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기세척기를 사용하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며 구매를 추천하는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들었었지만 나로 하여금 구매를 망설이게 한 건 식기세척기를 사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나 어디다 두어야 할지 공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나도 살까? 라고 고민할 때마다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가 떠올라 버리는 것이다. 지금은 인용문을 찾을 수 없어서 가져올 수 없지만,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에는 여자들이 이름모를 병을 앓는 이유중에 하나로 단순한 가사노동을 꼽는다. 가사노동 자체는 머리 써서 해야할 일이 아닌 그저 단순한 일인데, 그걸 매일, 평생 반복하고 있으니 안우울하고 안아플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베티 프리단은 멍청한 남자도 가사노동은 할 수 있다고 얘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매일 반복되는 우울을 불러오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는 그런 여성들을 공략해 여러가지 편리한 가사노동 도움 기구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마치 그것을 사면 더 획기적으로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처럼 청소기를, 세탁기를, 식기세척기를 사게 된다는 뉘앙스였는데, 이 세상은 자기들끼리 거대한 판을 만들어놨다. 가사노동은 여자들의 몫이지 → 근데 가사노동 힘들지? 세탁기를 사!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 마치 힘들게 노동하는 여성들을 생각해주는 것처럼.
책이 있으면 그 부분을 찾아볼텐데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식기 세척기 살까? 하는 고민을 할 때마다 여성성의 신화... 이렇게 되어버려서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자본주의에 굴복하지 않겠어!! 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샀다.
식기세척기를 사기 전에 그리고 사고난 바로 다음에도 내가 가질 가장 큰 만족감은 설거지를 누가 내 '대신' 해준다는 거였다. 대충 씻어서 넣어두면 누군가 내 대신 해준다. 나는 식기세척기에 설거지거리를 잔뜩 넣어두고 외출을 해도 되고 책을 읽어도 되고 잠을 자도 된다. 만세. 지난주에는 이모가 왔고 같이 식사를 했는데 이모가 벌떡 일어나서 설거지를 하려 하길래,
"이모, 이모도 그렇고 올케도 그렇고 울엄마도 그렇고 여동생도 그렇고 앞으로 우리 집에 와서 설거지할 생각 1도 하지마. 우리집에서만큼은 설거지에서 자유로워지게 해줄게. 나 식세기 샀어."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동안 이모가 설거지를 할라치면 울엄마는 내가 할게, 하고 아니면 내가 벌떡 일어나서 '놔둬 내가 할게' 막 이렇게 되었었는데, 어쨌든 '내'가 안하면 '누군가'는 설거지를 해야 한다. 이건 피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다. 울아버지는 평소 본인이 밥 차려 드시고 본인이 드신 그릇을 설거지 하시지만 주말에 다같이 모여 식사할 때는 항상 "설거지는 네가 해" 하시는거다. 처음엔 욱해서 언젠 내가 안했어? 마치 아빠가 했던 것처럼 얘기하네?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이도저도 다 싫다. 나는 식기세척기를 샀다.
여동생은 식기세척기를 사고 제일 좋은 건 락앤락 뚜껑을 닦는 거라고 했다. 그거 닦기 싫었는데 식세기가 해줘서 너무 좋다고. 내 경우엔 락앤락 유리그릇을 닦아주는 게 좋고 냄비나 프라이팬을 닦아주는 게 좋다. 유리그릇과 냄비 닦는거 너무 싫고 닦아도 그게 깨끗한건지도 모르겠는데 식세기에 놓고 돌려버리면 샤라라랑~ 하고 나와버리는 거다. 좋아..
식기세척기를 사고 내가 만족하는 부분은 나 '대신'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아, 그러나 사용해보고난 후 내가 가장 만족하는 것은, 놀랍게도, 나'보다' 더 깨끗하다는 거다. 식기세척기가 나보다 설거지를 더 잘하고, 더 깨끗하게 하는것 같아. 흑흑. 그게 너무 좋다. 마치고 난 다음에 따뜻한 그릇이나 수저들을 꺼내노라면 얘네 깨끗해졌다 하는 마음으로 만족감이 장난 아닌거다. 나도 내가 이렇게 깨끗한 걸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아아, 나 세상 깨끗한 사람이었는가보다. 깨끗해진 그릇을 보면 안정감이 장난 아니야. 식세기가 나 '대신' 해줘서 좋은것보다 나'보다' 깨끗하게 해줘서 너무 좋다. 식기세척기 진짜 사랑한다. 나는 이제 남자를 사랑하긴 글러버린 것 같지만(그런데 크리스토퍼... 나를 갈등하게 해....) 식기세척기라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나는 나에게 좋아한다고 표현해주는 친구들 덕에 가슴 가득 만족감이 차오른 채 살고 있지만, 이렇게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안정적이 되었다. 새로운 사랑, 식기세척기.. 뽀에벌~ ♡
그래서!
식기세척기에게 내 사랑을 표현하기로 했다. 나란 여자, 사랑이 차오르면 그걸 표현하지 않고 살 수가 없는 사람이다. 나에게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언제나 확신했다. 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그만큼 애정 표현에 진심이다. 무릇, 사랑은 표현해야 하는 것! 나는 식기세척기에게 사랑을 표현하겠다. 식기세척기로 하여금, 내 사랑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 아아,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해.. 하는 것을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게 만들어주겠다. 그래서!! 바야흐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야!!! 식기세척기야, 나의 고마움과 사랑을 담아 너에게 선물해줄게. 너에게 뭐가 좋을까 곰곰 생각해봤어.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사줄까?
아이패드 사줄까?
아니면.. 그냥 소박하게 책 몇 권 사줄까?
뭐가 됐든 사줄게. 고마우니까. 사랑하니까. 이것이 내 사랑이야~ ♡
사양하지 말아줘. 꼭 받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