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새벽에는 꿈을 꾸었다. 오랜만에 어마어마한 야한 꿈을 꾸었는데, 그러니까 꿈 속에서 나는 그의(?) 집에 가서 엎어치고 메치고 뒹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오래오래 침대에서 뒹굴었다면 좋았겠지만 나에게는 다른 일정이란 것이 있었고 그래서 그의 집을 떠나야 했다. 그렇게 옷을 차려입고 나의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거울을 보았는데 나의 양쪽 콧구멍 속에 아주 커다란 코딱지들이 가득했다. 너무 가득해서 그냥 바깥에서도 다 보이는 정도였다. 와, 아니 이거 뭐야. 이 거대한 코딱지들이 내 코 안에 있었는데 나는 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거지? 아니 저 사람은 이걸 왜 나한테 말해주지도 않았지? 분명 이거 봤을텐데 말야. 아니.... 이걸 보면서도 나랑 물고 빨고 했다니, 헐, 이건 설마... 찐사랑?
나는 그렇게 꿈속에서 진실한 사랑, 찐사랑, 트루 럽을 경험하고 깼다.
영국 여자 '애나'는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미국 남자 '제이콥'을 만나 연애하고 사랑하게 된다. 한창 사랑사랑하다가 영국 여자 애나는 비자 기간이 만료되어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게 돌아가야 할 날을 앞두고 그들은 헤어지기 싫어 너무 아쉬워한다.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되지만 그만큼의 시간조차도 떨어지는 걸 상상할 수가 없는 거다. 안되겠어, 도무지 떨어져서 못있겠어, 그냥 너랑 있을래, 해가지고는 비자 기한을 너며서도 사랑사랑 연애연애하면서 스윗스윗한 날들을 보내고,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낸 후에, 영국가서 할 일하고 다시 올게, 그 때 만나 하고는 간단 말야?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오려고 공항에 도착해서 제이콥에게 '공항에 도착했어 빨리와!' 했는데, 그러나 미국 공항에서는 애나에게 입국을 허락하지 않는다. 안돼, 너 지난번에도 비자에 문제 있었는데 너를 어떻게 들여보내주니 안돼. 저기요, 이번 한 번만 들여보내 주세요, 남자친구 여기 있어요, 와있다고요, 하는데도 안돼, 해서 그녀는 결국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렇게 공항에 꽃다발 들고 찾아온 제이콥과 만나지도 못하게 된다.
애나는 영국에서 제이콥은 미국에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원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나 원거리 연애는 결코 쉽지가 않다. 각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 돈을 벌고 있는데 한쪽이 전화하면 다른 한쪽이 전화를 받을 수 없고 다른 한쪽이 전화를 하면 또 이쪽이 너무 바쁘다. 이들이 서로에게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멀리 떨어진 사이에 그들은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돈을 벌고 친구를 사귀고 순간순간을 보내며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그래서 보고 싶다. 연락이 닿고 애나가 제이콥에게 여기로 와줘, 하였고, 그렇게 제이콥은 시간을 내어 슝- 영국으로 날아간다. 오랜만에 애나를 보았다는 기쁨도 잠시, 애나의 친구들의 모임에 함께 갔는데, 애나에게는 이미 영국에서의 새로운 일상과 관계가 자리잡혀 있다. 내가 없는 사이 애나에게는 새로운 삶이 형성되었구나, 라는 서운함이 생긴다.
너무 힘들면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 만날까? 라는 제안에 제이콥은 화를 낸다. 너 그러고 싶어? 그래서 그래? 아니라면 왜 그런 말을 해? 왜 그런 생각을 해? 아니야, 그런거 아니야, 그들은 며칠간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결국 그들은 자신이 일상을 사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연애를 한다. 사람은 외롭게는 살 수 없는 동물이구나,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먼 곳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구나. 저기에 저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내 안에 품고 있으면서, 그러나 다른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고 일상을 함께 보내고 섹스할 수 있는 거구나. 인간, 약한 존재야. 외로운 거 못견디는구나, 했는데, 위에도 언급했다시피, 그들에게는 서로가 아주 강한 존재로 가슴 안에 있다.
나무를 생각했다. 거대한 나무.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의 존재는 내 안에서 나무가 되어 자라는 것 같다.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거대한 나무기둥이 위로 올라가고 그 위에 잔가지들이 하나씩 하나씩 생겨 여러개를 이루고 그렇게 나무를 이루어서 그 사람이 내 안에 자리잡다가, 그 사랑이 끝나면 나무가 뽑혀 버리는 거다.
