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못해서, 잘 몰라서 끈질기게 시도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아동문학과 시 이다. 봐도 봐도 잘 모르겠어서 '그래도 언젠가는 알게되겠지' 싶어 계속 시도하는데, 역시 그래도 잘 모르겠다. 얼마전에도 신간인 시집을 호기롭게 샀다가 바로 중고로 팔아버렸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 아동문학도 그렇다. 좋다는 그림책, 동화책을 읽어도 내가 너무 어른의 눈으로 봐서인지 제대로 감동을 할 수 없는 거다. 나는 항상 예술이란 제대로 감상하는 자의 몫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면에서 볼 때 아동문학은 나랑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분야였어. 어쩌면 어릴적에 엄마가 내게 책을 읽어주지 않아서 이런건지도 몰라, 생각했지만, 엄마는 읽어줬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기억이 안나? 게다가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 책을 주로 읽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중학교때 읽었단 말이다, 나는... 나란 여자... 나란 어른... 아무튼,
그래서 아동문학은 나랑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봐봤자 나는 이해도 못해, 하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 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는 내가 이제 포기한다. 잘가라, 사요나라. 굿바이- 그렇지만 아동문학은 포기하지 않겠어. 왜냐하면 나에게는 조카들이 있으니까.
지난주말에 조카보러 갔는데 조카랑 책 이야기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나: 이모 해리포터 읽기 시작했어.
조카: 정말?
나: 응. 아직은 마법사의 돌만 읽었어.
조카: 나는 지금 아즈카반의 죄수 읽어.
나: 아 그렇구나.
조카: 이모 해리포터 재밌어?
나: 음.. 아니. 이모는 막 그렇게 재밌지는 않아.
조카: 나는 해리포터가 제일 재밌는데!
나: 이모는 막 그렇게 재밌지는 않은데 그건 좋아. 머글이 뭔지 알게 된거.
조카: 이모 머글이 뭔지 알아?
나: 응. 마법사들이 마법을 부리지 못하는 인간을 부르는 말이잖아.
조카: 응, 맞아.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해리포터 내 취향 아니라고 던져둘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해리포터 읽으면서 몇 번이나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여.... 그래서 2부부터는 안읽을거야, 했지만, 조카랑 저런 대화까지 한 마당에 내가 또 안읽을 수 있나. 휴...
조카: 이모, 푸른사자 와니니 알지?
나: 응, 이모가 사준거잖아!
조카: 응 맞아. 나 그거 2권 샀어!
조카는 제방으로 달려가더니 푸른사자 와니니 2권을 가져온다.
나: 우와. 이모가 이거 타미 사주려고 했거든. 이모도 나온 거 알고 있었어.
조카: 응 우리반 친구가 이거 읽고 있는데 나도 너무 읽고 싶은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사달라고 했어.
나: 아, 이모가 사줄라고 했는데! 다 읽었어?
조카: 아니, 아직 안읽었어.
나: 응. 다 읽었다고 하면 이모가 빌려가려고 했어. 다 읽고 빌려줘.
조카: 응. 빌려줄게.
나: 음... 이모 2주후에 또 올건데..그때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조카: 응. 그때까지 다 읽을 수 있어. 그 때 빌려줄게.
세상 행복하고 아름다운 대화가 아닌가... 럽....... 사랑이 넘치는 이모와 조카다.
그래서! '김지은'의 《거짓말하는 어른》을 읽었다. 아동문학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고 싶어서. 내가 좀 더 잘 알아야 그림책이며 동화책이며 더 잘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잘 읽을 수 있게 된다면 더 많이 읽을 수 있을테고, 그러면 아이들과 좀 더 잘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내심 이 책이 재미없으면 어쩌지, 라는 걱정도 했다. 아동문학에 대한 평론집이 과연 재미있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우 재미있었다. 이건 시작부터 재미있어. <책머리에>부터 이미 명문들로 가득하다. 코끝이 찡해지는 구절들로 가득해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아동문학을 사랑하면서 아동문학을 많이 읽고, 어린이를 위해 생각할 줄 아는 어른이 있다는 게 너무 좋은 거다. 나는 못하고 있는 걸 어딘가의 누군가가 해주고 있다는 게 너무 감사했다. 이런 어른들이 있어서 아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세상에 참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게 다행스러운거다.
