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현대 사회의 인간은 비판적 이성을 상실해

(Herbert Marcuse, 1898~1979)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과 함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 이론가다. 1960년대 말 서구 사회에서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질 때 그는 마르크스, 마오쩌둥과 함께 ‘3명의 엠(M)’으로 일컬어지며 사회변혁운동의 사상적 지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가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헤겔, 하이데거 등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혁명론·노동이론의 영향을 받았고 대중사회의 일상성에 매몰된 비본래적 실존으로서 익명의 일상인(das Man)과 그 일상성을 극복하는 본래적 실존이라는 인간 이해의 틀을 하이데거 사상으로부터 수용했다.

헤겔 철학의 이성 개념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현실이 비이성적일 때, 이성은 그러한 현실과 긴장관계에 있는 비판적 이성이 된다. 그러한 비판적 이성의 과제는 이성적이지 못한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며 나아가 이성적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이후 줄기차게 최선의 국가, 최선의 쾌락, 지고의 행복, 영구평화 등 현실의 모순과는 대비되는 이상적인 현실을 구상해왔다.

대부분의 인간은 현실에 적응하여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모순을 타파하여 이상적인 현실을 창출하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인간은 바로 그렇듯 가능성의 존재, 이중적인 차원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성과 일상성에 매몰된 차원과 해방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차원, 그러한 이중적인 차원을 분명히 자각함으로써 인간은 보다 나은 현실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선진산업사회 속에서 인간은 그러한 가능성의 차원을 상실하고 단지 현실성의 차원으로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다. 즉 ‘일차원적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차원과 배부른 돼지의 차원 가운데 배부른 돼지가 되어버리고 만 셈이라 할까. 선진산업사회는 기술의 진보를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을 효과적으로 억제시킨다. 비판이 마비되고 반대를 찾아 볼 수 없는 현실, 바로 ‘일차원적 사회’는 압도적인 효율성과 경제적 생활수준 향상이라는 조건 위에서 사회 모순을 은폐시킨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 공간은 기술적 현실에 의해 침범·마멸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현상유지에 대한 저항이 뿌리를 박을 수 있는 정신의 내적 차원이 마멸되고 있다. 부정적 사유력인 이성의 비판력이 자리잡는 이차원의 상실은, 선진산업사회가 반대를 침묵시키는 바로 그 물질적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대응현상이다.’

마비된 비판 의식 속에서 ‘일차원적 인간’은 끊임없이 소비하기 바쁘다. 이러한 허위 욕구는 과도한 산업생산, 낭비, 실업, 소외와 억압 등의 부정적인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러니까 해방되고자 하는 진정한 의식과 욕구를 마비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선진산업사회의 뚜렷한 특징은 해방을 요구하는 욕구들을 효과적으로 질식시키는 한편, 풍요한 사회의 파괴적인 힘과 억압적인 기능을 유지·허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통제는 낭비의 생산과 소비에 대한 과도한 욕구, 이미 실제로는 필요가 없는 곳에도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노동에 대한 욕구, 이 마비상태를 경감·지속시키는 여러 가지 휴식에 대한 욕구, 통제된 가격 안에서의 자유경쟁, 스스로 검열하는 자유언론, 미리 조작된 광고와 상표 중에서의 자유선택과 같은 일종의 기만적인 자유를 유지하려는 욕구를 강요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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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존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
현대사회의 주요한 흐름 10가지 제시

우리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말대로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변한다고 보면 불확실성의 정도와 범위 또한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사실 사람들에게 가장 싫어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그 중에 불확실성은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이에 따라 누구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그 같은 노력에 성공하는 개인과 기업이 남보다 앞서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불확실성을 줄이는 노력 중의 하나가 트렌드를 찾아내고 그에 맞춰 나가는 일이다. 따라서 트렌드, 그것도 메가트렌드를 잘 읽고 있다면 남들보다 크게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메가트렌드(Megatrends)라는 말은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John Naisbitt, 1929~)가 1982년에 내놓은 책의 제목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가 선정하는 베스트셀러에 2년 동안 오르면서 전 세계 57개국에서 800만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엄청나게 유익하다(triumphantly useful)”, 댈러스타임스헤럴드는 “1980년대에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라고 평했다. 이와 함께 메가트렌드는 사회적·문화적 또는 경제적 흐름, 그 중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리잡았다. 덕분에 당시까지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나이스비트는 단번에 세계적인 미래학자로 떠올랐다.

