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적으로도 그리고 업무 외적인 것으로도 스트레스가 많다. 가슴이 답답하다. 어제부터 한숨을 깊이쉬고 있으며 또 자주 쉬고 있다. 내가 내 가슴을 토닥토닥여주며 답답한 마음 달래고자 하지만 안된다. 커피향이라도 실컷 맡자 싶어 커피를 한사발 내렸지만, 이 향으로도 풀어지질 않아. 어떡해야 할까, 내가 무언가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것이라면 내 마음을 바꿔야 할텐데, 어떻게해야 이 스트레스가 풀어질까. 좋은 것들을 떠올려봐도 대체가 안되는데. 그러다 내게는 글쓰기가 있다는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그래, 글을 쓰자. 글을 써보자. 그렇게 이번달 같이읽기 도서인 여성성의 신화를 끌고 온다.
어제 비연 님이 이 책에 대한 페이퍼를 쓰시면서 '마거릿 미드'에 대한 얘기를 하셨다. 당시에 누구보다 빨리 깨친 사람이었고 여성을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앞서 나간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의 한계에 대한 부분. 그것을 베티 프리단이 지적한 것에 대해 어떤 씁쓸한 마음을 표현한 글이었다. 그 마음이 무언지 너무 잘 알겠는데, 내가 잘 알겠는 까닭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옳기만 할수도 없고 완벽할 수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거릿 미드가 자신의 생각을 펼쳐가는데 있어서는 그 전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이 있어야 했다. 그건 이런게 잘못됐잖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그러니까 무에서 갑자기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예 없는 일은 아니어도 드물다. 그러나 있던 것에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던가. 우리는 다들 그렇게 나아가지 않나. 마거릿 미드는 아마도 그 당시에 자신이 나아갈 수 있는 최선으로 나아갔을 것이었다. 결국 실망과 백래시를 가져왔다 하더라도 어쨌든 나아가는 과정은 분명히 있었고, 나아가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었다.
베티 프리단이 마거릿 미드의 그런 완벽하지 못함, 결국은 어떤 주저앉음에 대해 지적했다면, 나는 베티 프리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얘기하고 싶다. 우선 완벽한 가정주부가 되어야 하는데, 누가 봐도 부족할 게 없는 상황인데 이름 모를 병을 앓고 있다고 시작하는 이 책, 《여성성의 신화》는 그걸 지적해 풀어냄으로써 또 그에 대해 많은 여성들과 인터뷰를 하고 기록함으로써 너무나 대단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에 내가 살았다해도 이런 책을 기획하고 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바로 이런걸 우리는 고전이라 부르는거다. 베티 프리단의 지적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 후의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기 위해 이 책을 가져와 덧붙이는 것은 지금까지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의 나도 그리고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을테니 앞으로의 독자들도 이 책을 읽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에는 이런 너무나 대단한 '베티 프리단'이 젊은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나타나고 나서는 오히려 백래시의 주역이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백래시에 대한건 아니고, 베티 프리단이 말하는 '동성애'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직업뿐만 아니라 집 밖에서 어떤 중대한 일을 하는 것까지도 주부이면서 어머니인 여성들의 '여성성'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헌신하는 데 자신의 시간을 충분히 쏟아넣을 수 있고, 이런 종류의 헌신은 잠재적이거나 확실한 동성애를 낳을 수 있다. 이런 기생적인 어머니의 사랑에 질식되어 있는 소년은 성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성장하지 못했다. 동성애자들은 학교를 마치고 어떤 직업적인 일에 종사하기에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다. (킨제이는 동성애 경향이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에게 많으며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적다는 것을 발견했다.)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의 성생활의 특징인 비현실성, 미숙함, 난잡함, 계속적인 만족감의 결여 등은 그들의 생활과 일, 모든 것에 특징적이다. 성 이외의 생활, 교육, 일에 있어서 개인적인 사명 의식의 결여는 '여성적'으로 여겨진다. '여성성의 신화'에 의해 사는 딸들처럼, 그 아들들은 생애 대부분을 성적 공상 속에서 지낸다. 이렇게 슬픈 '게이'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이 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젊은 주부와 유사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 주변에 짙은 안개처럼 퍼져있는 동성애는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된 조혼 속에서 공격자가 된 젊은 여성들이 끊임없이 찾고 있는 성과 마찬가지로 불길한 것이다. (p.482-483)
나는 오늘 아침 지하철안에서 위의 부분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물음표가 이천개쯤 생겼다. 우선 베티 프리단은 여성성의 신화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이 점은 분명히 옳다. 동의하는 바다. 여성들을 교육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집안에 들어앉히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전혀 틀림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위의 인용한 문장을 보면, 여성성의 신화 때문에 집에 있는 여자들이 극성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면 그 아들이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고개를 갸웃한다. 여자들을 코너로 몰아 넣으면 발생하는 부작용중의 하나가 그 자식의 동성애, 라는거 아닌가. 그렇다면 동성애는 어떤 부작용의 하나인건가. 무언가 잘못 발현되는 것이 동성애라고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이건 나가도 너무 나간거 아닌가 싶은거다.
