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23일 (토) / 제 1 회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월권을 일삼
는 경호실장 차지철을 더 이상은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보부장 김재규 또한 차지철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했
다. 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의 삽교천행사에 동행
하겠다며 차지철에게 전화한다. 하지만 차지철은 정보부장은 서울
을 지키라며 의도적으로 김재규를 배제시킨다. 당일 오후 차지철
은 다시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궁정동 연회에 참석하라는
박 대통령의 명령을 통보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린다.
김재규의 차실장에 대한 반감은 극에 치닫는다. 권총에 실탄을 장
전한 김재규의 눈에 살의가 번뜩인다.

김재규는 궁정동으로 향하기전 저녁이나 같이 하자며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궁정동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궁정동에서 만난 김계
원 비서실장에게 차지철를 제거해야 한다는 의사를 밝히고는 김계
원의 표정을 살피는데 박대통령이 도착한다.

박대통령이 신민당 공작과 관련해서 김재규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일처리를 나무라자 기회를 엿보던 차지철이 정보부가 좀 잘해야겠
다며 나선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던 김재규는 2층 집무실로
가 서가에 놓아둔 권총을 들고 박흥주와 박선호에게 방안에서 총
소리가 나면 경호원을 처치하라고 명령하고 다시 만찬장으로 들어
간다.

2005년 4월 24일 (일) / 제 2 회

김재규는 차지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차지철이 쓰러지자 곧
박 대통령에게 총구를 겨눈다. 김재규는 맨발로 정신없이 잔디밭
을 뛰어가고, 곧바로 정승화와 김정섭에게로 가서 다짜고짜 차를
타고 출발한다. 영문을 모르고 함께 나선 정승화는 무슨 일인지 묻
고, 김재규는 대통령께서 저격당했다고 한다.

육군병원에 도착한 김계원은 대통령이 이미 절명했음에 충격으로
휘청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후 대통령의 사망 사실을 입단속 시키
고 최규하 총리를 찾아간다.
2005년 4월 30일 (토) / 제 3 회

쿠데타의 가능성이 미국 측에 감지되면서 한반도의 위기감은 더
욱 고조된다. 박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확인한 전두환은 끊어 오르
는 분노를 누르며 사태 파악에 나선다. 전두환, 허삼수, 허화평은
차실장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경호실의 공격에 대비해 지휘본부
를 육본 보안부대로 옮긴다.

정승화 총장은 김계원 실장으로부터 박 대통령을 쏜 사람이 차지
철이 아닌 김재규란 사실을 듣게 된다. 정승화 총장은 김진기에게
(육군 헌병감) 김재규의 체포를 지시하고 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
장으로 임명한다.

김재규는 국무위원들 앞에서 계엄선포를 강력히 주장하지만 신현
확의 반발에 부딪히고 박대통령의 서거 사실이 국무위원들에게 알
려지면서 분위기는 김재규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기 시작한다.

박대통령의 서거를 확인한 국무위원들은 국방부 회의실에서 최규
하 대통령권한대행체재를 출범 시킨다. 79년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법에 따라 전두환이 합동
수사본부장이 된다.

2005년 5월 1일 (일) / 제 4 회

전두환은 김재규를 조사하던 중 사건당일 현장에 정승화 총장이
있었고 김재규와 함께 육본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총장
의 혐의점을 밝히기 위해 김재규를 상대로 강도 높은 조사를 진행
하지만 결국 단독범행으로 결론난다.

전두환은 중앙정보부를 장악하고 그 외에 검찰, 경찰 등 정보수사
기관을 장악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찾고 모든 정보보고 라인은 자
신을 통하도록 한다.

김재규의 진술로 10.26의 전모가 들어나고 김계원 실장과 정승화
총장에까지 수사가 확대되지만 정총장의 소환수사에 부담을 느낀
전두환은 극비리에 내사를 지시한다. 하지만 이학봉은 경우에 따
라선 정총장이 내란방조죄에 해당할 수가 있다며 정식 소환주사
를 주장한다. 결국 정총장은 이학봉의 형식적인 방문조사를 받게
되고, 김계원 실장은 보안사로 연행된다.

허삼수, 허화평, 이학봉 등은 국가의 모든 정보가 보안사로 집중되
면서 정치판과 군 수뇌부의 부패 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으로
드러나고 10.26 당시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의 부적절한 행동 등
을 들어, 지금은 국가를 위해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해볼 시
점임을 전두환에게 역설하는데...

2005년 5월 7일 (토) / 제 5 회

월권과 정치개입으로 정승화 총장에게 심한 질책을 받은 전두환.
전두환은 조사 결과 정총장의 무혐의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학봉, 허화평과 함께 정총장의 내란 방조죄 적용 여부를 모의한
다. 정총장이 군 내부에 정치군인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정보가 나
돌면서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의 위기감도 고조 된다.

정총장의 훈시를 듣던 황영시(당시 군단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불
행한 군인으로 지칭되자 이에 발끈하여 전두환을 찾아가 대통령시
해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계엄사령관이 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분통을 터트리고 전두환은 조금만 기다리라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인다.

11월 10일, 최규하 권한대행의 담화발표 직후 윤보선, 백기환, 김
상현, 등 당시 민주인사들은 한자리에 모여 유신체제 반대 모의시
위를 계획하는데...

전두환은 정총장의 유신 관련 공신발언을 문제 삼아 이학봉에게
정총장 연행을 위한 철저한 준비를 지시한다. 그런데 정총장이 전
두환을 동해경비사령부로 전출 시키려한다는 정보가 입수되면서
다급해진 전두환은 정총장의 강제연행을 모의한다.

2005년 5월 8일 (일) / 제 6 회

정총장의 강제연행을 결정한 전두환은 허화평, 이학봉과 구체적
인 계획수립에 들어간다. 특히 작전 당일 장태완 수경경비사령관
의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던 전두환은 수경사 30
경비단 장세동 대령을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

한편 정총장은 노재현 국방장관을 찾아가 전두환의 교체를 주장하
지만 노 장관은 좀 더 두고 보자며 급히 자리를 피한다. 이후 위컴
(한미연합사령관) 사령관이 또 한번 전두환 쪽의 움직임이 이상하
다고 경고 하지만 노재현은 위컴의 경고를 무시한다.

