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신드롬
공지영 소설이 또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젊은 세대들에게 ‘우행시’라는 준말로 더 익숙한 공지영의 장편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70만부를 넘어서며 두 달 이상 서점가의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영화 때문이라는 중평이기는 하다. 공지영도 이제는 어지간히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 가고 있지만 영화 〈우행시〉의 남녀 주인공으로 나오는 강동원과 이나영이라는 아이돌만큼은 아니잖을까? 그런 점에서 이건 분명 다중매체의 시너지 효과이지 소설가 한 사람의 파괴력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공지영이 영화나 아이돌스타의 힘에 실려 덩달아 잘 팔리는 종류의 작가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그는 이미 1990년대부터 〈고등어〉 〈봉순이 언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 수십만부씩 팔린 베스트셀러 비블리오그라피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우행시’ 이후의 근작들이 소설이건 에세이건 가릴 것 없이 다시금 겹치기로 ‘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90년대와 달리 국내소설이 빈사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이 아닌가. 공지영과 함께 90년대 베스트셀러 여성작가 삼인방을 형성하던 은희경과 신경숙의 화려하던 대중적 인기도 언제였나 싶게 저조해진 지금 공지영의 독야청청은 확실히 하나의 문화적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왜 공지영은 살아남아 여전히 잘 팔리는가?
이들 90년대 여성작가 삼인방의 문체적 특징을 각각 은희경-냉소, 신경숙-어눌, 공지영-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은희경이 냉소적으로 세상과 비껴가고 신경숙이 어눌하게 말을 고르는 동안 공지영의 센티멘털리즘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그대로 밀착해 들어가게끔 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문학적, 혹은 예술적 자의식의 부족이나 이른바 ‘문제성’의 부족이라는 비판을 불러온 것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은 그가 문학을 하고자 삶을 들여다본 것이 아니라, 삶을 치열하게 살고자 문학을 수단으로 동원한 데서 오는 스타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공지영을 두고 문장이 거칠거나 예술적 자의식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지만 80년대 변혁운동이나 90년대 페미니즘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는 변혁운동이나 페미니즘을 팔아먹은 게 아니라 자신의 삶 앞에 문제로서 가로막혀 있는 변혁운동에서 받은 상처라든가 가부장적 현실의 질곡을 자신의 방식으로(물론 그 방식의 평면성은 문제삼을 만하지만) 글을 써냄으로써 이겨나가려 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굳이 그가 무엇인가를 팔았다면 그는 자신의 힘겨운 삶을 글로 가공하여 판 것이리라. 지금 잘 팔리고 있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도 나는 사형제도 폐지라는 표면적 메시지보다는 허무에서 긍정으로 돌아오는 공지영 자신의 2000년대적 변화가 더 두드러지게 보인다.
대중이 공지영의 작품에서 읽은 것도, 또 높이 사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동시대를 사는 작가로서 자신들과 함께 삶의 질곡에 허덕이며 자신들과 비슷한 문제들에 시달리고 또 그것을 이겨나가는 모습에서 대중(아마도 주로 20~40대의 여성들)은 바로 자기 자신의 자화상을 읽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지금 목하 펼쳐지고 있는 ‘공지영 신드롬’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 문제 해결과정으로서의 공지영식 소설쓰기가 기왕의 정치적 건강성과 공공선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으면서 지속된다면 조금 통속적이고 조금 감상적인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지금 공지영을 좋아하는 독자들과 함께 그가 각기 성이 다른 세 아이와 함께 꾸려가는 가족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김명인/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787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