평론집이니만큼 아주 많은 아동문학이 이 책에 등장하는데 읽으면서 몇 권이나 보관함과 장바구니에 쑤셔넣었다. 장바구니엔 당장 살 책들이 들어갔는데, 너무 많아서 몇 권 추려야 할 것 같다. 그중에 몇 권만 일단 사서 읽은 후에 조카 가져다줘야지. 조카야, 이거 읽어봐, 하고 주고 싶다. 그러면 우리는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테니까.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내가 어린이의 시점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에 대해서라면 사실 그렇지 않다..라고 밖에 답할 수가 없다. 사람이 책 한 권 읽었다고 막 또 달라지고 변하고 그러는 건 아니잖아? 그래도 김지은 평론가가 언급한 책을 읽노라면 그전보다 이해의 폭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긴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아이들만의 공간에서 생활해도 이미 상처받는다. 그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고민이 생기는가. 우리도 다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잘 알잖아. 다음날 눈뜬 후에 학교가기 싫다, 고 생각하면서 울었던 날들도 있고, 학교가 지옥 같았던 날도 있고, 싸운 친구랑 사이 어색해서 그냥 다 싫기도 하고, 공부하기도 싫고, 체육시간도 싫고, 어른들 잔소리도 싫고..그냥 아이들 삶 만으로도 이미 힘들고 상처받는 게 허다한데, 어른들이 거기에 짐을 더 얹어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세상 제일 싫은 게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다. 아, 이렇게까지 얘기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아무튼.
나는 아이들이 가급적 상처 받지 않으며 자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자라면서 상처를 받지 않을 순 없다. 상처주지 않으려는 사람들만 주변에 가득하다해도 알게 모르게 어떤식으로든 각자의 이유로 상처받기 마련이다. 어떤 상처는 작고 어떤 상처는 매우 클텐데, 나는 궁극적으로 아이들이 상처를 극복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어른이 되어서도 필요한 건 내 상처를 가지고 안으로 숨어들기보다는,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게 최종목표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상처를 스스로 들여다보고 극복할 수 있는데 책이 정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른들이 제 때에 제대로된 말을 해주지 못해도 책은 그걸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혼자 책을 읽는 시간, 그 자체로도 아이에게 힘이 될 수 있고, 책 속 이야기나 등장인물들을 만나면서도 한뼘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궁극적으로 좋은 어른이 되고 싶고 내가 좋은 어른으로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딱히 많은 것 같질 않은 거다. 그렇지만 나 역시 책을 많이 읽고 아이가 읽은 책에 대해 같이 이야기나누는 건 내가 할 수 있지. 또는 아이가 어떤 일로 힘겨워할 때 어쩌면 적절한 책을 건네는 것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은 내 조카들과 조카의 친구들을 기준으로 한다. 나는 이 아이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가, 나는 이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주고 싶은가.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 물론 마음을 먹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김지은은 좋은 어른이 되는 방법을 알고 또 실제로 그런 어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동문학을 사랑하고 그래서 어떤 아동문학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일테고. 아동문학에 대한 이만큼의 애정으로 글을 쓸 수 있으려면 기본적으로 아동에 대한 애정도 있어야 가능하다고 본다.
