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꿈에 아주 오랜만에 그가 나왔다.
우리는 예전과 같은 사이였고 그는 우리집에 놀러왔다가 이제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돌아가기 전, 그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뭔가 꺼내 내 앞에 두었다. 이거, 너 주려고 가져왔어. 그것은,
감자였다. 감자 한 꾸러미.
꾸러미 오브 potatos
이게 뭐냐 물으니 그는 자기가 사는 나라에서 어머님이 농사 지으신거라며 날 주려고 가져왔다고 했다. 비행기를 타고 온 감자 되시겠다. 그런데 감자.. 비행기 타고 넘어와도 되나? 그거 불법 아닌가? 농산물 넘어오면 안되는거 아녀요? 여하튼, 그렇게 나한테 감자를 줬다. 나한테 감자 꾸러미를 주고... 그는 비행기를 타러 가는데, 잠에서 깼다.
물론 이렇게 담백하게 꿈속에서 감자만 주고 받은건 아니지만 이곳에는 초딩도 오고 중딩도 오고 그러니까, 우리 화요일 아침, 19금은 건너뛰자. 여하튼,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 이 꿈을 떠올리면서, 도대체 왜이렇게 오랜만에 그가 꿈에 나온것인가, 그리고 그는 왜 나에게 감자 한 꾸러미를 주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와 감자.. 그는, 왜, 내게, 감자를, 주었는가. 그것도 내가 집 앞 시장에 나가면 언제든 살 수 있는 감자를 열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와서 주었는가. 왜, 왜땜시.. 무엇 때문에..
이 꿈은 무얼 말하고자 하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대체로 나는 내가 꾼 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늘 생각해보곤 하는데, 아 이건 이런 뜻이겠구나, 하고 내 나름의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고 그거 맞다고 맨날 좋았어, 나의 꿈의 해석! 이러지만, 가끔은 이건 걍 별 뜻없고,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이 뒤섞였구나, 하게 된다. 그리고 어제의 꿈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친구의 블로그에서 주말에 카레를 해먹었다는 글을 읽었다. 그걸 보고 오, 그러고보니 카레 해먹은지 오래되었네, 나도 카레 해먹어야지. 근데 집에 감자가 있나? 나는 카레에 다른건 안넣어도 감자는 꼭 넣는 사람이라서 집에 감자가 있는지 떠올려보는데 없는 것 같았다. 엄마, 집에 감자 있었나? 하고 엄마한테 톡을 보냈더니 엄마는 없다고 하셨다. 오케. 그러면 수요일에 시장 가서 감자를 사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마 꿈에 그는 내게 감자를 주었던 것 같다. 그러니 꿈에 그가 감자를 준 것에 대해서는 파악 끝. 그렇다면, 이제 왜 '그'가 나왔는가에 대한 답을 생각해볼 차례. 그것은 내가 읽은 책으로부터 온것이렸다?
어제 퇴근길에 읽은 <헤이팅 게임>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원서를 친구들과 함께 읽기로 했는데, 나는 원서를 시작하기에 앞서 어제 집에 가는 길, 전자책으로 번역본을 시작한거다. 읽다보니 주인공 '루시'의 키는 153 이랬나 너무 작고 남자주인공은 190 이상이었다. 맙소사. 이건 차이가 나도 너무 나잖아. 이렇게 너무 큰 차이는, 좀 별로지 않나? 상대에 비해 내가 너무 작게 느껴지는 건 좀 거시기하다. 여하튼 40센치 차이나는 이야기를 내가 읽어서 그랬을까? 키에서 40센치..
나는 키가 작은 편이고 그는 키가 컸다. 내가 사귀었던 남자중에서 제일 큰 건 아니었지만 제일 큰 거에서 두번째쯤 되시겠다. 그래서 그가 나온것 같다.
어쩌면 어제 자기 전에 읽었던 <나일강의 죽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청나게 돈이 많고 또 아름답기도 한 '리넷'은 태양이다. 사이먼을 뜨겁게 사랑하는 가난한 여자 '재클린'은 친한 친구인 부자 리넷을 찾아가 '내 애인인 가난한 사이먼을 너네 집 정원사로 고용해주면 안되겠니?' 부탁하고 리넷은 그러겠다고 한다. 리넷에게는 부자 남자 약혼자가 있었는데 딱히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 결혼을 해도 될까.. 갈등하던 터, 친구인 재클린의 남자친구 사이먼을 보자마자 반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사이먼은 어떻게 되느냐? 리넷과 결혼한다.
오
마이
갓
친한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겨버린 재클린은 절망한다. 리넷은 아름답기도 하고 돈도 엄청 갖고 있고 그래서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다 가진 여자지만, 자기는 가진게 아무것도 없고 있는거라곤 지독하게 사랑하는,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먼 뿐이었는데, 그런데 사이먼조차 리넷에게 가버리고... 그런 절망에 빠진 재클린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을 둘다 죽이거나 그들중 한 명을 죽이거나 하는 마음을 품고 그들을 스토킹 하는 것이었다. 여기엔 설마 없겠지, 하고 돌아보면 리넷과 사이먼이 가는 곳 어디나 재클린이 있고 그래서 리넷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우리의 탐정 '푸아로'는 재클린에게 말한다. 네 안에 악마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그 때 재클린은 푸아로에게 달과 태양 얘기를 한다. 자신은 사이먼에게 달이었는데 리넷은 태양이다, 그 태양이 뜨는 순간 달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크-
내가 이부분을 읽으면서 아아, 나는 달이었던가, 나는 그에게 달이었던가, 그가 보는 하늘에 태양이 떠버려서 달은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된건가... 흑흑 뭐 이랬던거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다보면, 태양이 떠서 달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태양이 지고 달이 보이는 순간이 온다는 것. 태양이 진 자리에는 달이 있었지. 달은 항상 거기 있었다.