작전 당일(12.12), 차질 없이 정총장의 강제연행을 위한 준비를 점
검하던 전두환은 예상치 못한 정총장의 호출 명령을 받게 된다. 정
보 유출을 걱정한 전두환은 정총장을 만난 직후 군부장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정총장의 강제 연행을 위한 작전개시를 명령한
다.

전두환은 정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 최규하
권한대행 설득작업을 펼치고 우경운, 허삼수 일행은 육참총장(정
승화) 공관으로 향한다.

2005년 5월 14일 (토) / 제 7 회

최규하 권한대행은 정승화 총장의 연행조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는 국방장관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정승화 총
장의 강제연행 도중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전두환은
급히 보안사로 돌아간다. 김진기는 모든 일이 전두환의 계획에서
비롯된 일임을 직감하고 총리공관 경호대장 구정길에게 전두환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사태를 파악한 장태완은 30경비단장 장세동을 찾지만, 그는 이미
전두환측에 동조하고 있었다. 황시영과 유학성이 장태완을 설득하
려 하지만 흥분한 장태완은 전차로 날려버리겠다며 정총장을 원
상 복귀시키라고 소리친다.

위협을 느낀 전두환은 박희도(1공수)에게 병력을 출동시켜 육본
과 국방부를 장악해 줄 것을 부탁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
황시영, 백운택, 유학성 등과 함께 총리공관으로 향한다.

2005년 5월 15일 (일) / 제 8 회

장태완은 박희모(30사단장)에게 1공수가 행주대교를 건너지 못하
도록 막아달다는 부탁을 한다. 하지만 당시 보안사 조직을 통해 군
내 모든 통신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던 전두환측 허화평은 즉시
박희모에게 전화를 걸어 회유하고 부대동원을 사전에 봉쇄한다.

장태완의 전화를 받고 상황을 파악한 3군 사령관 이건영은 예하부
대들의 서울이동을 막으려하지만 구창회 대령은 군지휘체계를 완
전히 무시한 채 노태우소장의 지시에 따라 1개 대대를 서울로 출동
시킨다.

장태완의 명령을 받은 수경사 33경비단 전차부대가 경복궁 30경비
단으로 향한다. 점점 가까워지는 탱크소리를 들은 노태우, 장세
동, 김진영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김진영은 탱크를 돌려세우겠
다며 뛰쳐나간다.

최규하 대행의 설득에 실패하고 보안사로 돌아온 전두환은 육본
지휘부가 CP를 수경사로 옮기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장태완과
정병주만 잡으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는데...

2005년 5월 21일 (토) / 제 9 회

윤성민(육참차장)은 먼저 9공수를 복귀시킨다면 1공수를 복귀시키
겠다는 전두환의 말만 믿고 신군부측과 신사협정을 맺는다. 윤석
민은 서울로 향하던 9공수여단에게 원대복귀 명령을 내려 복귀시
킨다. 하지만 1공수는 행주대교 초소의 초병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행주대교를 접수한다.

미8군 벙커에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의 행동을 명백한 반란으로 판
단하고 군대 출동을 고려하지만 그럴 경우 내전이 불가피하다는
김종환과 위컴(한미연합사령관)의 말류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국방부로 간다.

행주대교를 장악한 1공수는 국방부를 무력화하고 단숨에 국방장관
실까지 밀고 들어가 노재현 장관을 찾는다. 한편 전두환으로부터
장태완 사령관을 체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신윤희(수경사 헌병
부단장)는 무장한 헌병들을 앞세워 직속상관인 장태완사령관을 체
포하는데 성공한다.

1공수에 의해 보안사로 간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정총장의 강제연행에 동의하는 서류에 사인하고, 직접 총
리공관으로 가 정총장의 연행에 관한 최규하 대행의 최종 재가를
받아낸다.

2005년 5월 22일 (일) / 제 10 회

전두환은 이희성에게 정총장의 연행이 합법이었음을 재차 강조하
고, 비어있는 육참총장자리에 모시겟다는 말을 건넨다. 전두환의
거침없는 행동에 이희성은 옳지않다고 느끼면서도 그 위세에 눌
려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은 미국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설득
하느냐에 고심한다. 미대사 글라이스틴과 브루스터 미CIA 서울지
부장은 전두환을 비롯한 군세력의 정치개입 여부를 염려하며 어떻
게 하면 한반도를 안정시켜 미국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내
느냐에 고심하는데...

2005년 5월 28일 (토) / 제 11 회

미국의 동의를 얻는데 실패한 군내 역쿠데타 세력은 전두환 저격
직전 작전을 보류하고 미국정부의 연락을 기다린다. 전두환은 군
내에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미국 정부를 상
대로 한 로비를 펼치고, 필요한 자금조달에 직접 나선다.

동교동 자택에서 만난 김대중과 김영삼은 유신을 종식시키고 5공
화국을 하루빨리 출범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힘을 합치
기로 합의한다.

브루스터(CIA서울지부장)는 전두환을 만나 미국이 군내 역쿠데타
세력의 쿠데타 제의를 거절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브루스
터는 쿠데타를 제의한 사람이 누구냐는 전두환의 질문에 앞으로
큰일을 하자면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면 이번엔 그냥 넘어가라
고 조언한다. 그리고 정보를 독점하는 자가 바로 권력자라며 전두
환의 편에 선 듯 말한다.

전두환은 장세동, 권정달, 허화평 등 핵심측근들을 요정으로 불러
격려하고 미국이 군내 역쿠데타 세력을 보이콧한 사실을 전한다.
허화평과 허삼수는 혁명을 중도에 그만두면 역적으로 몰릴 위험
이 있다며 지금이 중장 진급의 적기임을 역설한다.

