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출근길부터 필리스 체슬러의 이 책을 읽고 있다. 1940년에 태어난 여성이 나이 일흔이 넘어서 이렇게 자신의 일대기를 적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시작부터 좋아서, 우리가 이렇게 늙어가야 할 거라고, 적어도 나는 이렇게 늙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읽다 보면 젊은 시절 필리스 체슬러의 일기가 인용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바로 부끄러워졌다. 내 종이 일기장(다이어리)에는 필리스 체슬러의 젊은 시절 치열한 의식 같은 건 적혀있지 않으니까. 죄다 어떤 놈이 좋다 어떤 놈이 그립다 어떤 놈이 너무 싫다..이런 것 뿐인데, 언젠가 날 잡아 내 일기 다 태워버려야겠다. 부끄러워..
얼마전에 다른 분의 댓글에도 썼지만, 나 역시도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여성이지만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중에도 당연히 여성이 있다. 나를 지독히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한 건 남성이지만, 여성때문에 오래 괴로웠던 적도 있다. 여성주의 책을 읽어오면서 나 역시도 여성에게 더 많은 걸 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너는 여자니까 이럴 땐 여성의 편이 되어야지, 여기선 이쪽 편을 들어야지, 라고 생각했던거다. 남성이 편들지 않는다면 남자는 어쩔 수 없다니까, 하고 기대도 하지 않고 바로 돌아설 수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당연한 상황에 여성이 등을 돌리면 너무 심하게 내가 상처를 받는거다. 그러면서 나를 자꾸 다독여야 했다.
또한 내가 편들어준 여성이 내 뒤통수를 치는 일도 생긴다. 그 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 그 미움은 오래 갔다. 나야말로, 여성들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거라고, 여성은 다르다고 그렇게 여성에게 더 많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나 스스로 늘 되뇌이는게 도덕코르셋을 벗자는 것이었으면서 다른 여성들은 더 선량하고 상냥하게 무조건 여성의 편이길 기대했던 거다. 여성도 인간인데. 나에게도 이렇게 성차별적인 시선이 있었다. 여성도 질투할 수 있고 짜증낼 수 있고 욕할 수 있고 나쁜 마음을 품을 수 있다.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는것인데. 인간이니까, 다른 인간들이 하는 그 모든것들을 그대로 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그래서 '우리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해도 우선순위는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계속 주입시키고 있다. 그래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안에 연대하지 않는 사람들, 내 선택과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 좀 덜 힘들어지니까. 내 우선순위가 다른 사람의 우선순위일 순 없다, 고 스스로에게 매일 속삭인다. 물론 그렇다해도 서운하거나 속상한 일이 덜어지는 건 아니지만 훈련을 하고 있달까.
필리스 체슬러는 평생 자신의 삶을 걸쳐 바로 그런 걸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본인 역시 다치고 힘들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편들거나 혹은 원망하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비록 같은 목적으로 모였지만 우리도 인간이었다, 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 하면 될까.
그런 마음으로 반성과 깨달음을 가져가며 첫번째 꼭지를 끝냈는데, 두번째 꼭지에서 나는 갑자기 이런 내용을 맞닥뜨린다.
1964년에는 저널리스트 리사 하워드를 인터뷰했고, 10대들이 보는 잡지 《앤저뉴ingenue》에 내가 쓴 인터뷰 기사가 나갔다. 한때 배우로도 활동했던 하워드는 ABC에서 미국 최초의 뉴스 프로그램 여성 앵커가 됐다. 하워드는 흐루시초프, 케네디, 애들레이 스티븐슨, 이란의 왕 샤shah,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를 인터뷰했다. 미시시피 옥스퍼드에서 발생한 폭동을 보도하기도 했다.
나는 어떻게 그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느냐고, 소설을 쓰고, 배우가 되고, 여성단체에서 강의를 하고, 인터뷰한 인물들을 연구할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게다가 하워드는 아이가 둘 있는 엄마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갈고닦아야 할 자질을 꼽는다면 단연 자기 절제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목표를 향해 나가고 어떤 경우에도 굴하지 말아야 해요. 프로임을 증명하는 건 준비, 끈기, 인내죠. 남자들보다 뛰어나야 합니다.
