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과 ㅇㅈ

'캐서린 맥키넌'의 [포르노에 도전한다] 를 읽고서도 생각한 거지만, 왜 같은 영상을 보고 여성과 남성이 느끼는 게 다른걸까. 아니 그보다는, 손발을 묶고 재갈을 물리고 구타의 흔적이 보이고, 성기를 입안 가득 쑤셔넣는 영상이, 이토록 언급하기에도 괴로운 영상이, 왜 나와 다른 성별에게는 발기의 자극제가 되는걸까. 포르노에 있어서라면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옹호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낀다. 캐서린 맥키넌이 그랬고 안드레아 드워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수맣은 포르노 영상들과 포르노, 매춘, 강간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아, 세상에는 너무 많은 남자들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고 너무 많은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정말 너무도 많이 남자들이 말과 글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화지도 카메라도 마찬가지. 오래전부터 여성을 학대하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괴롭히면서 그러나 많은 남자들은 그것이 여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고, 자기들이 원하는데 자기들도 잘 몰랐고, 그렇게 태어난 것이 여자의 본성이라고들 말해왔다. 심지어 미성년자 여성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그것을 원한것처럼 말해왔다. 무엇을. 성적 학대를. 여성을 고문하는 영상을 찍으면서 그 안에 쾌락이 있는 것처럼 표현해, 많은 남자들이 그것을 실제와 다르지 않게 생각한다. 현실에서도 저런 일들이 자신앞에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런 영상을 보면 나는 괴로워서 두 눈을 질끈 감는데, 그런데 남자들은 너도 포르노에서처럼, 이라면서 그런 행위를 강요하거나 '부탁'한다. 실제 이 책에서도 그런 사례가 나온다. 섹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여자애를 성인 남자들이 붙잡고 포르노 잡지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해보라고 안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했던 일들이. 실제상황이다.



남자들이 쓸데없이 너무 많은 말들을 했다. 남자들이 사실이 아닌 것을 너무 사실처럼 써냈다. 사드가 그랬고 바타유가 그랬다. 바타유라면 일전에 내가 그의 책을 읽어보려다가 40페이지도 못읽고 별 하나를 준 구매자평을 쓴 적이 있다. 연달아 페이퍼도 써냈는데, 그가 초반부터 섹스와 오줌싸기를 연결시키는 바람에 읽기 힘들었던 거였다. 안드레아 드워킨은 자신의 책 [포르노그래피]에서 바타유의 <안구담>이란 책을 언급한다. 이 책에서도 고추를 빨고 또 빨고 오줌을 싸고 발기되는 걸 보기 위해 목졸라 죽이고 안구를 빼내서 항문에 넣는 기이한 행각을 벌인다. 그리고 많은 저명한 저술가들이나 사상가들이 그런 바타유의 문학을 심오하다고 옹호한다. 그중에 한 명이 수전 손택이었고. 손택이시여... 오줌싸고 안구를 적출해 항문에 넣는 것에 무슨 심오함이 있나요? 사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성병을 옮기고 고문을 하고 미성년자를 납치 감금한 사드의 문학에 반해 그를 옹호하는 장문의 글을 보부아르가 썼다. 심지어 사드는 많은 사람들에게 천재적이라 인정받기도 했다. 미성년자 납치 감금과 학대 고문... 에서 무슨 천재적인걸 본것인가. 남들은 하지 못하는데 실제로 행하는 데에서 그 큰 용기를 본 것인가. 인간들이여....



잠깐 바타유가 한 말을 들을 필요가 없지만 들어보자. 손택이 그의 글을 심오하다고 하면 안됐던 이유가 되는 글이다.




매춘은, 여자의 태도의 논리적인 귀결이다. 여자가 매력적인 한 남자의 욕망의 먹이가 된다. 여자가 순결을 지키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햇으므로, 완전히 남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면, 문제는 어느 정도의 금액에, 어떠한 상황에서 여자가 굴할 것이냐이다. 만약 조건이 이루어진다면, 여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성의 대상으로 내놓는다. 매춘은 다만 경제적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을 뿐이다. (바타유의 단언, p.237)





이 책은 드워킨이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집필한 책이다. 그리고 1981년에 출간되었다. 그 때로부터 사십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포르노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퍼지고 있다. 심지어 불법촬영한 영상물들이 포르노라는 이름을 달고 유포되고 있다. 


