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금가지나 은향나무에서 나온 애트우트의 소설들의 표지가 항상 아쉽다. 그 표지들은 너무 화려하게 꾸며지거나 강한 색대비를 쓰는데 나는 그런 표지들이서 뻔하거나 유치한 애기들이 들어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2025년의 독자로서 60년대에 출판된 글을 읽는데도 낯설지가 않다. 기술이 바뀌었다는 것 말고 이 인간 군상들은 지금도 존재하는 타입들이다. 여기 나온 구시대적 여성차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싶은 것들이지만 현재에서 같은 일을 겪을 확률은 결코 0이 아니다. 하지만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점 말고도 나는 주인공의 심리적 방황과 육식부터 시작해 음식을 먹기 어려워지고 식물이 되는 것 같이 느끼는 감정이 한강의 채식주의자와도 연결되면서 여성의 식물성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상식적으로는 아마도 너무나 이기적이라고 간주될만한 덩컨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꼈다. 어쨌든 나에게는 그리 진부한 페미니즘 소설로 느껴지지 않았고 자아찾기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성이기에 그 위에 여성차별이라는 굴레까지 씌워져 있었던 것 뿐 아닌가(사실 그 한가지가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그녀를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코 기분 좋은 일들은 아니었다. 한편 외삼촌 입장에서 보면절대 탄크레디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었다. 진짜 잘못은 이시대에 있었다. 그러니까 좋은 가문의 젊은이가 위험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유롭게 카드 게임 한판 하기도 어려운혼란스러운 시대 탓이었다. 가혹한 시대였다. - P29
주인공처럼 작가도 엄청난 개 애호가였을 것 같다.
그는 가만히 벤치에 앉아 화단을 파헤치며 망가뜨리는 벤디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따금 벤디코는 자기가 저지른 일을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이 천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카네이션을 열네 송이나 꺾어 놓았고 울타리를 반쯤 쓰러뜨렸고 물을 대는 좁은 수로를 막아 버렸다. 진짜 사람이 한 짓 같았다. "그만해, 벤디코, 이리 와." 그러자 벤디코가 달려와서 흙투성이 주둥이를 그의 손에 댔다. 개는 자신의 중대사를 중단시킨 것은 잘못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영주를 용서해 주었음을 보여 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 P18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건 좋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를 위해, 혹은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 알아야 한다. 아니, 적어도 그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훼손된 얼굴은 이것을 요구했다. 바로 여기서 안개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 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