열심히 하고 용감해야 해요." 인터뷰 기사가 보도되자 하워드는 내게 다정한 감사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1965년, 하워드는 ABC 방송사에서 해고되고 유산까지 한 뒤 10개월이 지나 자살했다. 불과 서른아홉의 나이였다. 앞서1962년에는 서른여섯의 메릴린 먼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두 사람 모두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성년이 된, 젊고 아름답고 재능 있고 독보적인 캐릭터로 성공한 여성들이었다. 그런데도 페미니즘이 확산되기 이전인 1960년대를 사는 여성에게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 P44~45
1964년 필리스 체슬러가 이십대 중반, 그녀는 야망도 있고 매우 똑똑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이 일 저 일 여러가지 일에 도전해 다 해보고 있는 중인데, 그러다 인터뷰한 뛰어난 여성이 자살을 하게 된거다. 나는 갑자기 여성의 자살이 나올 줄 몰랐고, 자기 절제를 이야기했던 여성이, 어떻게 그 모든 일을 감당하느냐는 질문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여성이, 남자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고 답했던 여성이 자살해버렸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지하철에서 이 부분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왜 뛰어난 여성은 자살해야 하는가. 하워드 스스로가 말했듯이 '남자들보다 뛰어나야'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기에 그녀는 엄청난 노력을 했을 거다. 남들보다 잠도 덜 잤을거고 남들보다 공부도 더 했을거고 치열하게 싸우는 일도 많았을거다. 그랬는데 왜, 왜 자살하는거야. 서른아홉의 하워드가 자살하고 서른여섯의 메릴린 먼로가 자살했다. 갑자기 여성들의 자살을 책에서 마주치자 너무 가슴이 아픈거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세상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좋은 이야기만 듣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칫하면 명성이 땅에 떨어져버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힘겨웠을까. 서른아홉, 서른여섯 모두 이른 나이지만, 아마 그녀들로서는 그만큼 버티기도 애써왔던 게 아닐까.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나는 울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더 진행시키지 못하고 삶을 끝내버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 속 등장인물 생각도 났다.
But he remembered where he was-right outside the main gorcery store here in town-when he found out that she had vinished Vassar and then killed herself. It was Trish Bibber who told him, a girl they had been in school with, and when Denny said, "Why?, " Trish had looked at the ground and then she said, "Denny, you guys were friendly, so I don't know if you knew. But there was sexual abuse in her house."
"What do you mean?" Dinny asked, and he asked because his mind was having trouble understanding this.
"Her father," said Trish. And she stood with him for a few momints while he took this in. She looked at tim kindly and said, "I'm sorry, Denny." He always remembered that too: Tisht's look of kindness as she told him this.
So that was the story of Dorie Paige. -p.144-145
하지만 그녀가 바사를 졸업하고 자기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기억했다-타운의 큰 식료품점 바로 앞이었다.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같은 학교에 다녔던 트리시 비버였다. 데니가 "왜 그랬대?" 하고 물었을 때 트리시는 땅을 내려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데니, 너희 둘이 친하게 지내서 혹 알았는지도 모르겠는데, 집에서 성적 학대가 있었대."
"무슨 뜻이야?" 데니가 물었다. 자신의 머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랬대." 트리시가 말했다. 그리고 데니가 그 말을 이해하는 동안, 잠시 그와 함께 서 있었다. 트리시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참 안됐어, 데니." 그는 그것 역시 늘 기억하고 있었다. 소식을 전할때 트리시가 보여준 다정한 얼굴.
도리 페이지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책 속에서
짧은 시간을 살다갔는데 그것이 그녀의 이야기 전부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다시, 올리브》를 읽었을 때에도 저 부분을 읽다가 '더 긴이야기를 쓰도록 하자'고 페이퍼를 썼었는데,
우리 더 긴 이야기를 쓰도록 하자.
필리스 체슬러 처럼 여든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나의 태어남이 어땠는지 그리고 자라오는 과정이 어땠는지, 무수히 많은 일들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 나의 인생에 후회는 무엇이고 또 기억할만한 일은 무엇이었는지, 기쁨은 무엇이었는지, 성취는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나를 괴롭혔는지, 그걸 어떻게 이겨냈는지, 여기까지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지, 내게 도움을 준 사람은 누구인지, 나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런 삶의 순간순간들과 과정을, 그리하여 지금의 내가 된 모습까지를 일흔이 되어서도, 여든이 되어서도, 그리고 백살이 되어서도 쓸 수 있도록 하자. 그렇게 진행되는 책의 마무리는 '내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도록 하자.
아니, 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가 더 좋겠다.
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도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