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역사 1>을 다 읽었다. 총 네 권중에서 가장 얇은 책이니 앞으로 2-4권을 완독할 생각을 하면 앞이 깜깜하다. 게다가 1권도 읽었다고 볼 수도 없다. 글을 아직 모르는 아이들이 알고 쓰는게 아니라 글자를 보고 그리듯, 나 역시 이 글자를 '보는' 것에 그친 것 같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는 것.


나는 책을 읽으면서 종종 누군가에게 그 책에 대해 얘기해주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린다. 책의 줄거리기이도 하고, 그 책을 읽고난 감상이기도 하며, 그 책 속의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데 으윽, 너무 고통스러워 너라면 어떨 것 같아? 라고 묻는다거나, 그건 작가가 너무 욕심이 많아 지나치게 이것저것 끼워넣은 것 같아, 라는 식의 감상이기도 하다. 이것은 나의 독후활동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내가 읽은 것을 이렇게 알라딘에 쓰면서 그리고 누군가에게 얘기하면서도 그 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에 이런 독서 후 활동이야말로 독서를 더 즐겁게 만들어준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내가 그 책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얘기를 할 수가 없다. 만약 친구가 내게 요즘 무슨 책 읽어? 라고 물었을 때 내가 '성의 역사 읽어' 라고 답하고, '오 그 책 재미있어? 어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잘조잘 책에 대해 얘기하는 대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상대에게 얘기할 수 있으려면, 내가 무엇보다 그 내용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아는척을 하려고 해도 설명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아는 척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닌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부질 없다. 성의 역사에 있어서라면 이 책속의 무엇도 내 것이 되질 않았다.



길고 지루하기로 하자면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따를 책이 없겠지만, 그 책을 읽는 것은 그래도 가능하며 또 그 책에 쓰인 말이 성의 역사 만큼 모르겠는 것들로 채워진 것도 아니다. 보부아르는 그 긴 책을 쓰면서 자기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을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쓴다. 쉽게 말해 예를 드는 거다. 자 봐,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했는데 그건 이래서 문제지, 이건 이 작가가 놀랍게도 이런 감각을 가지고 있어, 라고 할 수 있게끔 이야기를 끌어 오는 거다. 그 이야기는 자신의 것이 아닌,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이었지만, 어쨌든 보부아르는 이야기를 그 안에 끌고 온다. 그러니 나는 보부아르의 주장을 들으면서 이야기와 결합할 수 있다.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프로이트도 마찬가지다. 나는 아직 그의 개론서를 두 권 읽은게 전부이지만 프로이트 읽기가 재미있었던 것은, 그 안에 프로이트가 만난 환자들의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연은 그 사람 고유의 이야기이고, 그것이 책 속에서 내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한 근거가 대고 예가 된다. 정신분석학에 사용되는 용어 자체는 내게 낯선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이해하는 것이 내게는 어렵지 않았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 사연, 즉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간 소설을 숱하게 읽어온 나로써는 사실, 정신분석학이든 사회학이든 여성학이든, 전문적 용어에 대해 알지 못했을 뿐, 개념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터였다. 정신분석학, 사회학, 여성학, 심리학, 인문학 등등, '학'이 붙는 책들은 주장이나 논리, 이론에 사연을 가져온다면, 소설은 이야기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고, 사람들이 소설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소설에는 재미있는 이야기 뒤에 다 들어있다. 한 사람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배경과 그 심리, 그리고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 고민하는 순간까지, 소설이 주는 이야기는 단순히 이야기의 재미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모든 학문이 다 들어있는 거다. 다만, 전문적 용어만 쏙 빠져있을 뿐이다. 말이 길었는데,



푸코의 성의 역사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문장 자체가 지나치게 길거나 도대체 무슨 말이지 모르겠는 문장들이 수두룩해도, 그것들을 꾸며주는 혹은 덧대주는 이야기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읽기 힘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낯선 단어들과 낯선 문장들이 쉼없이 이어진다. 아주 많은 문장들을 두 번 이상씩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르겠는거다. 집어던지고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는데, 이 책이 이번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라 그럴 수가 없었다. 와 진짜 같이 읽는 거 아니었으면 열 장도 못읽고 던져버렸을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꾸역꾸역 다 읽었다.