아주 오래전에 예능에서 한 남자 연예인이 남자는 바람피워도 되지만 여자는 안되는 이유가 뭐냐면, 남자는 그저 몸만 주는 거지만, 여자는 마음을 줘야 몸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때 게스트들을 비롯하여 어린 나 역시도 오 그런거구나, 그래서 여자 바람이 더 무서운 거구나, 했었는데,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그 말이 얼마나 개소리인줄 알게 되었다. 남자라서 되고 여자라서 안되고 하는게 아니라, 사람은 저마다 다른 존재라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으며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인데, 그걸 여자라서 안되고 남자라서 된다고 퉁칠 수는 없는거다. 그저 여자의 바람을 막기 위한 거대한 메세지를 던지는 것일 뿐. 태양이 노래합니다. 나는 바람 펴도 너는 절대 피지마~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다른 사랑을 만났을 때, 어떤 사람은 내 안에 자리 잡았던 큰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다. 뿌리째 뽑는 과정은 아프고 그래서 울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뽑아내고 그 자리에 다시 또 새로운 나무를 심어 뿌리내리게 할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사람1, 사람2, 사람3을 만나 사랑하는 과정은 나무1, 나무2, 나무3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의 나무를 심고 뿌리내리면, 그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는 일 자체를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안에 자란 이 나무를 나는 그대로 두겠다고, 나는 결코 뽑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커다란 나무 옆에 작게 또다른 뿌리를 내리게 하는 수도 있다. 사람1, 사람2, 사람3을 만나도 사람1을 만났을 때 심어두었던 거대한 나무1이 뿌리를 내리고 잔가지까지 숱하게 뻗어나가게 두었으므로, 나무2는 옆에서 아무리 자라려고 해도 차마 제대로 자라나지를 못하는 거다. 햇빛도 못받고 뿌리 내릴 공간도 없다.
애나와 제이콥은 이렇게 큰 나무를 심어두고 뽑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안에 큰 축을 이루고 있어서 다른 것들이 들어와서도 그 나무를 뽑아낼 수가 없다. 제이콥은 다른 여자를 만나 사귀고 그 나무에 열심히 물을 줘보지만, 그 나무는 큰 나무 앞에 맥을 못춘다. 오랜만에 온 문자 메세지에 제이콥은 현재의 애인과 이별을 하고 다시 또, 애나에게로 간다. 애나는 그둘에게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일단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되고, 그렇게 미국으로 함께 가면 된다는 것. 그래서 제이콥과 애나는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부부가 되었다. 기뻤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6개월간 영국에서 부부로 살아야했고, 그들은 워낙에 뜨거웠던 사랑을 불태우면서 영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그리고 시간이 되어 미국으로 가기 위해 자기들이 위장 결혼이 아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이임을 판사 앞에 증명하려 한다. 이거봐, 우리가 이미 제출한 서류로도 알 수 있지만, 내가 제이콥 만났을 때부터 썼던 일기가 있어, 이걸 읽어보면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을거야. 판사는 너네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 너희들의 결혼이 진짜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너 전에 비자기한을 안지켰던 거, 이거 때문에 너네 결혼에 대해 내가 수락할 수가 없네, 비자 문제 먼저 해결이 되어야 할 것 같아, 라고 해서 그들이 미국으로 가는 길은 또 막힌다. 그렇게 거절 앞에 그들은 예전의 행복한 연인이 아니다. 짜증이 난다. 신경질이 난다. 화가 난다. 자꾸 신경질이 나서 서로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가 없다. 이게 뭐야, 그들은 헤어진다. 제이콥은 다시 미국으로 가고 애나는 영국에서 살면서 커리어를 충실히 쌓는다.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거의 연락도 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삶을 산다. 각자 사랑하는 사람도 생겼다. 애나는 부편집장으로 승진도 했다. 동거남으로부터 축하도 받았다. 동거남이 바라는대로 삶의 방식과 습관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동거남이 청혼하는 순간, 애나는 그것을 수락할 수 없다. 아무리 자라게 두려고 해도 큰 나무가 버티고 서있는 이상 새로 심은 나무는 자랄 수가 없다.
그참에 아버지의 지인으로부터 비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연락이 온다. 기쁜가? 아닌가? 애나는 이 사실을 제이콥에게 알린다. 제이콥 역시도 동거중이었는데, 하아- 동거녀와 이별을 하고 제이콥과 애나는 이제 미국에서 함께 살기로 한다. 그들은 재회했고, 애나는 드디어, 미국의 제이콥의 집으로 들어온다. 그렇다면, 그들은 ... 그후에 영원히 행복했습니다, 가 될까? 그렇게 크게 버티던 나무는 여전히 건재할까? 오랜 시간 자꾸만 작은 나무들이 자라려고 하는 걸 보면서 큰 나무가 상하지는 않았을까? 그들은, 이제 행복할까? 이것이 해피엔딩일까?
