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역자의 번역을 신뢰하지 않는다. 한 번 마음이 삐딱해졌기 때문일까? 


"가슴풍만하고 성기당당한"... 원래 이런 말이 있나? 나만 모르나?

여러분, 이 말의 영어가 짐작이 되나요???


내 대안적 번역이 물론 틀릴 수도 있다.




19쪽 18행: 전문가 회의 -> 학회 학술대회(professional meetings)


23쪽 17행: 가슴 풍만하고 성기 당당한 존재를 -> 좋은 신체(능력, 재능)를 타고난 존재를


가슴 풍만하고 성기당당한? "well-endowed"가?

이 뭔 변태적 번역인가? 



41쪽 13행: 그는 더 나아간다. -> 그녀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44쪽 15행: 그러나 늑대와 개의 대립은 농담조가 아니다. -> 그런데 이 늑대와 개 대립 이야기는 재미없다 (농담인 것 같은데 거슬린다). 


47쪽 19-20행: 지상의 생명체는 형상으로든 일시적 존재로든 -> 지구 생명체의 형태와 시간성(temporality)은

=> 역자가 temporal과 temporary를 혼동했음; temporal이라는 말을 모를 수도.. 


63쪽 16-17행: 먼지를 -> 오물을


63쪽 24행: 살아있는 자본의 체제에 -> 생명자본 체제(the regime of Lively Capital)에


74쪽 22행: 인간의 노예가 -> 인간 노예가


123쪽 2행: 검증된 삶 -> 검사되는/시험되는 생명(examined lives)


131쪽 16행: 개 이빨을 -> 송곳니를


139쪽 1행: 개 활동가들이 있는 광경이나 -> 개활동가들의 현장이나


141쪽 16행: 리스트서버 -> 리스트서브


196쪽 6행: 책략가 -> 트릭스터(trickster)


315쪽 2행: 사체-절도는 -> 신체 강탈/전용(body-snatching)


341쪽 1행: 시골 캘리포니아주 -> 캘리포니아주 시골


348쪽 1-2행: 떠돌이 고양이들이 추적용 번호를 부여받고 백신 접종 의무가 있다는 것 외에 커뮤니티 칼리지[전문대학]의 학생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간단한 대답으로는 양쪽 모두 역사적인 상황 속의 테크놀로지 속에서 내부-작용을 통해 "교육"된다는 점이다.


What do feral cats have to do with community college students, besides having numbers assigned to them for tracking purposes and being required to get vaccinations? The short answer is that both classes of beings are "educated" through their intra-actions within historically situated technology. (281)


추적용 번호가 부여된다는 것과 백신 접종 의무가 있다는 것 말고도 길고양이와 커뮤니티칼리지 학생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선 간단한 대답으로는 두 집단 모두 역사적으로 위치지어진 테크놀로지 내부에서 발생하는 내부-작용을 통해서 "배우는" 존재라는 것이다. 


348쪽 6행: 가축 -> 집에서 키우는 동물(domestic animals)


350쪽 11-12행: 분리주의자와 미국이 지원하는 마닐라 혁명운동 양쪽 모두의 억압에 의해 죽었다.


... students who were mostly dead a few years later from the repression of both separatist and revolutionary movements by the US-supported regime in Manila. (p. 283)


-> 미국이 지원하는 마닐라 정부가 분리주의 운동과 혁명운동 양자 모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360쪽 2~12행: 나는 이 대리자를 ... 열림 속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사실 나는 이 대리자를 "퀴어"라 부르고 싶고, 보통의 이성애자들에게도 이게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에 약간의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거기에서 그친다면, 피치니니는 자신의 작품 이미지 사용을 허가한 것을 분명히 철회할 것이다. 여전히 이 대리자는 소화불량에 양분을 공급하는 창조물로 남아있다. 그것은 적절한 장소와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소화불량이다. 사실 퀴어 이론이 말하는 전부가 장소와 기능의 적절성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제자리에서 벗어난 양육의 속삭이는 달램(mutter)/문제(matter)이다. 이 양육의 달램/문제가 바로 소위 재생산이라는 여성을 정의하는 기능의 (충분조건은 아닐지 몰라도) 필요조건의 조각(cut)이다. 제자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개는 위험에 처하는 것임을, 그러나 때로는 개방된 공간, 그러니까 아직은 가치와 의도가 대못을 쳐서 폐쇄하지 않은 공간에서 자유롭다는 것임을 뜻한다.  (p. 292)




380쪽 27행

백정 -> 정육업자(butcher)


butcher는 오늘날 정육점 주인이나 점원을 다 가리키는 말인데...

