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씨네21)
 
영화라는 게 파괴 행위를 즐겨다루다보니 본의 아니게 TV로 생중계된 9·11 사건은 수백만명에 의해 마치 진짜 재난영화처럼 경험되었다. 그렇다면 9·11을 다룬 영화는 재난영화에 대한 재난영화가 되고 마는 걸까?

올리버 스톤의 새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어떤 의미에서 1974년작 <타워링>의 리메이크라면 <플라이트 93>은 70년대 <에어포트> 시리즈의 재구성된 후편쯤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자가 큰 스케일의 영화라면 후자는 좀더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둘 다 재난을 극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영화 이후 가장 중요한 미국 역사를 다룬 영화로 선전될 테고 <플라이트 93>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이후 엔터테인먼트를 넘어서는 첫 영화로 자리잡으려 할 것이다.

오래전 수잔 손택은 “우리는 오로지 영화를 통해서만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도시의 멸망, 인류의 파괴까지도 겪는 판타지에 참여할 수 있다”고 썼다. 그뿐 아니라 우린 그걸 즐기기까지 한다! 지난 세기말 극장을 도배한 구식 재난영화들은 도시 전체를 날려버리는 특수효과 범벅으로 그저 얄팍한 인간 호기심에 호소했다. 1998년 <타이타닉> 다음으로 흥행한 세 영화, <아마겟돈> <딥 임팩트> <고질라>는 모두 뉴욕시의 파괴를 담고 있다. 2001년 9월11일, 묘한 우연이겠지만 할리우드는 뉴욕의 파괴에 연루된 듯 느꼈다. 알 카에다가 할리우드를 베낀 것일까? 그 뒤 며칠간 스튜디오와 경영자들은 영화를 거둬들이고 다시 편집하고 취소하는 난리를 펴야 했다.

사회적 책임의식을 지닌 재난영화의 출현

2004년 여름 우리는 책임감을 느끼는 듯한 새로운 종류의 재난영화를 맞게 된다. 구식 재난영화들에서는 자연재앙이 테러리스트였다. 탐욕스럽고 부정직하거나 어리석은 개인의 잘못이 존재하는 한편, 제도는 본질적으로 건강하고 충분히 내재화되어서 자연스럽게, 흔히 제복을 입은 지도자가 혼란을 뚫고 출현하곤 했다. 하지만 <투모로우>는 지구 온난화의 위기를 이용해 공공연히 부시 행정부를 비판하며 대통령 선거의 한 부분으로 어설프게 자리잡았다.

몇달 뒤 인형극 <팀 아메리카>가 새로운 사회적 책임의식을 지닌 재난영화를 조롱했지만 2005년 여름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이런 영화들의 첫 흥행이 달성된다. <우주전쟁>은 고의적으로 9·11의 고통을 상기시키며 별 볼일없는 아버지가 영웅적 시민이 된다는 정치적 상징까지 담아낸다. 영화는 처음 경험하게 한다기보다 최근의 사건을 다시 상기시키며 경험케 하려는 의도를 지녔다(최근 <새>의 리메이크였고 조류독감을 다룬 TV영화 처럼 그 여름의 또 다른 재난 쇼였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국가 지도층을 비판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최근 개봉된 <포세이돈>은 구식 재난영화인데 단지 1972년 <포세이돈 어드벤쳐>를 다시 만들어서만 아니라 순수한 오락흥행영화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관객은 재앙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없다. 재앙에서 비롯된 액션과 생존의 서스펜스가 초점이니까. 수백명의 엑스트라는 우리의 오락을 위해 ‘죽어’가지만 아쉬울 건 하나도 없다. 문학적 비평 용어로 말하자면 <포세이돈>은 희극에 속하는데 결혼할 두쌍의 남녀를 배출하며 끝난다. 그렇다고 9·11의 그림자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70년대 초 고전적인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영향의 재난영화들은 대개 최고 공직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지닌, 고난 속에서 피어나오는 영웅주의를 보여준다. <포세이돈>도 전 뉴욕 시장을 주요 인물로 갖추고 있다.

<플라이트 93>은 구식 재난영화를 닮아서 미국식 삶에 온전히 참여하려면 꼭 봐야 하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에어포트>나 <포세이돈>과 달리 재미있지 않고, 그저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해외시장에서 영화가 어떻게 반영될지 시간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아마 이 영화를 즐길 관객은 알 카에다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서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가 상영되기 12일 전, 법정에서 93호 비행기 녹음 테이프가 돌려졌을 때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활짝 웃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서스펜스를 불안감으로 대체

<플라이트 93>은 왜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보고 싶어할까? 영화는 상업적 제품일까, 아니면 갖춰야 할 지식이거나 일종의 단체 치료에 해당되나? 그린그래스 감독의 뛰어난 연출에 힘입어 <플라이트 93>은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고 들린다. 하지만 영화는 극적 재구성이다. 존재하는 전화 통화들과 기내 녹음에도 불구하고 비행 도중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장과 조종사들, 퍼스트 클래스 승객 한명, 승무원 한명이 찔려 죽었다는 정도 추측할 수 있으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를 경험하게 된다.

