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현대 사회의 인간은 비판적 이성을 상실해

(Herbert Marcuse, 1898~1979)는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과 함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 이론가다. 1960년대 말 서구 사회에서 학생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질 때 그는 마르크스, 마오쩌둥과 함께 ‘3명의 엠(M)’으로 일컬어지며 사회변혁운동의 사상적 지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가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헤겔, 하이데거 등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혁명론·노동이론의 영향을 받았고 대중사회의 일상성에 매몰된 비본래적 실존으로서 익명의 일상인(das Man)과 그 일상성을 극복하는 본래적 실존이라는 인간 이해의 틀을 하이데거 사상으로부터 수용했다.

헤겔 철학의 이성 개념도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현실이 비이성적일 때, 이성은 그러한 현실과 긴장관계에 있는 비판적 이성이 된다. 그러한 비판적 이성의 과제는 이성적이지 못한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며 나아가 이성적인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된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이후 줄기차게 최선의 국가, 최선의 쾌락, 지고의 행복, 영구평화 등 현실의 모순과는 대비되는 이상적인 현실을 구상해왔다.

대부분의 인간은 현실에 적응하여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모순을 타파하여 이상적인 현실을 창출하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인간은 바로 그렇듯 가능성의 존재, 이중적인 차원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성과 일상성에 매몰된 차원과 해방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차원, 그러한 이중적인 차원을 분명히 자각함으로써 인간은 보다 나은 현실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역사의 주체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선진산업사회 속에서 인간은 그러한 가능성의 차원을 상실하고 단지 현실성의 차원으로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다. 즉 ‘일차원적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차원과 배부른 돼지의 차원 가운데 배부른 돼지가 되어버리고 만 셈이라 할까. 선진산업사회는 기술의 진보를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을 효과적으로 억제시킨다. 비판이 마비되고 반대를 찾아 볼 수 없는 현실, 바로 ‘일차원적 사회’는 압도적인 효율성과 경제적 생활수준 향상이라는 조건 위에서 사회 모순을 은폐시킨다. 마르쿠제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 공간은 기술적 현실에 의해 침범·마멸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현상유지에 대한 저항이 뿌리를 박을 수 있는 정신의 내적 차원이 마멸되고 있다. 부정적 사유력인 이성의 비판력이 자리잡는 이차원의 상실은, 선진산업사회가 반대를 침묵시키는 바로 그 물질적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대응현상이다.’

마비된 비판 의식 속에서 ‘일차원적 인간’은 끊임없이 소비하기 바쁘다. 이러한 허위 욕구는 과도한 산업생산, 낭비, 실업, 소외와 억압 등의 부정적인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러니까 해방되고자 하는 진정한 의식과 욕구를 마비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선진산업사회의 뚜렷한 특징은 해방을 요구하는 욕구들을 효과적으로 질식시키는 한편, 풍요한 사회의 파괴적인 힘과 억압적인 기능을 유지·허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통제는 낭비의 생산과 소비에 대한 과도한 욕구, 이미 실제로는 필요가 없는 곳에도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노동에 대한 욕구, 이 마비상태를 경감·지속시키는 여러 가지 휴식에 대한 욕구, 통제된 가격 안에서의 자유경쟁, 스스로 검열하는 자유언론, 미리 조작된 광고와 상표 중에서의 자유선택과 같은 일종의 기만적인 자유를 유지하려는 욕구를 강요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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