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리오 영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박영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평점 :
발자크의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명한 작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그의 소설을 읽을 기회는 영 닿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 작품은 두 딸들에 대한 고리오 영감의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파리라는 사회에 첫 발을 담기 시작한 법대생 라스티냐크가 사회적 성공을 거머쥐기 위한 과정의 경험을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는 사실주의 문학이다.
사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흐르기 전까지의 소설의 전반부 몇 장은 속도감이 너무 떨어져 많이 지루했던 것이 사실이다. 책을 덮을까도 싶었지만 꾹 한번 참았다. 역시 인내하길 잘했다.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지루함은 사라지고 흥미를 돋우는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가 어쨌다는 식의 이야기를 빼더라도 '돈'이라는 경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존재가 된 것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돈과 관련된 인간의 행동이 어떤 변화를 할 수 있으며 얼마나 처절해지고 비열해질 수 있는지를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레 드는 생각은 이랬다. '개인의 삶은 그 시대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속해 있지 않는가' 라는.
고리오 영감의 넘치는 부성애와 라스티냐크가 새로운 세상에 대해 눈을 뜨고 사교계에 입성한 뒤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심한 이질감을 안겨주지만 이야기 속에 담긴 모습들이 현실의 그것보다 과장되어 있더라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사회적인 현실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형국인 듯 싶다. 보케르 부인의 하숙집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군들을 집약해 놓고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요 '보트랭'이라는 인물이다. 보트랭은 사람의 흥미를 끌 만하다. 모든 것에 능수능란하지만 그 능수능란함은 다분히 악마적이다. 보트랭이 라스티냐크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도덕심을 서서히 무너뜨리도록 은근히 종용하는 듯한 음흉한 솜씨가 인상깊게 묘사된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개인의 삶과 그 시대적인 모습이 맞물려 돌아가는 세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출세욕, 성공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들도 결국은 경제적인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떵떵거리며 부족함 없이 호화스럽게 살고 싶은 욕망은 모두가 보편적으로 가지기 쉬운 바람일 테니까. 그렇지만 인간성, 도덕성이란 온기를 내팽긴 채 물질을 좇는 삶이 바른 삶이라는 생각은 죽어도 들지 않으니 이상하다. 사회적 기반을 닦고 성공을 잡으려 달리는 모습과 달리기를 멈춘 후에 몰려올 그 공허함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개인 선택과 연관된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까.
고리오 영감의 장례식 장면과 본격적인 파리와의 대결을 선택한 라스티냐크의 외침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라스티냐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갈지 독자들은 궁금해진다. 다른 어떤 작품보다 발자크의 성향을 잘 드러내고 있는 듯한 대표격으로 꼽히는 작품인 만큼 작가와 책에 대한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는 일독을 권한다. 그렇게 가볍지도 지리멸렬하지도 않은 작품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