그렇게 읽다가 '고백'에 대한 부분을 만난다.


지난 금요일이었다. 고백에 대한 부분을 읽고 고백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푸코의 의지와는 달랐겠지만, 나는 폭력으로써의 고백에 대해 생각했다. 자, 푸코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자.


어쨌든 판단 기준의 관례와 비교해서, 전통의 권위에 의해 부여되는 보증과 비교해서, 증언뿐만 아니라 관찰과 입증의 세밀한 방법과 비교해서도 고백은 서양에서 진실을 생산하기 위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기술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우리는 고백이 유별나게 행해지는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고백의 효과는 사법, 의학, 교육, 가족관계, 애정관계, 가장 일상적인 영역, 가장 엄숙한 의례로 멀리 퍼져 나갔고, 누구나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고백하고 자신의 과거와 몽상을 고백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고 자신의 질병과 빈곤을 고백하고, 누구나 가장 말하기 어려운 것을 최대로 정확하게 말하려고 열심이고, 누구나 자신의 부모, 교육자, 의사,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고백하며, 다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고백은 기쁨과 괴로움 속에서 자기 자신만이 볼 수 있을 뿐인 글로 쓰이기도 한다. 누구나 고백한다. 아니 누구나 고백을 강요당한다. (p.71)



고백은 대체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달라는 일이다. 고백했기 때문에 애정이 성사되고 고백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도 있으며 고백했기 때문에 마음의 짐을 덜기도 한다. 또한 고백했기 때문에 당신과 내가 더 가까워지기도 한다. 고백이라는 것은 그 속성상, 처음부터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신과 내가 처음 봤을 때, 알지도 못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당신에게 좀 더 다가가고 싶었을 때, 그럴 때 하는 것이 고백이다. 푸코는 '누구나 고백을 강요당한다'라고 했는데, 그 말도 역시 맞다. 우리는 때때로 상대에게 고백을 강요하기도 한다. 범죄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사적인 관계에서도 그런 일들은 빈번히 일어난다.


고백은 당신과 나를 좀더 내밀하고 가까운 사이가 되게 하는데 일조하는데, 자신에 대해 먼저 드러내기 어려워하는 친구도 내가 먼저 무언가를 얘기하면 이내 자기 얘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아, 이 친구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거구나, 라는 것을 그 친구를 보며 깨닫곤 했었다. 이 친구는 말수가 적고 자신을 드러내는 걸 꺼려하는 친구지만, 그러나 내가 '말해말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이랬어' 라고 말하면, '아 그래, 내게도 그런 일이 있어' 라고 하면서 자신의 얘기를 꺼내는 거다. 그렇게 나에 대해 그 친구가 알아가고 그 친구에 대해 내가 알아가면서 우리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연인 사이도 마찬가지. 사귄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연인이 어떤 일을 내게 얘기한 적이 있었고, 나는 그 때 내가 지금 당장 물리적으로 그의 옆에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속상했었다. 그가 내게 '지금 네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 라고 말한 건 아니지만, 그 때만큼는 내가 옆에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고백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은밀한 바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고백은 여지없이 분명한 폭력이다. 나는 듣기 싫은 말을 강제로 들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고, 그것이 너무 괴로웠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알게된 일에 대해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 생각해도 대체 왜 내게 그걸 말해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할까 몸부림치지만, 결론은 하나다. 그 얘기를 내게 했던 당사자들은 그 자신이 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중에는 죄에 대한 것도 있었다. 가해에 대한 것이 있었고 피해에 대한 것이 있었다. 상대는 내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게 무거운, 아주 무거운 일이 되었다. 들으면서도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고 그 후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그걸 얘기하던 그 당시 그 사람의 눈빛 같은 것들이 여전히 떠올라 괴롭다. 왜 내게 그걸 얘기했을까. 장담컨대, 내게 그 얘기를 하고난 후 당사자들은 자신의 짐을 어느 정도 덜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덜어진 짐의 무게는 고스란히 내게로 와 더해졌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런 것들을 듣게 한게 나는 소름끼치도록 싫다. 왜 내게 그걸 떠넘겼을까. 왜 자신의 짐을 덜자고 내게 더했나.