2005년 5월 29일 (일) / 제 12 회

허삼수와 허화평은 전두환에게 대권에 도전하라며 적극적으로 나
서라고 한다. 전두환은 18년간 장기집권 해 온 군사 권력에 반하
는 여론을 의식하며 쉽사리 결심하지 못하지만 점점 대권에 욕심
이 생긴다. 일본에서 귀국한 허문도는 전두환과 독대를 하면서 여
론은 만들어 갈 수 있다며 전두환을 더욱 부추긴다.

최규하는 김영삼에게 개헌을 위해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한다.
김영삼은 빠른시일 안에 비상 계엄해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
했지만 최규하의 미적지근한 행동에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한편 전두환은 본격적으로 앞으로의 대권경쟁을 위해 언론 앞에
서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한다. 또한 3김이 서로 정권싸움을 일으
켜 야당의 분열을 조장하기 위해 전 경호실장인 박종규를 만나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2005년 6월 4일 (토) / 제 13 회

허삼수와 허화평은 대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론을 먼저 장
악해야 한다며 언론을 책임지고 통제할 적임자로 대공 공작 업무
국내 1인자 이상재 준위를 전두환에게 추천한다.

전두환은 노태우와 특전사령관 정호영을 만나 학생들의 시위가 격
렬해지고 사회가 혼란해질수록 군이 나설 명분이 생겨 주도권을
잡는데 유리할 것이라며 특전사에서 하는 모든 훈련을 폭동진압훈
련인 충정훈련으로 전환해 시위 진압을 준비하라고 한다.

중장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라는 직함만으로는 국무
회의에 참석할 수가 없어, 공석인 중앙정보부장에 오르기 위해 최
규화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를 압박하기 위한 계략을 꾸민다.

한편 김영삼과 김대중은 야권통합을 위해 만나지만 김영삼은 김대
중에게 신민당에 입당하고 경선을 통해서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자
고 요구하고, 김대중은 입당 후 경선을 한다면 김영삼이 이길게 분
명하다는 생각에 신민당에 들어가기를 꺼린다.

2005년 6월 5일 (일) / 제 14 회

보안사 회의실에서는 전두환, 유학성 3군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
차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영 특전사령관 등이 비상계엄을 전
국으로 확대해 국회를 해산시키고 주요정치인들을 연행하는 동시
에 국가보위비상기구를 설치해서 정국을 잡자는 시나리오를 검토
하고 결의를 다진다.

한편 김종필과 공화당 당부의장 길전식은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
치 않다며 당장 국회를 열어야겠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전두환
과 노태우는 일본을 이용해 북한이 남을 침략한다는 거짓정보를
퍼뜨려 계엄해제를 막고 북한의 남침 설을 학생들의 시위와 연결
시키기로 결정한다.

80년 5월 14일 광주 전남도청 앞에서는 전남대 교수들과 학생들,
수천 명의 고교생까지 시위에 참여해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
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이날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전에 소
요진압부대인 충정부대의 투입지시를 내리고 국민들의 민주화바
램과는 달리 정권찬탈음모를 계속 진행시키고 있는데...

2005년 6월 11일 (토) / 제 15 회

1980년 5월 18일자 조간신문은 정치활동 금지, 대학에 휴교령, 비
상계엄 전국확대 등의 헤드라인으로 1면을 장식한다. 전남대 앞에
는 1공수대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학생들의 출입을 막는다. 이에 학
생들은 군인들은 물러가라고 소리를 높이며 돌맹이를 던진다. 돌
격 명령이 떨어지자 공수부대원들은 돌진해서 무지막지하게 곤봉
을 휘두른다. 도망 다니는 학생들과 강경 진압하는 공수대원들의
모습으로 광주시내는 피로 물들어 간다.

김영삼과 김덕룡은 신민당 당사 앞에 깔린 계엄군들을 보고 말문
이 막힌다. 김대중과 김종필이 이미 전두환에게 잡혀 갔다는 말을
들은 김영삼은 상황의 긴박함을 인지하고 김덕룡에게 빨리 국회
를 소집해서 비상계엄을 해제하자 한다. 김종필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보안사 조사실에서 억류당해있다.

광주시내 곳곳에서 기습적인 시위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
를 받은 전두환은 전남대와 조선대를 점거중인 7공수를 빨리 투입
시켜서 시위대를 쓸어버리라고 한다. 광주에서 시위가 늘어난다
면 김대중 때문에 광주사태가 의외로 심각해질 수 있다는 허화평
의 말을 들은 전두환은 급히 육본으로 가서 황영시 육참차장에게
동국대를 점거중인 11공수를 광주로 내려 보내 병력을 증원하겠다
고 하는데...

2005년 6월 12일 (일) / 제 16 회

허화평은 김대중에게 내란음모 죄를 씌워서 국민들을 납득시키자
고 한다. 보안사령관실에 모인 노태우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은 전
두환에게 자세한 상황을 보고하며 김대중과 광주 사태를 한꺼번
에 해결 할 시나리오를 꾸민다.

공수대의 가혹한 진압으로 성난 광주 시민들은 하나 둘 금남로에
진입하기 시작한다. 전남북계엄 사령관은 더 이상 시민들을 자극
하지 않고 사태를 잠재우기 위해 그동안 연행했던 시민들을 풀어
주기로 한다. 전두환은 데모대를 석방하려는 결정에 화를 내며 전
남북계엄사령관을 교체하기로 한다.

김영삼은 5.17사태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이에 전두환은 김
영삼을 가택연금시키고 군병력을 이용해 국회 소집마저 막아버리
는데...

2005년 6월 18일 (토) / 제 17 회

광주시민들은 광주의 진실에 침묵하고 은폐하려고 하는 언론에 분
노하여 광주 MBC를 불지른다. 점점 거세어지는 시위대들에 당황
해 하는 공수부대가 못마땅한 정호용은 좀 더 강하게 진압하라고
한다.

