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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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데이트 폭력"


그는 그녀를 그저께도 어제도 그리도 오늘도 사랑한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생각이 그와 다르고 그녀가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그녀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반복되고 절제할 수 없는 '폭력'은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랑은 불면, 불안, 광기를 동반한다. 사랑하는 자들은 잠 못드는 밤, 감정에 균열을 불러오는 불안, 느닷없는 광기를 겪는다. 특히 광기는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격렬함이고, 자기모순과 폭력으로 표현되는 과잉 열정이다.

사랑에 대하여 / 장석주지음 / 책읽는 수요일, KPI 출판그룹 / p101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사랑에 미쳐서' 발생한 '사랑 싸움' 때문이라고 가볍게 생각한다. 어떤 시인은 사랑은 모순과 폭력을 포함하고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키며 심지어 자해, 자살,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무겁게 이야기 한다. 그러나 사랑은 내 모든 것을 주어 상대방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지 상대방으로 부터 무언가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받을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고자 하는 행복한 감정이다. 가끔 정신을 차려보면 받은 것이 적거나 또는 전혀 없는 것을 알게되더라도 가슴아프고 후회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사랑은 주는 것이다. 준 만큼 받을 수 없더라도 또는 전혀 받을 수 없더라도 사랑은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준 사랑 만큼 사랑을 받고자 요구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감정교환'이다. 그리고 '교환'은 '내 것'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이므로 '교환'은 '소유'를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교환'과 '소유'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행해지고 통제되지 않는다면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교환 조건이나 방법을 바꾸고 제약을 가하거나 '폭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랑'으로 포장된 '소유'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심지어 그 폭력은 '사랑하니까'로 미화된다.

"폭풍의 언덕(에밀리 브론테 지음)"은 '소유'를 '사랑'으로 착각한 '캐서린 언쇼'와 영국 리버풀 거리에서 주어온 아이 '히스클리프'의 사랑 놀이로 시작되어 히스클리프의 광기로 마무리된 18세기 말의 막장 드라마식 소설 이다.  책 골라주는 남자


주어온 남자아이가 딸과 사랑한다. 그러나 그 딸은 돈많은 남자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주어온 남자아이는 떠난다. 돌아온 남자(주어온 아이)는 두 집안의 몰락을 위해 돈많은 남자의 여동생과 결혼한다. 사랑하는 여인도 죽고 돈많은 남자와 그 여동생도 죽고 복수가 완성되려는 순간, 주어온 남자는 미쳐버린다. 이 소설이 막장 드라마로 읽히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내가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우리가 거지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하지만 내가 린튼과 결혼한다면 히스클리프가 오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울 수가 있어.

풍의 언덕 / 에밀리 브론테 / p135


주어온 아이를 아버지가 나보다 더 사랑한다면,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할 수 밖에 없다. 하물며 그 아이가 내 '소유'를 탐내고 뺏으려 한다면, 나는 그 아이를 죽기 직전까지 패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그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면, 나는 그 아이에게 내가 겪은 과거 고통과 괴로움을 수 십 아니 수 백배로 돌려주고 결국 그 아이를 내 집안에서 내 쫓아 버릴 것이다. 그 아이는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자신의 악행을 반성하고 자숙하면서 남은 인생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아이가 당한 고통과 괴로움을 나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또다른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히스클리프에게 빼앗긴 '힌들러 언쇼'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노동, 폭언 그리고 폭력을 동원해 히스클리프를 괴롭힌다. 그리고 '캐서린 언쇼'에게 배신당해 워터링 하이츠를 떠났던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힌들러 언쇼'에서 부터 시작된다. 이 광기 가득한 복수의 근원은 무엇일까.


모든 문제의 근원은 아버지의 '책임질 수 없는 선의' 때문이다. 영국 리버풀 길가에 버려져 헤매고 있는 힘들고 지친 아이를 데려다 먹이고 키우겠다는 '선의'는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나의 아이들과 주어온 아이를 똑같이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버지의 선의는 '편애'가 되었고 '편애'의 희생자인 '힌들러 언쇼'는 '복수'를 다짐한다.


