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에서 본은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나는
달리기에 대해서라면 내 스스로 잘하지도 못할뿐더러 앞으로도 잘 할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신체 구조상 사춘기 무렵부터
달리기를 너무 싫어하게 됐고 달린다는 것은 내게 불편함이다. 다른 사람들이 달린다고 하면 응원하고 또 멋지게 생각하지만 그것이
언젠가 나의 것이 될것이다 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스쿼트가 내게는 더 낫다.
달린다는 것을 멋지게 생각했다고 해도 그것이 내게 치명적으로 매력적이진 않았다. 푸시업이라든가 턱걸이같은 것은 내게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지만 달리기는 그정도로 내게 훅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거다. 그런데,
본이
달리는 걸 보는 순간, 살기 위해 맹렬히 달리는 걸 보는 순간, 진심으로 그를 또 그의 달리기를 응원하게 되고 더 빨리 빨리
외치게 되고, 그리고 그가 그렇게 열심히, 잘 달릴 수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 시리즈에서 본이 요원이 된
것은 철저한 훈련을 거친 뒤였고 또 그 훈련이 그로 하여금 신체적으로 많은 운동을 하게 만들었고 감각을 발달시켰겠지만, 그 훈련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기에 그래서 그의 그토록 빠른 달리기는 더 가치 있다. 물론, 그가 요원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빠른
달리기가 필요하진 않았겠지만.
그가 달리는 걸 보면서 달리기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달리기 되게 멋있구나, 엄청 멋있네... 게다가 저렇게 달리곤 난 뒤에 멈추면 심장이 폭발하듯 뛰지 않을까...
《본
슈프리머시》가 내가 기억하는 바로 그 장면이 나오는 영화였다. 본은 자신이 몇 년전 첫 임무로 죽인게 누구였는지를 떠올렸고 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뒤, 피해자의 딸을 찾아간다. 그렇게 찾아가기 위해 그의 몸은 너덜너덜해졌고 피를 흘리고 상처 입었지만,
그는 그 아이의 집에, 부모를 모두 잃었을 때 꼬마 였던 그 아이의 집에 찾아간다. 이제는 청소년이 되어있던 피해자의 딸이 자신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거기에는 피흘리는 제이슨 본이 앉아있다. 진실을 전하고 사과를 하기 위해 그렇게 피흘린 채
피해자의 집에서 기다리는 것은 결코 친절하지 못한 일이다. 의도가 뭐가 됐든 침입이고, 그 한 번의 침입으로 집의 주인은 다음
침입에 대해서도 두려워해야 하니까.
어쨌든 제이슨 본은 사과한다. 네가 알고 있는 게 진실이
아니야. 진실은 네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자살한 게 아니고 내가 너의 부모님을 모두 죽였다는 거야, 그것이 내 첫 임무였어.
나라면 진실을 알고 싶을 것 같아서... 미안해. 본은 그렇게 말한다. 피해자는 뒤늦게 진실을 알고 눈물을 흘린다. 얼마가 됐든 그
시간동안 아이는 '내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자살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이 세상을 살아온 터다. 그러니 이제라도 진실을 아는
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했고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그가 고통스럽게 살아온 시간을 대체 어떻게 할것인가. 게다가
앞으로도 그 아이는 혼자 살아가야 하는데. 제이슨이 사과를 한 것은 옳은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사과를 했다고 해도 피해자의
삶은 돌이킬 수 없다.
본 시리즈 재미있다. 그의 거침없는
액션을 보는 것도 좋은데 무엇보다 그가 머리를 쓰는게 좋다. 달리는 것은 다리가 하는 일이지만 어디로 어떻게 달려야 자신을 쫓는
자를 따돌릴 수 있는지는 그의 머리가 하는 일이다. 주변을 관찰하고 둘러본 뒤에 이렇게 뛰어서 저기에 다다른 다음에 저 도구를
사용하고... 등의 일을 그의 머리가 하면 그의 단련된 신체는 거기로 달리고 매달리고 버틴다. 이런 과정을 보는 일은 너무
즐겁다. 물론 당사자에게는 너무 힘들고 고통이겠지만.. 미안해, 제이슨 본.