금남로에 모인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며 일제히 도청
으로 향하고, 같은 시각 공수부대원들은 도청 앞의 시위대를 진압
하기 위해 긴장하며 시위대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공수부대의 발
포에 놀란 시위대 사이에 일순간 정적이 흐르고, 여기저기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이 보이자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
한다.

광주에서의 발포사건이 보안사에 전달되고, 다급해진 전두환은 광
주사태가 외부로 알려지지 못하도록 지시한다. 불안해하는 전두환
에게 허화평은 새벽에 시민들이 무기고를 털어갔다는 사실을 보안
사에 유리하게 조작해서 언론에 발표하면 문제 없다며 구체적인
상황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2005년 6월 19일 (일) / 제 18 회

군사지식이 있는 예비군들은 시위대들에게 총기 사용법을 알려주
고, 시위대들은 무장하기 시작한다. 육참 총장실로 찾아간 전두환
은 더 이상 폭동을 방치할 수 없다며 이희성에게 자위권 발동을 요
구한다.

미국으로부터 작전중지 요청을 받은 전두환은 작전이 며칠 중단되
는 동안 광주시민들에게 재정비의 시간을 주는 것 같아 불안해한
다. 브루스터는 미대사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결과적으로 전두환
을 인정한 셈이 되어 버린 시점에서 뒷일을 무마하기 위해 미국의
입장을 밝히자고 한다.

광주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언론의 보도검열을 했던 전두환은 각
언론사 사장단과 사회부 부장들을 만나 압력을 행사한다. 언론마
저 장악하게 된 전두환은 광주를 점점 더 고립상태로 몰아넣는
데...

2005년 6월 25일 (토) / 제 19 회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발포에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고, 몰
래 광주 시민군들 사이에 잠입한 보안사 공작원들에 의해 불안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광주는 점점 불안감에 휩
싸이는데...

2005년 6월 26일 (일) / 제 20 회

80년 5월 24일 박정희 독재정권의 주주였던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
된다.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을 발족시키고 집권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매형인 노태우의 추천으로 국보위에 법사위원으로 참여한 박철언
은 노태우를 찾아 대통령선출 방식에 관해 논의한다. 허화평, 허삼
수 등은 직선제에 무게를 두지만 전두환의 생각은 달랐다. 전두환
의 의중을 파악한 노태우는 허화평과 허삼수의 견제 필요성을 느
낀다.

전두환의 여러 정치적 행보를 지켜보던 최규하 권한대행이 예정
된 정치일정을 3개월이나 뒤로 미루는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고
전두환측을 견제한다. 이를 지켜본 신군부측은 최규하를 당장 끌
어내리고 전두환을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만들 것을 결정한다.

내심 간선제로 마음을 굳힌 전두환은 유학성에게 중정부장 자리
를 제안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을 설득해줄 것을 부탁하
는데...

2005년 7월 2일 (토) / 제 21 회

허화평과 허삼수가 7년 단임제를 반대하고 나서자 전두환은 일단
청와대부터 접수하고 보자며, 그때 가서 자네들 맘대로 하라고 설
득한다.

미국측은 전두환을 압박하기 위해 경제적 압력 행사를 계획한다.
이런 미국의 움직임을 감지한 전두환은 최규하의 하야를 하루라
도 앞당기기 위해 김정렬(공화당 의장)을 찾아가 최규하의 설득을
부탁한다. 김정렬이 최규하를 설득하는 사이 전두환과 신군부측
은 창당 작업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한다.

노태우는 신당 창당 작업에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김윤환를 만나
의견을 타진한다. 허화평과 허삼수는 이런 노태우의 움직임을 경
계하게 된다. 이처럼 군부 내 권력암투의 싹은 조금씩 그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느 날, 이순자를 찾아온 장영자는 특유의 친화력과 고가의 선물
로 이순자의 환심을 산다.

최규하는 김정렬 의장을 청와대로 불러 하야 결심을 밝힌다. 이날
밤, 전두환과 노태우는 기쁨을 같이 나누고 평생 같이 할 동지임
을 확인한다.

2005년 7월 3일 (일) / 제 22 회

이학봉과 정기용(군검찰부장)은 김대중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논의한다. 정기용은 김대중에게 재판에서 국가보안법
1조 1항의 적용은 막아 보겠다며, 빨른 수사진행을 위해 모든 협의
사실을 인정하라고 한다.

전두환의 부탁을 받은 김정렬은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설득한다. 최규하의 하야 결심이 전해지자 전두환과 신군부측은
환호를 지르며 기뻐한다.

전두환이 장세동에게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자고 한다. 하지만 장
세동은 장차 전두환의 정적이 될 수도 있는 노태우와 정호용을 견
제하며 군을 지키겠다며 충성을 다시 한 번 맹세한다.

청와대 입성을 코앞에 둔 전두환과 신군부측은 김영삼의 거취 문
제를 놓고 고심한다. 결국 여자관계와 정치자금 등 김영삼의 약점
을 잡아 우회적으로 협박, 1980년 8월 13일 김영삼의 정계은퇴 선
언을 이끌어 낸다.

전두환은 자신의 전역을 축하하는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는 차안에서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강창성 보안사령관에 의해
하나회 전체가 제거당할 뻔 했던 일을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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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타벅스의 경영 전략

- 세계적인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 스타벅스의 비싼 커피값을 예로 들어, 희소성이 가격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바가지”라고 말할 때, 그것은 ‘생산원가에 비해 지나치게 비싸게 판매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가격의 결정은 생산원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희소성에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진실입니다.

- 문제는, 이 논리가 바가지 요금을 합리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산원가 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판매할 수 있는 것은, 그 가격을 마다하지 않고 이용하려는 소비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만약, 가격이 소비자의 기대 수준 (소비자가 해당 재화나 서비스를 이용하는데 지불할 용의가 있는 가격 수준) 이상으로 책정된다면, 소비자들은 이용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곧 가격의 하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겁니다. “바가지 요금이라고 불평하지 말고, 구입하지 말아라. 그러면, 가격이 내려갈 것이다.”

