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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과 종이 만날 때 - 복수종들의 정치 ㅣ 아우또노미아총서 80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갈무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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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힘들게 읽었다. 그런데 공들인 만큼 얻은 것은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이전에 읽은 해러웨이의 글들 - 두 선언문, 『트러블과 함께 하기』, “상황적 지식” -만큼의 감동이 없다. 이제 조금은 해러웨이의 글쓰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고생한 만큼의 보람은 없는 읽기였다. 좀 지친다. 리뷰를 쓰기로 한 것은 나의 이 아쉬움의 실체가 무엇일지 생각해보기 위함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보통 논평은 그 평을 듣는 작자의 마음을 고려해, 혹평의 경우는 처음에는 미덕을, 찬사의 경우는 앞에서 아쉬운 점을 먼저 이야기하고 나중에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을 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작자의 마음을 고려하기보다 해러웨이에 대한 내 마음이 급격히 식는 것을 막아보기 위해서 그나마 좋았던 점을 먼저 써보고자 한다. 근데 좀 한참 생각해야 할 것 같다.
1. 그나마 있는 미덕들
미덕을 꼽자면, 무엇보다도 이전의 글에 나왔던 캐릭터들(characters)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의 반가움과 익숙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등장인물이라고 썼다 지우고 캐릭터라고 썼다. 이제 character를 “등장인물”로 번역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적 편견이 반영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크리터(critter)를 조금은 더 잘 알게 된다는 것. 이전의 글에 잠시 얼굴을 비추었던 이들 – 해러웨이의 아버지, 남편, 카옌, 롤랜드, 나바호-추로양, 개 훈련사 비키 헌, 믹소트리카 파라독사 등 –의 이야기가 이전 에피소드의 전편(prequel)과 속편(sequel)을 제공해준다.
각 캐릭터는 혼자 등장하지 않고 언제나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들의 형상(figure)으로 등장한다. 해러웨이는 이 형상을 “복수의 신체들과 의미들이 서로를 형성하는 물질-기호론적 결절점 내지는 매듭”으로 규정한다(13). 이렇게 적고 보니, 정말 좋은 서술이다. 이 형상은 언제나 몇 개의 것들이 얽혀 있는 모습이며, 어떤 서사(narrative)를 통해 상호작용 또는 “내부작용”하는 그 얽혀 있는 것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며 그들을 함께 형성한다. 그 형상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에 위치지어져 있다(situated).
해러웨이의 논의를 잘 따라가려면, 이 형상, 내부작용하는 몸들, 그것들이 공구성하는 세계, 의미, 그것이 처해져 있는 상황을 잘 파악하면 된다.
2. 종과 종이 내부작용하는 형상들
이 책은 바로 서로 다른 종들이 몸을 함께 휘감고 얽히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들에 대한 서술이다. 형상들을 책에 나오는 순서대로 한 번 꼽아보자. 짐의 개와 레오나르도의 개(15), 통신장비를 단 암컷 늑대(24), 카옌과 도나, 데리다와 고양이, 스머츠와 개코원숭이, 위아래로 겹쳐 있는 거북이(48-49), 혈우병 걸린 개(77-78), 감옥 수형자와 개(82), 기니피그와 체체파리와 바바 조셉(91), 앙코마우스(99), C. A. 샤프와 오씨 커뮤니티(138~169), 간질 걸린 개(161), 프랭크 해러웨이와 목발(6장), 어질리티하는 인간과 개들(7, 8장), 크리터캠을 장착한 바다 동물(9장), 구조된 길고양이(341), 북쪽털코웜뱃(northern hairy-nosed wombat), 믹소트리카 파라독사(352), <(앉아있는) 제임스>(358), 태반 먹기, 멧돼지 바베큐 등...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잠재적 애독자라면 아마도 여기에 제시된 형상들의 상황에 어떤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위의 형상들에 사실 별 흥미가 없다. 