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를 오래 좋아해왔다. 고등학생일 때 처음 읽었고 대학생일 때부터 좋아했다. 그의 단편 <일곱 번째 남자>가 그를 좋아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계속 좋아했고 생일 때도 거침없이 '하루키 책 사줘!'를 말하곤 했다. 길을 걸으면서 하루키를 읽다가 전봇대 앞에서야 비로소 멈추기도 했고 계단을 오르며 하루키를 읽다가 앞 사람과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하루키의 많은 책들을 두 번이상 읽었고 책장 한 칸은 통째로 하루키에게 주었는데, 한 칸으로는 모자라서 눕히고 쌓고 난리도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하루키는 소설보다 에세이라고 했지만, 나는 하루키의 소설도 너무나 사랑했다. 그가 툭 던져내는 심드렁한 유머는 나를 늘 웃게했고, 또 나는 그게 좋아서 계속 그의 소설을 읽고 다시 읽고 그랬다.



그래서 이 책 읽기를 미뤄왔다. 이 책의 인용된 문장을 보았는데 기분이 나빠진거다. 소녀와의 대화에였는데, 소녀의 가슴에 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사실 그 전 작품은 《1Q84》에서 이미 한차례 '왜 그랬어'를 수십번 물었던 장면이 있다. 한 종교의 교주와 십대 소녀의 성관계를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그 교주는 성폭행을 일삼는 자로 나오지만, 그 장면이 거기에 필요했을까, 대체 왜그랬을까를 수십번 물으면서 넘겼더랬다. 그러다 이 책에 소녀의 가슴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생각하니, 갑자기 확- 밀려왔다. 일큐팔사의 그 싫었던 장면이, 해변의 카프카의 그 장면이, 그리고 그간 그가 소설에서 그려낸, '악의는 없는', '순수한', '아저씨와 소녀'와의 친근감이. 그러고보니 그는 항상 아저씨와 소녀의 친밀한 관계를 그려냈다. 성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그들은 친밀했다.


하루키를 오래 좋아했고, 하루키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 읽기를 미뤄왔다. 읽고나서 내가 그를 버릴까 두려웠고 그에게 온갖 정이 떨어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자꾸만 뒤로 미뤘다. 안돼. 신간이 나왔지만 예전이라면 서둘러 샀을 그의 신간을 부러 사지 않았다. 기사단장 죽이기 읽어보고, 그 때 결정하자...


얼마전에 친구들과 여럿이서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오래 좋아하던 남자 작가를 최근에 버리게 되면서, 그 씁쓸함을 얘기했더랬다. 나는 친구가 좋아하는 작가를 좋아한 적이 없어 버리기가 쉬웠는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버려야 한다면, 나 역시 친구처럼 씁쓸하고 쓸쓸하겠지. 이미 필립 로스 때도 마음이 아팠는데... 그런데 하루키까지..... 하루키를 내가 좋아한 시간이 도대체 얼마야... 어쨌든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잘 읽히고 재미있어서. 도대체 이 사람 머릿속엔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이야기를 흥미롭게 잘 만들어낼까.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은, 밤에 자기 전에 읽지 말라는 거다. 지금 현재 1권의 끝부분을 읽고 있는데, 여러분, 자기 전에 읽지 마요. 특히 혼자 자는 사람들은... 읽지마요 ㅠㅠ 무섭다 ㅠㅠㅠ 새벽에 바깥에서 들리는 방울소리, 그래서 그 땅을 파니 거기에 방울이 들어있고...누가 울린걸까 그 방울을 작업실에 가져다 뒀는데, 새벽에 또 작업실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방울소리...으아악 너무 무서워 ㅠㅠ 나 어제 자기 전에 읽고서는 아아 괜히 읽었다, 낮에 읽을걸, 으아아아, 너무나 무섭네, 하고 내 침실로 가 잠을 청하는데 으아악 ㅠㅠ 한 시간에 한 번씩 깬 것 같다. 너무 무섭다. 여러분 이 책 읽을 거면 자기 전에 읽지 마요. 잠 못자요 ㅠㅠ



소설을 쓰는 작가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주인공에 자신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 주인공의 직업은 '화가'이지만, 늘 일정하게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이 있고, 음식을 많이 먹지 않고, 음악을 많이 듣는다. 요리를 비롯한 가사노동에 들이는 시간이 많은 남자가 나오는데, 이건 그간 하루키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어왔다면 비슷한 성향임을 알 수 있을 거다. 이 사람은 그냥 자기 삶이 그런 사람이구나.