- 하지만, 희소성에 따른 가격결정은 즉각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공급자 집단과 소비자 집단은 일대 일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죠. 공급자 개인의 결정이 소비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즉각적이지만, 소비자 개인의 결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것이 가격 결정에 까지 이르는 비용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습니다. 조건 자체가 다른 두 집단의 시소게임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죠. 따라서, 희소성이 가격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바가지 요금의 합리화로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가격 결정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슈퍼마켓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

- 슈퍼마켓의 염가제품을 예로 들어 가격표적화를 설명합니다. 재화나 서비스에 책정된 가격이 특정 소비자 집단에만 국한되어 판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품의 가격이나 외관을 차별화 해 구매력이 다른 소비자 집단에 모두 판매 가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3. 경제학자가 꿈꾸는 세상, 완전시장

- 공급자와 소비자가 모두 다수이고,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어 있으며, 새로운 공급자가 시장에 진입하는데 어떤 비용도 들지 않는, ‘완전경쟁시장’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가격은 재화나 서비스가 보유한 가치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하지만, 세금과 같이 시장에 근거하지 않은 채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로 인해, 가격이 가치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죠.

- 크리스 하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장경제의 무조건적 옹호자들은 억지에 가까운 단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몇몇 비시장 요소들에 의해 시장의 정상적인 작동이 방해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가격이 비합리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인데요, 시장의 실패를 유발하는 요인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한가지는 현실의 시장이 완전경쟁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불완전 경쟁, 정보의 비대칭)이고, 또 한가지는 비시장 요소라고 불리우는 것들(공공재)이죠. 물론, 외부효과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요소들도 있습니다.

- 문제는 선후관계입니다. 시장경제의 무조건적 옹호자들은 이런 요소들 때문에 시장의 실패가 일어난다고 설명하지만, 선후관계가 뒤집어져 있습니다. 시장 자체의 문제이거나,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요소들인 것이죠. 시장이란, 무엇보다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 저자는 시장의 효율성과 공정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시장의 과제라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리한 출발이론을 소개합니다. 유리한 출발이론이란, 불완전경쟁시장에 대한 규제 대신, 시장의 완전경쟁 조건을 충족시키자는 것입니다.

4. 출퇴근의 경제학

- 외부효과에 관한 장입니다. 외부 효과는 말 그대로 시장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발생해 의도하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퇴근길의 매연이 이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부정적 외부효과에 대한 비용을 어떻게 책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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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은 자본주의 본연의 과잉투자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완전경쟁시장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 자본주의 본연의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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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무엇인가?> 크리스 하먼 외, 다함께, 2500원

- 反전 反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단체 '다함께'에서 발행한 소책자입니다. 총파업, 봉기, 혁명과 폭력,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정당까지, 혁명에 관련된 주제들을 말 그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혁명'이라고 하면, '폭력'을 떠올리고는 이내 고개를 저어버리고 마는 분들에게 가볍게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총파업

"총파업 구호는 노동자 투쟁의 일정한 시점에는 들어맞는 구호다. 단, 그 시점에 이르기 전에, 총파업 구호를 마치 만병통치약이나 되는 듯 남발하는 것은 잘못이다."

- 우리 역시 '총파업'에 무척이나 익숙하죠. 매번 정부의 정책이 발표될 때 마다, (조직력을 기준으로 볼 때)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조직 민주노총은 늘상 "총파업으로 대응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익숙함과 총파업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익숙한 것은 '총파업 선언'이겠죠. 총파업은 말 그대로 산업 전체의 마비를 의미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총파업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극히 적었고, 체제의 발달과 함께 산업과 노동자들이 집중된 이후에 그 빈도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노동자계급의 성서라는 <공산당 선언>을 집필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70년대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총파업 선동을 비판했다는 사실입니다. 총파업 선동에 대한 비판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제 노동자 조직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서'(코민테른, 제3인터내셔널, 1919년 설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칫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혁명과 총파업의 관계를 질문하게 됩니다.

- 총파업, 그리고 파업의 중심을 이룰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산물입니다. 자본주의의 산물인 총파업은, 기본적으로 방어적이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노동조합과 파업입니다. 총파업이란, 노동자계급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투쟁이지만, 그것은 엄연히 어디까지나 체제 내적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그 위력이나 겉모습과는 별개로, 총파업은 혁명과 그 성격을 달리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총파업의 본질적인 성격 외에 또 하나의 진실은, 혁명은 총파업과 같은 대중적인 열망과 지지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총파업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총파업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사이에 혁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총파업이란 완전히 패배하거나, 완전히 승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 아무리 궁극까지 밀어붙인 총파업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혁명으로 전환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배계급에 대한 방어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혁명가들이 반대했던 총파업은, 이러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총파업이었습니다. 창을 든 상대를 방패만으로 제압하려는 총파업에 혁명가들은 반대했던 것입니다.

2. 봉기

"프롤레타리아의 능동적 소수가 아무리 잘 조직돼 있어도, 그 나라의 총체적 여건과 무관하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혁명적 사회주의의 상징인 바리케이드는, 공공연한 거리에서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시초는 1830년대 프랑스의 오귀스트 블랑키라고 하는군요. 그가 일으킨 1839년 프랑스 파리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이후, 나폴레옹이 바리케이드를 염두해 거리의 폭을 넓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바리케이드는 곧, 혁명의 막바지가 군사적 대립일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역으로, 군대가 특정 시대 특정 정치권력의 최후 보루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일상적 시기에 이들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지만, 사회적 갈등이 극한에 도달할 때 이들은 어김없이 체제의 수호를 위해 정치무대에 등장함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혁명가들은 블랑키의 봉기 또한 비판했습니다. 총파업이 혁명이 아니듯이, 봉기도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었죠. 물론, 봉기는 총파업과 달리 자본주의의 산물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권력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정치권력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이 봉기를 비판했던 것은, 봉기 역시도 총파업과 마찬가지로 혁명의 반쪽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반쪽은 총파업과 같은 대중적인 열망과 지지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소수만의 봉기로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죠. 봉기는 혁명의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3. 혁명과 폭력