오늘
이웃님의 서재에서 이 책을 보고 거기에 댓글을 남기기도 했지만, 나는 이걸 책으로 읽기 전에 몇차례 방송을 들었더랬다. 이수정
교수님이야 내가 워낙에 좋아하고 지지하는 분인데, 이 방송에 나와서는 자신이 연대하기 위해 이곳에 나왔노라 밝혔던 적이 있었다.
내가 들었던 방송에서 한 청취자가 사연을 보내 이다혜 기자가 읽어준 적이 있다.
자신은 직장 내에서 강간을 당했는데 강간당한 날 cctv 에 피해자가 두 발로 제대로 걸어나오는 장면이 찍혀 있어서 강간으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연을 적어 보내왔다. 그 사실이 너무 힘들었는데 이수정 교수님의 연대하겠다는 말씀에 힘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그 방송을 들었을 때 나는 울컥했고 이수정 교수님도 사연을 듣다가 울먹이셨다. 아 쓰면서 또 눈물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부분이 억울한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감정이다. 게다가 그저 아는 걸로 그치지 않고 이수정 교수님은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행동한다.
강간한 새끼는 잘 살아가고 있을까?
요즘 액션 영화에 빠져서 독서를 게을리 하고 있는데 어쨌든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애나 번스'의 《밀크맨》이다. 내가 독서를 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책 잘 안읽는 사람들도 두루 읽으며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은 구릴 때가 많지만, 책 많이 읽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좋다고 말하는 책은 좋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단연코 후자이고, 아직 절반도 읽지 못했지만 너무 좋다. 물론 빡침은 처음부터 따라온다.
반정부주의자 '밀크맨'은 마흔한살의 유부남인데, 열여덟살의 주인공을 따라다닌다. 옆에서 말을 걸고 너에 대해 다 알고 있노라 떠벌린다.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날 때에, 밀크맨이 여자를 만지거나 건드리진 않았어도 그 쎄한 느낌과 두려움에 척추가 떨려온다. 이 느낌을 남자들은 전혀 모르겠지? 이 새끼가 옆에 혹은 앞에, 뒤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 종아리와 척추가 긴장하는 그런 느낌. 그러나 누가 '그가 널 만졌어?'라고 물으면 '아니' 라고 답해야 하고(아니니까) 그래서 괜히 내가 예민한 여자가 되어버리는 그런 느낌. 그러므로 이런 일이 있었어도 차마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그런 느낌. 아 좆까라 진짜 다 죽어라. 아 짜증나.
처음부터, 그러니까 이 중년의 남자가 아직 십대인 여자를 보고, 찾고, 옆에 서서 말을 거는 것부터가 너무 짜증난다. 게다가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그는 여자의 남자친구를 비하한다. '어린' 놈이라고. (어쩌면)남자친구는 심지어 여자보다 두 살이 많은데, 그런데 밀크맨은 그 남자는 어린 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어린 여자에게 왜 접근하는가? 그것은 어려서가 아닌가. 왜 어린 놈은 안되는데 어린 여자 찾고 있나 밀크맨이여...
읽으면서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죽고 시작한다.
밀크맨이 말했다. "네가 가끔 보는 남자, 어린 남자 말야." 밀크맨은 어쩌면-남자친구가 너무 어리다는 식으로 '어린 남자'라고 말했다. 어쩌면-남자친구가 나보다 두살 많은데도. "그 어린 남자랑 그 남자 지역에 있는 클럽에서 춤추지, 아니야? 시내에 있는 클럽이나 대학교 근처에 있는 클럽에서도? 어린 남자와 술도 마시러 가지?" 그러고나서 술집 이름, 정확한 장소, 날짜, 시간을 읊었고 내가 주중에 시내로 가는 버스를 안 타는 날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고 말했다. (p.155)
밀크맨이 하는 저 구절 속의 모든 말들이, 그 안에 담긴 모든 의미가 다 싫다. 다 싫고 소름끼친다.