프랑스 센강 하류에서 고기 잘라 파는 사람을 "백정"이라고 번역하면 어떡하나? 그 사람이 도살을 하건 안 하건, 이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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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02-07 0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well-endowed 번역에 웃고 갑니다. 오래 기다리던 번역인데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로군요.

에로이카 2024-02-08 03:48   좋아요 0 | URL
네, 여러모로 아쉬운 번역입니다.
 
종과 종이 만날 때 - 복수종들의 정치 아우또노미아총서 80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갈무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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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오랫동안 힘들게 읽었다. 그런데 공들인 만큼 얻은 것은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이전에 읽은 해러웨이의 글들 - 두 선언문, 트러블과 함께 하기, “상황적 지식” -만큼의 감동이 없다. 이제 조금은 해러웨이의 글쓰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고생한 만큼의 보람은 없는 읽기였다. 좀 지친다. 리뷰를 쓰기로 한 것은 나의 이 아쉬움의 실체가 무엇일지 생각해보기 위함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보통 논평은 그 평을 듣는 작자의 마음을 고려해, 혹평의 경우는 처음에는 미덕을, 찬사의 경우는 앞에서 아쉬운 점을 먼저 이야기하고 나중에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을 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작자의 마음을 고려하기보다 해러웨이에 대한 내 마음이 급격히 식는 것을 막아보기 위해서 그나마 좋았던 점을 먼저 써보고자 한다. 근데 좀 한참 생각해야 할 것 같다.

 

1. 그나마 있는 미덕들

미덕을 꼽자면, 무엇보다도 이전의 글에 나왔던 캐릭터들(characters)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의 반가움과 익숙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등장인물이라고 썼다 지우고 캐릭터라고 썼다. 이제 character등장인물로 번역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적 편견이 반영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크리터(critter)를 조금은 더 잘 알게 된다는 것. 이전의 글에 잠시 얼굴을 비추었던 이들 해러웨이의 아버지, 남편, 카옌, 롤랜드, 나바호-추로양, 개 훈련사 비키 헌, 믹소트리카 파라독사 등 의 이야기가 이전 에피소드의 전편(prequel)과 속편(sequel)을 제공해준다.

 

각 캐릭터는 혼자 등장하지 않고 언제나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들의 형상(figure)으로 등장한다. 해러웨이는 이 형상을 복수의 신체들과 의미들이 서로를 형성하는 물질-기호론적 결절점 내지는 매듭으로 규정한다(13). 이렇게 적고 보니, 정말 좋은 서술이다. 이 형상은 언제나 몇 개의 것들이 얽혀 있는 모습이며, 어떤 서사(narrative)를 통해 상호작용 또는 내부작용하는 그 얽혀 있는 것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며 그들을 함께 형성한다. 그 형상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에 위치지어져 있다(situated).

 

해러웨이의 논의를 잘 따라가려면, 이 형상, 내부작용하는 몸들, 그것들이 공구성하는 세계, 의미, 그것이 처해져 있는 상황을 잘 파악하면 된다.

 