"폭력이 따를까 봐 혁명을 뒤로 미루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에게는 폭력을 쓰지 말라고 점잖게 타이르면서도 자기는 서슴없이 폭력을 저지르는 부르주아 정치가들의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 혁명에는 불가피하게 폭력이 수반됩니다. 지배계급은 소수이고 피지배계급은 다수입니다. 계급간의 갈등이 물리적이고 군사적으로 치달았을 때, 소수에 불과한 지배계급은 그 스스로 싸우지 않습니다. 이들 스스로의 저항이라면, 절대적인 수적 우세로 인해 혁명은 폭력 없이 끝날 수 있을 것이지만, 이들이 피지배계급의 일부로 하여금 저항하는 피지배계급과 싸우게 만들기 때문에 혁명은 폭력과 군사적 충돌을 수반합니다.

4. 소비에트: 1905년의 교훈

"파업으로 빵을 얻을 수는 있어도, 빵집을 빼앗을 수는 없다."
"봉기는 기예이며, 모든 노동자들이 기예를 이해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 일단 총파업이 일어나면, 노동조합이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듭니다. 일상적인 시기에는 침묵하는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이지만,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직접 행동을 의미하는 총파업 안에서는 고작 전체 노동자의 10% 미만을 포함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전체 노동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게 됩니다. 공장위원회, 파업위원회, 소비에트, 꼬르돈, 등 시대와 국가에 따라 명칭은 달랐지만,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행동하고 (전체의 의사를 모아야 할 정도로) 정치적으로 결집되었을 때 새로운 조직은 어김없이 등장했습니다.

- 이렇게 일반화된 혁명이론이 존재하기까지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경험은, 대중파업이 소비에트와 같은 대중적 정치기구를 통해 진일보 할 수 있으며, 이것은 기존의 정치기구인 의회와 더불어 '이중권력' 상태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이중권력 상태는 오래 유지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1905년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제복 입은 농민들(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 역설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모든 혁명가들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1905년 혁명의 실패가 필요했습니다. 일부 혁명가들은 혁명이 실패한 이후에서야, 이중권력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까요.

5.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이 사회는 지금까지의 어떤 사회 보다도 민주주의적이다."

- 이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독재'로부터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 즉 '소수에 의한 다수에 대한 독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독재 역시도, 본질적으로는 독재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보통선거'를 통해서도 이 역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소수가 독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가진 보통선거 제도를 통해서 실질적인 불평등을 은폐하려고 하지만, - 그 마저도 100여년 가까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 다수가 독재하는 사회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1917년 혁명으로 수립된 러시아의 헌법은, 자본가, 임대인, 상인, 수도승과 신부, 구 경찰관료의 선거권을 제한했습니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소비에트와 같은 대중적 정치기구를 통한 직접민주주의에 기반합니다. 직접민주주의가 사회를 운영하기에 비효율적이며 광범위한 계획경제와 모순된다는 비판에 대해, 저자는 민주주의의 축소가 아니라 확대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무척 생소한 것이 사실이나, 간접민주주의(의회민주주의) 가 유권자 대중들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비판과 함께,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국민소환제, 국민발안제와 같은 제도들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두 제도 사이에 교집합이 존재하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란 제도를 넘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6. 혁명정당의 구실

- 혁명정당의 구실은 앞서 언급된 내용에서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총파업을 혁명으로 전환시키는 준비, 봉기와 같은 군사적 충돌에 대한 준비, 이중권력 상태에서 흔들리지 않고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운동을 대변하는 것, 등의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의견과 행동의 통일이 필요하겠죠. 이것을 '정당', 더 나아가 '혁명정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 물론, 혁명정당 이론은 '일당독재'라는 숱한 오해를 해명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저자는 과거 소비에트연방, 중국, 북한과 같은 국가를 지배했던 공산당을 비판하며, 레닌의 당 개념은 당이 노동자계급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대중들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혁명정당은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는거죠.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이루어냈던 볼셰비키당 역시 대중적인 지지를 받기까지 굉장한 우여곡절이 많았으니까요. 혁명정당 이론은, 혁명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단일하고 일관된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는 이론이지, 그러한 정치세력이 오로지 자신들임을 자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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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uba-photo.com/gallery_epic/EP-Salas/EPS-Index.htm

16세기 설탕과 노예무역, 보물선단의 정박
1952년 전국 의회선거에 출마
1953년 7월 26일. 120명의 반군과 함께 병영 공격.
1956년 12월 25일. 쿠바 공격.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게릴라 활동.
1959년 1월 1일. 장교들의 이탈, 미국의 제의. 바티스타의 도주. 부자들은 떠나고 사탕수수 노동자들과 시가를 마는 노동자들은..
1959년 4월. 닉슨과 면담. 공산주의자 아니다.
1959년 5월. 농업개혁안 발표.
1960년 8월. 농업계획 조치로 미국과의 관계 냉각. 설탕 수입 금지. 대미 수출 80% 삭감. 소비에트와 수교. 문맹퇴치 프로그램. 체 게바라가 산업부흥부 장관과 중앙은행 총재.
1961년 자발적인 근로일 제안.
1961년 4월. 1,500명 망명자들의 피그만 침공.
1962년 8월. 미사일 위기.
1965년 누구나 사탕수수 수학하는데 참여할 것 제안.
1967년 체 게바라 볼리비아에서 사망.
1990년 소련의 지원 중단. 특별기간 설정.
1993년 외환 거래 양성화
1995년 소규모 사업 운영 허용

- 명제: 체 게바라와 공산주의 사상에 이끌린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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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르타주 [reportage]

어원은 보고(報告:report)이며 ‘르포’로 줄여 쓰기도 하는데, 어떤 사회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보도가 아니라 보고자(reporter)가 자신의 식견(識見)을 배경으로 하여 심층취재하고, 대상의 사이드 뉴스나 에피소드를 포함시켜 종합적인 기사로 완성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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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조치 [禁輸措置, embargo]