오늘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읽으면서는 이 책을 읽다가 왈칵 눈물이 고이고 말았는데, 그건 개와 고양이들 때문이었다. 읽으면서, 개나 고양이와 함께 살지도 않고 딱히 동물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나도 여기서 이렇게 눈물이 고이는데, 개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읽었을까,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개와 고양이들 때문에 울고 싶었고, 개나 고양이를 사랑하면서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울고 싶었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싫어하는 숫자가 있고, 그 숫자로 인한 징크스가 있다. 누가 들으면 웃기다고 할까봐, 이상하다고 할까봐, 신경과민이라고 할까봐 차마 말하지 못하지만, 나는 어디에서든 가급적 그 숫자를 피하려고 한다. 미친 사람 같겠지만, 만약 내가 가야할 장소의 지하철역 출구가 그 숫자라면 나는 부러 다른 곳으로 나가 목적지로 향한다. 지하철 역 승강장에서는 그 숫자로 앞이 시작하는 곳을 피하고, 합이나 차가 그 숫자가 되는 곳도 피한다. 그래서 나는 혼자가 편하다. 다른 사람에게 '여기 말고 저기로 서자' 했을 때 '왜?'냐고 물으면, 나는 차마 '이 숫자에서 이 숫자를 빼면 이 숫자가 나오잖아' 하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페이퍼나 리뷰의 제목을 쓸 때도 가급적 그 숫자를 피한다. 제일 처음 생각한 제목의 글자수가 그 숫자라면 어떻게든 말을 바꾼다. 늘이거나 줄이거나 아예 제목을 바꿔버린다. 이건 가족들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혼자만이 가진 약점이라고 해야할까.이렇게 약해지는 나를 상대에게 알리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아침에 그 숫자를 보기를 꺼리는데, 그 숫자를 접하고나면 내 기분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재작년의 수술로 인해 계속 약을 먹고 있고, 그 외에도 비타민이나 유산균을 챙겨 먹는데, 먹다보면 딱 그 숫자가 남을 일이 있다. 어쩔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다. 그러면 어김없이 기분이 안좋다. 아이고, 그 숫자가 되었네, 해버리게 되는 것.
오늘 아침 약을 챙겨 먹다가 그 숫자가 남았다는 걸 알게 됐고 그런데 내가 한 개를 먹어서 그 숫자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숫자는 순차적으로 커지고 또 순차적으로 적어지니 피할 수 없는 과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피할 수 없다. 10 다음은 9고 9 다음은 8이며 8다음은 7이다. 역순은 그렇다. 마찬가지로 1다음은 2고 2 다음은 3이다. 내가 만약 3으로 가고 싶다면 차레차레 1부터 반드시 2를 거쳐야 한다. 역순으로 7로 가고 싶다면 10부터 시작해도 어쨌든 9와 8을 뛰어넘을 수가 없다. 내가 싫어하는 숫자들은 숫자들의 연속에 분명히, 자명하게도 속해있고 나는 그것을 피할 수가 없이 맞닥뜨려야 한다. 그 때마다 기분에 영향을 받고 신경이 쓰이더라도 반드시 거쳐가야 한다.
오늘 이렇게 그 과정 하나를 거쳐가면서, 그러나 삶이란 것이 다 그렇지 않은가 싶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가 활약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슬픔이가 활동했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일에 이르기 전에 혹은 안정적인 일에 이르기 전에 반드시 어떤 나쁜 과정을 거쳐가야 하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피할 수 없이 어떻게든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게 삶.
그나저나 제이슨 본 달리는 것 때문에 러닝러닝 앤 러닝러닝 하는 노래 찾아서 올릴라고 했는데 제목을 모르겠는거에요... 중간에 막 우후~ 우후~ 막 이러는 노래인데... 가사로 검색해도 엠블랙만 나오는데 내가 생각하는 노래는 국내가 아니라 해외팝인데..........그 가사가 러닝이 아닌가...... 히융
아무튼 캐나다 뷰로 마무리 한다.
이거슨 어제의 캐나다 뷰. 라로님이 밤을 언급하시는 바람에 출근하고 가방 던진 다음에 편의점 뛰어가서 맛밤 사왔다. 마침 내게는 친구로부터 받은 편의점 상품권이 있었지롱.
그리고 이것은 오늘의 캐나다 뷰.
내가 지금은 양재에서 캐나다뷰 올리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조만간 캐나다에서 캐나다뷰 올리는 날이 오겠지. 올것이다. 오고야 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