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저녁부터 혼자 있게 될 어제저녁의 메뉴를 생각해 두었었다. 치킨버거를 평소에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두툼한 치킨패티가 들어간 치킨버거에 와인을 먹고 싶었다. 어제 하루종일 어제저녁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퇴근하는 길, 발걸음도 가벼웁게 맘스터치에 들러 싸이버거를 샀다. 맘스터치를 가 본 적이 별로 없는 터라 어느 햄버거가 제일 좋을까 메뉴를 살펴보는데 잘 모르겠더라. 햄버거 좋아하는 다정한 친구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흐음, 모든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해, 하고는 싸이버거를 골랐다. 여동생은 얼마전에 '다릿살이 좋아서' 싸이버거를 먹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도 치킨의 다릿살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도 싸이버거! 그거 하나만 먹으면 저녁이 조금 외롭고 초라하지 않을까, 나는 너겟도 주문했다. 그렇게 어제의 초라하면서도 간단한 술상.



LOST ANGEL 은 여동생이 좋아하는 와인이다. 일전에 친구로부터 선물 받아 마시는데 여동생도 한 잔 같이 마시다가 너무 좋다고 하는거다. 저걸 다 마시고나서 내가 늘상 사두는 9,900원 와인 마시더니 이건 맛없네? 하더라. 입맛 귀신 같은 동생이여... 응, 이건 저려미여.....나처럼 이렇게 와인 마시는 사람은 비싼 거 못사놔...저려미..로 냉장고를 채워야 해..미안..


게다가 저 로스트앤젤은 우리 동네 홈플엔 없다. 여동생 동네의 이마트에만 있어. 나는 마침 지난번 안산에 갔을 때 이마트에 들러 로스트앤젤을 두 병 샀다. 사진의 파랑색은 블렌딩이고 또 한 병은 갈색의 까베르네 쇼비뇽. 우선 까쇼를 마셔봤는데, 오, 너무 좋았다. 굿 베리 굿이여. 블렌딩도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어제 마시는데, 오, 이건 단맛이 느껴지네? 그전에 마셨을 때는 단맛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확실히 단맛이 느껴졌다. 여동생은 두 병의 맛을 비교해서 말해달라길래, 나는 갈색 까베르네 쇼비뇽이 더 내 취향이라고 말해줬다. 그러고보면 알라딘 커피도 그렇고, 나는 블렌딩보다는 싱글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저 버거는 정말 내 취향 아니다. 너 같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어. 세상에 핫치즈징거버거 만한 치킨버거는 없는 것 같다. 일단 내가 닭다리살을 좋아하고, 저건 분명 닭다리살로 가득했지만, 그것이 패티의 역할을 할 때는 빛을 잃는다. 치킨 버거의 패티는 가슴살이 진리구나, 나는 어제 몇 번이고 깨달았다. 결정적으로 소스도 내 타입이 아니고... 아무튼 먹다가 치킨 패티 사라지고 빵과 소스만 남은 상황. 이럴 때 두려울 게 무어람? 나는 너겟을 빵과 빵 사이에 넣어 또 먹는다. 그것이 인생.....


근데 닭다리살이 맞는거야 닭다릿살이 맞는거야....빌어먹을 사이시옷... 명사와명사 사이니까 사이시옷 필요한거야? 제기랄 모르겠다.




그렇게 홀짝홀짝 술을 마시다가, 아 맞다, 책장 사진! 내가 알라딘 페이퍼에 책장 사진 올린다고 해놨지? 음주중에 들어가서 찰칵찰칵 찍었다. 일반책장은 그전에 올린 적도 있긴 하지만, 일단 일반책장.




고등학교시절 문학 선생님은 자신의 은사님 얘길 해준 적이 있다. 그 은사님은 본인 서재에 책을 정말 많이 가지고 있는데, 어떤 책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기억하신다는 거다. 그래서 어떤 책에 대해 얘기를 하면 딱 그자리에서 그 책을 빼주실 수 있다고. 기억력이 대단하시다고 얘길 해주셨었는데, 내가 돈을 벌고 책을 사기 시작하고 그리고 이렇게 점점 책이 많아지게 되면서 나 역시 책장을 마련하게 됐고, 그렇게 책을 꽂다 보니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겠던데? 내 책이고 내 책장인데 그걸 모르는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밖에 있다가도 남동생이 책 빌려달라고 하면 오른쪽에서 두번째 위에서 세번째, 하는 식으로 그 책이 어디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해전까지는...