지난 금요일은 내내 고백에 대해 생각했고 그러자 자연스레 신해철의 노래 <고백>이 생각났다. 폭력으로써의 고백에 대해 생각했으면서도, 그러나 <고백>이 생각났다. 금요일은 스트레스가 켜켜이 쌓여서 폭발할 것 같은 날이었고, 저녁에 술약속이 있었던 터라, 이런 기분으로 술마시면 나 미치겠다 싶어 나를 안정시켜야겠다 싶었다.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할 예정이었던 나는 일단 편의점에 들러 컨디션을 샀다. 오늘은 이런 기분으로 마시면 취할테니 조금이라도 준비하자, 하고 컨디션을 친구것까지 사서 준비했다. 그리고 친구가 도착하기 전까지 잠시라도 내 마음과 정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나는 <고백> 을 재생시켰다.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았다.




친구가 오기 전에 내 기분을 낫게 해야 한다. 스트레스로부터 그리고 연달아 떠오른 폭력으로써의 고백으로부터 나는 빠져나와야 했다.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내가 폭력이라고 생각한 건, 그 고백의 성격들 탓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상대에 대한 내 애정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였다. 만약 같은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내 반응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중 한 고백은 내가 사랑했던 그 누구도 하지 않을 짓이었기에 도저히 교차할 수 없었다.



쉽게 사랑이라 말하고 쉽게 돌아서곤 했었지
나에겐 사랑이란 말은 그저 나 자신에게 한 말이었어

처음 너를 본 순간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
내 삶의 끝까지 가져 갈 단 한번의 사랑이 내게 왔음을
내말을 들어봐

이제 난 다시는 거짓 사랑을 얘기하지 않아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사랑을 이제 난 찾았어

이제 난 다시는 헛된 사랑을 얘기하지 않아
많은 세월에 바래져도 언제나 난 너를 사랑해



친구가 도착했고 나는 친구에게 컨디션을 건넸다. 자, 우리 이거 마시고 시작하자. 친구는 웃었고 나는 컨디션을 앞으로 내밀며 친구의 컨디션과 건배했다.



푸코의 문장이(혹은 번역가의 문장이) 도대체 뭔말인지 잘 모르겠어서 아주 많은 것들이 헷갈린다. 뭐 어쩌라는거야, 이러라는 거야 저러라는 거야, 하면서 헷갈린 거다.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이다가, <제5장 죽음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권력>에서부터 재미있어졌다. 오, 군주의 생살여탈권에 대한 것이었는데, 오오, 흥미롭다.



군주는 정당하게 전쟁을 벌이고 신민에게 국가의 방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할 수 있고, "직접적으로 신민의 죽음읠 꾀하지"않으면서 합법적으로 "신민의 목숨을 좌지우지할"권한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군주는 신민에 대해 "간접적"생살여탈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만일 군주에게 항거하고 군주의 법을 위반하는 자가 신민의 한 사람이라면, 군주는 그의 생명에 대해 직접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징벌의 명목으로 군주는 그를 죽이게 된다. 이렇게 이해된 생살여탈권은 더 이상 절대적 특권이 아니다. 이런 생살여탈권은 군주의 보호와 고유한 존속을 조건으로 갖는다. (p.154)



물론 그렇다고 이 5장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한 건 아니지만, 요건 재미있어서 나중에 5장은 다시 읽어봐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권력은 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육체"와 "인구"의 연결 지점에서 성은 죽음의 위협보다는 오히려 생명의 관리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권력의 중심적 표적이 된다.
피는 오랫동안 권력의 메커니즘, 권력의 발현, 권력의 관례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p.167)



그리고는 '사드의 작품에서 피는 줄곧 쾌락을 따라 흐른다'(p.169)고 사드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으으..나는 사드 안읽었지만 싫은데, 하는데, 으앗, 너무 싫은 바타유가 나와..



