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반복해 꾸는 악몽중 하나는 학교, 학창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종종 꿈속에서 나는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 학생이고 과제를 미처 못했거나, 수업에 지각했거나, 강의실을 못찾는 등의 일들로 난처해한다. 그게 그렇게 큰 일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깨고나면, 아, 그 시기들을 다 지나와서 다행이다 라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는 공부를 못했고 안했으며 공부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입버릇처럼 내 서른살이 되기 전까지의 시간은 내 인생에서 들어내도 큰 변화가 없을거라고, 그 시기는 내 존재가 없던 시기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나에겐 나만의 신념과 고집이 있었고, 그 때도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판단하였으며 그런 것들을 하지 않고 지내기는 했다. 물론, 후회되는 일들도 많이 쌓여있고.
출근길 지하철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주변 자리에서 학생인 누군가가 교과서나 교재로 보이는 것들을 들여다보며 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푸는 걸 보노라면, 아, 나는 저 시기를 지나와서 다행이야,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언제나, 늘 생각해왔다. 나는 학창시절을 지나왔음에 늘 감사했다. 만약 다시 되돌린대도 잘할 자신이 없다.
요즘 정신 없이 바빠 단톡방의 톡을 읽기도 힘겨운 시간들이 이어지고 있다. 책을 읽는게 다 뭐람.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액션영화만 본다. 책 읽는데 쓸 에너지가 남아 있질 않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퇴근 무렵이면 생각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고 회사에서 이미 탈탈 털린 채다. 그럴 때는 액션 영화가 최고라고, 요즘의 나는 생각한다.
1,2편 모두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가 넷플릭스에 올라온 걸 알면서도 아, 로맨스 따위 이제 보고 싶지 않다, 하고 넘겼다가, 어제는 넷플을 아무리 둘러봐도 보고싶은 액션 영화가 없어서(이미 반복해 본 것들 투성이다) 하는 수없이 라라 진과 피터의 영화를 재생했다.
영화속에서 피터는 이미 운동 특기생으로 스탠퍼드 대학의 진학이 확실해졌다. 라라 진은 피터와 같이 대학 생활을 하기 위해 스탠퍼드에 원서를 넣어두고 합격 소식만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 함께 가면 그들은 계속 다정한 연인일 수 있고 매일 잘자라는 인사를 끝으로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둘이 함께 갈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그 외에도 라라 진은 스탠퍼드와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버클리 대학애도 원서를 넣어두었고, 언니의 '견문을 넓히라'는 조언에 따라, 안갈거지만, 갈 생각 전혀 없지만, 뉴욕대학교에도 원서를 넣어둔 상태였다.
라라 진과 피터 이 커플은 여전히 다정하고 여전히 사랑한다. 그러니 함께 미래를 꿈꾸는 것이 당연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에 둘이 함께 있는 걸 그려넣는게 당연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라라 진은 스탠퍼드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고 그러나 버클리에 합격한다. 스탠퍼드에 합격하지 못한 걸 피터에게 알리는 게 두려웠지만, 그러나 어쨌든 그에게 알렸고, 피터는 차로 한 시간 거리니까 괜찮다면서 우리는 잘해나갈 것이고, 잘 될 것이라고 얘기하며 이 커플은 아름다운 미래를 역시나 여전히 꿈꾸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아, 운명이란 무엇인가,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학교에서 졸업 여행으로 뉴욕엘 간단다. 오 마이 갓. 그 큰 도시에 졸업여행으로 간단다.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또 버스를 타고 이 학교 학생들은 뉴욕이란 대도시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그곳에서 유명하다는 컵케익을 먹고, 세 개의 조로 나뉘어서 각기 다른 곳을 관광한다. 그리고, 아아, 라라 진은, 거기에서, 도시 한 복판의 뉴욕대학교를 보게 된다. 또한, 이거슨 무슨 운명의 조화인가, 뉴욕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4학년 선배도 만나게 되고, 그렇게 뉴욕대학교의 학생들이 주최하는 파티에도 참석하게 된다. 이 뉴욕이란 도시, 자신이 주눅들거라 생각했던 도시에서 그녀는 오히려 모든 것들에 반한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것,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자연스런 누군가의 모습, 파티 장소에서 보이는 이 거대한 도시의 불빛. 라라 진은 뉴욕이란 도시에 매혹된다. 그리고 그녀가 고려해보지 않았던 뉴욕대가, 언니가 견문을 넓히라고, 다른 길이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그러나 피터와 어차피 함께 대학갈테니 심드렁했던 바로 그 장소가, 라라 진이 가고 싶은 대학이 된다.
