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평 대회가 아니었다면 알지도 못했을 책이고 알았다해도 관심갖지 않았을 책이다. 수영대회라고 해서 정말 수영 얘기인줄 알았지. 책장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이것이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얘기인줄 알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을 내가 어릴 때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여러차례 생각했다. 어릴 때 보았다고 지금의 나와 다른 어른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면서 그런데 말 잘못하면 혼났던 때를 떠올리노라니, 이 책이 좀 더 일찍 나한테 왔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 거다.
책에서는 처음 남자의 정자가 어디에 들어 있는지 보여주고 그 정자에게 '윌리'라는 이름을 주어 수영대회(그렇다, 난자에게로 헤엄쳐가는 걸 뜻한다)가 열리고 난자를 만나 아이가 탄생하는 걸 보여주고 있다. 책의 마지막, 정자 윌리가 가지고 있던 특성은 태어난 아이에게 고스란히 남겨졌지만 그 아이에게 난자의 특성은 보이지 않는 것은 가장 큰 유감이었다. 물론 난자의 특성이 어떤건지(과학을 잘하는지 달리기는 못하는지)전혀 나와있지 않았고. 정자가 어떻게 난자를 만나느냐에 집중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지만, 태어난 아이가 정자의 특성만 가지고 있는건 역시나 아쉬운 부분이다.
내가 어릴 적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아이가 된다'는 것도 알았고 '여자와 남자가 같이 자면 아이가 생긴다'는 것도 알았다. '여자가 생리해야 임신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고. 난자와 정자가 '어떻게' 만나는지는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그랬다. 어쩌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벗은 어른들이 함께 누워있는 걸 보노라면, 나는 상체만 보았기 때문에 상체를 벗고 벗은 육체만 끌어안는게 전부인줄로만 알았지 하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거다.
그러던 국민학교 시절, 지금은 아마 사라진 것 같지만 '어린이 회관'이란 곳으로 소풍을 갔다. 견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학급 아이들과 다같이 회관 안을 둘러보다가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의 포스터가 순서대로 걸려있는 걸 보았다. 거기에는 어른 여자와 어른 남자가 어둠 속에 누워있었고, 올챙이같은 정자가 남자쪽에서 여자쪽으로 간다고만 표현되어 있었다. '어린이 회관'이어서인지, 어른 남자와 여자는 벗고 있지도 않았고 그저 이불 덮고 누워있는 장면이었으며 그들 얼굴 가까이에 정자가 가는게 그려져있었던 거다. 정자는 난자를 만나려면 기어코 남자의 몸에서 빠져나와야 하는데, 나는 세상에 그게 어디인지, 설마 거기일거라고는 진짜 상상도 못했고, '어딘가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만 알았고, 그런데 같이 자면 정자와 난자가 만난다고 되어있으니, 그 포스터를 보자마자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온거다.
콧구멍!
콧구멍이다!!
정자가 '나올' 구멍은 콧구멍 밖에 없지않나. 이마, 볼, 가슴, 팔.. 대체 어디에서 정자가 '나온'단 말인가. 난자를 '만나려면' 기어코 나와야 하는데 그게 어디란 말인가. 또한 나온 정자가 난자를 만나려면 어딘가로 '들어가야'하는데, 역시 그것도 콧구멍밖에 없었다. 어린이회관에서 그 그림을 보고서 비로소, 아, 답은 콧구멍이구나! 한거다. 하아-
그리고 국민학교 5학년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생리를 시작했다. 자, 사고의 흐름을 보자.
생리를 시작하면 임신할 수 있다-여자랑 남자가 같이 자면 임신한다.
여기 어디 '틀림'이 있는가. 틀림은 없지만 상세함이 없다. 방법이 없어.
나는 친구의 생리 소식을 엄마에게 전하며 물었다.
"엄마 걔 이제 자기 아빠랑 같이 자면 임신하겠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국민학교 5학년 생이고, 당연히 한 집에서 아빠랑 함께 자고, 생리를 시작해서 임신이 가능하니, 나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 엄마는 크게 노하셨다. 그런 얘기 하는거 아니라고. 나는 내 말이 왜, 어디서, 어떻게 잘못됐는지 모른채 혼나야 했다. 내가 가진 생각 어디에 틀림이 있단 말인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내게 무엇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그러니까 정자와 난자가 어떻게 만나는지를 알려준건, 아, 놀랍게도, 책이었다. 성교육 책이 아니라 소설이었고, 아아, 버지니아 앤드류스, 당신이 해냈어요!
(아니, 저거 개정판 처음 나왔을 때 표지 예쁘다고 호들갑 떨었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표지가 왜 저모양임????? 왜 죄다 여자 다리 그려놨담????)