그러나 안읽은 책이 쌓이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책을 계속 사지만 공간은 한정적이니, 읽은 책을 내보내야 했던 거다. 방출을 하다가 중고매장 생기면서 중고로 팔기도 하고 또 가끔은 미혼모센터에 기부도 하고 그러면서 내 책장의 책은 절반 이상이 읽지 않은 책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하아- 너무 자주 사서 이제는 샀는지 안샀는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고. 그러다가 몇몇책들의 사진을 이곳에도 올렸던 것처럼 두 권씩 꽂아두게 되어버렸던 거다. 분노의 포도도 읽고 넣어두다가 윗칸에서 앗? 이러고 또 찾아냈고(심지어 1,2권 두 권짜리 책이었다 ㅠㅠ), 그 뭣이냐 앤젤라 카터 책도 그랬지. 뭐 그런 책 많다. 다 읽고 넣어두다가 책장에 이미 꽂혀있는 걸 발견할 때의 그 공포... 하아-

요즘엔 그래도 알라딘에서 '너 기존에 산 책이야~' 라고 알려주어서 좀 덜해지게 됐는데, 문제는 기존에 산 책이라는데 나는 기억에 없다는거다... 뭐, 이런 일은 알라디너에게 빈번하게 일어날테니 이쯤하자.



문학선생님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산다는 것'이 너무 기쁘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말은 그 당시 듣고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들어가고 또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내 돈으로 내가 여러권의 책을 처음 산 날, 문학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아, 그 때 선생님이 말한 게 이거구나! 선생님은 월급날이면 차 끌고 서점에 달려가 뒷트렁크를 책으로 채운다고 했는데, 나는 인터넷으로 주문하기 시작했다. 물론 서점에 가서 한아름 안고 오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월급날 기다렸다가 왕창 책을 산다...인생이여... 지금도 커피랑 책이랑 막 사고 싶은데 월급날이 아직 한참 남았음에 곶통..... 인생이여.....


아무튼 그렇게 차곡차곡 샀더니 책장이 필요해졌고, 책장을 샀더니 하나 더 필요해졌고, 아무리 내다 팔아도 하나 더 필요해졌고.... 그렇게 나는 이케아에서 주문한 책장을 조립합니다. 거기에는 페미니즘 책들을 차곡차곡 쌓습니다...




맨위의 인형은 몇년전 홍콩 디즈니랜드 갔을 때 조카랑 같이 기념품샵 들어가 고른 것인데, 나는 저걸 사고 나서 '김말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지난 주말 조카가 와서 보고는 '응, 김말이네?' 이러고 아는척 하고 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저 책장 하나는 99프로가 페미니즘 책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많고, 위에서 두번째 칸은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들이다. 세상 근사해.... 아무튼 이것이 나의 페미니즘 책장인 것. 멋져... 저게 하루아침에 저렇게 된건 당연히 아니고 시간이 쌓여서 모여진 것들이다. 관심갖고 책을 사서 읽고 그러면서 어떤 책들은 팔고(페미니즘 에세이들은 대부분 팔아버림) 그리고 또 사서 읽고... 반복했던 시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책장. 책장이란 무릇 그런게 아닙니까.




오늘은 금요일이라서인지 출근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퇴근 후의 계획도 머릿속에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그리고 사무실에 도착해서 잠겨있던 정원의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여는데, 와, 날씨가 너무 좋은거다! 그러자 기분이 막 좋아졌어!! >.<





아 날씨 좋아, 기분 좋아, 한 번 심호흡 하고 들어오면서, 아오, 날씨는 대체 뭘까, 뭔데 이렇게 사람 기분을 갑자기 좋게 만드는거지, 했다. 어쩌면 샐린저의 말대로, 날씨 앞에서 우리는 인질이나 다름없는지도 모른다.





















금요일이라서 너무 좋다! 시간이 너무 빨라서 좀 야속하긴 하지만, 책상 위에는 친구가 보내준 호두떡도 있고(히히) 직장 동료가 준 초콜렛과 빵도 있다. 언제든 정원 문을 열고 나가 좋은 날씨를 몸에 직접 받을 수도 있다. 날씨가 좋아서 다 좋은가보다.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책을 몇 권 사고 싶지만, 그건 월급날까지 꾹 참아보기로 한다.





















그럼 여러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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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5-29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면서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예가 의외로 드물던데, 다락방님 책꽂이 책들은 정리가 잘 되어 있네요.
주말 날씨가 좋다던데, 좋은 일 팍팍 생기시길 바랍니다.