2. 종과 종이 내부작용하는 형상들

이 책은 바로 서로 다른 종들이 몸을 함께 휘감고 얽히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들에 대한 서술이다. 형상들을 책에 나오는 순서대로 한 번 꼽아보자. 짐의 개와 레오나르도의 개(15), 통신장비를 단 암컷 늑대(24), 카옌과 도나, 데리다와 고양이, 스머츠와 개코원숭이, 위아래로 겹쳐 있는 거북이(48-49), 혈우병 걸린 개(77-78), 감옥 수형자와 개(82), 기니피그와 체체파리와 바바 조셉(91), 앙코마우스(99), C. A. 샤프와 오씨 커뮤니티(138~169), 간질 걸린 개(161), 프랭크 해러웨이와 목발(6), 어질리티하는 인간과 개들(7, 8), 크리터캠을 장착한 바다 동물(9), 구조된 길고양이(341), 북쪽털코웜뱃(northern hairy-nosed wombat), 믹소트리카 파라독사(352), <(앉아있는) 제임스>(358), 태반 먹기, 멧돼지 바베큐 등...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잠재적 애독자라면 아마도 여기에 제시된 형상들의 상황에 어떤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위의 형상들에 사실 별 흥미가 없다. 억지로 꼽자면 멧돼지 바베큐 정도? ㅋㅋ 혹시나 이 책을 읽을까 말까 하는 사람이 이 리뷰를 읽는다면 위의 형상들에 자신이 얼마나 흥미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독서 개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개와 매일 산책을 하거나 길고양이를 사랑하면, 또는 실험실에서 동물을 다루는 일을 한다면 좀더 관심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해러웨이는 맑스의 잉여가치이론이나 푸코의 생명정치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자신과 자신의 개가 처한 구체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새로운 이론화를 시도한다. 맑스의 자본은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에 완전히 통합된 개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부적절하고,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이나 성의 역사도 개의 신체 규율과 생명의 통제·조절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맑스와 푸코의 통찰을 자신과 개의 상황에 맞게 가공하여 생명자본개집의 탄생을 쓰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종과 종이 만날 때는 그러한 의도가 돌연변이된 알이라고 한다(79). 같은 맥락에서 시드니 민츠의 설탕과 권력설탕의 공생발생적인 자연문화를 상세히 탐구하고 있지만, “민츠의 인류학이 가진 휴머니즘적인 프레임 때문에 다른 많은 생명체들(과 다른 비인간들)이 적극적으로 거기에서 관계되고 있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고 평한다(450).

 

그런데 이게 이론화냐? 아니다. 이론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그냥 조크(joke) 같다. 좀더 진지하게 제대로 쓰던가 아니면 아예 출판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실 맑스와 푸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기대했다. 그리고 실망했다. 나머지 나오는 여러 형상들... 특히 해러웨이가 열심히 참여하는 개 커뮤니티 이야기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내가 이 바쁜 와중에 도대체 왜 이런 책을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이론화라면 좀더 엄밀해야 했고, 조크라면 좀더 재미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개나 고양이를 키운다면 이 책이 재미있을까? 글쎄... 반려종과 함께 산다고 해러웨이를 좋아하라는 법도 없고, 해러웨이가 불만족스러워 하는 맑스, 푸코,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러웨이 말을 알아듣고 말고는 그 다음 문제일 것이다.

 

3. 해러웨이의 동맹자들

비판대상이 있다면 동맹자도 있다. 해러웨이의 다른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와 빵을 함께 먹는 관계인 동맹자들이 등장한다. 거의 매번 등장하는 마굴리스, 라투르, 배러드, 스탕제르 이야기가 되풀이된다. 가장 의외의 인물은 데리다였다(1). C. A. 샤프에 대한 4장은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 종에 대한 의학적 진실이 어떠한 네트워크 확장과정과 함께 생산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내가 읽은 해러웨이의 글 중에 라투르의 ANT 접근방식을 가장 충실히 구현한 글인 것 같다. 캐런 배러드의 내부-작용(intra-action)”과 이사벨 스탕제르의 코스모폴리틱스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이 중에서는 스탕제르 이야기가 좀더 궁금하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찾아봐야 하겠다.


4. 후주

난 후주(endnote)보다 각주(footnote)를 선호한다. 그런데 해러웨이의 책은 영어로 나온 책들도 다 후주를 달아놓았다. 해러웨이의 어떤 주는 매우 전문적이고 장황해서 각주로 두기가 좀 힘들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본문 읽다가 후주 찾아 읽다가 다시 본문으로 오는 게 참 쉽지 않다. 더구나 영어책이랑 같이 볼 때 이 수고는 두 배 이상이다. 그런데 또 막상 후주 내용이 쌈박하거나 그렇지도 않다. 아마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불만을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다(371).

 

5. 맺으며

아무튼 난 이 책이 별로였다. 절판되었던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황희선, 임옥희 옮김, 아르테)가 새로운 번역으로 곧 출판 예정이다. 오늘날의 해러웨이를 있게 한 사이보그 선언상황적 지식이 실려 있는 훌륭한 책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옮긴이 중 한 분은 해러웨이 선언문의 번역자기도 하다. 난 그 번역자를 신뢰한다. 그러나 난 올해 더 이상 해러웨이를 읽지 않겠다.