그리고 어떻게 새벽에 울리는 방울소리.. 같은 걸 책에 쓸 생각을 했을까? 머릿속에 이야기로 가득차있나..그리고 진짜 재미있어 ㅠㅠ 나는 하루키 소설이 재미있다 ㅠㅠ 그래서 슬프다 ㅠㅠ 왜냐하면 걸리적 거리는 부분들이 많이 나왔거든.



만약 열두 살에 죽지 않았다면 동생은 어떤 인생을 보냈을지 곧잘 상상하곤 했다. 물론 내가 그런 걸 알 수는 없다. 나 자신이 어떤 인생을 보낼지도 가믄할 수 없는데 하물며 동생의 앞날을 알 수 있으랴. 그래도 심장판막 기능에 선천적인 이사잉 없었더라면 그애는 틀림없이 유능하고 매력적인 어른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많은 남자의 사랑을 받고 그들의 다정한 손길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구체적인 광경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나에게 그애는 어디까지나 세 살 아래의, 나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어린 동생이었다. (1권, p.186)



물이 흐르듯 곧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에, 이목구비가 인형처럼 또렷했다. 다만 너무 또렷한 탓에 전체적으로 보면 어딘가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객관적으로는 미인형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저 간단히 '아름답다'고 단언하기에는 왠지 망설여지는 얼굴이다. 무언가가-짐작건대 일부 소녀들이 성장기에 발산하는 독특한 생경함 같은 것이- 본래 있어야 할 아름다운 흐름을 가로막는 것이리라. 언젠가 어떤 계기로 그 걸림돌이 제거된다면 실로 아름다운 아가씨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더 걸릴 것 같다. (1권, p.461-462)



주인공이 열다섯살 때 여동생이 죽었는데 주인공은 여동생의 가슴이 막 나오기 시작한다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여동생이 죽지 않았다면 남자들한테 사랑받는 여자가되었을텐데..같은 생각을 하는데, 여자가 자라면서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가장 자랑스레 성취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남자한테 사랑받는'것 뿐일까? 또한 어른이 된 주인공이 사춘기 소녀에 대해 묘사하면서도 '어른이 되면 더 예뻐질 거'라고 한다. 여자의 가장 큰 성취는 '예뻐지고 사랑받는' 게 전부인가? 그게 남자 작가의 머릿속 한계, 사고의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저 생각을 했던 시기의 주인공이 십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걸까. 달에 갈지도 모르고 수학 박사가 될지도 모르고 노벨상을 탈지도 모르고 피아니스트가 될지도 모르고 공대 교수가 될지도 모르는데, 판사가 되고 경찰이 되고 FBI 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식으로는 사고가 확장되지 않고, '어른되면 예뻐질거다', 라든가 '남자한테 사랑 많이 받았을텐데' 라는게 생각의 전부라니.. 이런 식으로밖에 사고하지 않는 남자들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너무 답답했다. 하루키처럼 세계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라면 그 영향력이 더 클텐데 이런 사람이 똭- 페미니즘 장착해서 가슴사이즈로 먼저 말하여지는 여자를 그려내지 않아야 되는게 아닌가.



하루키도 이 소설에서 여자 가슴 얘기를 몇 번이고 언급하는데, 남자 작가들은 유독 여자를 묘사할 때 가슴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왜 처음 여자를 볼 때 가슴을 볼까? 그러보고면 여자 작가들이 남자를 그려낼 때는 한 번도 '처음 볼 때부터 유독 큰 고추 사이즈가 눈에 들어왔다' 던가, '벗겨보니 고추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이 작았다' 라든가, '시커먼 고추가 축 늘어져 있어서 김이 샜다' 라든가, '그가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 고추로 눈길이 갔다' 라든가 하지 않는데... 왜 여자의 가슴 사이즈는 여자를 말할 때 어떤 특징으로 말하여지는 걸까. 왜 가슴이 여자의 대표성을 가질까? 소설에서마다 고추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면, 남자 독자들은 읽으면서 어떤 기분을 느낄까?




그러나 일큐팔사의 마지막 권에서도 좋았던 것처럼, 이 책 부분부분이 분명 마음에 든다. 어쩌면 놓기 너무 아쉬워서 그러는 것일까. 이혼한 아내에 대한 부분들은 다 너무 좋았어. 물론 처음 만남은... 아니 그런데 말입니다. 도대체 왜 어째서, 애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한 눈에 반하는 걸까? 이 책에서 주인공도 그랬다. 애인이 있는데 우연히 만난 애인의 동창에게 한 눈에 반해버리는 거야. 그래서 결국 그녀에게 연락을 하고 결혼까지 하게된다.