정반대의 극단에서 우리는 그 동일한 19세기 말부터 성생활의 주제를 법, 상징적 질서, 주권의 체계에 재편입시키기 위한 이론적 노력을 추적할 수 있다. 일상의 성생활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확고한 의도가 있는 그러한 권력 메커니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돌이킬 수 없이 확산적인 성격을 (그것도 정신분석의 탄생부터, 다시 말해서 정신분석이 유전적 퇴화의 신경-정신의학과 단절하면서부터) 의심한 것은 정신 분석이나 적어도 정신분석에 있었을 수 있는 가장 초지일관한 것의 정치적 영광이다. 법, 즉 혼인관계, 금지된 혈족관계, 아버지-군주의 법을 성생활에 원리로 부여하려는, 요컨대 욕마을 중심으로 옛 권력의 영역 전체를 불러들이려는 프로이트의 (아마 그와 동시대적인 인종차별의 광범위한 대두에 대한 반발로 인한) 노력은 이로부터 유래한다. 정신분석이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파시즘과 대립하는 입장이었던 것은 이러한 노력 덕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분석의 입장은 분명히 역사적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법, 즉 혼인관계, 금지된 혈족관계, 아버지-군주의 법을 성생활에 원리로 부여하려는, 요컨대 욕망을 중심으로 옛 권력의 영역 전체를 불러들이려는 프로이트의 (아마 그와 동시대적인 인종차별의 광범위한 대두에 대한 반발로 인한) 법, 죽음, 피, 주권의 심급에 따라 성적인 것의 영역을 사유하는 것은 사드와 바타이유에 대한 참조가 어떠하건, 그들에게 요구되는 "전복"의 담보가 무엇이건, 결국 역사적 "후방-선회"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성생활의 장치와 동시대적인 권력의 기술로부터 성생활의 장치를 사유해야 한다. (p.170-171)




나는 위의 문장을 아무리 읽고 또 읽어봐도 그래서 사드와 바타이유가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들의 그 피를 부르는 성에 관한 것은 그들의 의도가 어떠했건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것인가. 그들이 뭘 어쨌건간에 우리는 별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 그렇지만 내가 사드를 싫어하고 바타유를 싫어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안다. 사드는 사실 읽어본 적 없으니 '모르면서 싫어한다'고 하는게 맞는 말일테고, 으으 바타유 진짜 졸 싫다. 바타유 너무 유명해서 내가 그의 작품을 어디 한 번 읽어볼까, 했던게 《눈 이야기》이다.
















이 책 읽다가 37페이지에서 포기했다. 거기에 대해 쓴 명품 페이퍼는 여기 ☞ https://blog.aladin.co.kr/fallen77/9424234


저 페이퍼에서도 얘기하지만, 여기에서는 섹스하면서 오줌 싸는 얘기가 나온다. 상대와 자기의 몸에 오줌을 싸면서 쳐발쳐발하는게 나오고, 단체로 섹스하면서도 그렇게 하는데, 나는 일단 그 부분에서 오줌 냄새 너무 나서 싫었고, 게다가 장농에 들어가서도 오줌 싼다 그래서 흠씬 두들겨패고 싶었다. 오줌 이불빨래 안해본 바타유 되시겠다. 지가 빨래하는 거 아니라고 그렇게 여기저기 오줌 싸대면 하아- 일하는 사람에게 왜 그런 고통 안겨주지요? 나는 푸코의 성의 역사에 바타유 나오는 순간, 오줌 빨래 니가 해라... 하는 마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눈 이야기에 실린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살펴보자.


