성이 게으른 디어링은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가 다시 또 부유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모든 문제로부터 멀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이 잇었기에 가능했다. 이 남자는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만 해주면 그 다음 일들은 그냥 술술 풀려버리는 거다.
리지 자신은 문제의 그날, 아침 뉴스를 살펴보는 것보다 더 고된 일을 하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일하는 습관이 깊이 몸에 밴 그녀는 매사 되는대로 내버려두는 남편의 성격을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그의 첫 번째 결혼이 늘 뒤죽박죽이었던 탓이라 여겼지만, 이제는 그가 자신의 자애로운 규을 아래 들어와 있어도 결코 그 이상 적극적으로 개선할 마음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법의 지팡이를 휘두르듯 그녀가 주위 물건들을 깔끔히 정리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마법 같은 가사를 즐기며 미소만 짓는 무책임함은 줄이지 않았다. 그의 아내와 아내의 친구는 이제 그 무책임의 가장 정떨어지는 결과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p.54
내가 이 남자랑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한 여성의 남은 생애를 결정짓는다. 이렇게나 나를 사랑하는 남자 나도 사랑해, 나에게 사랑을 알게 해준 남자, 로 그와 결혼하고 그 후에 그녀는 그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달고 그를 돌봐주고 뒷처리를 다 해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라면서 다시 한번 사랑으로 감싸려고 하고 그런 사람이니까 받아들여야지, 하고는 체념하면서 그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고단한 건 그걸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하는 여성이고, 사랑한다고 말했던 남자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만 해주는 남자는 손 하나 까딱 않고 여유로운 삶을 산다. 그에게 세상은 환할 것이고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의 고뇌와 고난 고생이 보이질 않는다.
그는 정말이지 '사랑만' 하는 남자이다. 그 사랑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애를 쓰고 액션을 취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개념이 없는 사람이고 개념이 없기에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사랑만 하면 된다. 사랑해~ 그 말 하나면 태어나서 죽는날까지 고생을 모르고 살게 되는 거다. 인생 진짜 개꿀로 살게 되는거다. 디어링은 사랑한다는 고백을 함으로써 그의 인생을 통째로 거저 얻은 셈이다. 심지어 그가 사랑한 여자가 돈까지 있는 여자엿으니 이 얼마나 개꿀빠는 팔자인가. 야 그런 미친놈이 세상 어딨냐 그런 놈하고 살지마, 라고 만약 내가 리지에게 말한다면 리지는 남편과 이혼하는 대신 나와의 친구 관계를 끊겠지. 하하하하하ㅏ하하하하하. 필리스 체슬러의 일화가 생각나는 단편소설이기도 했다.
리지는 그가 자신에게 그런 일을 맡긴 것이 아내의 재산에 딴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람 좋고 게으른 천성 탓임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 상하지 않고 그 의무를 이행했다. 디어링 씨는 돈에 현혹되지 않았다. 돈이 생겼다고 사치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너무 게을러서 빚을 갚는 것을 잊어버렸듯이 너무 게을러서 수표를 찾지도 않았다. -p.55
사실 나는 편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이 단편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는 편지, 중요한 상징이 되는 편지. 그러나 그 편지에 대해 언급하는 순간 엄청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꾹 참는다. 다만, 그는 '사랑한다'는 '말만' 하는 남자였고, 그런 사람의 사랑은 절대 나에게 와서 닿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사랑한다는 말만 하는 남자를 사랑하지 말지어다. 난 너를 사랑해, 말은 그게 누구든 할 수 있고 거짓으로 할 수도 있다. 물론 말로하는 사랑이 모두 거짓인 것도 아니고 과장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사는 삶과 내가 살아가는 시간에 통 관심이 없다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은 사랑인가? 사랑한다는 말로 모든걸 거저 얻으려는 개수작을 부리는 남자들을, 여자들은 기피해야 한다. 말로만 사랑하는 남자보다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게 훨씬 낫다. 음.. 출출해지네. 짬뽕 끓여먹어야겠다. 벌써 점심시간이야.
리지는 줄리엣의 경우에서는 이 모든 것을 알아차렸지만, 자신의 경우는 당연히 다를 줄 알았다. 모든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경험에서 자신만큼은 예외일 거라 나몰래 기대하듯 디어링 씨에게 자신은 예외일 줄 알았다. 물론 그의 습관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알았지만, 그의 감수성을 더 깊게 해주고, 그에게 '이상'(천사 같은 아내)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했다. -p.63
아주 재미있는 단편이었고 사실 좀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이 책을 통해 보여지는 억압, 감금, 고립, 유령, 보이지 않는 존재, 오해, 의심, 불신, 게으름, 소문, 무관심 들은 우리가 아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상대의 사랑에 나를 통째로 맡기는 것, 내 삶을 사랑이라 믿는 것에 저당잡히는 것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했던 두려움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랑(이라고 믿는 것)에 나를 던졌다가 결국 내 자신을 잃고 내 자신을 잊는 것이 아닐까. 너를 잃을까 두려워 혹은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나를 잃게 내버려두는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내 자신이다. 자유로운 내 자신, 더 넓은 것을 보고 경험할 내 자신.
짬뽕 끓이면서 썼다. 이제 가스렌지의 불을 끄고 짬뽕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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