 

해러웨이는 내게 라투르와는 다른 하이브리디즘의 가능성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정말 고맙게도 르 귄을 알게 해준 사람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에서 르 귄은 안 보인다. 책 한 권 읽고 실망했다고 손절하거나 그럴 일은 없다. 미심쩍은 번역은 따로 정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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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종이 만날 때 - 복수종들의 정치 아우또노미아총서 80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갈무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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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를 처음 읽는다면 이 책부터 읽지 마세요. 해러웨이의 다른 좋은 글들을 먼저 읽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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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고원 -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 새물결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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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도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시비가림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돈 주고 책 산 독자의 불평쯤 될 것이다.


어려운 책이라 번역이 어려웠겠지만, 용어 선택에 있어서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예컨대, progression을 "진보", regression을 "퇴행", involution을 "역행"이라고 옮겨 놓았는데(446~453), 각각 "전진", "후퇴", "연루/엮임/얽힘/관계맺음"으로 옮겨야 말이 된다.


"진보"는 말 그대로 "시간의 화살"을 전제하는 근대주의적 개념이다.

이 책 <천 개의 고원>에서 progression은 "무엇을 향해 더 앞으로 나가다/전진하다"라는 공간적 이동의 의미이지, 시간의 흐름을 전혀 지시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자연>은 단계적인 닮음에 의해 계열의 모델과 근거로서 존재자들 모두가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신이라는 최고항을 향해 나아가면서 진보적이거나 퇴행적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모방하는 존재자들의 사슬이라는 형식으로 고려된다.

"나아가면서 진보적이거나 퇴행적으로" -> 전진하거나 후퇴하면서 - P446

우리들로서는 이처럼 이질적인 것들 간에 나타나는 진화 형태를 "역행(involution)"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단 이 역행을 퇴행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되기는 역행적이며, 이 역행은 창조적이다. 퇴행한다는 것은 덜 분화된 것으로 향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선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할당가능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일을 가리킨다.

1. 역행 -> 엮임, 휘감김
2. 마지막 문장 (영어본, p. 239)
But to involve is to form a block that runs its own line "between" the terms in play and beneath assignable relations.
그러나 연루된다는 것은 서로 관계하는 항들 "사이에", 그리고 할당가능한 관계들 밑에 나있는 자신의 선을 달리면서 한 덩어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연루된다는 것은 복수의 항들이 한 덩어리가 된다는 것) -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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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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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0.

빼앗긴 자들(1974)(https://blog.aladin.co.kr/eroica/14627603)의 진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다. 그 책에서 주인공 셰벡은 원고를 다듬던 오도가 보이는 비전(vision)을 접한다. 나도 빼앗긴 자들을 쓰던 당시 르 귄의 모습과 생각이 궁금해서 작품 밖의 그녀가 보고 싶었고, 50년 전쯤에 쓰인 글들이 모여 있는 이 책을 통해 살짝이나마 본 것 같아 좋았다. 따뜻한 음색의 명료한 영어를 구사하는 지금 내 나이 또래의 똑똑한 백인 여성. 이 책에서 만난 르 귄은 그렇다. 원래부터 유명하지만 나는 몰랐던,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요즘 내게 르 귄이 그렇다.

 

1979년에 처음, 그리고 1989년에 다시 손봐서 출판된 책이다. 수록된 글들은 1973년부터 79년까지 출판된 에세이들이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https://blog.aladin.co.kr/eroica/13896013)1976~88년 시기에 쓰여진 글들의 모음이니, 그 책과 시기가 살짝 겹치면서도 약간 더 오래된 글들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생각하기에 따라 큰 흠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한국어판은 편집자 수잔 우드가 주제별로 배열한 순서를 해체하고 발표 연대순으로 글을 재배열해놓았다. “옮긴이의 말에서 이유를 밝혀놓았는데, 별로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1. 르 귄의 창작법과 예술론: “SF와 브라운 부인

르 귄이 좋은 글을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좋은 글을 아주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에세이에는 언제나 독서 이력이 진하게 묻어난다. 던세이니, 자먀친, 톨킨, 스타니스워프 렘, 필립 K. 딕 같은 판타지/SF 작가들뿐만 아니라,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D. H. 로렌스, 솔제니친 같은 소설가들, 카를 융 같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등장한다. 사실 나는 이들 모두에 대해 이름만 들어봤을 뿐 문외한이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만 약간의 정성을 더 기울여 르 귄이 다루는 울프 글을 읽어봤지만, 정작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아 공들인 것이 좀 아쉽다. “SF와 브라운 부인”(1975)은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1924)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 또는 업데이트다. 울프의 글은 100년 전 글이고, 르 귄의 글은 50년 전 글이다. 두 글 간에는 50년 정도의 격차가 있고, 르 귄이 “SF와 브라운 부인을 쓴 시점과 독자인 내가 그 글을 읽는 시점 사이에도 50년의 시차가 있다.

