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폭력으로서 ‘몰카‘와 성폭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어 피해여성이 ‘죄인‘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강간 범죄에서나 ‘몰카‘ 범죄에서나 문제화되는 것은 ‘가해자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가‘가 아니라
피해자의 처신이다. 둘째,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 사실 자체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지만, 피해자는 오히려 피해
사실을 숨긴다. ㅂ씨 피해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스스로 ‘ㅂ씨와의 성관계를 찍은 몰카를 가지고 있다‘며 언론에 범죄 사실을
알렸으며, ㅂ씨는 사건 발생 초기에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는 강간범이 강간 피해여성에게 ‘강간 사실을 가족·주변
등지에 알리겠다‘며 협박하고, 피해여성은 이를 숨기기 위해 가해자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메커니즘과 똑같다. 범죄는 가해자가
저질렀으되, 사회적 처벌은 피해여성을 향한다. (강김아리, p.135)
셋째, 강간과 ‘몰카‘의 정치적 효과는 일반 여성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들어, 일상적으로 여성의 몸을 규율, 통제한다.
이제 여성들은 공중 화장실이나 공중 숙박 시설을 이용할 때 ‘몰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범죄에
대한 주변의 반응과 처벌 과정은, 잠재적 피해여성들에게 ‘이 범죄에 대해서는 처벌 기제가 없으며, 당하는 사람만 피해를 보는
것이니, 미연에 알아서 조심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즉 ‘ㅂ씨 비디오‘의 존재 자체가 일반 여성들에게 일종의
‘경고‘이자 ‘본보기‘인 것이다.
강간 문제에서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남성의 폭력성‘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었듯이,
‘몰카‘ 역시 여성의 몸을 감시와 통제의 대상으로 만든다. 강간과 ‘몰카‘, 그것은 여성들 스스로 종속을 체화하게 하는 가부장제적
공포와 통제의 수행자이다. (강김아리, p.136)
내가 읽은 건 2003년에 나온 구판이고, 링크된 책은 2018년 개정판이라 쪽수가 일치하는지는 모르겠다. 어제 승리와 정준영 사건을 보면서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2016년 정준영 동영상 사건이 드러났을 때 정준영은 무혐의라고 계속 예능에 나왔고 또 지금도 나오고 있다. 그때 내가 인터넷 기사의 댓글들을 읽으며 다니진 않았지만, 아마 많은 남자들이 정준영이 '당했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여자들은 '무혐의가 무혐의가 아닐 것이다'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불법촬영의 피해자가 괜히 그걸 고소할 리가 없으니까. 불법촬영 당했다는 혹은 성추행, 성폭행 당했다는 고소를 여자들이 대체 무슨 '이익'을 보자고 괜히 하겠나. 그 무혐의를 지켜보며 피해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러고도 정준영은 예능에 계속 나와서 웃으며 돈을 벌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피해자는, 아니 피해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피해자 중에는 자신이 찍힌 걸 뒤늦게 알고 '고소안할테니 유포만 하지 말아라'고 말하기도 했던데, 그렇게 말을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정말이지 분해서 미치겠다. 왜 피해자가 범죄 사실을 드러내기 겁내야 하고 숨어야 하는가. 그동안 이 사회는 어떻게 유지되어온 것인가.
그나마 이렇게 심각하게 인식될 수 있었던 건, 지난해 나를 비롯한 많은 여자들이 불법촬영 하지 말라고 길에 나가 크게 소리질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에 이른 게 아닐까. 세상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마 저런 단톡방은 숱하게 많을 것이다. 불법촬영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공유하는 단톡방. 남자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학생들 사이에도 숱하게 존재하는 단톡방이겠지. 부디 이번에 저 단톡방에 있던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붙잡아 죄에 맞는 벌을 받는 걸 보고싶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지금 이 나라에 존재하는 수백 수천개의 단톡방들을 더이상 이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저 단톡방에 있던 그 누구도 텔레비젼에 더이상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나와서 반성했다며 눈물 흘리고 또다시 웃으며 돈을 잘 벌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노래가 좋아서', '연기를 잘해서'라는 핑계로 그들이 여전히 잘 살 수 있음을 보여줘서는 안된다. 우리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열심히 노래하고 연기하는 이들을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만큼 연기하고 그만큼 노래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이 아니면 안되는 게 아니다. 범죄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피해자들이 보는 텔레비젼에 나와서 재능을 뽐내는 일따위 해서는 안된다. 사실 뭐 재능 따위, 남자라는 것 말고 별 거 있는 것 같지도 않지만.
어제 저녁 퇴근 무렵만 해도, 사랑의 묘약 다 읽었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말랑해진 마음으로 페이퍼써야지, 했는데, 저 지독한 한남들의 뻔한 단톡방 불법촬영 사건을 보고 너무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최근 책읽기에 또 집중 못하는 타이밍이구먼, 하고 있었는데, 더 가열차게 읽어야겠다. 작년에 친구와 나는 성폭력에 대해 더 파고들어보겠다, 라는 얘길 나눴더랬는데, 더 열심히 읽고 더 열심히 말하고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만큼 힘을 보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