왜 메가트렌드를 읽는 것이 당시의 메가트렌드가 된 것일까. 책에서 나이스비트는 1980년대를 이끌어 갈 메가트렌드로 10가지를 들었다. 이를 통해 대다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미래의 트렌드를 명확하게 짚어냄으로써 불확실성을 크게 줄여줬다. 한마디로 평범한 사람이나 뛰어난 사람 모두가 가려워하는 부분을 잘 긁어주는 책이었다. 그럼 1982년에 나이스비트가 본 10가지 메가트렌드는 무엇인가.

①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②기계 위주의 단순기술에서 인간 위주의 첨단기술로
③국가 경제에서 글로벌 경제로
④단기 위주에서 장기 위주 시각으로
⑤집중화에서 분산화로
⑥정부와 같은 제도의 지원에서 자조(自助·self-help)로
⑦대표를 통한 간접 민주주의에서 직접 참여 민주주의로
⑧피라미드형 관료주의에서 네트워크형으로
⑨미국의 북동지역 위주에서 남서지역 위주로
⑩양자택일형에서 다양한 선택으로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가 아직까지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20여년 전에 읽은 흐름이면서도 대다수가 지금도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국가 경제에서 글로벌 경제로, 피라미드형 관료주의에서 네트워크형으로 바뀔 것이라는 예측은 정보화, 글로벌화, 네트워크화와 같은 말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대니얼 벨의 ‘후기산업사회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20여년 전에 정보사회를 내다본 나이스비트가 자신의 다른 책이나 강연에서 우리에게 던진 정보와 관련된 메시지를 한번 살펴보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정보를 주요 자원(key resource)으로 하는 경제가 펼쳐지고 있다. 정보는 재생이 가능할 뿐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사회는 정보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정보의 홍수가 문제다.” 정보가 중요한 정보사회라지만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진다면 과연 어떤 정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한 나이스비트 자신의 해답은 다음과 같다.

최성환 대한생명 경제연구소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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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대니얼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복지국가ㆍ혼합경제 출현으로 사회주의 무력화”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책이 탄생한 시대적·지역적 배경, 그리고 저자가 사용한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저널리스트 대니얼 벨(Daniel Bell, 1919~)의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 1960)’은 ‘1950년대 정치사상의 고갈에 관하여’라는 부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대적으로는 1950년대를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지역에 관해서는 벨이 머리말에서 ‘이 책은 1950년대 미국의 사회 변동을 다루고 있다’고 밝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벨은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데올로기란 사상을 사회적인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정열이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탐구는 항상 정열을 배제시키고자 노력하며, 모든 사상을 합리화하려고 애쓴다.’ 벨은 이데올로기가 철학적 탐구나 사상과 달리, 정열에 바탕을 두어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예를 벨은 사회주의에서 찾는다.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들, 특히 사회주의자들의 경우에 진리란 실천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들은 묵상(默想)이 아니라 행위 속에서 살고 있다. 사상의 단순화와 실천적 진리에 대한 헌신이 결합되면, 이데올로기는 민중을 봉기시킬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단지 사상만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까지도 개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950년대의 끝자락에서 미국 사회학자가 미국 사회의 지난 10년을 돌이켜 분석한 책이, 왜 지금까지 현대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것일까? 그것은 벨 자신이 미국의 사회 변동을 다룬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 당시 세계 정세의 변화 전반을 다룬 것은 물론, 특히 사회주의 이념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학은 물론, 철학 사상이나 정치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사실 1950년대는 세계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되면서 동서 냉전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시기다. 우리가 1950년대 초에 겪어야 했던 한국전쟁은 그러한 냉전의 서막을 알리는 열전이기도 했다. 세계는 바야흐로 이데올로기에 따라 갈라져 서로 치열하게 다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로서는 이데올로기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벨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이야기했을까? 벨의 말을 들어보자.