 

울프는 브라운 부인으로 상징되는 인물(character)에 대한 글을 썼다. 브라운 부인은 “Catch me, if you can!”을 외치고 사라지며 작가들에게 글을 쓰게 만든다. 르 귄은 그 글을 물고 늘어지면서 묻는다. “SF 작가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것은 바람직한 것일까?”(200). 르 귄에 따르면, SF는 오웰이나 헉슬리 등에 의해 1930년대에야 태동하였고, 1920년대 초에 그 글을 쓰던 울프는 SF의 존재를 몰랐다. 그리고는 넌지시 말한다. 판타지 문학은 브라운 부인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문학 분야라고, 판타지는 민담, 동화, 신화처럼 인물(character)이 아니라 원형(archetype)을 다룬다고 말이다. 그러나 곧 다시 반문한다.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본 나도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과 이름이 나온다. “프로도 배긴스!” 톨킨이 대단한 점은 프로도라는 하나의 캐릭터에 실제로는 너댓 원형들(archetypes)을 조합해낸 것이다. 프로도, , 골룸, 스미아골, 그리고 아마 빌보까지 다섯 개의 부분이 프로도라는 하나의 퍼스낼러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어서 SF 소설 두 작품(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D. G. 콤튼의 인조쾌락)의 사례를 들어 이제 SF에도 브라운 부인, 그러니까 캐릭터, 또는 우리가 따르며 사는 영혼(the spirit we live by)”이 존재함을 확언한다.

 

[“the spirit we live by”212쪽에서는 우리가 따르며 사는 영혼으로, 218쪽에서는 우리가 그 인도를 따르며 사는 영혼으로 다르게 번역된다. 갈라디아서 525절의 구절이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그러나 역자가 이 말이 울프의 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의 맨 마지막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한 것 같다. 알았다면 좀더 번역이 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건 그렇고, spirit영혼으로 옮겨도 되나?]

 

반지의 제왕이야기가 나올 때는 재미있었는데, 다른 SF를 몰라서 살짝 지루해졌다. 그런데 때마침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르 귄은 책에 대한 영감을 줄거리나 메시지의 형태가 아니라, 문득 보이는 사람의 모습, 사람이 있는 어떤 비전(vision)에서 얻는다고 한다(214).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람과 그가 있는 곳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사람을 보면, 그곳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르 귄은 빼앗긴 자들의 메인 캐릭터인 셰벡도 그렇게 보았다고 한다. 이 남자 물리학자의 모델은 젊은 시절의 로버트 오펜하이머란다. 원자폭탄 발명가. 때마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도 개봉 예정이다. 외모는 그렇게 보였다 한다. 그 다음은?



 

르 귄은 원래 이 이야기를 단편으로 썼다. 그런데 이것이 “30여년 작가 인생 최악의 작품, 정말 한심한 단편였다나... 이 단편을 발표했을까? 발표했다면 제목을 언급했을텐데, 그런 이야기는 없다. 어쨌든 그 실패작 단편에서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남자 물리학자 캐릭터가 르 귄에게 말한다. 아마 썩소를 날리면서 말했을 것이다. “Catch me, if you can.” 이때부터 르 귄의 캐릭터 잡기 = 둘 간의 대화 = 르 귄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상상이 시작된다.


르 귄: 이름이 뭐니?

셰벡: 셰벡. (이 때에야 비로소 이름이 지어진다.)

르 귄: 그래서 당신은 누구지?

셰벡: 글쎄... 아마도 유토피아의 시민?  


르 귄은 유토피아가 어떤 모습일까 알기 위해 여러 해에 걸쳐, 엥겔스, 마르크스, 폴 굿맨, 셸리, 크로포트킨을 읽는다. 셰벡과 대화하며 상상하는 과정은 아직은 캐릭터로 구현되지 않은 spiritlive by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르 귄에게 셰벡이 있는 곳, 그가 돌아갈 곳 등을 고민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사회와 세계에 대한 고민과 겹쳐 있다. “Catch me, if you can!”하며 달아나는 셰벡을 르 귄은 결국 잡아내서 빼앗긴 자들안에 온전히 담게 된다.

