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대니얼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복지국가ㆍ혼합경제 출현으로 사회주의 무력화”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책이 탄생한 시대적·지역적 배경, 그리고 저자가 사용한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저널리스트 대니얼 벨(Daniel Bell, 1919~)의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 1960)’은 ‘1950년대 정치사상의 고갈에 관하여’라는 부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대적으로는 1950년대를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지역에 관해서는 벨이 머리말에서 ‘이 책은 1950년대 미국의 사회 변동을 다루고 있다’고 밝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벨은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데올로기란 사상을 사회적인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데올로기에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정열이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탐구는 항상 정열을 배제시키고자 노력하며, 모든 사상을 합리화하려고 애쓴다.’ 벨은 이데올로기가 철학적 탐구나 사상과 달리, 정열에 바탕을 두어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예를 벨은 사회주의에서 찾는다.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사람들, 특히 사회주의자들의 경우에 진리란 실천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들은 묵상(默想)이 아니라 행위 속에서 살고 있다. 사상의 단순화와 실천적 진리에 대한 헌신이 결합되면, 이데올로기는 민중을 봉기시킬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단지 사상만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까지도 개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950년대의 끝자락에서 미국 사회학자가 미국 사회의 지난 10년을 돌이켜 분석한 책이, 왜 지금까지 현대의 고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것일까? 그것은 벨 자신이 미국의 사회 변동을 다룬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 당시 세계 정세의 변화 전반을 다룬 것은 물론, 특히 사회주의 이념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회학은 물론, 철학 사상이나 정치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사실 1950년대는 세계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되면서 동서 냉전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시기다. 우리가 1950년대 초에 겪어야 했던 한국전쟁은 그러한 냉전의 서막을 알리는 열전이기도 했다. 세계는 바야흐로 이데올로기에 따라 갈라져 서로 치열하게 다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로서는 이데올로기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벨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이야기했을까? 벨의 말을 들어보자.

‘이제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믿을 사람도, 국가가 경제에 대해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고전적인 자유주의자도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이나 영국에서 복지 국가가 예속과 복종의 길이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구 세계에서는 오늘날 정치적 쟁점에 대체적인 의견의 일치가 지식인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즉 복지국가의 용인, 권력 분권화에 대한 희망, 혼합경제 체제의 정치적 국가 다원론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역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다.’

여기에서 혼합경제 체제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게 아니라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여 시장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공공 부문 사업이나 경제 정책을 통해 국가 경제를 관리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사회주의의 평등 이념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빈곤 계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국가가 보호하는 복지 국가 개념이 확산되었다. 정치적으로도 획일적인 이념이나 체제를 강요하지 않는 다원적인 정치 체제가 대두되었다. 결국 벨이 이 책을 쓸 무렵 미국 사회나 많은 다른 국가들이 더 이상 어떤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벨은 19세기에 탄생한 이데올로기가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설득력이나 적용 가능성을 잃고 있다고 보았다. 화이트칼라라 불리는 사무직 노동자의 급격한 증가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강조하는 전통적인 노동자 개념이나 계급 구조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점점 더 분명하게 양극화되고, 두 계급 사이의 갈등도 점점 더 커져야 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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