처음 아내를 만난 건 서른 살을 앞둔 무렵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세 살 아래였다. 요쓰야 산초메에 있는 작은 건축사무소에 다녔는데, 2급 건축사 자격증이 있고, 당시 내 여자친구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긴 생머리에 연한 화장, 굳이 말하자면 온화해 보이는 얼굴이었다(성격은 얼굴만큼 온화하지 않다는 사실이 머지않아 판명되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다).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던 중 어느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마주쳐 소개받은 그녀에게 나는 거의 한눈에 반했다. (1권, p.46-47)



왜 한눈에 반한거야, 왜? 여자친구가 있는데 왜그랬어? 여자친구가 있는데 왜 다른 사람한테 반했어? 왜? 왜그랬어?


위의 인용문의 페이지수를 보면 알겠지만 이게 거의 초반에 나오는데, 어휴, 그래서 초반부터 너무 힘들었다. 내 경우엔 나의 애인이 다른 여자에게 반한 적은 없지만,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가 내게 첫만남에서 반한 적이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이건 안된다, 이건 안된다' 수도없이 말했지만 나도 너무 홀딱 반해버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릴라고 이를 악물었더니 눈물만 나왔지. 그때 그가 내게 그러지 않았으면,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나를 보지 않았으면, 그랬으면 내 인생은 평온하게 흘러갔을텐데... 지극히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흘러갔을 텐데...그 날 이후로 나는 고통스런 천국에 살고 있지........왜그랬어, 왜... 왜그렇게 나한테 쑝갔어.... 나는 긴 생머리에 연한 화장, 온화한 얼굴도 아닌데...... 왜 그 때 나한테 그렇게 들어왔어.....왜 이렇게 내 마음과 정신이 널뛰듯 살아야 하는거니, 왜.... 여자친구만 봤으면 됐잖아........



'하루키를 버릴 것인가 말것인가'로 시작하며 책장을 열었다가 나의 온전한 슬픔에 침잠해버려, 읽는 내내 분노와 짜증과 무서움이 찾아왔지만 전반적으로 슬픈 마음으로 이 책을 나는 읽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혼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여전히 남아있고, 그리고 그렇게 아내를 그리워해. 이혼 후에 다른 여자들을 만나 섹스하지만, 그런데 온전히 상대에게 올인하는 섹스가 아니다. 섹스를 위한 섹스일 뿐, 머릿속에 계속 헤어진 아내가 있다. 난처한 일이라고 친구가 그에게 말하는데, 나는 또 이 난처한 일이 정말 난처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넌 아직 유즈를 좋아하는구나."

"잊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마음이 딱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 이유는 몰라도 그렇게 되어버려."

"다른 여자하고 자진 않아?"

"다른 여자와 자더라도 그 여자와 나 사이에 항상 유즈가 있어."

"난처한 일이네." 그가 말했다. 그리고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진심으로 난처한 것처럼 보였다. (p.377)




나는 모든 사람들이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런 난처한 상황에 놓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런 난처한 일을 겪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고, 나 역시 그중 하나이다. 나는 언젠가 누군가에게 '나는 그 날 이후로 나를 쪼개서 살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를 쪼개서 한 쪽에선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하고 한 쪽에선 다른 사람을 만나 데이트도 하고 연애를 해, 라고. 나를 쪼개서 사는 일,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항상 그 사람이 있는 그 난처한 삶을 내가 살았다. 그런데 하루키가 이런 것에 대해 말하고 있어..나는 정말이지 어쩔 줄을 모르겠는 것이야...



아직 1권의 100페이지가 남아있고 나는 당연히 2권도 읽을 것이다. 갑자기 조 올로클린 시리즈도 읽고 싶지만, 나 그 책 샀나 안샀나, 아직 신간 안샀나? 헤어진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읽노라니 조 올로클린도 넘나 생각나는 것...