다락방 2020-05-29 09:34   좋아요 0 | URL
아이고 그렇지도 않아요. 그래서 사진 작게 올린거에요 ㅠㅠ
전집 같은 경우는 그것들끼리 꽂아놓으면 되니까 괜찮은데 다른건 엉망이에요. 날잡고 정리해야지, 하고 책 다 뺐다가도 얼마 안가 아 짜증난다 그러고 다시 막 꽂아요 ㅋㅋ 그래서 뭐랄까, 막 꽂혀있답니다. 후훗.

날씨가 좋아서 너무 좋아요, 나인님. 날씨가 좋으면 왜 기분도 좋은지 모르겠어요. 나인님도 오늘 그리고 주말도 모두 즐겁게 보내셔요! 저는 나인님과 이렇게 오래오래 알라딘에서 만나는게 정말 좋아요.
:)

잠자냥 2020-05-2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 크게 올려주시지 책 구경 좀 하게 ㅎㅎㅎ
초라하고 간단한 술상이라는 말에 사진 보고 으응???? 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아침부터 햄버거 먹고 싶게 곶통..... ㅋㅋ

다락방 2020-06-01 08:29   좋아요 1 | URL
책장이 정리가 안되어있고 말입니다 좀 지저분해서 ㅋㅋ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심하게 부끄럽다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치킨과 너겟뿐인데 초라하지 않습니까? 왜 이 사진을 본 제 친구도 그렇고 ‘너에게 초라함이란 대체 무엇이냐‘ 제게 되묻는걸까요?
아침이 밝았습니다. 월요일입니다. 기운내서 열심히 일합시다.
그나저나 제가 오늘도 잠자냥 님에게 땡투를 드린다는 댓글을 달고 왔는데, 보셨을까요? 으하하하.
부자 되세요, 잠자냥 님!

잠자냥 2020-06-01 09:29   좋아요 0 | URL
그 땡투 얼른 취소하세요!!! 사면 안돼~~!!!!

다락방 2020-06-01 09:34   좋아요 0 | URL
아이참 ㅋㅋㅋㅋ 잠자냥 님의 절작한 외침 ㅋㅋㅋ 앱접속 적립금이 10시에 들어온다고 해서 아직 주문 전이었어요 ㅋㅋㅋㅋㅋ아이참 사고싶은데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6-01 09:36   좋아요 0 | URL
휴 다행이에요. ㅋㅋㅋㅋㅋㅋ 다른 책 사세요 ㅋㅋㅋㅋ

blanca 2020-05-29 1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사 정원 사진 캬. 다락방님의 금요일 페이퍼를 읽으니 그 기분좋음이 저한테까지 전해져오네요. 이제 저는 책을 빌려 읽기로 했는데 흑, 낡은 책 상태가 책을 넘길 때마다 사람을 절로 우울하게 만드네요. 왠지 찝찝하기도 하고...새책의 중독성은 정말이지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네요.

다락방 2020-06-01 08:30   좋아요 0 | URL
이토록 좋았던 기분은 사라지고 어느덧 괴로운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도대체 뭘까요, 블랑카님? 하하하하하.
저는 여름이 너무 좋아요! 더운 날씨도 좋고요, 초록초록한 잎들도 너무 좋아요! 살랑살랑 바람 불 때도 너무 좋구요! 우리 날씨 좋을 때마다 행복해하면서 잘 지내봅시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책읽고 글쓰면서 이곳에서 만나요!

수연 2020-05-29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책장 완전 근사해요. 너무 근사해. 날씨도 좋고 와인 사진도 좋고 덩달아서 기분 업업되어 하루 시작해요. :)

다락방 2020-06-01 08:31   좋아요 0 | URL
취향의 일치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수연님. 수연님과 저는 페미니즘 책과 와인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저 보통의 사진을 근사하게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후훗.
월요일이지만 우리 계속 좋은 기분으로 또 보내봅시다, 화이팅!

반유행열반인 2020-05-2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풍경이 막 우리집 같고 심지어 이케아 책장 똑같은 거 우리집에 있어서 깜짝...

다락방 2020-06-01 08:32   좋아요 1 | URL
회사 임원실에 저 책장 있는거 보고 어디서 샀냐고 물은 뒤에 저도 주문한 거랍니다. 이케아 물건은 저게 유일해요, 저는 ㅎㅎ 하나 더 사서 해놓고 싶은데 이젠 둘 공간이 없어요. 그나저나 책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서재 풍경을 가지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