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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심시선'의 사망 10주기를 앞두고 가족들은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죽은 사람 위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제사에 반대했고 그런고로 자신을 위한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살아생전 말한 심시선이었기에 가족들은 여태 제사를 안지내고 살아왔지만, 10주기에는 지내보자, 한 것. 물론 전통적인 제사가 아니라 이 가족 고유의 방식으로 하기로 한다.
자, 일단 엄마(이자 할머니이자 장모님)가 젊었을 때 살았던 하와이로 가는거야, 거기에서 온 가족이 각자 취향대로 여행하면서 가장 인상깊고 좋은 걸 상에 올리기로 하자. 이 특이한 제사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고 그렇게 누군가는 하와이의 훌라춤을, 누군가는 하와이의 무지개를, 누군가는 커피를, 파도를, 핫케익을 각자의 마음을 담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심시선이 과거에 썼던 글들과 교차하여 가족 구성원 개인의 히스토리도 보여진다. 이야기는 재미있고 탄탄하며 인물마다 캐릭터도 살아있다.
그간 정세랑의 소설을 거의 다 읽어왔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깜짝 놀랄정도로 문장에 감탄했다. 정세랑, 이렇게나 글 잘 썼었나? 하고 몇 번이나 놀랄 정도로 문장력이 좋았다. 게다가 그녀는 시대의 흐름을 분명하게 읽는 작가인지라, 이슈가 되는 모든 것들을 이 책안에 다 박아넣었다. 남자의 여자에 대한 염산테러, 제사, 가스라이팅, 디지털 성폭력, 퀴어, 비혼, 인종차별, 제국주의, 환경문제 등등. 정세랑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책 내내 흐른다. 어떤 세상에 살아도 정세랑은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작가일 것 같다. 정세랑 월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세랑은 점점 더 힘이 세지는 작가인데 그건 너무나 마땅하고 당연해 보인다. 지금 이 시대에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이름을 높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좋은 책이고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이 책은 책장을 팔랑팔랑 잘도 넘길 수 있을 것이며, 베스트셀러가 되어 마땅한 책이다. 눈살 찌푸릴 인간 하나 나오지 않고 오히려 심시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그리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판타지적인 요소도 있지만 어쨌든 매우 착한 소설이다. 좋은 소설이냐 물으면 좋은 소설이라 망설임없이 대답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는 소설이다.
흠잡을 데가 하나도, 하나도 없다. 정말이지 하나도 없어. 착하고 바르고 좋은 소설이다. 그런데,
매력이 없다.
왜 매력이 없는가에 대해서 내가 어제 책장을 덮고서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매력이 없어. 책장을 덮고 나서 내가 소설에게 기대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나 생각의 연장이 일어나지 않는다. 책장을 덮으면 뚝, 끊긴다. 착하고 바른게 나쁜게 아니고 착하고 바른 소설은 분명 존재해야 하지만, 다시 한 번 좋은 소설이라는 데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하겠지만, 좋은 소설이라고 해서 좋아하는 소설이 될 순 없는 것 같다. 누가 내게 이 책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해? 라고 물어보면 응, 이라고 답하겠지만, 네가 좋아하는 소설이야? 물으면 아니, 라고 답할 것 같다.
좋아하는 소설이 뭐냐고 물어보면 지옥 천국을, 올리브 키터리지를,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컷글라스 보울을 얘기하겠지만, 시선으로부터를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착하고 바른 소설을 왜 좋아하지 못하는가 스스로 물었지만 거기에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다. 착하고 바르고 좋은 소설인데 뭐가 문제인가, 라고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나도 그 뭔가 이 어떤 매력없음...이 어떤 지점에서 나오는건지를 잘 모르겠단 말이야?
이만 여기서 마친다.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딸을 만났고 그것은 이제 살면서 운이 좋아야 서른 번 남짓 더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우윤이 돌아오기로 마음먹거나, 난정이 미국으로 향하지 않는다면…… 같은 상황에서 울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보라고 해, 난정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 P28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사실 그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조각하고 빚고 찍고……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 P288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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