우리가 부부관계를 정식으로 끝낸 뒤에도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부로 지낸 육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공유했다. 많은 시간, 많은 감정, 많은 말과 많은 침묵, 많은 고민과 많은 판단, 많은 약속과 많은 포기, 많은 열락과 많은 권태. 물론 서로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속에만 품고 있던 비밀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감각까지도 제법 현명하게 공유해왔다. 거기에는 시간만이 배양할 수 있는 '자리의 무게'가 존재했다. 우리는 그런 중력에 요령 있게 몸을 맞추고, 미묘한 균형을 잡으며 살아왔다. 또한 우리의 독자적일 '로컬 룰'같은 것도 몇 가지 있었다. 그것을 모조리 없던 셈 치고, 그곳에 존재하던 중력의 균형이나 로컬 룰을 배제하고서, 그저 단순한 '좋은 친구'따위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p.305-306)


이런 부분을 읽으면 정말 너무 좋잖아 ㅠㅠ



이혼을 겪고난 후의 남자가 두 달간 혼자 여행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페이퍼가 너무 길어지니 이만 쓰도록 하겠다.


이만 총총.





아홉 달 남짓-이 시간이 이별의 기간으로 길었는지 짧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영원에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고, 의외로 순식간에 흘러간 것 같기도 하다. (p.15)

"저기,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혹시 이대로 헤어지더라도 친구로 지내줄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발을 신고, 가방을 어깨에 메고, 한 손을 현관 손잡이에 올린 채로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친구로 지내자고?"
그녀가 말했다. "그럴 수 있다면, 가끔 만나 이야기를 하면 좋겠어."
여전히 말뜻을 알 수 없었다. 친구로 지내자? 가끔 만나 이야기를 한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수수께끼라도 푸는 것 같다. 대체 나한테 전하려는 말이 뭘까. 내게 특별히 나쁜 감정은 없다, 그런 걸까?
"글쎄." 내가 말했다. 더는 할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일주일을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래서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p.37)

결혼한 여자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마 나는 정신적인 돌파구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빠진 정체에서 어떻게든 헤어나고 싶었고, 그러려면 스스로를 자극하고(그게 어떤 자극이건) 정신을 뒤흔드는 것이 필요했다. 늘 혼자라는 사실에도 지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상당히 오랫동안 여자와 자지 않은 상태였다. (p.79)

뭐, 상관없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맺었다. 눈앞에 어떤 흐름이 생겼다면 일단 흘러가보면 된다. 상대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면 그 의도에 걸려들면 될 일이다. 이 산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이 묶여 있는 것보다야 그편이 훨신 근사하지 않은가. 사실 호기심도 있었다. 내가 앞으로 상대할 인물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내게 거액의 보수를 내놓는 대신 무얼 요구할 셈일까? 그 무언가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어졌다. (p.128)

"어제 일 말인데요." 멘시키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지하의 석실을 열어버림으로써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무언가를 얻었을 겁니다. 과연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저는 그 점이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닙니다." (p.297)

한편 유즈에게서도 전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전화 한 통 없고 편지 한 통 오지 않았다.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말을 꺼낸 건 그녀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생각 이상으로, 예상을 훨씬 넘는 정도로 내게 상처를 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내게 상처를 준 것은 사실 나 자신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 침묵 속에서 내 감정은 날붙이로 만든 무거운 추처럼 한끝에서 다른 한끝으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왕복했다. 그 감정의 호는 내 피부에 생생한 상처를 몇 군데나 남겼다. 그리고 내가 그 아픔을 잊을 방법은 실질적으로 하나뿐이었다. 당연히,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p.306)

"그렇습니다. 저는 흔들림 없는 진실보다는 오히려 흔들릴 여지가 있는 가능성을 선택하겠습니다. 그 흔들림에 제 몸을 맡기는 쪽을 선택할 겁니다. 그게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p.468)

우리는 어찌 보면 닮은꼴인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장차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행위를 내가 납득할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내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동기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p.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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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8-08-20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열심히 읽고 쓰고 계시네요 ㅎ 하루키 ㅠ 저에게도 애증의 작가입니다 마치 카프카처럼 읽을 때는 빨려드는데 다 읽고나서는 이게 뭔 소리야 하고 책을 던져 버리는 ㅠ 근데도 수리부엉이 황혼을 날아오르다를
샀네요 ㅠ
글구 하루키의 여성에 대한 생각이 남자에 의해 소비되는 대상으로만 묘사된다는건 지금 글을 읽으며 깨달았네요 @.@
이거 더 정 떨어지는걸요…

다락방 2018-08-20 09:27   좋아요 0 | URL
십대의 소녀를 볼 때도 사랑받는, 사랑받아야 할 ‘여성‘으로만 보는게 찝찝해요. 당연히 성인 여성과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하면서 상대의 성적 매력에 이끌릴 수 있는데, 십대 소녀가 자라서 그런 여성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게 전제에 깔린 것 같아서 불쾌했어요. 오랜 시간 좋아했는데 이런 게 눈에 들어와버려서 참 저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ㅠㅠ