어제 토요일에는 혜화역에서 <페미사이드 철폐 시위>가 있었다. 나는 드레스코드인 블랙에 맞춰 아빠의 롱패딩을 입고 검정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푹 눌러쓴 뒤에 시위에 참여했다. 아마 내가 그러한 것처럼 그 자리에 모여든 여자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더이상 여자들의 죽음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 여성을 살해하는 이 세상에 대해 그만두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그 자리에서 때리지말라고 죽이지말라고 목청껏 소리쳤다. 작년 여름에는 땡볕에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니 불법 촬영하지 말라고 소리쳤는데, 이제는 추위속에서 죽이지말라고 소리쳐야 했다. 우리는 그렇게 소리를 치고 남자들은 불법촬영을 한다. 시위 중에도 유튜브로 불법촬영하는 남자가 있어 경찰이 제지하는 일이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왜 한쪽 성은 불법촬영 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왜 한쪾 성은 불법촬영을 할까. 왜 한쪽은 죽이고 한쪽은 죽이지 말라고 소리질러야 할까.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왜 한쪽 성이 괴로워하는 일을,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는 일을, 한쪽 성은 보고 즐기고 유포를 할까. 몰래 신체를 촬영하는 일이, 침범하는 일이, 고통을 주는 일이, 왜 남자들에게는 즐기는 일이 되어있을까. 왜일까.



나는 그것이 남자가 너무 많이 말하여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많은 남자들이 너무 여기저기에서 너무 많이 말하고 너무 많이 쓰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은 그런 쓰레기 같은 말과 글들로 가득해지고 그리고 그것은 당영한 듯이 다음 세대의 남자들에게 전해진다. 남자들은 너무 많이 말하여진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말과 글을 통해 강간을 여자들도 원한다고 말한다. 여자인 당사자들이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아니야 사실은 여자들도 강간을 원한다니까, 라고 말하고 있다. 여자를 김치녀로, 된장녀로, 맘충으로 명명하는 것도 남자들의 몫이었고, 그들이 명명하는 순간 그 이름들은 힘을 가지고 또 전파된다. 남자들은 진짜 입을 다물줄을 모르고 손을 가만둘 줄을 모른다. 너무 많이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일들에 대해 짐작하고 말하고 쓴다. 그리고 그것들이 너무 많이 돌아다니고 전해져서 아직까지도 유효하게 작용한다. 시상식만 봐도 후보들이 죄다 남자들이잖아. 남자들은 너무 많이 사회 곳곳에서 웃기려고 하고 예술을 하려고 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진상짓들을 한다. 강간을 사실은 원한다고, 여자들의 노는 사실은 예스라고, 자기들이 여자인 당사자도 아니면서 멋대로 말들을 해대고 그것을 사실화 한다. 남자들은 너무 많이 말한다. 남자들은 사실은 강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자들도 좋아서 해놓고는 수틀리면 그것을 강간으로 신고한다고 말한다. 그 말들을 거침없이 해대는 통에 또 사실화 된다. 남자들은 쓸데없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부끄러움도 모르는채로 너무 나선다. 너무 나대고 설치는 게 지금의 남자들이 하는 일이다. 남자들이 너무 많이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 남자들이 너무 많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 남자들이 너무 입을 많이 가지고 있고 남자들이 너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것처럼 그렇게 전달하는 입과 손을 더이상 작동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그들에게 지면을 더이상 주어서는 안되고 그들에게 마이크를 주어서는 안된다. 여자들을 때리고 묶고 정액을 뿌려가면서 그것이 마치 여자들에게도 쾌락인냥 포장해 보이는 일을 더이상 하게 해서는 안된다. 여자들을 몰래 촬영하면서 그것을 올리는 일을 하게 두어서는 안된다. 



남자들은 그동안 너무 많이 말해왔다. 오줌싸고 안구를 적출해서 항문에 넣는 것이 왜 문학이란 이름으로 나와야 하는가. 게다가 그것이 어째서 심오한 글이 되는가. 미성년자를 납치하고 감금하고 고문하는 사람의 글이 어째서 천재적이란 칭찬까지 들어야 하는 것인가. 남자들이 너무 많이 말했고 너무 많이 썼다. 그리고 아주 많은 남자들이 그것들에 환호했다. 이제 그래서는 안된다. 



