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는 다음날 쉬는 날이라고 좋아서 침대에 앉아 넷플릭스의 영화 한 편을 선택해 보았다. 자, 살랑살랑 봄바람도 불어오니 로맨스 한 번 보자. 나는 로맨스 영화를 너무 좋아해. 사람들이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며 사랑이 생겨나는 걸 보는게 너무 좋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갈등을 해소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도 좋고. 굵직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이 작은 이야기들의 힘이 내게는 크게 느껴진다. 결국 인간이란 다른 존재를(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랑하면서밖에 살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닉'(데이먼 웨이언스 주니어)은 <러브 개런티드>라는 데이팅 앱을 유료로 사용하면서 천 번의 소개팅을 했다. 그 앱에서는 천 번을 만나면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광고했단 말이다. 그런데 천 번의 데이트를 했지만 자기는 사랑을 찾지 못했고, 이에 이 앱을 만든 회사를 고소하기로 한다. 나름 거기서 승소해 나오는 이익은 물리센터에 기부할 예정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그 회사를 고소하기 위해 지역의 변호사 '수잔'(레이첼 리 쿡)을 찾아간다.
수잔은 어릴적부터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이었고 언제나 약자의 편이었다. 돈 없는 사람들에겐 비용을 받지 않고 상담도 해주고 변호도 해준다. 그러니 돈이 모일리가 있나. 아침부터 밤까지 일 생각 뿐이고 그래서 연애를 할 겨를도 없었다. 이 사건 자체는 자신이 맡고 싶어하지 않는 종류의 사건인데, 자신이 운영하는 법률회사가 너무 돈이 없어서 돈이 필요했다. 하는수없이 맡기로 한다.
그래서 닉과 수잔은 자주 만나야 했다. 재판 준비를 하기 위해 수잔은 닉과 데이트 했던 여자들을 다 찾아가보고 그가 제대로 데이트 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심지어 전여친까지도 만난다. 설정 자체가 참 너무 거시기하지만, 더 거시기한 건 그 모든 여자들의 대응이었다. 닉은, 한 번을 만나 데이트했던 여자들도 그리고 전여친 까지도, 흠잡을 데 없는 남성이었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존재하기나 하나. 어떻게 천번 데이트 해도 천번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정하며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 존재한단 말인가. 어쨌든 이것은 로맨스 영화이고, 그러니 남주를 완벽하게 만들고자 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그래, 모두에게 젠틀한 남자를 만들어놓은 것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나는 엊그제 만난 친구의 말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수용의 폭이 넓다고 한다. 그래, 수용의 폭이 넓으니 이만큼은 수용하겠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다보니 서로에게 끌리게 된다. 그동안 천번의 데이트보다 이 변호사와의 식사와 대화가 훨씬 즐겁다. 그녀는 특별하다. 수잔 역시 닉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를 사랑하게 된다.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그들이 산책하며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이야기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걷는게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정한 이와 함께 걸으며 얘기하는 걸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한다. 걷는 것도 좋고 다정한 사람도 좋은데 다정한 사람과 함께 걷는다? 만세 만세 만만세다. 그 장면에서 나도 걸을거라고, 내일 산책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 이제 갈등이 나온다. 데이트앱 회사는 수잔과 닉이 다정한 사진을 찍어두고 '니네 사이 너무 가까운 거 아니냐' 며 합의금 받기를 종용한다. 이에 수잔은 앞으로 2주 남은 재판 동안 이 재판에서 지는게 두려워, 닉과 거리를 두고자 한다. 우리 재판 준비에 열중해야 하니 만나지 말아요, 라고 하는거다. 그렇게 만나지 않고 멀리하면서 2주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들은 서로에 대한 그리움에 쌓인다. 그리고 재판 당일에 만나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고 서로를 냉정하게 대하며 재판에 들어가게 되는거다.
그렇게 재판이 거듭되고 이 사건은 커다란 데이팅앱 회사와 한 개인의 재판인지라 세상의 이목도 끌게 되는데, 그동안 만난 소개팅 여성들이 증인으로 나오고 또 전여친까지 나오면서 거의 이기는 재판에 가까웠다. 이겨야 한다. 이겨서 나오는 수익은 기부할거니까. 이겨야 해. 수잔은 최선을 다해 재판에 임하고, 마지막 증인은 바로 의뢰인인 닉이다. 닉은 증인으로 나와서 자기의 입장을 얘기해야 하는 그 재판의 마지막 순간!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에, 아니 이놈이 돌았나...