단발머리 2018-08-20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루키를 다 읽지는 않았구요. 그러니까 소설 3개, 에세이 2-3개 읽은 것 같은데, 저도 하루키가 좋거든요.
이 책도.... 사실 좋았구요.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십대 소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십대 소녀가 ˝아저씨, 제 가슴 어때요?˝ 하고 묻는 장면 빼고요.
남자 작가들이 왜 이렇게 여성의 가슴에 대해 집착할까 라는 질문에, 전에 정희진샘 대답이 생각나요.
남자에게 가슴이 없어서라고. 없어서 그런거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ㅠㅠ

오래 시간 좋아한 사람에게서, 참을 수 없는 이런 점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한 마음으로 슬퍼집니다.
그것보다 더 슬픈 건 다락방님의 마지막 단어들.
이만 총총.
나는 세상에서 ‘이만 총총‘이 제일 싫어요. 얼른 읽어주세요~~ 얼른 읽고 또 써주세요~~

지금까지 58815번째 방문자였습니다. 이만 총총.

다락방 2018-08-20 09:48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이 좋아요. 재미있어요, 단발머리님. 그래서 속이 터져요. 아직 말씀하신 부분을 읽진 않았지만, 그 부분 읽다가 또 화가나겠죠... 아 빡쳐 ㅠㅠ 그런데 하루키 재미있어요. 속상해요. 하아-

남자가 가슴이 ‘없어서‘ 여자의 가슴에 집착하는 거라면, 여자는 고추가 없는데 왜 남자의 고추에 집착하지 않을까요? 사춘기 소녀를 보면서도 성숙한 여성에 대해 떠올리는 게 너무 징그럽고 싫어요. 하루키는 일전에 에세이에서 ‘무조건 약자의 편에 서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약자의 편에 선다는 건 .. 뭘까요? 하아-
그렇지만 이 책 재미있어서 일단 끝까지 다 읽긴 할겁니다. 휴..

다 읽고 또 페이퍼 쓸게요. 우리 부지런히 읽고 써요, 단발머리님. 좋은 건 좋다고 남기고 싫은 건 싫다고 남기면서 계속 그렇게 읽고 쓰도록 해요!1

단발머리 2018-08-20 09:55   좋아요 0 | URL
제가 <여성성의 신화> 읽고 있잖아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거기에서 이런 문장이...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여성의 성격 형성의 동기가 되는 힘은 남근에 대한 여성의 선망이었다. (228쪽)

거세 폼플렉스와 남근 선망, 그의 모든 사고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이 두 개념은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가정한다. (229쪽)

프로이트는 당시 여성들의 신경증이 남근 선망 때문이었다고 했대네요.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 열망.
저도 현재 읽는 중이라.... 모르는게 너무 많아요 @@
이만 총총.

다락방 2018-08-20 09:5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일전에 페미니즘 강의 들으러 갔을 때 쌤들이 프로이트 얘기 많이 하시더라고요. 프로이트는 남성을 ‘고추가 있는 존재‘라고 봤고 여성을 ‘고추가 ‘없는‘ 존재‘라고 봤다고요. 그러니까 여성은 여성의 성기를 ‘가진‘ 자가 아니라, 남성의 성기를 ‘가지지 못한‘ 자요. 그래서 여성은 열등하고, 열등하다고 생각해서 남근을 선망하고...

네네, 또 얘기해주세요, 단발머리님!!

비연 2018-08-2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미뤄두고 안 사고 있었는데 말이죠 말이죠 ㅠㅠㅠ 락방님 미오요 ㅠㅠㅠ

다락방 2018-08-20 19:37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장바구니에 책을 또 쓸어담았습니다 ㅜㅜ

비연 2018-08-20 20:11   좋아요 0 | URL
헉!

clavis 2018-08-22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넘나 재미나게 읽다가 이만 총총.하시니 무지 서운해지네요. 정말 맛깔나게 잘 읽었습니다.

다락방 2018-08-22 22:02   좋아요 1 | URL
히히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의 기쁨입니다!!

즐건독서 2021-01-0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은 그냥 성. 전세계위 일반적인 성적 사고와 판타지를 우리의 사고에 맞출려니 힘들어지는듯. 그애들을 인정해주는것이 우리도 인정받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더 인간적인 사고라 생각하는 순간 오류가 벌어지기 시작해 불편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