남자들은 그만 말하고 그만 써야 된다. 남자들은 그만 그리고 그만 찍어야 한다. 남자들은 그만 만들어야 한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갓난아이의 질을 강간>해 보고 싶다며 그녀의 음모를 깎아냈다. - P21

우리들은 프레더릭 더글러스나 소자나 투르스(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의 일인칭 언어, 프리모 레비나 에리 위즐(유대인 강제수용소에 관해 증언한 사람들)의 일인칭 언어, 나데즈나 만델스탐이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일인칭 언어를 신뢰한다. 방금 말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고민이나 공포의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도 증언하려고 과감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한 증언을 사람들은 도저히 이애할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용기 있는 증언을 한 탓에 영예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 우리들은 그녀들의 이야기에 수치와 타락의 악취가 배어 있다고 단정하여 얼굴을 돌려 보렸다. 동시에 그녀들의 이야기는 너무도 두렵고 이해의 차원을 넘어 불쾌한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관하였던 사람들-모든 시점에서 우리들 대부분의 인간-까지도 고발했기 때문이다. - P26

포르노그래피는 여성의 몸과 정신에 대한 조직화된 파괴행위이며, 강간·구타·근친상간·매춘은 포르노그래피와 서로 활발히 연계되어 있다. 포르노그래피의 특질은 비인간화와 새디즘이다. 그것은 여성에게 선포하는 전쟁이며, 인간의 존엄이나 자아 그리고 인간적 가치에 대한 끝없는 공격이다. 살아남은 여성들은 각자 자기 자신의 인생경험을 통해서, 포르노그래피가 여성을 구속하고 있다는 사실-여성들은 포르노 필름 속에 붙잡혀 있으며, 그 필름이 또 다른 여성에게 사용되고 있으며, 남성이 그 필름을 갖고 있는 동안 여성은 계속해서 감금된 것이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 P27

포르노그래피란 사진으로 여성을 명백하게 성적 종속물로 표현하는 것이며, 성의 대상·물체·도구로 인격을 박탈 제시하는 문장이다. 즉 여성을 고통이나 굴욕을 즐겨 받아들이는 성적인 대상으로 표현하는 것, 강간당하는 가운데 성의 쾌락을 경험하는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는 것, 묶거나 자르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구타하거나 육체적으로 손상시키는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는 것, 성적 복종이나 노예상태, 더구나 성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자세나 위치로 여성을 표현하는 것, 여성의 몸의 부분-질이나 유방이나 엉덩이를 포함하는데, 반드시 이것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을, 즉 여성을 그 부분 자체로 깍아내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드러내게 하는 것, 여성을 타고난 매춘부로 표현하는 것, 여성의 질에 물건이나 동물의 페니스를 넣는 장면, 모욕과 상처와 가학의 시나리오에 따라 여성을 부정하거나 열등시하는 것, - P34

피를 흘리고 구타당하거나 상처입어야 할 것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이러한 조건을 섹시하다고 여겨 경연대회에서 표현케 하는 것이다. - P34

현 재판소는 포르노그래피를 옹호하고 있다. 재판소의 사법 판단으로는, 여성에게 미치는 포르노의 해악은 인정하지만-혹은 그 해악을 인정한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그래도 여전히 여성에게 헌법은 그 해악이 행해지는 것을 옹호하고 있다고 말한다. 재판소에서 이러한 견해를 유지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곧 현실이다. 말하자면 재판소는 여성이나 아이들은 이 나라의 빈민으로 머물러 있게 해 놓고, 포르노업자들이 계속해서 부를 누리는 상황을 보증하는 셈이다. - P34

포르노그래피란 우리들 여성에게는 그런 남성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은 상태이며, 남성에게는 여성이란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케 하며, 또한 우리들을 그렇게 만들려고 하는 상태이며, 더욱이 남성이 우리들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 P42

사회 시스템에서 여자의 신분이 높으면 육체적인 강함은 잠식되고 저해되며, 여자는 (남자에 의해 정의된 바에 의하면) 자신의 경제적 계급이 높을수록 육체적으로 약하다. 여자는 권력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약하다. 육체적으로 강한 여자는 심지어 육체적으로 약한 척하여서 자신의 여자다움뿐만 아니라, 자기의 상승 지향의 미적‘심미적 희구를 강조한다. 육체적인 면의 무능력은 여자의 아름다움의 한 형태이고, 남자의 부의 상징이다. 부유한 남자가 여자를 노동면에서 능력이 업고 쓸모없이 만들고, 장식적인 존재로 남도록 한다. 또한 여자는 종종 유행이나 관습에 따라 실제로 육체를 절단한다. - P53