새 재난은 공동체로 경험된다. 실시간의 사용을 통해 <플라이트 93>은 관객의 참여를 의도했다. (최후의 카타르시스가 부재하는) 영화의 줄거리가 쏙 빠진, 이젠 악명이 나버린 예고편처럼 관객은 영화의 액션을 따라했다. 예고편은 <인사이드 맨>을 보려고 앉아 있던 관객의 주목을 “납치해버렸다.” 소문에 의하면 AMC 로이스 링컨 스퀘어 극장에서 충격을 받고 화난 관객이 예고편 상영을 멈추게 하기 위해 단합했다고 한다.

영화의 결말이 뻔하니 <플라이트 93>은 서스펜스를 불안감으로 대체했다. 비행기 자체 장면들보다 연방 항공관리국과 공군사령부 장면이 두배는 더 길다.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작동했을까? 시달리던 공항 관제탑 요원은 울부짖는다.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지만 아무 대답이 없어….” 군대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찾지 못한다(관객은 플로리다에서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는 대통령을 상상하겠지). 그린그래스는 승객이 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관객이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긴장감을 이리저리 뒤틀며 재난의 기선을 제압하고 있다. <우주전쟁>이 9·11을 이용해 비난과 호평을 받았듯이 <플라이트 93>이 “너무 일찍” 만들어졌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누가 그렇게 말했을까? 이미 TV에서 두번이나 극화된 이야기가 영화로 너무 일찍 만들어질 수 있을까?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만든 은 극화된 내용 중간중간에 가족들의 인터뷰를 집어넣었고 A&E채널에서 채널 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다큐드라마 <플라이트 93>은 600만 시청자를 끌어들였다(영화 <플라이트 93>보다 더 느긋하고 좀더 친밀하게 구성된 TV 다큐드라마 <플라이트 93>은 가정 내 시청을 위해 만들어져 승객과 고통받는 가족들간의 전화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유려한 교외 거주 지역을 주로 보여줬다).

영화 <플라이트 93>만큼 예술적이거나 일관적이지 못하다 하더라도 TV 다큐드라마 <플라이트 93>은 호평을 받았고 보수적인 <내셔널 리뷰>는 찬사를 보냈다. “악당들은 박스 커터를 휘두르고 알라를 외치며 사람들을 죽였지만 미국인들은 선거에 참여하고 주기도문을 외우며 이에 대항한다.” 드라마는 그 사실성뿐만 아니라 정치성으로 인해 칭찬받았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암울한 재난엔터테인먼트영화

부시가 2001년 후반과 2002년 내내 93호 비행기를 얼마나 자주 언급했나를 생각하면 <플라이트 93>의 백악관 상영이 아직 없다는 게 이상하다. 하지만 영화는 일찌감치 라디오 진행자인 러시 림보의 열정적인 지지를 받아냈다. 이 토크쇼 스타는 <플라이트 93>을 고무적이라고 칭찬하며 비행기 내에서 보여진 것과 같은 리더십을 강조하고 “테러리스트들을 향한 증오에 가까운 분노가 넘쳤다”고 자신의 영화 시청 경험을 묘사했다. 림보는 화를 내며 자신의 확신을 더욱 굳혔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왜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지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림보가 개봉 전 잘려나간 파블로브식 자막을 본 것이 분명하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였다.) 림보는 여기에 정치적 결론을 더한다. 부시 행정부의 93호 비행기 강조를 염두에 두고 림보는 미친 좌익이나 93호 비행기를 이용해 부시를 질책할 것이라고 대통령을 두둔했다.

이라크 침공 준비가 처음 진행되기 시작한 2002년 봄 이후 줄곧 부시는 93호 비행기 승객의 영웅적 희생을 말했다. “승객은 납치된 비행기가 살인을 위해 사용될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좀더 숭고한 목적을 이루고자 결심했습니다. 이 경우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기도문을 외우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고하고 그들은 비행기를 추락시켰습니다.” 이렇게 93호 비행기는 알라모나 바탄의 전투처럼 영광스러운 패배로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린그래스의 해석은 교조적이지 않다. 음모론보다 관리들의 무능력을 주목하고 납치자들과 승객이 자신들의 신에게 호소하는 것을 보여주며 국가주의적 호소를 피하고 있다. <플라이트 93>은 집단화된 영웅주의를 보여주는데 몇몇 승객이 더 영웅적이었다고 간주하는 가족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다. 심지어 기내 서비스 카트를 밀고 돌진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자 부시가 9·11 두달 뒤 슬로건 처럼 처음 사용한 “굴립시다(Let’s roll)”라는 말도 들리지 않는다.

<플라이트 93>은 애국적인 자기 희생이라기보다 궁지에 몰린 승객이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동기로 행동했다고 제안한다. 조종실로 돌진한 것도 비행기를 조정해서 착륙시키기 위해서였다(이렇게 되면 사실상 부시가 묘사한 것처럼 “숭고한 목적을 이루고자 기도문을 외우고 비행기를 추락시킨” 쪽은 오히려 테러리스트들이 된다).

(역사가라기보다) 상업영화 감독인 그린그래스는 관객과의 계약에 더 관심이 있다. 영화를 보는 경험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야 하는데 그린그래스가 주는 것은 부시가 93호 비행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다. 조작의 천재였던 앨프리드 히치콕이 <새>에서 보여준 것처럼 시원한 종결의 부재에 음악이 없었다면 관객의 동요를 더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절정에 이르러 <플라이트 93>은 사실주의를 통해 이야기의 암울함을 보여준다. 이 새 재난영화가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하겠지만 당신은 돈을 내야 그걸 얻을 것이다.
 
글: 짐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빌리지 보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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