1897년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의 소도시 비용에서 태어나, 매독 환자에 맹인인 아버지와 우울증을 동반한 정신착란에 시달리는 어머니 아래에서 자랐다. 한때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성직자의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파리 국립고문서학교에 진학하여 파리 국립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1962년 오를레앙 도서관장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사서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사드의 적자'라 불릴 만큼 매음굴을 전전하며 에로티슴 소설을 썼고, 니체의 무신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헤겔의 종교철학에 심취하여 <도퀴망> <크리티크>등 당대 사상계를 주도한 잡지를 주재하기도 했다.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종교, 정치, 문학, 예술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집필 활동을 펼쳤다. -<눈 이야기> 책날개의 작가소개 中



이 책의 뒷표지에는 수전 손택도 바타유를 좋아한다고 했는데(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 나는 그래서 뭔가 있을 줄 알았지. 이불 빨래 안하고 오줌 싸는 사람들만 가득할 뿐이었다. 그런 바타유에 대해서라면 나는 얼마후, 아아, 드워킨 님의 글에서 만나게 된다. 안드레아 드워킨 만세다! 드워킨이 바타유를 지적할 때, 나는 내가 바타유를 싫어하는 게 나의 본능적인 감각이라는 것을 알았고, 살면서 습득한 경험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바타유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매춘은, 여자의 태도의 논리적인 귀결이다. 여자가 매력적인 한 남자의 욕망의 먹이가 된다. 여자가 순결을 지키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햇으므로, 완전히 남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면, 문제는 어느 정도의 금액에, 어떠한 상황에서 여자가 굴할 것이냐이다. 만약 조건이 이루어진다면, 여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성의 대상으로 내놓는다. 매춘은 다만 경제적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을 뿐이다. (바타유의 단언, p.237)








안드레아 드워킨의 이 책에서도 수전 손택이 언급된다. 수전 손택을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이 바타유의 글을 심오하다고 했다는 거다. 드워킨은 바타유의 <안구담>이란 책에 대해 언급하는데(고추를 빨고 오줌을 싸고 발기되는 걸 보기 위해 목졸라 죽이고, 안구를 빼서 항문에 넣고..), 드워킨의 포르노그래피를 읽고 쓴 명품 페이퍼는 여기 ☞ https://blog.aladin.co.kr/fallen77/11398382




으 싫다... 그의 문학을 심오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마음속에 그것을 '오 심오하다!' 느껴서 그런걸까? 글쎄, 모든게 취향의 문제라지만, 난 잘 모르겠네?




여성학 책들을 읽다보면 매번 모든 책이 백프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태어나 살아온 삶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책들이 머릿속에 팍팍 들어오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러나 일단 읽고 60프로 정도만 이해한 채로 있어도, 그렇게 읽었던 경험과 60프로가 나에게 남아 있어서, 훗날 다른 책을 읽다가 갑자기 팍 떠오르면서 그 전에 60프로 이해되던 것이 갑자기 75프로가 되기도 한다. 앗, 그 때 그 책에서 말한게 바로 이거였구나! 하고. 또한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네? 라고 했다가도 다른 책을 읽다가 퍼뜩, 아, 혹시 이게 그 뜻이었나? 하고 찾아보면 또 이해가 될 때가 있다. 이런것들이야말로 독서근육일 것이다. 근육이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푸코의 책을 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책(이야기가 없는!!)을 읽는 근육이 내게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푸코의 책을 4권까지 어떻게든 억지로 읽어낸다면, 지금의 5프로 이해가 15프로가 되고 70프로가 되는 날도 올것이다. 물론 계속 독서를 한다는 전제하에 그렇다. 다른 책들을 또 읽고 읽다보면, 앗 그 때 푸코가 한 말이 이건가? 하고 다시 들춰보게 될 날도 오겠지. 그런날을 기다리며 나는 이제 2권을 시작하겠다. 아, 며칠 좀 쉰 다음에....