 

이쯤에서 끝나도 좋았을 글인데, 르 귄은 계속한다.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우리는 객체가 아닌 주체이며, 자연이라는 위대하고 궁극적인 객체도 오직 우리가 함께 해야 전부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베넷씨가 주체를 객체에 대한 묘사로 대체해버리려 했다는 울프의 비판에 동참하면서, 르 귄은 베넷식의 소설작법뿐만 아니라, 현대 심리소설’,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 당시의 대중적 SF를 싸잡아 비판한다. 곧 이들은 신 흉내를 내면서 불편부당함을 강조하는 과학자들처럼 주체의 경험을 무시하는데, 이는 비전(vision)을 재생산해야 한다는 예술가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라고 강도높게 비판한다(230, 그런데 번역이 잘못되어 있어 이런 말인지 알기 힘들다).

 

르 귄은 픽션의 매력을 언제나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찾는다(231). 시와 음악과 달리, 픽션은 초월, 곧 이해(understanding)를 건너뛴 평화를 줄 수 없다. 픽션의 본질은 바로 진창(muddle)이다. 진창은 흐느적거리며 유연하고,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무언가가 새롭게 생겨나는 진흙탕이 바로 소설인 것이다. 소설은 거짓 희망이 아닌 진실한 희망을 주며, 빵은 아니지만 우리가 의지해 살아갈 대상”(what we live by)을 준다. 그리고 브라운 부인이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을 약속한다.

 

이 글 “SF와 브라운 부인은 르 귄의 판타지처럼 글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다(74, 125). 버지니아 울프에서 출발해서 톨킨과 다른 SF를 거쳐서 자신의 빼앗긴 자들, 그리고 다시 애초에 울프의 글로 돌아가서 멋진 마무리를 짓는다. 그러나 이 글을 쓰던 당시 르 귄은 몰랐을 것이다. 이 마지막 부분에 그녀가 남긴 실의 형상(string figure)이 도나 해러웨이라는 걸출한 생물학자이자 SF 팬에게 넘어가 트러블과 함께 하기라는 흥미로운 저작이 태어나는 진창 역할을 하게 될지를. 마치 1923베넷씨와 브라운 부인을 쓰고 있던 울프의 실이 50년 후 르 귄에게 넘어가 새로운 형상의 실뜨기 모습으로 릴레이되리라는 것을 울프가 몰랐듯이.

 

2. 판타지는 밤의 언어로 말한다.

르 귄의 책을 읽을 때에는 그것이 소설이 아닌 에세이집이라 해도 제목에 상당히 신경이 쓰인다. “밤의 언어”? 무슨 말일까? 영어책 맨 앞에 실린 수잔 우드의 Introduction은 한국어판에서는 책 뒤에 실린 해설이다. 어쨌든 우드의 그 글은 르 귄이 1976년에 발표한 에세이의 한 구절을 제사(題詞)로 택한다. “... 판타지는 시처럼 밤의 언어로 말한다.” 르 귄은 일단 출판한 글을 다시 손대는 일을 타부로 생각했지만(6), 그녀의 팬이 편집자가 되어, 자신의 수많은 글들을 추리고, 그 중에 나오는 멋진 말 밤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night)”를 콕 집어 제목으로 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밤의 언어란 무엇인가? 먼저 우드의 요약에 따르면, 꿈은 말이 아닌 이미지(nonverbal images)로 되어 있는데, 의식의 정신(conscious mind)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꿈이 단어-상징(word-symbols)으로 번역되어야 한다(362). 그래서 우드는 이 책의 핵심어로 번역을 꼽는다. 실제로 르 귄은 아이와 그림자”(1974)에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한 훌륭한 비평(130~131)을 제시하는데, 바로 이것이 밤의 언어를 낮의 언어로, 직관적인 과정을 이해가능한 언어-상징으로 번역한 것이다.

 

르 귄은 밤의 언어를 낮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에도 능하지만, 밤의 언어로 창작하는 것에 더 능한 이이다. 르 귄의 출중한 밤의 언어 구사 능력에는 칼 구스타프 융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 르 귄이 융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얼핏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난 융을 모르고, 사실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르 귄은 내게 융의 매력을 제대로 알려주었다. 좀처럼 하지 않는 일인 것 같은데, 르 귄은 아주 친절히 융을 독자에게 설명해준다.

