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성을 읽는 일이 쉽지 않다.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정말 쉽지 않다. 아직 500페이지에 닿지도 못했는데 벌써 10월 22일이다. 10월을 시작하면서는 얼른 이 책을 끝내고 다른 책들을 실컷 읽어야지 했었는데 10월 내내 이 책만 붙들고 있는데도 이제 겨우 절반이다. 앞으로 열흘도 채 남지 않은 시간동안 나는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이미 한 번 읽은 책인데도 펼칠 때마다 새롭다. 지금은 제2권 <체험>에 대해 읽고 있다. 그중에서도 제 1부 <형성>에서 2장 <젊은 처녀> 부분이다. 이 나이대의 여성에게 자해가 많이 나타남에 대해 보부아르는 얘기하고 있다. 코르셋에 대해 얘기할 때도 와 보부아르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이 없구나 감탄했었는데, 아, 지난 번에 읽을 때는 몰랐던, 젊은 여성들의 자해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거다. 대단하신 분..
이러한 태도는 이런 나이에 아주 빈번한 자해에서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젊은 처녀는 면도칼로 넓적다리에 상처를 내고, 자기
몸을 담뱃불로 지지고 칼로 베고, 살갗을 벗기기도 한다. 내가 젊었을 때 여자 친구 한 명은 따분한 가든파티에 가지 않으려고 자기
발을 도끼로 내려찍어 6주 동안이나 누워 있어야 했다. 이러한 사디즘적 마조히즘의 행위는 성 경험에 선행하는 행위인 동시에
그에 대한 반항 행위이기도 하다. 이런 시련을 견뎌 냄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모든 시련에 굳게 대비해야만 하고, 그렇게 해서
결혼 첫날밤을 포함한 모든 시련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젊은 처녀가 민달팽이를 자기 가슴 위에 올려놓거나 아스피린 한
통을 삼킬 때나 자기 몸에 상처를 낼 때, 그녀는 미래의 자기 애인에게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즉, ‘당신은 내가 내 몸에 가한
것보다 더 가증스러운 짓을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의미다. 이런 것은 성적 모험에 대한 음울하고 오만한 입문이다.
수동적인 먹이로 바쳐질 그녀는 고통과 혐오감을 참아 내면서까지 자기의 자유를 주장한다. 그녀가 자기 몸을 칼로 긋고 불로 지질 때,
그녀는 자기의 처녀성을 빼앗는 침투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다. 즉, 그런 항의로써 처녀성 박탈을 무효로 하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
속에서 고통을 맞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마조히스트인 그녀는 무엇보다도 사디스트다. 자율적 주체로서 그녀는 이 의존적 몸, 즉
굴종에 처한 이 몸을 호되게 공격하고 조롱하고 고문하면서도 이 몸에서 자기를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계제에
자기의운명을 진심으로 거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디즘적 마조히즘의 기벽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기만이 내포되어 있다. 즉, 소녀가
그런 기벽에 빠지는 것은 자기거부를 통해 여자로서의 미래를 수락하는 것이다. 우선 그녀가 자기를 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증오심을 품고 자기의 몸을 훼손하지는 않을 것이다. -p. 491
이 부분에 대해 새로운건 아마도 읽을 때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것이고 무엇보다 내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도 자해를 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자해를 인지하고 심각하게 한 게 아니라, 그저 커터칼로 손가락을 한 번 그어봤던 것이었다. 그 때는 내가 나에게 해를 입힌다기 보다는 순간적으로 이래보면 어떨까 하는 충동이었는데, 그게 보부아르가 말하는 자해와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중학교 3학년 때니까 15살 이었는데, 그 때의 내가 미래의 애인에게 도전한 것인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굴하지 않겠다는 정신을 가진 것인지에 대해서라면,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윽 아프고 피난다.. 했던 것만이 생각난다.
보부아르가 저 부분에서 언급한 자해에 대해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건, 아마도 프랜시스 때문인 것 같다. '샐리 루니'의 소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주인공인 프랜시스가 자기 육체에 스스로 상처를 입히고 기어코 피를 보고 흉터를 만들어내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건 샐리 루니의 대표작인 《노멀 피플》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거기에도 자기 자신에게 가학적인 면이 드러나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나는 샐리 루니가 이런 인물을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에 반복해 등장시킨건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고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그걸 내가 잘 캐치해낼 수가 없어 답답했는데,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다보니, 프랜시스의 성격이 보부아르의 설명과 겹쳐진다.