그렇다면 버려진 아이들은 절대로 데려다 키워서는 않되는 것일까. 아버지 '혼자만의 결정(책임질 수 없는 선의)'이 문제다. 주어온 아이(히스클리프)를 집안에 들이는 문제는 온 가족이 함께 고민하고 의논해서 결정했어야 할 사안이다.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논의했다면 '편애'도, '질투'도, '복수'도 없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가 생활 속에 행하는 '선의'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내가 행한 '선의'가 상대방과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책은 소유와 사랑을 착각하지 않고 책임질 수 없는 선의를 베풀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주변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필요함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이 책이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류의 막장 드라마식 소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 골라주는 남자


그러나 소유와 사랑을 착각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선의를 베풀어야 하지 말아야 할지 선택도 쉽지 않다.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것은 알겠는데 무엇(what)을 어떻게(how) 시작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책이라는 간접 경험을 통하여 what과 how를 짐작한다(헤아린다). 끊임없이 책을 읽고 생각하고 쓰고 삶에 대입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나의 책 읽기는 적극적인 삶을 위한 수단"

이다.


1801년. '히스클리프'의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세들어 살게된 '록우드'와 그 저택에서 일하는 '엘렌(넬리) 딘'이 '히스클리프'의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이 소설은 시작되고, 캐서린 언쇼가 가난한 히스클리프를 떠나 부자인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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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리커버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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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백지투표' 선거 결과에 놀라고 권력에 취해있는 우익 정부와 이에 비폭력으로 대항하는 시민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선거 결과 : 우익정당 13%, 중도정당 9%, 좌익정당 2.5%, 백지투표 70% 이상"

"재선거 결과 : 우익정당 8%, 중도정당 8%, 좌익정당 1%, 백지투표 83%"



시민들은 현 정부에 대한 환멸을 표현하기 위해 '혁명'이 필요했으나, 그랬을 경우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기 때문에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인 '투표'를 선택했고 그 결과가 '백지투표'이다.

 

우익 정부는 백지투표 상황을 현 정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들이나 테러단체에 의한 사주로 결정하고 시민들을 잡아다가 '누가, 어떻게 백지투표를 하라고 시켰는지 말하라고' 겁주고 협박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권력자들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평화시위를 통해 시민들의 의지(선거 결과)를 표명한다.

 

우익 정부는 현 도시에 무질서와 폭동이 발생토록 경찰을 포함한 정부기관과 정부를 다른 도시로 옮긴다. 그러나 무질서와 폭동이 발생하지 않자 우익 정부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로 가장한 지하철 폭발 사고를 일으키고 대다수 언론은 테러리스트의 소행이라고 선동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지하철 폭발 사고로 숨진 사람들을 애도하고 다친 사람들을 돌보면서 대통령궁을 향한 평화 행진으로 대응한다.


"단지 본보기로 삼기 위해 사상자를 만 내지 이만 명쯤 내고, 거기에 또 실제로 아무런 범죄도 저지른 게 없으니 아무도 뭔지 모르는 혐의로 삼, 사천은 감옥에 집어넣어서 이 우스꽝스러운 계엄을 끝낼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p.139)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사람들을 완전히 가두는 것은 수도 주위에 담을 쌓아야만 가능한 일이오. 콘크리트 판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우는 것이지, 내가 보기에는 높이가 한 팔 미터 정도면 될 것 같소." 

(p.219)


"즉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우리는 독재적 성격을 가진 극적인 조치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도의 주민에게서 시민권을 무기한 박탈하는 것입니다. 이념적인 편애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도 예외일 수가 없겠지요. 또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비상선거법을 통과시켜야 할 겁니다. 전국에 적용될 이 법은 백지투표를 무효로 만드는 등의 내용이 담겨야겠지요." 

(p.221)



이런 상황에서 4년 전의 '백색 실명' 전염병에서 유일하게 실명하지 않았던 안과 의사의 부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우익 정부의 수괴들에 의해, 안과 의사 부인은 백돌이들(백지투표) 봉기와 테러행위의 '배후 조정자'로 결정(?)된다.



그런데 ... 



어? 재미있다. 분명 6년 전에 읽었을 때는 지루했다. 우익 정부에 대한 풍자도, 시민들의 평화시위도, 우익 정부를 배신하고 시민 편에 서는 양심자들 이야기도 지루했다. 그런데 다시 읽은 이 책은 왜 재미있을까?


시민들의 평화 시위를 보면서 2016년 '촛불 혁명(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을 떠올렸다. 특히 지하철 폭발 사고를 당하고 대통령궁으로 몰려드는 시민들의 이야기 부분에서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촛불을 들고 청와대 앞으로 몰려들었던 우리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 뜨거움을 느꼈다.


