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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리커버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2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백지투표' 선거 결과에 놀라고 권력에 취해있는 우익 정부와 이에 비폭력으로 대항하는 시민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선거 결과 : 우익정당 13%, 중도정당 9%, 좌익정당 2.5%, 백지투표 70% 이상"
"재선거 결과 : 우익정당 8%, 중도정당 8%, 좌익정당 1%, 백지투표 83%"
시민들은 현 정부에 대한 환멸을 표현하기 위해 '혁명'이 필요했으나, 그랬을 경우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기 때문에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인 '투표'를 선택했고 그 결과가 '백지투표'이다.
우익 정부는 백지투표 상황을 현 정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들이나 테러단체에 의한 사주로 결정하고 시민들을 잡아다가 '누가, 어떻게 백지투표를 하라고 시켰는지 말하라고' 겁주고 협박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권력자들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평화시위를 통해 시민들의 의지(선거 결과)를 표명한다.
우익 정부는 현 도시에 무질서와 폭동이 발생토록 경찰을 포함한 정부기관과 정부를 다른 도시로 옮긴다. 그러나 무질서와 폭동이 발생하지 않자 우익 정부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로 가장한 지하철 폭발 사고를 일으키고 대다수 언론은 테러리스트의 소행이라고 선동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지하철 폭발 사고로 숨진 사람들을 애도하고 다친 사람들을 돌보면서 대통령궁을 향한 평화 행진으로 대응한다.
"단지 본보기로 삼기 위해 사상자를 만 내지 이만 명쯤 내고, 거기에 또 실제로 아무런 범죄도 저지른 게 없으니 아무도 뭔지 모르는 혐의로 삼, 사천은 감옥에 집어넣어서 이 우스꽝스러운 계엄을 끝낼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p.139)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사람들을 완전히 가두는 것은 수도 주위에 담을 쌓아야만 가능한 일이오. 콘크리트 판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을 세우는 것이지, 내가 보기에는 높이가 한 팔 미터 정도면 될 것 같소."
(p.219)
"즉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우리는 독재적 성격을 가진 극적인 조치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도의 주민에게서 시민권을 무기한 박탈하는 것입니다. 이념적인 편애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도 예외일 수가 없겠지요. 또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비상선거법을 통과시켜야 할 겁니다. 전국에 적용될 이 법은 백지투표를 무효로 만드는 등의 내용이 담겨야겠지요."
(p.221)
이런 상황에서 4년 전의 '백색 실명' 전염병에서 유일하게 실명하지 않았던 안과 의사의 부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우익 정부의 수괴들에 의해, 안과 의사 부인은 백돌이들(백지투표) 봉기와 테러행위의 '배후 조정자'로 결정(?)된다.
그런데 ...
어? 재미있다. 분명 6년 전에 읽었을 때는 지루했다. 우익 정부에 대한 풍자도, 시민들의 평화시위도, 우익 정부를 배신하고 시민 편에 서는 양심자들 이야기도 지루했다. 그런데 다시 읽은 이 책은 왜 재미있을까?
시민들의 평화 시위를 보면서 2016년 '촛불 혁명(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을 떠올렸다. 특히 지하철 폭발 사고를 당하고 대통령궁으로 몰려드는 시민들의 이야기 부분에서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촛불을 들고 청와대 앞으로 몰려들었던 우리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 뜨거움을 느꼈다.
왜 시민들이 '백지'를 던졌는지 자문하고 반성해야 할 우익 정부가 자신들을 민주주의 체제 수호자로, 시민들을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속고있는 어리석은 집단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대한민국의 엘리트, 특히 검찰 조직을 떠올리게 하면서 '권력 집단'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사실을 외면하고 우익 정부의 지침(Guide)대로만 보도하는 다수 언론과 사운을 걸고 약자의 사실을 보도하는 소수 언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떤 국가의 어떤 언론사들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은 다수 언론의 보도가 우익 정부의 지침이라는 것을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시민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속칭 '기레기'들만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민들의 백지투표를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도시의 주변에 담을 쌓겠다는 우익 정부 대통령의 황당한 제안을 읽으면서 트럼프가 미합중국 국경에 쌓고 있는 장벽이 떠올랐다. 트럼프가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닐까?
아마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늘어났기에, 다시 읽은 이 책은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비권장'이었던 것을 '권장'으로 수정해 제안한다. 덕분에 '재미없게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읽어보자'라는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눈이 있으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봐야 할 것을 보지 않는 분들에게 특히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