'이런 시련을 견뎌 냄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모든 시련에 굳게 대비해야만 하고'
'당신은 내가 내 몸에 가한
것보다 더 가증스러운 짓을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의미.
프랜시스에게 그 때의 가해는 나를 죽이거나 파괴하는 의미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의미였던 거라고 지금은 생각하게 됐다. 왜 몸에 상처를 내서 아프게 하지, 왜 피를 보고야 말지, 아프게 하지마, 다치게 하지마, 라고 나는 속으로 계속 얘기했었는데, 칼로 긁고 꼬집고 피를 내는 것은, 그야말로 이보다 더한 고통을 너는 내게 가할 수 없다, 누구도 내게 가할 수 없다, 나는 이것들을 극복할 것이다, 의 의미로 보부아르 덕에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이 생각 전부가 틀렸을 수도 있고 어쩌면 너무나 정확한 궤뚫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의 행위
속에서 고통을 맞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마조히스트인 그녀는 무엇보다도 사디스트'라고 말하는 보부아르 덕에 프랜시스가, 메리앤(노멀 피플 주인공)이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상처 입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연인에게도 나를 때려달라고 부탁했던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남자주인공 둘 다,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 그러고 싶지 않노라 거절했다. 샐리 루니의 따뜻한 지점은 나는 거기였다고 본다. 네가 내게 때려달라 부탁해도 그것이 나에게 '그건 아닌 것 같은 감각'을 가져오기 때문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등장인물을 보여준다는 점.
마조히스트이며 사디스트이기도 한, 자기 자신에게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히면서 시련에 대비하고 존재를 드러내는, 무엇보다 자기몸인 바로 그녀들은, 그러나 해를 입히는 게 단순히 몸에만 한정되지 않아 나는 그것이 걱정된다. 노멀 피플의 메리앤은 자신과 섹스를 하면서도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 남자와 연애를 했고, 친구들과의 대화 에서 프랜시스 역시, 누구에게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사랑을 하면서 수시로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아' 라고 감정적으로 상처받아야 했다.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아, 라는 비참함이 자신을 채우면서도 '그렇다면 너와의 관계를 끝내겠어' 라고 하지 않는 부분에서는, 그녀가 육체적으로만 스스로에게 해를 입히는 게 아니라, 정신에마저 스스로 해를 입힌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런 걸 보는게 아주 힘에 겨웠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젊은 처녀들에게 저런 특징이 나타나곤 한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저렇게 자해를 하는 증상은 젊은 처녀일 때 나타나고 사라지는 걸까. 더 나이가 들면 괜찮아질까? 십대 소녀에게 여드름이 났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젊은 처녀일 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증상인걸까. 그러니까 자해라는 게 어떤 사람의 고유한 성질 같은게 아니라 그 나이대의 여성들에게 간혹 나타나는 증상 같은 것인가. 프랜시스도 메리앤도 서른이 넘어가면 아니 마흔이 넘어가면 그런 일을 하지 않을까? 나는 육체적 상처를 스스로 감당하는 것을 보기도 힘들지만 감정적으로 자신을 내팽개치는 걸 보는게 더 힘들다. 날 사랑하지 않는, 날 감추려고 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굳이 섹스하는 건, 나로서는 여전히 너무나 지치는 부분이다.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감정적으로 자신을 학대하지 말라고, 그 관계에서 빠져나오라고 하고 싶다. 그런 시련을 굳이 견뎌내지 않아도 된다고. 어쩌면 나는 젊은 처녀의 시절을 훌쩍 넘겼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사실 나는 예전에도 딱히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 나로 하여금 내 가치를 저평가 하도록 만드는 사람과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 없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영 별로라면 그걸 굳이 참아가며 그 손을 붙잡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나같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나랑 다르니 내가 끼어들 수 없고, 다만 아프게 살지 말자는 말을 하거나 글을 씀으로써 어딘가의 누군가에는 닿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31일까지(그래도 31일까지 있어서 다행이네요 ㅠㅠ) 다 읽을 수 있을까.
여러분, 힘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