이 고소를 취하하겠다고, 자기는 자기 변호사를 사랑한다고 갑자기 판사와 배심원들이 있는 법정에서 고백하는거다.
네?
아니, 자기 안의 사랑을 깨닫고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고백하는 거 좋단 말이다. 그래, 그러라고. 근데 아니 어째서 왜 때문에 법정에서 재판하다말고 그러는거야? 나 완전 돌아버리겠네.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이게 지금 사랑고백이라서 허용되는거야? 나는 수잔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본다. 수잔 입장에서는 열심히 했던 일이 중요한 순간에 틀어져버리는 게 아닌가. 그런데 수잔은 좋아하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들의 사랑이 이뤄지는 걸 축복하며 환호하는 거다.
네??
아 졸라 빡치네 진짜. 아무리 로맨스 영화 사랑사랑 사랑 사랑이 이루어지는 게 최고라고 해도 미쳤냐? 이런 개같은 설정은 뭐야 대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일단 개념적으로 추상적으로 이런 일이 싫지만, '그러나 막상 내 앞에 닥치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럴 경우 구체적 인물을 대입해보곤 한단 말이다. '나는 그런거 싫어' 혹은 '나는 그런거 좋아'라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다가도 거기에 구체적 인물을 대입하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나는 변호사인 수잔의 입장이 되고 닉에다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사람을 넣고서 이 상황을 그려보았다. 그럴 경우 나도 수잔처럼 아니, 나도 이사람 사랑하는데, 너무 좋으다, 하면서 거기서 키스할까?
답은 '아니다' 였다.
아니다.
아니다.
싫다.
너무 싫다.
내 일을 다 망쳐버린 놈이 되어서 있던 사랑이 식어버린다.
나는 너무 당황했을 것이고 좌절했을 것이다. 아니, 상황과 때를 가리지 못하는 남자였네.. 하면서 내 자신을 자책할 것 같다. 그에겐 말했을 것 같다.
"야, 지금 여기서 꼭 그렇게 해야해?" 라고.
왜 내 일 다 틀어지게 만들지? 아 빡쳐.....................후아.........................
나는 그와 사요나라, 세이 굿바이 한다. 내 일을 개판쳐놨어...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나를, 내 일을 존중한다면, 거기서 갑자기, 그렇게 나올 순 없는거지. 아니, 내가 아무리 너를 사랑했다한들, 나의 사랑은 나를 향해 더 크게 뻗어있고 또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사랑을 머리로 한다. 그 상황에서 나 이 재판 안해~ 왜냐면 이 데이팅앱에서 만난 여자는 아니지만 이 데이팅앱을 통해 사랑을 찾았기 때문이야~ 나는 내 변호사를 사랑해~ 해버리는 거 진짜 너무... 에휴..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랑고백하지 마라..특히나 나 일하고 있는데......... 조심해. 진짜 뭐야 빠가사리들이야 뭐야..... 다 큰 어른이 때와 장소도 구분 못하고 사랑고백이야.... 어우 싫어....... 끔찍하다 진짜루.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다시, 올리브》중 단편 <햇빛>에는 병에 걸린 여성이 나온다.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면서 문병온 올리브 키터리지랑 대화를 나누는데, 자신이 떠나고난 후에 남편이 혼자 남는 걸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신디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 키터리지 선생님. 그이가 혼자 산다는 생각도 견딜 수 없어요. 못 견디겠어요. 정말로 못 견디겠어요. 그이는 그저…… 오, 혼자 두기엔 덩치만 큰 아기 같아요. 그래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요. -책 속에서
참.... 에휴...... 아들을 둘이나 둔 아버지인데 '혼자 두기엔 덩치만 큰 아기' 같다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지 않았나. 진짜. 어른이 되자, 어른이. 제대로 어른이 되자.
여동생이 만든 포도쨈 바른 토스트를 간식으로 먹고 있다. 안에 소박하게 치즈와 계란후라이가 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