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를 잘 하는 것은 언제나 내 로망이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야말로 노력이 필요한 것이므로. 나는 사실 노력에는 큰 재능이 없는 것 같아. 잘하고 싶다는 욕망만 있지 잘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해, 항상 외국어 공부할거야! 라고 마음 먹고 흐지부지 또 외국어 공부 안하는 내가 되고야 만다.
얼마전에는 프랑스어를 읽어보는 것 만이라도 하고 싶어 프랑스어 교재를 샀다. 스프링분철로 주문해서 받은 뒤, 한 번도 펼쳐보지 않고 한달째 방치되고 있다. 책상 위 프랑스어 교재를 볼 때마다 내가 무슨 짓을 한것인가, 이거야말로 돈지랄이 아닌가 싶다.. 그래놓고 이거 다 보고 다른 언어도 기초만 좀 해보겠다며, 보관함에 스페인어, 베트남어 교재를 넣어둔 터다. 오오, 나란 인간. 욕심은 똥구멍까지 찼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러나!
줌파 라히리는 나와 다르다. 나와 다른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아아, 줌파 라히리여, 원래 글도 잘 쓰는 데 이사람은 세상에,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더니, 숫제 이탈리아어로 글도 쓰기 시작했다. 아,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진단 말입니까. 세상 멋있네. 그냥 외국어만 잘해도 멋진데, 외국어로 에세이를 쓰고 소설을 쓴다!
이 책을 읽은 총평에 대해 얘기하자면, 나의 경우,
기존 그녀의 소설들이 훨씬 더 좋지만, 그러나 역시 줌파 라히리다!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싱글이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한 동네 사는 친구 남편에게 연정을 품고 있는 사십대 중년' 이다. 이 정체성에서 나랑 두 가지 정도가 겹치는데, 오호라, 바로 이런 구절을 만난다.
마흔다섯 살 이후, 좀처럼 병원에 가지 않았던 긴 행운의 시기를 보내고 나서 난 몸의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알 수 없이 이곳저곳이 아프고 이상 증상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눈 안쪽에 계속 안압이 있고, 팔꿈치가 몹시 쑤셨으며, 얼굴 한 부분이 한동안 마비되는 듯했다. 복부에 퍼진 붉은색 둥근 반점들이 심한 가려움증을 일으켜서, 한번은 응급실에 가야 했을 정도다. 결국 연고로 충분했다. (p.34)
나야말로 작년부터 병원에 부쩍 자주 가기 시작했다. 나로 말하자면 주변에서 건강을 타고났다고 말하는 사람이었고, 스스로도 '나는 감기도 안걸려'라며 으스대는 사람이었다. 몇 년간 감기조차 걸리지 않았던 나지만, 요즘엔 몸에 이곳 저곳에 이상이 나타나 자주 병원을 찾게 되는 거다. 이번해 3,4월만 해도 병원을 자주 들락거려, 돈벌어서 병원비 하기 바쁘다고 투덜대는 참이었다.
어제는 복부초음파와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들렀다가, 약 들어갈 길을 터준다고 간호사선생님이 팔에 주삿바늘을 꽂고 계시는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은 왜 한숨이냐 물으셨고,
"저는 감기 한 번 안걸리는 사람이었는데 올해 병원을 너무 자주 와요"
했다. 선생님의 연배도 나와 비슷해 보였는데, 선생님은 정말 공감된다고 하셨다. 아아,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2주전에는 에이형독감에 걸려 타미플루를 처방받았고 우울의 끝까지 다녀왔는데, 어제 검사 결과 담석에 용종까지 붙어 있어 수술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나만큼은' 수술과 거리가 멀거라고, 아픈 것과는 거리가 멀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아아, 역시 사람 일은 한 치앞도 모르는건가. 어떻게 이렇게 병원에 자주 가게 되었나 우울해하는데, 여동생이 내게 그랬다. 그간 언니가 그렇게 언니 몸 잘 사용해온 것에 대해 몸에 감사하라고. 그런데 줌파 라히리가 말한다.
'좀처럼 병원에 가지 않았던 긴 행운의 시기' 라고.
나야말로 내 몸에 감사하고, 그 긴 행운의 시기에 감사해야 하는 거구나. 겸손해진다. 지금 내 몸이 아프다고 우울해질게 아니라, 그간 잘 지내준 내 몸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거였어. 감사하고, 좀 더 살펴야겠구나.
몸이 자주 아프기 시작하면서 내 친구는 서럽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고 했다. 나는 외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럽고 외로운 것. 어쩌면 이것도 이즈음의 우리가 공통적으로 받게 되는 느낌인걸까.
이 여인은 동행자가 없다. 요양보호사도, 친구도, 남편도 없다. 나 역시 이십 년 뒤 어떠한 이유로 이 여인처럼 병원 대기실에 있게될 때, 곁에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걸 그녀가 눈치챌까 두렵다. (p.37)
친구들과 항상 건강하자고, 건강하게 지내자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얼마만큼 와닿는 얘기일까. 나는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제일이라고, 건강해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만, 내가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나는 내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믿어왔지만, 몸 안에 돌이 자라고 있는 걸 내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거기 돌이 있는 줄 미처 몰랐지. 거기에 돌이 있다니, 게다가 그렇게 크게 있다니. 나는 그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까?