성에 관해 말하도록 부추기는 모든 선동이 성의 비밀을 깨뜨리려고 하건, 말하는 방식 자체에 의해 성의 비밀이 막연히 지속되건 성의 비밀은 아마, 그 모든 선동의 자리를 결정하는 기본적 실체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 모든 선동의 매커니즘 자체에 속하는 주제, 즉 성에 관해 말하라는 요구를 구체화 하는 방식, 성에 관한 담론의 한없는 확산적 유통에 불가결한 허구이다. 근대 사회에 고유한 것은 근대 사회가 성을 어둠 속에 머물도록 운명지었다는 점이 아니라, 근대 사회가 성을 ‘그‘비밀로 내세움으로써 언제나 성에 관해 말할 운명이었다는 점이다. - P44

어른과 어린이의 분리, 부모의 침실과 아이들의 침실 사이에 확립된 양극 구조(이 양극 구조는 19세기 동안 민간 주거가 대대적으로 건설될 때 철칙이 되었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의 상대적 격리, 세심한 육아(育兒)의 엄격한 수칙[어머니의 수유(授乳), 위생], 어린이의 성생활에 대한 부단한 관심, 추정된 수음의 위험, 사춘기에 부여되는 중요성, 보모에게 암시되는 감시 방법, 훈계, 비밀과 두려움, 필요를 인정받음과 동시에 꺼려지는 하인의 존재, 이 모든 것으로 인해 가족은 가장 작은 규모로 축소된 형태까지도 단편적이고 유동적인 다수의 성생활로 포화된 복잡한 조직망이 된다. - P57

어쨌든 판단 기준의 관례와 비교해서, 전통의 권위에 의해 부여되는 보증과 비교해서, 증언뿐만 아니라 관찰과 입증의 세밀한 방법과 비교해서도 고백은 서양에서 진실을 생산하기 위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기술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우리는 고백이 유별나게 행해지는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고백의 효과는 사법, 의학, 교육, 가족관계, 애정관계, 가장 일상적인 영역, 가장 엄숙한 의례로 멀리 퍼져 나갔고, 누구나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고백하고 자신의 과거와 몽상을 고백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고 자신의 질병과 빈곤을 고백하고, 누구나 가장 말하기 어려운 것을 최대로 정확하게 말하려고 열심이고, 누구나 자신의 부모, 교육자, 의사,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고백하며, 다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고백은 기쁨과 괴로움 속에서 자기 자신만이 볼 수 있을 뿐인 글로 쓰이기도 한다. 누구나 고백한다. 아니 누구나 고백을 강요당한다 - P71

권력은 손에 넣거나 빼앗거나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간직하거나 멀어지게끔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다. 권력은 무수한 지점으로부터, 불평등하고 유동적인 관계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행사된다.
권력관계는 다른 유형의 관계[경제 과정, 지인(知人)관계, 육체 관계]에 대해 외재성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관계에 내재하고, 거기에서 새겨나는 분할, 불펻등, 불균형의 직접적 결과이고, 역으로 이러한 차별화의 내부적 조건이고, 단순한 금지나 추방의 역할에 힘입어 상부구조의 위치를 점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하는 거기에서 직접적으로 생산적 역할을 맡는다. - P110

대개의 경우에는 유동적이고 과도적인 저항지점들이 문젯거리로 떠오르면서, 사회의 여기저기에 균열이 생기고 통일성이 무너지고 재편성이 초래되고 개인에게 자국이 나고 개인이 재단되고 개조되며 개인의 마음속에, 개인의 육체와 영혼에 축소할 수 없는 영역이 그려진다. - P112

권력관계에서 성생활은 가장 은밀한 요소가 아니라 가장 많은 활동에 이용될 수 있고 가장 다양한 전략에 대해 거점 또는 연결 지점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가장 큰 도구성(道具性)을 갖추고 있는 요소의 하나이다. - P120

‘여성 육체의 히스테리화‘, 이것은 여성의 육체가 완전히 성생활로 포화된 육체로서 분석되고, 이를테면 자격을 부여받거나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하고, 여성의 육체에 고유한 병리학의 영향 아래 여성의 육체가 의료 실천의 영역에 통합되며, 끝으로 여성의 육체가 (여성의 육체에 의해 일정한 다산성을 보장받게 되어 있는)사회체, (여성의 육체가 실질적이고 기능적인 요소이게 되어 있는)가족 공간, (여성의 육체가 낳고, 교육하는 동안 내내 지속하는 생명-도덕적 책임 때문에 보호해야 하는)어린이의 삶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삼중의 관계이다. 가령 어머니는 "신경질적인 여자"라는 부정적 이미지에 힘입어, 이 히스테리화의 가장 가시적인 형태가 된다. - P121