왜 시민들이 '백지'를 던졌는지 자문하고 반성해야 할 우익 정부가 자신들을 민주주의 체제 수호자로, 시민들을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속고있는 어리석은 집단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대한민국의 엘리트, 특히 검찰 조직을 떠올리게 하면서 '권력 집단'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사실을 외면하고 우익 정부의 지침(Guide)대로만 보도하는 다수 언론과 사운을 걸고 약자의 사실을 보도하는 소수 언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떤 국가의 어떤 언론사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은 다수 언론의 보도가 우익 정부의 지침이라는 것을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시민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속칭 '기레기'들만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백지투표를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도시의 주변에 담을 쌓겠다는 우익 정부 대통령의 황당한 제안을 읽으면서 트럼프가 미합중국 국경에 쌓고 있는 장벽이 떠올랐다. 트럼프가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닐까?




아마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늘어났기에, 다시 읽은 이 책은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비권장'이었던 것을 '권장'으로 수정해 제안한다. 덕분에 '재미없게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읽어보자'라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눈이 있으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봐야 할 것을 보지 않는 분들에게 특히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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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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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살 미만에서는 300명이, 29살 미만에서는 1606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2003년 이후 대한민국은 2017년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다.  더 큰 문제는 평균과의 격차인데, 평균의 2배에 가깝다.


청소년 자살


왜 이 땅의 청소년들은 희망찬 미래를 계획하고 꿈꾸며 가장 건강하고 활력과 의욕이 넘치는 시기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까. 본격적인 조사와 분석에 근거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미래가 희망적이지 않은 것도 한가지 이유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많은 청소년들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청소년기(靑少年期)를 희생하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대학가기 위한 공부만 한다. 그러나 이것도 끝이 아니다. 대학에서는 '좋은(?)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한 스펙을 죽어라 공부하고 쌓는다. 그러나 그 '좋은(?) 대기업'에 입사하더라도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다. 기업내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계속되기 때문에 자기를 돌아볼 여유는 없다. 왜 공부하는지도,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땅의 청소년들은 인생의 중요한 기초가 되고 밑거름이 될 경험과 지혜가 없다. 기성세대의 잘못된 가르침과 먹고 살기 위한 얄팍한 지식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과 얄팍한 지식이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 나아갈 수도 없고 되돌아 갈 수도 없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이어지는 자괴감과 후회는 이 땅의 청소년들을 삶에 대한 '절망'에 파묻히게 한다. 그러나 지식만 있고 경험과 지혜가 없기에 이 절망은 극복되지 않는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희망'은 절대 보이지 않는다. 문득 문득 머리속 저 어딘가에서 '죽음'의 달콤한 속삭임만이 들릴 뿐이다.


건강한 삶에는 나름대로의 내용과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젊은 기벤라트의 삶에서는 이미 그 목적과 내용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수레바퀴 아래서. p. 200

삶의 목적과 내용이 사라져버린 인생. 마지막 남은 선택은 '죽음' 아닐까. 문득 문득 저 어딘가에선 '희망' 대신 '죽음'의 달콤한 속삭임만이 들릴 뿐이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이 과정을 100년 전의 필체로 담담하고 아름답게 써 내려간 글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지음 / 김이섭 옮김


우리의 아이들은 세상의 변화와 충격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경험과 지혜가 부족하다. 부모는 먹고 살 돈 벌기에 바쁘고 학교는 돈 벌기 위한 지식만을 가르치기에도 벅차다. 그래서 지식만 있고 경험과 지혜가 부족해 기형적인 모범생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로 인해 이 사회는 '지식' 타이틀은 넘쳐나지만 치료 불가능하고 희망이 사라진 '헬조선'으로 규정된다.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모든 사람의 생각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삶과 행복의 기준은 모두 다르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삶과 행복의 기준을 다음세대에 강요해서는 않된다. 다음세대가 진정 원하는 삶과 행복의 기준을 찾고(성찰, 나눔 그리고 실천) 선택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는 옆에 있어주고 원할 때 도와주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이 책 '수레바퀴 밑에서'는 기성세대의 삶과 행복의 기준이 다음세대의 삶과 행복의 기준으로 강요되었을 때, 다음세대가 어떻게 불행한 삶을 살게되는지 보여주는 성장기 소설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성장기 소설은 정말 많기 때문에 특별히 권장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에 대한 심리묘사는 정말 뛰어나다. 특히 엠마와의 사랑 놀이(?)에 대한 한스 기벤라트 심리묘사 부분은 정말 재미있다. 그래서 이 책은 조심스럽게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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