조셉 고든 래빗이 주연한 영화 [50/50] 에서, 주인공은 건강하게 오래 잘 살기 위해서 술과 담배를 안하고 매일 운동을 한다. 마약도 하지 않고 원나잇섹스도 하지 않으며 신호가 항상 초록색일 때만 길을 건넌다. 이 모든 걸 철저하게 잘 지켜오는 사람이었지만 암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는다. 주인공은 대체 저것보다 무얼 더 할 수 있었을까? 건강하기 위해, 건강하게 잘 살기 위해 주인공이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 누구보다 노력했다. 그런데 암이라니. 뭘 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럴 때는 건강이 최고야, 건강을 지키자, 라는 말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그러려고 햇어,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어.
아, 인간 뭘까. 건강이란 뭘까. 결국 삶은 운명대로 흘러가는 것인가...
인생..뭘까.....
책 속 여자는 친구의 방문을 받는다. 친구는 아이와 남편과 함께 했는데, 여자는 친구의 남편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친구는 왜 저런 남자와 결혼한걸까? 여자도 친구의 남편에게 호감을 갖지 못했지만, 그건 아마 상대도 마찬가지겠지,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책장, 내 일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모든 책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그 책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날 짜증스럽게 한다. 아내가 소변을 눠야 하는 딸애에 신경이 팔린 동안 남편은 ㅐㄱ 하나를 골라 펼치더니 한 문단을 읽는다. 일요일 중고 시장에서 발견해서 오랜 가격 흥정 끝에 산 절판된 시집이다.
"재미있나요?"
"제 생각에는 그래요."
"오래전 이 작가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데 두 페이지 읽고 나서 그만뒀어요. 더는 읽을 수가 없더군요."
"전 좋아해요, 제 생각에는 훌륭한 작가예요."
"책을 빌려줄래요?"
요청이라기보다 일방적 주장이다. 난 주저 없이 대답한다.
"죄송합니다만 당신들은 여행중이잖아요. 언제 다시 만날지 몰라서요."
그는 날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반박하지 않는다. 책을 제자리에 다시 놓는다. 쩨쩨하게 느껴지지만 내 책을 이런 사람에게 빌려주기 싫다. 절대 그럴 수 없다. (p.89-90)
나는 이 장면이 너무너무 좋다. 여자가 예민한 장면, 까탈스러운 장면. 내가 어렵게 구한 책인데, 감히 여행중인 사람이 어떻게 뻔뻔스럽게 빌려달라고 말하지? 아마도 거절을 힘들어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평가가 나쁘게 날까 걱정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상대의 기분이 나쁘지 않게 이걸 안빌려줄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스트레스를 받게될 것이다. 어쩌면 결국은 내키지 않지만 빌려줬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여자는 아니, 너네 여행중이잖아, 나 언제 받으라고, 하며 빌려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빌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면, 빌려주지 말아야 한다.
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품고 빌려준다면, 그건 스스로에게 너무 못할 짓이다. 그 후에 돌려받을 때까지 마음을 쓰게 될것이고, 그 시간동안의 스트레스가 다 누구몫이람. 사람은 자기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면, 빌려주지 말아야 한다.
이거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스스로에 대한 룰이다.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
빌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면, 빌려주지 말자.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라고 당당히 말하자. 그게 뭐가 쩨쩨해. 그 후에 내가 싸가지없다는 평가를 듣게될 지언정, 어디서 누군가 나를 나쁘게 평가하는 말에 휘둘리지 말고, 아니, 싫다면, 싫다고 하자. 괜히 빌려주지 말고, 내 방 책장에 얌전히 꽂아두고 내가 원할 때 읽자.
아, 이 예민한 장면 진짜 너무 좋아!
이 예민한 여자는 그러나 일상의 것들에 행복함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면은 또 내가 자지러지게 좋아하는 면이며 또 내가 스스로 갖고 있는 면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나는 나의 이런점들을 너무 사랑하는데, 책 속 여자도 그렇다! 이것은 모두가 가진 특성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바, 나는 이런 내가 너무 좋고 그래서 이 여자가 좋다!
난 공짜나 마찬가지인 빵 값을 지불한다. 엉덩이를 붙일 곳을 찾다가 놀이 공원에 앉는다. 밤에는 텅텅 비지만 이 시간에는 아이들, 부모들, 강아지들, 나 같은 외로운 사람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다. 자신을 표현하고 섦여하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는 우리의 충동에 난 새삼 놀란다. 믿어 마지않는 소박한 빵맛에 또 새삼 놀란다. 햇살에 몸을 녹이며 빵을 먹는 동안 성스러운 음식을 먹는 것 같다. 이 동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안다. ( p.85-86)
이렇게 페이퍼를 쓰기 위해 커피를 내렸다. 커피가 다 떨어져가니 다시 주문해야겠구나, 생각하면서. 마침 식탁 위에는 빵도 있다. 빵과 커피를 먹다 보면 이 흐린 날의 오전이 또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내게는 읽을 책이 무지 많아!
이 책을 읽는 동안 굉장히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친구가 선물해준 느낌. 내가 이 책을 샀는데, 사고나서 며칠 뒤 친구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온 거다. 줌파의 신간이 나온 걸 알고 있었냐, 그거 사주고 싶다, 고. 나는 이미 샀다고 고맙다고 말했는데, 친구는 그렇다면 다른 책이라도 꼭 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다른 책을 선물받게 되었는데, 친구는 내게 줌파를 너 때문에 알았고, 그래서 줌파의 책을 보면 항상 네 생각이 난다, 고 말하는 게 아닌가. 크- 이렇게 근사한 작가를 볼 때마다 내 생각을 하고, 신간이 나오니 당연히 사주고 싶어한다니.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뷰티풀 월드.... 역시 친구중에 제일 좋은 친구는 술친구와 책친구인가 하노라....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선물받아 읽은 기분이었다.
아, 얼른 페이퍼 쓰기를 마치고 커피와 빵을 먹어야지. 일요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