영화의 아주 많은 부분을 나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미국에 사는 남자와 영국에 사는 여자가 사랑하면, 그들의 연애는 이벤트가 된다. 그들이 매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에 일상은 다른 사람들과의 몫이다. 오랜만에 만난 제이콥이 아무리 애나를 사랑해도 애나의 일상으로 자신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직장에 가고 퇴근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잠자리에 드는 그 모든 순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실체는 없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애를 하면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나를 외롭지 않게 해줄, 일상을 나눠줄 누군가를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원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애를 이벤트처럼 하고 싶은게 아니라, 일상으로 만들고 싶을 것이다. 이벤트가 의미있는 것은 어쩌다 특별한 순간에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특별한 이벤트는 특별하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므로, 연애가 이벤트가 되는 순간 일상이 공허해진다. 그래서 자꾸만 일상을 나누는 사람에게로 몸과 마음이 기울게 되는 것일테다. 그러나 제이콥과 애나는 이미 크게 자라게 둔 나무를 제 마음안에 그대로 두었으므로, 일상으로 만든 연애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을 수가 없었다. 기쁜 순간에 그리고 고독한 순간에 자꾸 서로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연애가 이벤트로 지속될 수 있으려면, 연애가 이벤트여도 괜찮다는 생각이, 나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있어야 한다. 나는 이벤트 오케이지만 당신은 이벤트인 연애를 못견디겠으면, 그 연애는 지속될 수가 없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날아가는 것, 영국에서 미국으로 날아가는 것, 그것은 낭만적이고 열정이 필요한 일이다.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쏟아붓는 일은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살기는 힘든 법이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의 삶을 살면서, 여기에서 사랑하고 여기에서 쉬고 싶어한다. 어쩔 수 없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날아가는 것이 괜찮은 사람은, 별로 없다.
고현정과 조인성이 나왔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에서는 조인성이 슬로베니아에 있었다. 조인성과 고현정은 화상통화로 늘 서로에게 안부를 전했고 그리워만 했다. 그러다 어느날, 고현정은 문득 깨닫는다. 어? 열네시간이면 갈 수 있는데, 내가 왜 못가고 있지? 그렇게 열네시간을 날아 조인성에게로 간다. 열네시간을 비워도 되는 삶이 고현정에게는 가능했다. 고현정은 프리랜서였으니 자신이 어느만큼의 시간을 빼고 날아갔다와도 자신이 조율해서 그 다음 업무들을 해나가면 되었다. 열네시간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체력과 비행기값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마음을 먹어야 그 행동이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이 마음을 먹어야, 계획을 짜야, 달력을 보고 계획을 세워야 가능해지는 것이라면, 그 사랑을 대체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사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답답한 지점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이 너무 강렬해서 아아 안되겠어, 비자 기간이고 뭐고 너랑 함께 있을래, 하고 순간의 기쁨을 선택했더니 어떻게 됐다? 그 다음에 만남이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빌어도 우리 서로 사랑해 해봤자 비자 기한 못지킨 사람 되어 비자가 나오지 않는, 입국할 수 조차 없는 상황이 되었잖아. 아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나로서는 정말이지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인거다. 지켜, 룰을 지켜라. 룰을 지켰다면 너네 사랑은 그 다음부터 순조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을 그렇게 만든게 누구다? 너네들이다. 내가 안갈래, 해도 너는 나에게 아니야, 이번에 네가 가야 우리가 그 다음에 또 잘 만나지, 하면서 보냈어야지. 나 안갈래, 아이참, 그래? 이러면서 물고 빨면 어떻게 된다? 그 다음 물고빨고가 안찾아온다, 이 밥통들아..... 아 너무 답답하기 짝이 없어. 왜 룰을 안지키지요? 룰 안지키고 왜 힘들어하지요? 그것은 너네 행동의 결과이다. 감당해라. 우리가 보는 방향이 한 방향이었다면 좋았을텐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일치했다면 좋았을텐데. 일치하지도 않고 같은 방향을 보지도 않은 채로, 나는 나무만 키워댔고 그 나무를 뽑아내지도 못해서, 그래서 슬픈 한 마리의 사슴이 되어 이에저에 떠딜 닢다이.... (응?)
오늘 설거지를 하기 전에 친구들이 오픈해둔 클럽하우스에 들어갔다. 클럽하우스에 처음 들어가봤는데, 오, 이거 좋다. 그러니까 내가 산책할 때 라디오나 음악 대신 틀어두면 좋을 것 같다. 친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거 들으면 좋을 것 같아! 문자로 나누는 대화와도 다르고 영상통화와도 다르고, 전화통화와도 좀 다른 느낌이었다. 연애하는 이들에게도 좋은 수단이 될 것 같았다. 그냥 틀어두고 각자의 삶을 산다면, 애나와 제이콥도 다른 나무를 심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다음에 내가 연애를 하게 된다면(응?) 콧구멍 청소도 열심히 하고(응?) 클럽하우스도 같이 해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