오래전 연애에서 막 연애를 시작했던 나의 남자친구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그들은 아픈거니까' 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그 말을 듣고 잠깐동안 고민을 했다. 이 연애를 진행할것인가, 말것인가. 이성애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아픈걸로 생각해도 되는것인가? 그것은 이성애만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나는 위의 문장에서 베티 프리단으로부터 그 때의 당황스러움을 다시 떠올렸다. '니네 그렇게 잘못하면 동성애가 많아진다니까?' 라는 뉘앙스의 저 문장이 걸리적거린다.
어떤 동성애는 그런식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자라는 과정에서 이성으로부터 호되게 고통을 당해 꼴도 보기 싫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동성만 사랑하게 되는, 그런 식의 발현. 뭐, 있을 수 있겠지. 그렇지만 저 뉘앙스는 불편한 게 사실이다. 덜 자라서, 어딘가 잘못되어서 발현될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건 너무 불편하지 않은가.
베티 프리단이 마거릿 미드가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권리를 위해 최선의 것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던 바로 그 지점이 나는 베티 프리단에게도 마찬가지로 느껴졌다. 그래, 사람이 완벽할 순 없지. 그 당시에 획기적이고 혁명적이며 또 오래 읽힐 수 있는 고전이어도, 그렇다고 그 안에 담긴 모든것들에 내가 기립박수치며 환호할 순 없을 것이다. 베티 프리단 이후의 학자들이 할 일이 바로 여성성의 신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일테다. 이것봐, 이런 작품이 나왔어, 정말 대단하고 날카로운 지적이 담긴 책이지! 하면서도, 그렇지만 말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그 후세대의 학자들이 할 일이 아닌가. 그런식으로 우리는 점차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동성애 발현에 대한 걱정이 담긴 저 문장을 읽고 내가 베티 프리단 싫다, 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이 책, 여성성의 신화는 베티 프리단이 그 때에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최선이며 동시에 가장 좋은 최선. 최선(最善)의 최선(最先). 혹은 최선(最先)의 최선(最善).
세상에는 수많은 형태의 잘못된 사랑이 있다. 아니지,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잘못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인줄 착각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게 맞겠다. 어쩌면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고 포장하지만 '지극하게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것이라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대표적으로는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계속 자신 옆에 있어달라고, 상대가 '싫다', '아니다' 라고 하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토커짓을 하는 게 그렇다.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는 없다고, 그렇게 열 번 찍는게 그 잘못된 사랑의 표현이다. 싫다고, 아니라고 하는데도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내 사랑을 왜 안받아줘, 이 지극한 내 사랑을 왜 몰라줘, 너를 너무 사랑해'라고 자기 할 말만 하는것. 이건 자기가 상대를 사랑한다는 감정에 취해서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 지극히 이기적인 자기애의 상태다.
얼마전의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개빡쳐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뒤부터 그 드라마를 안봤는데, 내가 그 드라마에서 빡쳤던 건 데이트폭력남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또 이도저도 못하고 사랑사랑 거리는 그 김희애 남편에 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늘상 사모했던 여자가 남편의 불륜으로 속상한 걸 알고 바로 접근하는 유부남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어라, 이 여자 지금 속상하고 외롭겠네, 그렇다면 바로 이때다! 하고 접근하는 거. 정말 토나오게 싫다. 정말정말 토나온다.
영화 [사랑과 영혼(Ghost)]에서도 애인의 죽음으로 상실한 데미 무어에게 그 친구가 대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여자의 입에서 '외롭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그 때에 훅- 들어가는 거. 정말 비열하기 짝이 없고 한심하고 자존감도 낮은 머저리의 형태다. 너무 싫어. 진짜 토나와.
정반대의 경우는 영화 [러브, 비하인드]를 들 수 있겠다. 여자는 가까스로 이별을 받아들이고 아파하는데, 이 때 여자에게 새로운 남자가 등장해 대시한다. 여자는 '나는 일단 혼자 서고, 그 후에 너랑 데이트할게'라고 말한다. 정말로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외로운 감정이 휘몰아쳐 있을 때 연인이 되는 건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최악의 선택이다.