어린이에게 어른의 짐을 지우는 사회는 온당치 않다. 누구라도 어린이의 건강한 유년을 착취하지 않아야 하며, 약자인 그들을 보호하는 것은 어른의 의무다. 동화 속 어린이들이 굳이 어른의 짐을 나눠서 지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은 작가의 목표이며 우리 공동체의 목표이기도 하다. (p.218)
일전에 김소영의 《말하기 독서법》읽으면서도 이런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었는데, 이 평론집을 읽으면서도 김지은 같은 평론가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동문학에 대한 정교하고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결과적으로는 아이들에게도 더 좋을테니까.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어, 라는 생각 때문에 나는 기분이 무척 좋다. 세상에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좀 더 많아져야 한다. 아이들이 있는 곳은 시끄럽고(당연하다!), 어지럽혀지고(역시 당연하다), 정신 사납다고(지나치게 당연하다!) 생각해서 아이들이 들어올 공간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그런 건 당연한 거니까 너희들도 우리 어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자고 하는 어른들이 가득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잘하는 어른들이 가득한 세상이라면 결국 그 아이들이 자라서 또 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른들이 되지 않겠는가. 아무튼 그러니까 내 말은 김지은 평론가가 너무 좋고 곁들여서 얘기하자면 김소영 선생님도 좋고, 뭐 그렇다는 말이다.
엣헴.
오늘 서민교수님의 신간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됐다.
워낙 책을 많이 내는 분이시라 다 따라 읽지는 못하고 있는데 이 서평집은 냉큼 읽어야겠다. 마태우스님의 서평집 신간이라니... 재밌을 것 같잖아?
내가 사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별다른 노력없이 이제 알 수 있게 되었다.
어제는 내가 당신의 안부를 궁금해했다면,
오늘은 당신이 나의 안부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겠구나,
라고 어제 오늘의 뉴스를 보면서 생각한다.
안부가 궁금하다면, 물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궁금해하지만 말고, 너는 괜찮으냐고,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물었다가 몇 달간 씹히는 한이 있더라도 ㅜㅜ 묻는 걸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그것이 용기.. 나는 용기있는 사람이야.
역시 이럴 때 생각나는 건, 이 시대의 명저, 잘 지내나요...
그럼 이만..
어린이의 감정이 흐르는 길에도 순한 것과 거친 것이 함께 있다. 웃음 뒤에는 비탄이 있고 호기심의 끝에서 공포를 직면하기도 한다. 어린이의 마음에 버젓이 있는 다양한 감정을 어른의 경험 위에서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고 바람직한 것 중심으로만 재편하려는 태도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린이들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골을 따라 문방구에서 산 잔혹한 이야기 시리즈를 찾아 읽는다. 동화가 공포감을 외면한 결과다. - P79
주목할 만한 장면 또하나는 「이놀 로꾸거」의 마지막이다. 모든 것을 거꾸로 하는 놀이에 집중하던 기찬이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따라서 거꾸로 걷자 그 놀이를 중단한다. 그리고 다시 바로 걷기 시작한다. 모두가 거꾸로 걷는다면 바로 걷는 게 거꾸로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이른바 우리가 ‘객관적 참‘이라고 믿는 각종 법칙이나 원칙에도 구성적인 측면이 있음을 알려준다. 애초부터 그것이 변함없는 참이었다기보다는 많은 사람이 따라함으로써 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다수가 했다는 이유로 그에 따르지 않은 소수가 거짓으로 몰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많다. 강자가 마련한 진리의 기준이 객관적인 참이 되어 약자에게 주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찬이의 상상력이 값진 이유는 그가 기존 질서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찬이는 상상력 천재일 뿐 아니라, 자유로운 어린이인 셈이다. - P153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책을 가진 자, 책을 만든 자를 처벌하여 잠잠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책은 그것이 비록 물리적인 모양을 갖췄으되 읽는 즉시 정신으로 다운로드된다. 책을 불태우고 책을 쓴 사람을 잡아들일 수는 있었으나 책을 읽은 사람들의 정신까지 가두지는 못하였다. 어떤 책을 처벌하면 처벌할수록 그 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높아졌다. 이른바 ‘금서의 원리‘다. - P204
어린이에게 어른의 짐을 지우는 사회는 온당치 않다. 누구라도 어린이의 건강한 유년을 착취하지 않아야 하며, 약자인 그들을 보호하는 것은 어른의 의무다. 동화 속 어린이들이 굳이 어른의 짐을 나눠서 지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은 작가의 목표이며 우리 공동체의 목표이기도 하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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