‘이제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믿을 사람도, 국가가 경제에 대해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도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이나 영국에서 복지 국가가 예속과 복종의 길이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구 세계에서는 오늘날 정치적 쟁점에 대체적인 의견의 일치가 지식인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즉 복지국가의 용인, 권력 분권화에 대한 희망, 혼합경제 체제의 정치적 국가 다원론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역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다.’

여기에서 혼합경제 체제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게 아니라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여 시장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공공 부문 사업이나 경제 정책을 통해 국가 경제를 관리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사회주의의 평등 이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빈곤 계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국가가 보호하는 복지 국가 개념이 확산되었다. 정치적으로도 획일적인 이념이나 체제를 강요하지 않는 다원적인 정치 체제가 대두되었다. 결국 벨이 이 책을 쓸 무렵 미국 사회나 많은 다른 국가들이 더 이상 어떤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벨은 19세기에 탄생한 이데올로기가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설득력이나 적용 가능성을 잃고 있다고 보았다. 화이트칼라라 불리는 사무직 노동자의 급격한 증가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강조하는 전통적인 노동자 개념이나 계급 구조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점점 더 분명하게 양극화되고, 두 계급 사이의 갈등도 점점 더 커져야 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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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왓슨의 ‘이중나선’
DNA구조를 밝힌 과학자들의 희로애락 그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해서 근대 생물학의 길을 열었다고 한다면 그로부터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 제임스 왓슨과 프란시스 크릭이라는 두 젊은 과학자는 DNA의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서 현대생물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다윈이 수백 쪽에 달하는 빡빡한 이론서로써 자신의 주장을 제시했던 데에 반해서 왓슨과 크릭은 ‘네이처(Nature)’라는 과학잡지에 겨우 900단어에 불과한, 단 두 쪽의 논문을 실어서 전 세계 과학계를 온통 흔들어 놓았다. 도대체 그 짧은 논문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

유전학과 유전자, DNA를 제외한다면 현대생물학은 아예 존립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오늘날의 생물학은 온통 이런 정보로 넘쳐난다. 유전학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유전물질과 그런 유전법칙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는 분야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런 유전물질의 존재인데 그것이 DNA라는 것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30년대였지만 1950년대에 이르러서도 많은 연구자는 DNA에 대해서 별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단백질은 종류가 수천 가지나 되는 데 반해서 그보다 훨씬 단순한 구조의 DNA는 모든 동식물에서 오직 한 가지 종류만 발견되는데 그것이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유전형질에 대한 정보를 모두 포함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DNA가 유전물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자체가 갖는 구조의 단순함, 즉 오늘날 우리가 ‘이중나선’으로 부르는 그 꽈배기처럼 꼬인 사다리 구조에서 비롯된다. 사다리의 양쪽 기둥이 마치 지퍼가 열리듯 그렇게 풀어지고 그 풀어진 각각의 기둥이 자신과 똑같은 구조의 다른 기둥을 만들어냄으로 해서 한 세포가 두 세포로 증식할 때 똑같은 유전정보가 두 세포에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이처럼 DNA에 의존해서 번식과 진화를 거듭해 왔다.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은 바로 이런 DNA를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인간에게 유용한 새로운 생물종을 만들고 또 인간에게 유해한 악성 유전병을 제어하는 등의 연구를 수행해서 21세기 과학의 총아로 각광받고 있다.