로마의 가부장은 노예와 자식에게 생명을 "베풀었고" 노예와 자식으로부터 생며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 P153

군주는 정당하게 전쟁을 벌이고 신민에게 국가의 방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할 수 있고, "직접적으로 신민의 죽음읠 꾀하지"않으면서 합법적으로 "신민의 목숨을 좌지우지할"권한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군주는 신민에 대해 "간접적"생살여탈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만일 군주에게 항거하고 군주의 법을 위반하는 자가 신민의 한 사람이라면, 군주는 그의 생명에 대해 직접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징벌의 명목으로 군주는 그를 죽이게 된다. 이렇게 이해된 생살여탈권은 더 이상 절대적 특권이 아니다. 이런 생살여탈권은 군주의 보호와 고유한 존속을 조건으로 갖는다. - P154

살아가는 행위는 더 이상 죽음의 우연과 숙명성 속에서 때대로 떠오를 뿐인 그 접근 불가능한 기반이 아니라, 지식의 통제와 권력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일정 부분 넘어가는 것이 된다. - P162

일반적으로 "육체"와 "인구"의 연결 지점에서 성은 죽음의 위협보다는 오히려 생명의 관리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권력의 중심적 표적이 된다.
피는 오랫동안 권력의 메커니즘, 권력의 발현, 권력의 관례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 P167

일상의 성생활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확고한 의도가 있는 그러한 권력 메커니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돌이킬 수 없이 확산적인 성격을 (그것도 정신분석의 탄생부터, 다시 말해서 정신분석이 유전적 퇴화의 신경-정신의학과 단절하면서부터) 의심한 것은 정신 분석이나 적어도 정신분석에 있었을 수 있는 가장 초지일관한 것의 정치적 영광이다. - P170

"성의" 관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권력을 "권력"으로 만드는 것으로부터 눈을 도렬 권력을 단지 법과 금기로서만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성, 우리의 눈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심급, 우리가 보기에 우리의 현재 모습 전체 아래 감춰져 있는 듯한 이 비밀, 내보이는 권력과 감추는 의미에 의해 우리를 현혹하고 우리의 현재 모습을 알게 해달라는, 우리를 규정하는 것을 밝혀 달라는 우리의 요구를 받는 이 지점, 성은 아마 성생활이ㅡ 장치와 이 장치의 작동에 필요하게 된 관념적인 지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P177

성은 권력이 육체, 육체의 물질성, 육체의 힘, 육체의 에너지, 육체의 감각, 육체의 쾌락을 장악함으로써 조직하는 성생활의 장치에서 가장 사변적이고 자아 관념적이며 가장 내면적인 요소이다. - P177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20-11-17 1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푸코 이 대머리가 맘고생을 시켰군요.... 그치만 알지? 푸코 읽자고 한 건 다락방님이야 ㅎㅎㅎㅎㅎ

음, 이 개념을 이렇게 버무리는 게 완전히 푸코의 뜻과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럴 수는 있어요.

‘권력‘이라는 걸 단순히 누군가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고 원치 않는 일을 하게 하거나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보면 안 된다는 게 이 책에서 푸코가 하는 큰 주장 중 하나거든요.

권력은 동사고, ‘지식‘을 만든다거나 ‘담론‘의 물꼬를 어느 방향으로 돌리려는 시도 자체가 하나의 권력행위라고 볼 수 있어요. 예를 들면, 권력이란 이런 것이라고 정의하거나 주장하는 것 자체 역시 하나의 권력행위라고 볼 수 있지요. 좀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이 책에서 푸코가 성의 ‘억압 가설‘을 비판하는 이유 중 하나는, 권력이란 억압행위라고 정의하는 순간 억압 이외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다른 양상을 숨김으로써 자체로 어떤 권력을 유지하고 지지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점이거든요? 그러니까 ‘권력은 억압한다‘는 말 자체가 권력행동이라는 거죠.