뉴욕과 뉴욕대를 눈 앞에서 보고난 라라 진은 흥분한다. 그리고 설레인다. 그곳에서 사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언니 말대로 12층짜리 도서관이 있는 곳, 도시 한 복판에 있는 곳,
라라 진은 뉴욕에 다녀온 후 언니에게 얘기한다. 왜 그토록 많은 책의 배경이 뉴욕인지 알겠다고, 어디를 봐도 이야기가 있다고, 그리고 뉴욕대에는 진짜 작가들을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강연하게 하는 멋진 문학 프로그램이 있다고, 어쩌면 출판사에서 인턴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이 상상한 미래에 대해, 설레이는 감정에 대해 얘기하는거다. 이쯤되면, 라라 진의 마음은 이미 뉴욕대로 기울어진 것이 아닌가.
이 장면 장면들이 나는 너무 부러웠다. 보통 나는 내 삶에 만족하는 편이고, 내가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장면을 보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나의 그렇지 못했던 학창시절을 라라 진이 완벽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
라라 진은 성적이 좋았다. 즉 열심히 공부하는 똑똑한 학생이었던 거다. 그래서 그녀는 여기 저기 대학에 원서를 두고 발표를 기다릴 수 있었다. 처음 자신이 가고가 마음 먹었던 스탠퍼드 대학에 합격하진 못했지만, 버클리를 다니면서 피터의 말처럼 편입을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공부나 미래 때문이 아닌, 남자친구와의 영원한 사랑 때문이긴 하지만. 그러나 라라 진은 이제 새로운 가능성을 옆에 두고 있다. 이럴 때 가능성을 열어두라는 언니의 조언은 얼마나 적절했던가. 라라 진은 자신이 아예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본다. 멋진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읽고, 지하철 안에서도 자연스레 책을 읽는 삶이 가능해지고, 좋은 문학 프로그램을 들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낯선 도시 뉴욕에서 자신 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이 가능성이, 나는 너무나 너무나 부러웠다. 이제 내게 없을 그 미래가, 라라 진에게는 펼쳐졌다는 사실이 너무 부러웠고, 그런데 내게는 닫혀버렸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인생을 다시 리셋하고 싶어졌다. 중학생으로 혹은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 이제 뉴욕대의 존재를 아는 나는, 내 인생에 뉴욕대를 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유학이 다 뭐야, 어학연수라는 것의 존재 자체도 몰랐다.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다. 내 주변에는 좀 더 큰 다른 미래가 있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도, 보여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국에 그리고 뉴욕에 가고 싶다고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게 뉴욕은 로망이긴 했으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라고, 공부를 위한 환경이 조성된 곳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던 거다. 이 사실이 슬펐다. 그리고 라라 진이 부러웠다. 너에겐 다른 길이 있어, 좀 더 견문을 넓힐 수 있지, 라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나 라라 진은 피터와 함께 미래를 약속했기에 고민이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뉴욕대인데, 그러나 그곳으로 가면 피터와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진다. 1일 18시간 자동차를 타야만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 이 사랑은 무사할까, 우리는 괜찮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라라 진은 망설인다. 나는 어차피 영화의 결론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라라 진에게 속으로 외쳤다. 라라 진, 네 미래를 생각해, 너는 고작 열일곱 살이야, 너를 설레이게 하는 미래를 잡아, 네 앞에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마, 남자 때문에 선택하지 말고 네 인생을 위해 선택해, 네 자신을 위해 선택해, 하고 싶은 공부가 있는 곳,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는 곳을 선택해, 그런 기회는 누구에게나 오는게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결코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라고!!
나는 잠시 영화를 멈췄다.
라라 진 앞에 놓인 기회가 너무나 너무나 부러웠다.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싶었다.
열심히 열심히 공부해서 뉴욕대에 가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뉴욕대에 가서 좋은 강의를 듣고 12층짜리 도서관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 삶은 상상하는 것처럼 밝기만 한것도 아니고 희망차기만 한것도 아니고, 어디에서나 누구나 그렇듯이 고난과 역경과 후회도 찾아들겠지만, 그러나 앞으로의 가능성이 활짝 열려있는 그 삶은 얼마나 찬란한가.
라라 진이 부러웠다.
이제 비로소 더 큰 가능성에 대한 문이 활짝 열린 것이 부러웠다.
그러면서 앞으로 또 더 큰 문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라라 진이여, 열심히 공부하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라.