남자는 적의와 폭력을 다양하게 섞어 <섹스>라고 명명한다. - P57

남자는 여자를 집에 있는 것만 어울리는 아내housewife로 명명하고, 여자를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완전히 의존적인 상황에 가두고, 결국에 가서 만일 여자가 집을 나가면 여자를 돈으로 사고, 그리고 창녀라고 부른다. 남자는 어떤 이름이든 자기 뜻에 부합하는 대로 여자를 부른다.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그 행위를 자신에게 부합하는 대로 부른다. 남자는 힘을 통해서 이름 붙이기의 권력을 적극적으로 보유하고, 그리고 명명의 권력을 통해서 힘을 정당화 한다. 남자는 여자를 포함하여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세계는 그의 것이다. 여자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이 언어를 사용하고, 그것은 그 이외의 다른 언어사용은 없기 때문이다. 남성지상주의 이데올로기의 네번째 교의는, 남자들은 지적이고 창조적으로 존재하므로 권위를 가지고 명명할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다. 남자의 명명에 역행하고 전복하려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명을 씌워 존재를 말소하고자 한다. - P58

남자의 시스템 안에서 명명의 권리는 그 자체로 힘의 형태이다. - P58

남자는 취하고, 그 상태를 지속하고, 일단 소유하면 그것은 그의 것이다. 취하는 자인 자기와 소유권과의 관계는 예를 들어, 강간과 결혼의 관계에 정확히 반영되고 있다. 제도로서의 결혼은 관례로서의 강간으로부터 발전하였다. 당초 유괴행위로서 규정된 강간은 포획으로서 결혼이 되었다. 결혼은 강탈이 시간적으로 확대되고, 여자에 대한 소유권의 행사뿐만 아니라, 일생에 걸쳐 소유권을 보유하려는 것이다. - P59

남자의 견해에 따르면, 남자가 정의한 여성상에 부합되게 행동하지 않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남자가 내리는 정의가 시종일관할 필요는 없다. 논리나 일관성을 지닌 관점인가, 심지어는 최소한의 상식에 합치하는 관점인가 정도도 음미 검토되지 않는다.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여자에 대한 정의를 공상적으로 만들고 이론화하여, 그것을 과학이나 예술이라고 부른다. 남자가 여자에 대해 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지 남자가 말했다는 이유로 진실이라고 본다. - P122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특히 글을 쓰는 것은 여자의 미의 정반대, 여자의 미에 청산가리처럼 치명적인 해악으로 간주됐다. 육체적 활동은, 그것이 금지되던 시기에도 글쓰기보다는 덜 미움을 샀다. - P192

‘치모를 왜 그렇게 수치스럽게 잘랐느냐는 질문을 받자, 카타리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고 답하였다‘ 여자가 내밀하게 원하는 것이 그 사진에서는 아주 우연히도 남자가 여자들에게 바라는 것과 일치하였다. 이것은 포르노그래피의 가장 비열한 주제이다. 남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해명해 보면, 여자, 자유스러운 여자들의 비밀스럽고 은밀하고 생생한 육욕이라는 것이다. - P219

(여성 영화가 몰리 해스컬의 말)

남자들은 강간이 여자에게 어떠한 의미-완전한 침해의 의미를 지니고, 혹은 강간의 협박만을 받아도, 그 여자의 행동의 자유에 일생 동안 그림자가 드리운다-를 지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장 중요한 불일치점은, 여자가 보고, 알고, 경험하는 강간은 적의와 공격의 의미를 지닌 것에 비해, 남자가 경험하는 강간은 환타지 안에 있는 관능적인 행위로서의 강간이라는 점에 있다. - P255

이 책을 집필하고 출간하는 데 따른 어려움은 컸다. 내가 숙명적으로 연구하게 된 포르노그래피는 나의 삶의 중심이 되었고, 큰 고뇌에 싸이게 했다. 이 책을 집필할 때, 일시적으로는 대부분의 잡지와 신문이 나의 연구를 게재하는 것을 거부한 관계로 먹고 사는 일조차 어려웠다. 서적 출판인들은 이 책을 출간하는 것을 기피하였다. 이 책의 완성은 나에게는 작가로서의 생존 축하의 의미를 지닌다. 많은 분들이 나를 도와 주셨고,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굴복하지 않았다고 감히 말한다. (저자후기)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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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netar 2020-01-01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 세상의 슬픈 현실,
그 현실이 더 슬퍼지는 것은
진실이 서로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보여진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