 

융 이론의 핵심은 자아ego는 더 큰 자기self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합적인 것이며, 모든 인류, 어쩌면 모든 생명체와 공유하는 것, 어쩌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로의 연결 고리이다. 곧 자기는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으로서, 이 안에서 우리 모두가 만난다. 곧 진정한 공동체의 근원이다(121). 이 곳에 가는 방법은? 융은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라고 말한다. 그림자는 인간 의식의 그늘 속 형제, 카인, 칼리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하이드 씨, 골룸, 도플갱어다. 의식에 의해서 부정당한 자신의 일부분. 그러나 그림자는 단순히 열등하고, 원시적이고, 서투르고, 짐승 같고, 아이 같은 악한 존재가 아니라, 강인하고, 생명력 넘치고, 즉홍적이다. 막 사춘기를 벗어난 젊은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총체적인 악으로 취급하곤 하지만, 결국 그것 역시 자신의 일부라고 인정해야 자기비하와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면 그림자는 그에게 안내자가 된다. 판타지는 그 그림자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여행자가 그 여행을 통해 바뀌는 여행(74, 128, 188).


자기라는 집단 무의식의 존재가 바로 인간의 소통가능성을 보장한다. 아마도 이것이 프로이트와 융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내 속에서 자아(ego)id, superego와 겹쳐 있다는 프로이트 이야기는 이제 좀 지겹다. 융은 저마다의 자아가 그 깊은 곳에 최소공통분모(the lowest common denominator), mass mind[120,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라 그런지 역자가 번역을 안 했다]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다 같은 인간이고, 같은 우주의 부분이다. 이 말은 당신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바로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르 귄은 이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정리한다.


예술가는 타인의 내면에 닿으려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 자신의 내면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갈수록 타인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188).


역설적으로 들리는 이 말이 가능한 것은 바로 융이 말하는 자기, 곧 집단 무의식의 존재 때문이다.


책꽂이나 텔레비전에서 살아 있는 원형(archetype)을 찾을 수는 없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인류 공통의 마음 속 어둠에 도사린, 개인성의 핵심에서 말이다”(189).

타인은 (사르트르처럼) 지옥이 아니라 구원이다”(254).

르 귄의 판타지가 성공한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르 귄이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그녀의 독자를 포함한 인류의 집단 무의식, 곧 자기에 잘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 경험을 다른 이들의 내면에 맞닿아 있는 밤의 언어로 뛰어나게 형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3. 나의 그림자

처음 아이와 그림자”(1974)를 읽으면서는 <악귀>머리를 풀어헤친 그림자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그림자가 나오는 장이 떠올랐다. 한국과 서양은 그림자에 대한 의미 부여가 좀 다른 것 같다. 프로도의 골룸, 나의 또 다른 나.

 

그림자는 평상시 잊고 지내던 과거의 나의 어떤 모습을 투사한 것이다. 아니 반대로 투사하기를 거부하려는 것, 투사되지 않고 안에 남은 불편함의 응어리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가끔 꾸게 되는 힘든 꿈. 보통 나는 그 꿈이라는 직관의 과정을 번역하지 않는다. 아니, 번역을 거부한다. 그리고 나는 잊었다 말한다. 그랬다. 조금 더 어른이 되면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려고 할까? 그러면 뭐가 좀더 좋을까?

 

공상은 이어진다. 그래. 나에게도 그림자가 있다. 밤에 이대로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다. 날씨가 좀 좋아져서 밤에 걷기 좋을 때쯤 그림자랑 대화를 한 번 해봐야 하겠다. 낮으로 넘어온다.

 

4. 쉬었다 계속하는 꼬리물기처럼...

베넷 부인이 버지니아 울프에게, 꺽다리 물리학자가 어슐러 르 귄에게 말했다. “Catch me, if you can!”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처음에는 순진한 호기심에, 그 후에는 오기도 생기고 재미도 있어 그 캐릭터 꼬리물기를 계속한다. 창작자가 아닌 나는 덕질하는 팬의 마음으로 르 귄의 꼬리물기를 계속한다. 여기에만 탐닉하면 안 될 것 같아 강도와 속도 조절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내가 따라가던 르 귄은 트릭스터처럼 모습을 바꾼다. 바로 나의 그림자로... ... 이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란... 내가 따라가던 것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따라가던 나도 달라진다. 책장을 덮은 나는 책을 읽으려고 첫 장을 읽던 나와 달라져 있다


어슐라, 이번에도 재미있었어요. 당분간은 못 와요. 다나 해러웨이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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