어쩌면 라라 진의 뉴욕대 선택 때문에, 그래서 피터와의 멀어진 거리 때문에, 하루하고도 반나절 이상 자동차를 타야만 만날 수 있는 곳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헤어질지 모른다. 그들의 사랑은 차츰 식어갈지도 모른다. 이제 자신들이 새로이 적응해야 할 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사건들 때문에 그들은 점점 더 소홀해질 것이다. 오늘은 내가 그리고 내일은 네가 각자 다른 공부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만남으로 서로에게 연락은 뜸해질지도 모른다. 이 멀어진 거리는 필연적으로 헤어짐을 가져올 것이다. 롱 디스턴스가 반드시 헤어짐을 전제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는 롱 디스턴스 후에 맺어짐으로 엔딩을 가져가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필연적이라는 말은, 슬프지만 대부분의 진실이 될것이다. 헤어짐은 아프겠지만, 그러나 그 헤어짐 후에 나에게 남는 것이 이별의 고통 뿐만은 아니다. 헤어진 사랑으로 인한 성숙과 성장이 거기 있을 것이며, 낯선 곳에서 새로운 공부를 하고 더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내가 있을 것이다. 공부하라, 라라 진이여!!
피터는 이 먼 거리가, 내가 그랬듯, 헤어짐을 가져올거라 본다. 그것은 뻔한 일이며, 그러므로 우리가 그럴 거라면 지금 헤어지자고 한다. 그러나 피터는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만큼의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그는 지레 포기하기 보다는 한 번 열심히 해보는 걸로 마음을 바꾼다. 먼 거리는 헤어짐을 보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먼 거리임에도 헤어지지 않을 수 있으려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애씀과 노력이 필요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 노력과 애씀을 언제까지고 지속할 순 없다.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다. 사실 나는 그들이 이제 고작 열일곱살이니만큼,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만나고 다른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순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먼 거리는, 지침을 수반한다. 먼 거리에 있으면서 서로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그 거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수이다. 너는 거기서 너의 삶을 살고 나는 여기서 나의 삶을 살고. 그것을 인정해야만 그것이 유지된다.
엊그제부터 읽기 시작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자서전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아마도 여성에게 가장 혁명적인 행위는 자기 의지로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와 환영받는 일이리라. -p.32
라라 진은 이제 자기 의지로 여행을 떠났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집을 나섰다. 물론 자기가 머무르는 곳을 또다시 집으로 삼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글로리아 스타이넘 말대로라면 이제 혁명을 시작했다. 떠나라, 길을 나서라, 자기 의지로 행동하라. 그렇다면 그녀의 미래는 아주 많이 다른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아직 학생이고 아직 젊은 모든 사람들이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란다. 나중에 한참 나이들고 나서, 아아, 그 때 공부할 걸, 하고 후회하며 살기 보다는, 일단 지금 공부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라라 진 앞에 이제 펼쳐진 세상이 너무 부러워서 한참을 마음이 아팠다. 이제 시작이니 얼마나 좋을까. 이제 힘차게 걷는 길이 놓여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새로운 강의는 얼마나 좋을까. 새로운 도서관은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하나씩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을 인생에 추가하면서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될까. 부럽다. 부러워 미치겠다.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아니, 다시 태어난다면, 열심히 공부해서 뉴욕대에 가고 싶다.
뉴욕대에 다니게 될 라라 진이 너무 부럽다.
누가 어느 대학 나왔어, 물어본다면, "나 뉴욕대 영문과 나왔지." 라고 대답하고 싶다. 아아. 얼마나 뽀대 나는가..
나는 이래서 안돼. 뽀대를 위해 공부하면 안된다.
아 뉴욕대 가고 싶다.
뉴욕대 가고 싶어.
어제 막 이런 열망에 들끓어서 친구들한테 얘기했더니 그러면 일단 뉴욕대에 여성학과 있는지 보자고 했다. 그렇지만, 뉴욕대 가려면.. 영어.. 해야 하지요?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제기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영어를 못하니까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다. 이제라도 영어 공부하자. 혹시 아는가. 내가 쉰 살이 돼서 혹은 예순 살이 돼서 뉴욕대에 가게 될지. 그 때 뉴욕대에서 오늘 강의는 뻐킹 쉿이었다고 알라딘에 페이퍼를 쓰게 될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기다려라, 뉴욕대. 언젠가 보자. 내가 캠퍼스 구경이라도 가겠다!! 문앞에 가서 사진이라도 찍고 오겠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는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향학열과 학구열을 불태우는 영화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