각각 25세와 36세의 풋내기 연구자에 불과했던 왓슨과 크릭은 그런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밝혀서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점을 입증함과 동시에 유전물질로서 작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를 제시하는 데 성공하였다. 왓슨과 크릭은 DNA 구조 발견의 공로로 다른 한 사람의 조력자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1962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1968년 처음 발간된 ‘이중나선(The Double Helix)’은 제임스 왓슨이 1951년 자신이 처음 영국에 발을 들여놓았을 무렵부터 1953년 봄 ‘네이처’지에 논문을 실을 때까지 자신의 주변사를 소설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신출내기 생물학자 왓슨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그때까지 박사학위도 받지 못했던 무명에 가까운 물리학자 크릭을 처음 만나서 함께 DNA의 구조를 밝히는 연구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의 DNA 연구는 영국의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런 쟁쟁한 과학자들을 물리치고 신참인 왓슨과 크릭이 먼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왓슨이 미국인 특유의 자유롭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면 크릭은 천성적인 떠버리이기는 하지만 보다 신중하고 합리적이다. 왓슨이 생화학자로서 교육을 받은 데 반해서 크릭은 X선결정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저명한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서 일찍부터 유전물질의 정체를 밝히고자 하는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남들에 앞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필경 똑같은 목표에 주목해서 함께 나아갔다는 점, 학문적 배경이 달라서 서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젊은 연구자로서 자신들에게 부족했던 지식을 주변 사람에게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 등이 기여하는 바가 컸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특별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젊은 연구자만이 가질 수 있는 탁월한 순발력과 신선한 아이디어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도 다른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DNA 구조가 이중나선인지 아니면 삼중나선인지, 염기쌍의 결합이 같은 염기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다른 염기들과 결합하는지 등에 대해서 이론을 확립하는 데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는 즉시 다른 대안을 찾는 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다른 연구자가 자신들의 업적과 경험에 매달려서 더 이상 진전이 없을 때 그들은 성큼성큼 새 길을 걸어나갔던 것이다.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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슘페터의‘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원동력은 창조적 파괴다”

경제학에서 1883년은 매우 기념비적인 해라고 할 수 있다. 3월에 공산주의 경제학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가 사망했고, 같은 해 2월과 6월에는 20세기 자본주의 경제학을 대표할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1883~1950)와 존 메이나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1883~1946)가 각각 태어났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1930년대의 대공황과 대량실업을 극복하는 데 실질적이면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에 따라 케인스는 죽기 전에 이미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떠올랐다. 이후 케인지언(Keynesian)이라 불리는 케인스를 추종하는 경제학자들이 득세를 했을 뿐 아니라 아직도 경제학계의 다수를 점하고 있을 정도다.

슘페터도 경제발전, 경제변동, 경제체제, 경제사상 등에서 케인스 못지않게 훌륭한 연구 업적을 많이 남겼다. 하지만 당대에 케인스의 주장과 이론이 현실 경제에 많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큰 각광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수요 측면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케인스 경제학이 잘 작동하지 않으면서 슘페터의 견해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슘페터는 공급 측면에서 기업과 기업가의 역할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슘페터’ 하면 떠오르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는 그가 29세 때인 1912년에 쓴 ‘경제발전론’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후 창조적 파괴는 국가와 기업가는 물론 개인의 역량 개발 등에서도 수없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슘페터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창조적 파괴라는 단어가 가지는 생명력 때문이다.

슘페터는 기업가들의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경제가 발전해 가는 과정을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라고 불렀다. 그는 창조적 파괴 또는 혁신을 위해 필요한 핵심적 요인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들었다.

① 새로운 제품의 발명 또는 개발
② 새로운 생산 방법의 도입 또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
③ 새로운 시장의 개척
④ 새로운 원료 또는 부품의 공급
⑤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조직의 형성

현재나 과거를 막론하고 기업가들이라면 이 중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성장의 엔진들이다. 이들 엔진을 여하히 개발하고 운영하느냐에 기업뿐만 아니라 한 나라 경제의 성장과 국민의 생활수준은 물론 인류 물질문명의 발전이 걸려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세계를 주름잡던 미국의 자동차회사 제너럴모터스(GM)와 일본의 소니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면 일본의 도요타와 우리나라의 삼성전자가 세계 1위 그룹에 올라서고 있는 것도 창조적 파괴라고 부를 수 있는 엔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을 기업가들의 창조적 파괴 과정에서 찾은 슘페터가 1942년에 내놓은 책이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이다. 지금까지 필자가 쓴 맥락에서 보면 슘페터는 자본주의 예찬론자로서 사회주의는 없어지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는 주장을 할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정반대로 슘페터는 책에서 ‘자본주의는 붕괴될 것이고 그 뒤를 사회주의가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그렇다고 슘페터가 마르크스의 추종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스스로 자신을 비(非)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를 정도로 마르크스의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슘페터는 대중궁핍화나 산업예비군에 이은 대공황과 같은 경제적 실패에 의해 자본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틀렸다고 공격한다. 대신 자본주의의 경제적 성공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붕괴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최성환 대한생명 경제연구소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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