그리고 또 사랑이 아닌데 사랑인줄 착각하는 건, 상대에 대한 철저한 의존이 있다. 베티 프리단은 이 책에서 바로 그걸 언급한다. 읽다가 답답해서 가슴을 쳐야했던 부분이다. 상대를 숨막히게 하는 이런 사랑. 사랑이라고 포장하는 어리석음. 베티 프리단은 '대리 생활'이라고 연구한 '안드레아 안쥐알Andrea Angyal'의 글을 인용한다.
대리 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징후는 특히 다른 사람에게 구조적으로 의존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주 사랑이라는 형태로 오인된다. 그러나 그렇게 강하고 집요한 애착은 헌신, 직관적 이해, 자기 자신의 권리와 방식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즐기는 것과 같은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모두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애착은 극도로 소유욕이 강하고, 상대방에게서 '그 자신만의 삶'을 빼앗는 경향이 있다. …… 상대방은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아니라 내면의 공허함과 무無를 채우기 위해 필요한 존재다. 이러한 무無는 원래 단순한 환상에 불과하지만, 지속적인 자기 억압을 통해 실제의 상태가 된다.
대리 생활을 통해 대체 인격을 얻으려는 이런 모든 시도는 그 사람을 막연한 공허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또한 순수하고도 자발적인 충동을 억제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감정적 무의미함(공허함)을 느끼게 하며, 거의 존재감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Andrea Angyal, "Evasion of Growth" 재인용, p.506-507)
나도 저런식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다. 상대는 그것을 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너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 나는 너의 신이 아니다, 라고 당시에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나에 대한 사랑이 아님을. 그는, 그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 그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나를 필요한 존재로 생각해 곁에 두려고 했던 거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나를 옆에 두려고 하면서, 그러면서 나를 신인것처럼 생각했다. 위의 안드레아 안쥐알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당연한 듯 '김 숨'의 <당신의 신>을 떠올렸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p.64)
남편은 아내를 신이라 여기고 신이 아니라며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이제는 '나를 버리려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사람. 아내는 그저 아내였을 뿐인데, 그의 영혼을 구원하고 또 파괴하는 사람이 된다. 아내가 한 일이 아니다. 아내를 구원자로 또 파괴자로 몬 남편 자신이 한일이다.
이혼을 원한다는 그녀의 요구를 그는 번번이 묵살했다. 혀가 꼬이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 밤, 마침내 따지듯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 무엇을 위해 시를 쓰지?"
"무슨 말이야?"
"시 말이야. 무엇을 위해 쓰지? 응?"
그녀가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하자 감정이 격해진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 아니었어?"
"영혼……? 나는 당신과 이혼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날 버리겠다는 거 아니야?"
"버리다니? 누가 누구를?"
"네가, 나를!"
"나는 지금 당신을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당신과 이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그게 그거 아닌가?"
"억지 부리지 마!"
"네가 날 버리는 건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p.58-59)
사랑이라고 입밖으로 낼 때, 그것이 과연 상대에 대한 사랑인지를 수십번 수백번 스스로 물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상대에게 사랑한다고 몇천번 얘기하면서 그러나 거절은 번번이 묵살한다면, 그것이 과연 상대에 대한 사랑인가.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 폭력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아무때나 사랑 갖다 붙여 쓰지 말라. 사랑이 너무 엿같은 게 되어버리는 게,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이다. 사랑이라니, 지긋지긋해, 이렇게 되어버린다고.
어휴..폭발하듯 글쓰기하는 아침이었네. 자, 이제는 마음을 좀 가다듬고,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 일...일..일..일을 하자. 720쪽 까지 있는 여성성의 신화를 이제 막 5백쫌 넘겼다. 내일 4월 30일까지 이 책을 다 읽어내려면, 나는 오늘도 퇴근하고 까페에 들러야할 것 같다.
새로운 섹스 테크닉을 기술하고 있는 매뉴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흥분이 고갈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 P460
성과 지성 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이든, 성행위를 뒤로 미루는 것은 고등교육에서 필요로 하며 그 결과물인 정신적 행위의 성장과 사회에서 가장 가치 있는 직업의 성취를 동반하는 듯했다. - P484
빠른 성교는 대개 오르가슴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소녀들은 계속해서 교육을 받고 5~10년 또는 15년 뒤에 결혼한 소녀보다 오르가슴을 덜 느꼈고 성적 만족도도 덜했다. 교외의 날라리 소녀들처럼, 이른 성 경험의 편견은 연약한 자아를 나타내며 결혼으로도 자아는 강화되지 않았다. -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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