그러니까 책을 좋아하던 친구가 다락방의 꽃들 시리즈를 사서 읽으면서 내게 빌려주었고, 나는 그걸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중학교 1학년이 읽을만한 책은 아니다. ㅠㅠ 그런데 내가 읽어버렸어.. 그리고 1학년에서 2학년으로 갈 무렵, 나는 깨닫게 된다. 아!!!!
책에서 그걸 노골적으로 써놓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읽다가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아!
아!
아!
나는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매우 놀랐다.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여동생은 기억할지 모르지만, 이걸 읽고 알게되어 충격에 빠진 나는 여동생에게 말해주었다. 그게 이렇게 되는 거더라고.. 하면서.... 너무 대충격이었어...................................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걸, 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을 하는거지 만약 어릴 때 알았다면 어땠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버지니아 앤드류스 얘기가 나온김에 하자면, 그 때는 뭔지 모르고 읽긴 했지만, 나중에서야 트라우마, 해리성 기억장애인걸 알게 되기도 했다. 어릴 때 성폭력 당한 아이가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그리고 집에서는 그걸 알고 엄마가 언제나 박박 목욕을 시켰던(넌 깨끗해져야 해! 더러움을 지워야해!) 기억 같은 것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폭발해서 힘들어하는 그런 내용의 소설이었다. 아이고, 앤드류스여..
지금 다시 읽는다면 힘들어서 못읽을 것 같다. 해리성 기억장애는 나도 가졌었기 때문에. 이걸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없을 것 같아. 어휴.. 어차피 국내 번역본 절판이긴 하지만... 어휴.....
고등학교 때 문학 선생님이 돈을 벌어서 제일 좋은게 책을 살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월급을 받으면 서점으로 달려가서 책을 한뭉탱이 사서 집에 온다고. 그게 너무 좋다고 했던 거다.
나 역시 그런 어른이 되었다. 직장에 취직하고서도 한 2년간은 대여점에서 빌려만 읽었던 것 같은데, 2년이 지날 무렵부터 책을 사기 시작했다. 세권쯤 사고 그러다 다섯권 사고. 그 때는 산 거 다 읽고 또 샀다. 그 때는 그랬다. 서점 나가서 샀고, 교보문고에서 인터넷으로 주문을 처음 해본 뒤에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했다. 그게 너무 좋았다. 그 때는 집에 책장이 딸랑 하나 있었는데, 그걸로도 충분했다. 나는 내가 책을 계속 더 살줄은 몰랐지?
2년다니다 첫직장을 퇴사하고 2개월간 백수로 지내다 지금 직장으로 왔는데, 어쩌다보니 알라딘을 알게되었고, 알게 되니 미쳐버리고 말았다. 택배가 매일 왔다, 매일. 정말 매일 왔고, 매일 박스로 왔다. 당시에는 1+1 도 있어서 책 한 권 사면 다른 책 한 권 더주는 식이었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연애소설 사면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 주는, 그런 식. 그러니 몇권만 사도 박스는 컸고, 그 박스가 매일, 매일 온거다. 미쳐버리겠네..
그렇게 집에 책이 차곡차곡 쌓여갔고, 이사를 가면서 엄마는 책장 사줄게, 하고는 책장을 몇 개 새로 사주었는데, 나중에 다시 이사갈 때 추가로 더 사주었고, 그런데 지금은 그 책장들에 다 꽂지도 못할 만큼의 책이 있다. 수시로 파는데도 그렇다. 나는 월급타면 책 사는 기쁨을 아는 어른이 된게 아니라, 월급과 상관없이 계속 책 사는 어른이 되어버렸어... 인생..이것이 바로 청출어람!!! 선생님, 저는 선생님보다 더 앞서 나가는 그런 어른이 되었어요!!
어제 알라딘에서 책 박스가 도착했는데 이번에는 집으로 받았고, 나는 뜯지도 않고 상자째 그냥 두고 오늘도 출근했다.
왜 사는(buy)걸까???
오늘 회사 임원과 아침부터 치킨 얘기를 하게 됐는데, 결국은 오리지널로 돌아오게 된다는 얘기를 했다. 새로운 맛의 치킨이 많이 나오고 맛있어 보여서 꼭 주문해 먹어보더라도 결국은 후라이드로 돌아간다는 얘기. 라면도 그렇다. 새로운 라면이 쏟아지니 어떨까 싶어 맛을 보고 맛있다고 생각해도 결국은 신라면(누군가는 안성탕면 혹은 삼양라면등등)으로 돌아간다는 얘기.
결국은 돌아가게 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꼭 이것이어야만 하는, 다른 거 다 겪어도 역시 이것만큼은 아닌, 그런거. 치킨이든 라면이든 그리고 사람이든. 그렇게 되는 것 같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