그렇다면!
태양이든 달이든, 그러니까 내가 태양이 되든 달이 되든, 영원할 순 없는 건 아닌가. 태양은 지는 순간이 오고 달 역시 감춰지는 순간이 온다면, 내가 늘상 하늘에 있으면서도 그대로 그에게 계속 꽂히려면,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별조차도 안되는데. 그러다가 라디오헤드의 노래가 파바박! 하고 떠올랐다. 그래, 그래서 라디오헤드는 이 자명한 진실 앞에 상대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너는 태양이고, 달이고, 별이야' 라고 노래한 것인가? 라디오헤드의 노래 <you>의 처음 가사가 그렇다.
You are the sun and moon and stars are you ~
그러니까 나는 태양이고, 달이고, 별이어야만 하는것인가....
피곤하다..
피곤하군..
아무튼 그렇다보니 꿈에 그가 나와서 나에게 감자를 준 것인가보다. 당신과 감자..
오늘 아침 밥을 먹으면서, 양치를 하면서, 그리고 집을 나서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면서, 오랜만에 꿈에서 그를 보고, 그 느낌(피 땀 눈물~).. 과 감자..를 생각하다보니 공일오비의 노래 <세월의 흔적 다 버리고>가 생각났다.
아, 오늘 세월의 흔적 다 버리고 감성이야.. 촉촉하다. 왜이래, 빠져나와. 그러나 나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이 노래를 반복재생한다.
참 오래됐지 우리 서로 헤어진 지(진짜 오래됐다. 잘 지내나요?는 이유경의 책제목)
나도 네가 없는 삶에 많이 익숙해졌어(응 익숙해지긴 했지)
네가 그리워 한때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 끝도 없이 울기도 했지(나는 주로 혼자 울곤 했어. 친구한테 전화해서 우는건 좀 민폐같잖아.)
이젠 모든 게 지난 일이야 힘겹게 버텨왔던 모든 일들이
난 괜찮은 척 웃을게 넌 하나도 신경 쓰지마(괜찮은 날도 정말 있어. 요즘은 대부분 괜찮아. 그렇지만 신경쓰고 살아라..사실 나 안괜찮은 것 같기도해..)
대신 너에게 부탁할게 우리 아름답던 기억들(우린 딱히 아름답다고 말할 순 없는 기억들이지. 강렬한게 더 적합한 표현같아.)
하나도 잊지 말고 이 세상 동안만 간직하고 있어 줘
모든 시간 끝나면 세월의 흔적 다 버리고
그때 그 모습으로 다음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내가 페르귄트 싫어하는거 알지. 육체라는 껍데기만 간신히 남아서 솔베이지에게 돌아오는 페르귄트 진짜 밥맛없잖아. 다음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나서 뭘 어째. 만날거면 이번 세상에서 만나는게 좋고, 이번 세상에서 만날거라면 하루라도 젊었을 때 만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늙어 만나서 뭘 어쩌자는겨..)
그래 어쩌면 이게 잘 된 건지 몰라(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서로 아름다운 모습만 기억할 테니(가끔은 우리가 좋을 때 헤어져서 더 슬픈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그리고 어쩌면 이게 잘된건지도 모른다고도 생각을 하지)
나이가 들어 주름살이 하나둘씩 늘어갈 내 모습을 넌 볼 수 없겠지(그거 알아? 나는 아직 주름살이 없어.. 팽팽해. 난 아마 앞으로도 딱히 주름은 없을 것 같아. 지성피부라 그런가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삶이 너무 힘들어 지치고 세상에 찌들어가는 그런 모습
감추고 싶은 모든 걸 서로 보이지 않아도 돼(나는 내가 요가하는 모습을 당신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감추고 싶은 나의 모습이야..우르드바다누라아사나는 진짜 드럽게 안돼..)
제발 너에게 부탁할게 우리 사랑하던 기억들
하나도 잊지 말고 이 세상 동안만 간직하고 있어 줘
모든 시간 끝나면 세월의 흔적 다 버리고
그때 그 모습으로 다음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그냥 이세상에서 만나자. 다음 세상이 어디 있다고 자꾸 다음세상 타령이야... 빨리 만나서 영생하자.)
아 오늘 너무 촉촉한 감성.. 세월의흔적다버리고 감성이 나를 적신다... 둠칫두둠칫.
있잖아, 왜 꿈에서 내게 감자를 줬는지.. 내게 말해줄 순 없겠니?
Talk to me, baby~
대답 기다릴게.
I'm wating for your answer.
그럼 안녕.
See you soon.
Bye.
오늘 내 마음에 세월의흔적다버리고감성과 영어가 내린다. 촉촉하게. wet wet w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