엠바고(embargo)라고도 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어떤 특정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하여 사용한다. 원래는 선박의 입출항을 금지한다는 말인데, 국가간의 수출금지, 통상금지 조치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금수조치 대상국과는 모든 경제교류를 중단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인도적 교류나 문화·체육 분야의 교류에는 예외가 인정되며, 국가정책 차원에서 대상국마다 경제제재 조치의 범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단순한 선박의 입출항이나 무역 금지조치 외에 재정지원 등 모든 경제적 협력을 규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경제적 강자인 서방 선진국, 특히 미국이 정치적·군사적 대립관계에 있는 국가들을 상대로 내리고 동맹국들이 공동 참여하는 형태로 자주 동원했다. 또 유엔의 결의에 따라 여러 국가가 특정국에 경제봉쇄 조치를 실시하는 경우도 넓은 의미의 금수조치에 해당하며,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 대한 제재조치가 대표적인 예이다.

미국은 ‘대(對)적성국교역법’에 이를 규정하고 베트남·북한·쿠바 등을 금수조치 대상으로 하였으나 1994년에는 베트남, 1995년에는 북한에 대한 금수조치를 해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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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씨네21)
 
영화라는 게 파괴 행위를 즐겨다루다보니 본의 아니게 TV로 생중계된 9·11 사건은 수백만명에 의해 마치 진짜 재난영화처럼 경험되었다. 그렇다면 9·11을 다룬 영화는 재난영화에 대한 재난영화가 되고 마는 걸까?

올리버 스톤의 새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어떤 의미에서 1974년작 <타워링>의 리메이크라면 <플라이트 93>은 70년대 <에어포트> 시리즈의 재구성된 후편쯤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가 큰 스케일의 영화라면 후자는 좀더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둘 다 재난을 극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영화 이후 가장 중요한 미국 역사를 다룬 영화로 선전될 테고 <플라이트 93>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후 엔터테인먼트를 넘어서는 첫 영화로 자리잡으려 할 것이다.

오래전 수잔 손택은 “우리는 오로지 영화를 통해서만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도시의 멸망, 인류의 파괴까지도 겪는 판타지에 참여할 수 있다”고 썼다. 그뿐 아니라 우린 그걸 즐기기까지 한다! 지난 세기말 극장을 도배한 구식 재난영화들은 도시 전체를 날려버리는 특수효과 범벅으로 그저 얄팍한 인간 호기심에 호소했다. 1998년 <타이타닉> 다음으로 흥행한 세 영화, <아마겟돈> <딥 임팩트> <고질라>는 모두 뉴욕시의 파괴를 담고 있다. 2001년 9월11일, 묘한 우연이겠지만 할리우드는 뉴욕의 파괴에 연루된 듯 느꼈다. 알 카에다가 할리우드를 베낀 것일까? 그 뒤 며칠간 스튜디오와 경영자들은 영화를 거둬들이고 다시 편집하고 취소하는 난리를 펴야 했다.

사회적 책임의식을 지닌 재난영화의 출현

2004년 여름 우리는 책임감을 느끼는 듯한 새로운 종류의 재난영화를 맞게 된다. 구식 재난영화들에서는 자연재앙이 테러리스트였다. 탐욕스럽고 부정직하거나 어리석은 개인의 잘못이 존재하는 한편, 제도는 본질적으로 건강하고 충분히 내재화되어서 자연스럽게, 흔히 제복을 입은 지도자가 혼란을 뚫고 출현하곤 했다. 하지만 <투모로우>는 지구 온난화의 위기를 이용해 공공연히 부시 행정부를 비판하며 대통령 선거의 한 부분으로 어설프게 자리잡았다.

몇달 뒤 인형극 <팀 아메리카>가 새로운 사회적 책임의식을 지닌 재난영화를 조롱했지만 2005년 여름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이런 영화들의 첫 흥행이 달성된다. <우주전쟁>은 고의적으로 9·11의 고통을 상기시키며 별 볼일없는 아버지가 영웅적 시민이 된다는 정치적 상징까지 담아낸다. 영화는 처음 경험하게 한다기보다 최근의 사건을 다시 상기시키며 경험케 하려는 의도를 지녔다(최근 <새>의 리메이크였고 조류독감을 다룬 TV영화 처럼 그 여름의 또 다른 재난 쇼였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국가 지도층을 비판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최근 개봉된 <포세이돈>은 구식 재난영화인데 단지 1972년 <포세이돈 어드벤쳐>를 다시 만들어서만 아니라 순수한 오락흥행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관객은 재앙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다. 재앙에서 비롯된 액션과 생존의 서스펜스가 초점이니까. 수백명의 엑스트라는 우리의 오락을 위해 ‘죽어’가지만 아쉬울 건 하나도 없다. 문학적 비평 용어로 말하자면 <포세이돈>은 희극에 속하는데 결혼할 두쌍의 남녀를 배출하며 끝난다. 그렇다고 9·11의 그림자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70년대 초 고전적인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영향의 재난영화들은 대개 최고 공직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지닌, 고난 속에서 피어나오는 영웅주의를 보여준다. <포세이돈>도 전 뉴욕 시장을 주요 인물로 갖추고 있다.

<플라이트 93>은 구식 재난영화를 닮아서 미국식 삶에 온전히 참여하려면 꼭 봐야 하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에어포트>나 <포세이돈>과 달리 재미있지 않고, 그저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해외시장에서 영화가 어떻게 반영될지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아마 이 영화를 즐길 관객은 알 카에다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가 상영되기 12일 전, 법정에서 93호 비행기 녹음 테이프가 돌려졌을 때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활짝 웃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서스펜스를 불안감으로 대체

<플라이트 93>은 왜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보고 싶어할까? 영화는 상업적 제품일까, 아니면 갖춰야 할 지식이거나 일종의 단체 치료에 해당되나? 그린그래스 감독의 뛰어난 연출에 힘입어 <플라이트 93>은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고 들린다. 하지만 영화는 극적 재구성이다. 존재하는 전화 통화들과 기내 녹음에도 불구하고 비행 도중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장과 조종사들, 퍼스트 클래스 승객 한명, 승무원 한명이 찔려 죽었다는 정도 추측할 수 있으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를 경험하게 된다.