같은 맥락에서, 이 책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다락방님의 말 역시 일종의 ‘설명‘ 행위잖아요. 그 말씀은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이 책의 내용을 좔좔좔 설명해주는 것만큼이나 어떤 영향을 미칠 거고, 또한 동시에 다락방이라는 사람의 어떤 일면에 대한 설명도 되지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이 페이퍼는 이대로, 되게 많은 것을 말해주는 양질의 페이퍼라는 뜻입니다.
수고하셨어용^-^

다락방 2020-11-17 10:35   좋아요 3 | URL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저는 스승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스승이 있다면 아는 것에 있어서 속도도 빠르고 또 깊이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푸코에 있어서는 진짜 스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네 권이나 되는데 두달 안에 읽어야하니 개론서 건너뛰자, 했는데, 개론서 한두권쯤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푸코는 누가 좀 이끌어주는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푸코의 성의 역사를 읽고 이런(?) 페이퍼를 쓴다는 것은 쇼님 말대로 푸코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거 알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이렇게밖에 쓸 수가 없었어 ㅠㅠ 왜냐하면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쓰지 못할테니까...
이게 1권 다 읽어가니까 뭔가 어렴풋하게 짐작 되고 그러는데 그래서 뒤를 더 읽어봐야겠다 생각되기도 해요. 페이퍼에도 언급했지만 생살여탈권 부분 재미있더라고요. 물론 이조차도 반복해 읽어야겠지만요.

아무튼 개론서 또 살거야, 나. 누구도 날 막을 순 없어!!

푸코 제가 읽자고 한 거 너무나 잘 압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미치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어, 내가 나를 원망해야 한다!! 만세!!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얼렁 페이퍼 써줘요, 쇼님. 내 이해를 도와줘!

단발머리 2020-11-17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메고 있는 저에게 이 페이퍼와 댓글들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다락방 2020-11-17 11:41   좋아요 0 | URL
다 읽어도 여전히 헤매입니다, 단발머리님. 이 페이퍼가 제가 쓸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ㅠㅠ

공쟝쟝 2020-11-18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여차저차 읽어낸 그대 대단! ^^ 언급하신 바타유는 정말 🤢 부글부글... 아 성의 역사 빨리 읽(어버리)고 싶다... 심호흡중.. 사실 저도 이해 못할까봐 입문서들만 뒤적이는 중이야요 ㅋㅋ

다락방 2020-11-18 07:58   좋아요 1 | URL
1권은 어떻게든 읽어내긴 했는데 이제 남은 것들은 어쩌나 싶어요. 후딱 읽어버리고 싶은데 무슨 말인지 모르니 걍 펼쳐보기도 싫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아 인생 뭘까요?

공쟝쟝 2020-11-18 08:15   좋아요 2 | URL
똑똑이들을 보며 똑똑해지는 과정?? 빨리 좀더 똑똑해져서 푸코 따위 비웃어버리자. 흥

scott 2020-11-19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이 작가 천재 인가봐요. 잭에 이야기로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다가 나중에 올리브와 함께 했던 (자잘하게 스치고 지나갔던 인연들)이들에 삶에 마지막 행복한 순간을 슬라이드 영상처럼 끼워 넣었어요.

다락방 2020-11-19 10:27   좋아요 1 | URL
으흐흐흐흐. 푸코 페이퍼에 달린 댓글이지만 찰떡같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를 말씀 하신다는 걸 알아 듣습니다 ㅋㅋㅋㅋㅋ
저 오늘 출근길에 <단속>한 편 읽었는데, 왜이렇게 좋아요, 스콧님? 저도 정확히 천재라고 생각했어요. 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 천재다, 소설 천재! 저도 소설 천재라고 생각하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너무 좋아요 ㅠㅠ 한 편 읽고 너무 좋아서 연달아 읽기보다 하루에 하나씩만 읽을까 싶고 마음을 정하지를 못하겠어요. 너무 좋아요, 스콧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