새 재난은 공동체로 경험된다. 실시간의 사용을 통해 <플라이트 93>은 관객의 참여를 의도했다. (최후의 카타르시스가 부재하는) 영화의 줄거리가 쏙 빠진, 이젠 악명이 나버린 예고편처럼 관객은 영화의 액션을 따라했다. 예고편은 <인사이드 맨>을 보려고 앉아 있던 관객의 주목을 “납치해버렸다.” 소문에 의하면 AMC 로이스 링컨 스퀘어 극장에서 충격을 받고 화난 관객이 예고편 상영을 멈추게 하기 위해 단합했다고 한다.

영화의 결말이 뻔하니 <플라이트 93>은 서스펜스를 불안감으로 대체했다. 비행기 자체 장면들보다 연방 항공관리국과 공군사령부 장면이 두배는 더 길다.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작동했을까? 시달리던 공항 관제탑 요원은 울부짖는다.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지만 아무 대답이 없어….” 군대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찾지 못한다(관객은 플로리다에서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는 대통령을 상상하겠지). 그린그래스는 승객이 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관객이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긴장감을 이리저리 뒤틀며 재난의 기선을 제압하고 있다. <우주전쟁>이 9·11을 이용해 비난과 호평을 받았듯이 <플라이트 93>이 “너무 일찍” 만들어졌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누가 그렇게 말했을까? 이미 TV에서 두번이나 극화된 이야기가 영화로 너무 일찍 만들어질 수 있을까?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만든 은 극화된 내용 중간중간에 가족들의 인터뷰를 집어넣었고 A&E채널에서 채널 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다큐드라마 <플라이트 93>은 600만 시청자를 끌어들였다(영화 <플라이트 93>보다 더 느긋하고 좀더 친밀하게 구성된 TV 다큐드라마 <플라이트 93>은 가정 내 시청을 위해 만들어져 승객과 고통받는 가족들간의 전화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유려한 교외 거주 지역을 주로 보여줬다).

영화 <플라이트 93>만큼 예술적이거나 일관적이지 못하다 하더라도 TV 다큐드라마 <플라이트 93>은 호평을 받았고 보수적인 <내셔널 리뷰>는 찬사를 보냈다. “악당들은 박스 커터를 휘두르고 알라를 외치며 사람들을 죽였지만 미국인들은 선거에 참여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며 이에 대항한다.” 드라마는 그 사실성뿐만 아니라 정치성으로 인해 칭찬받았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암울한 재난엔터테인먼트영화

부시가 2001년 후반과 2002년 내내 93호 비행기를 얼마나 자주 언급했나를 생각하면 <플라이트 93>의 백악관 상영이 아직 없다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영화는 일찌감치 라디오 진행자인 러시 림보의 열정적인 지지를 받아냈다. 이 토크쇼 스타는 <플라이트 93>을 고무적이라고 칭찬하며 비행기 내에서 보여진 것과 같은 리더십을 강조하고 “테러리스트들을 향한 증오에 가까운 분노가 넘쳤다”고 자신의 영화 시청 경험을 묘사했다. 림보는 화를 내며 자신의 확신을 더욱 굳혔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왜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지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림보가 개봉 전 잘려나간 파블로브식 자막을 본 것이 분명하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였다.) 림보는 여기에 정치적 결론을 더한다. 부시 행정부의 93호 비행기 강조를 염두에 두고 림보는 미친 좌익이나 93호 비행기를 이용해 부시를 질책할 것이라고 대통령을 두둔했다.

이라크 침공 준비가 처음 진행되기 시작한 2002년 봄 이후 줄곧 부시는 93호 비행기 승객의 영웅적 희생을 말했다. “승객은 납치된 비행기가 살인을 위해 사용될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좀더 숭고한 목적을 이루고자 결심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기도문을 외우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고하고 그들은 비행기를 추락시켰습니다.” 이렇게 93호 비행기는 알라모나 바탄의 전투처럼 영광스러운 패배로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린그래스의 해석은 교조적이지 않다. 음모론보다 관리들의 무능력을 주목하고 납치자들과 승객이 자신들의 신에게 호소하는 것을 보여주며 국가주의적 호소를 피하고 있다. <플라이트 93>은 집단화된 영웅주의를 보여주는데 몇몇 승객이 더 영웅적이었다고 간주하는 가족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다. 심지어 기내 서비스 카트를 밀고 돌진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자 부시가 9·11 두달 뒤 슬로건 처럼 처음 사용한 “굴립시다(Let’s roll)”라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플라이트 93>은 애국적인 자기 희생이라기보다 궁지에 몰린 승객이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동기로 행동했다고 제안한다. 조종실로 돌진한 것도 비행기를 조정해서 착륙시키기 위해서였다(이렇게 되면 사실상 부시가 묘사한 것처럼 “숭고한 목적을 이루고자 기도문을 외우고 비행기를 추락시킨” 쪽은 오히려 테러리스트들이 된다).

(역사가라기보다) 상업영화 감독인 그린그래스는 관객과의 계약에 더 관심이 있다. 영화를 보는 경험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야 하는데 그린그래스가 주는 것은 부시가 93호 비행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다. 조작의 천재였던 앨프리드 히치콕이 <새>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원한 종결의 부재에 음악이 없었다면 관객의 동요를 더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절정에 이르러 <플라이트 93>은 사실주의를 통해 이야기의 암울함을 보여준다. 이 새 재난영화가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하겠지만 당신은 돈을 내야 그걸 얻을 것이다.
 
글: 짐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빌리지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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