억지로 꼽자면 멧돼지 바베큐 정도? ㅋㅋ 혹시나 이 책을 읽을까 말까 하는 사람이 이 리뷰를 읽는다면 위의 형상들에 자신이 얼마나 흥미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독서 개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개와 매일 산책을 하거나 길고양이를 사랑하면, 또는 실험실에서 동물을 다루는 일을 한다면 좀더 관심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해러웨이는 맑스의 잉여가치이론이나 푸코의 생명정치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자신과 자신의 개가 처한 구체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새로운 이론화를 시도한다. 맑스의 『자본』은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에 완전히 통합된 개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부적절하고,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이나 『성의 역사』도 개의 신체 규율과 생명의 통제·조절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맑스와 푸코의 통찰을 자신과 개의 상황에 맞게 가공하여 『생명자본』과 『개집의 탄생』을 쓰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 『종과 종이 만날 때』는 그러한 의도가 “돌연변이된 알”이라고 한다(79). 같은 맥락에서 시드니 민츠의 『설탕과 권력』도 “설탕의 공생발생적인 자연문화를 상세히 탐구”하고 있지만, “민츠의 인류학이 가진 휴머니즘적인 프레임 때문에 다른 많은 생명체들(과 다른 비인간들)이 적극적으로 거기에서 관계되고 있는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고 평한다(450).
그런데 이게 이론화냐? 아니다. 이론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그냥 조크(joke) 같다. 좀더 진지하게 제대로 쓰던가 아니면 아예 출판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실 맑스와 푸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기대했다. 그리고 실망했다. 나머지 나오는 여러 형상들... 특히 해러웨이가 열심히 참여하는 개 커뮤니티 이야기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내가 이 바쁜 와중에 도대체 왜 이런 책을 읽고 있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이론화라면 좀더 엄밀해야 했고, 조크라면 좀더 재미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개나 고양이를 키운다면 이 책이 재미있을까? 글쎄... 반려종과 함께 산다고 해러웨이를 좋아하라는 법도 없고, 해러웨이가 불만족스러워 하는 맑스, 푸코,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러웨이 말을 알아듣고 말고는 그 다음 문제일 것이다.
3. 해러웨이의 동맹자들
비판대상이 있다면 동맹자도 있다. 해러웨이의 다른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와 빵을 함께 먹는 관계인 동맹자들이 등장한다. 거의 매번 등장하는 마굴리스, 라투르, 배러드, 스탕제르 이야기가 되풀이된다. 가장 의외의 인물은 데리다였다(1장). C. A. 샤프에 대한 4장은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 종에 대한 의학적 진실이 어떠한 네트워크 확장과정과 함께 생산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내가 읽은 해러웨이의 글 중에 라투르의 ANT 접근방식을 가장 충실히 구현한 글인 것 같다. 캐런 배러드의 “내부-작용(intra-action)”과 이사벨 스탕제르의 “코스모폴리틱스”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이 중에서는 스탕제르 이야기가 좀더 궁금하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찾아봐야 하겠다.
4. 후주
난 후주(endnote)보다 각주(footnote)를 선호한다. 그런데 해러웨이의 책은 영어로 나온 책들도 다 후주를 달아놓았다. 해러웨이의 어떤 주는 매우 전문적이고 장황해서 각주로 두기가 좀 힘들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본문 읽다가 후주 찾아 읽다가 다시 본문으로 오는 게 참 쉽지 않다. 더구나 영어책이랑 같이 볼 때 이 수고는 두 배 이상이다. 그런데 또 막상 후주 내용이 쌈박하거나 그렇지도 않다. 아마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불만을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다(371).
5. 맺으며
아무튼 난 이 책이 별로였다. 절판되었던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황희선, 임옥희 옮김, 아르테)가 새로운 번역으로 곧 출판 예정이다. 오늘날의 해러웨이를 있게 한 “사이보그 선언”과 “상황적 지식”이 실려 있는 훌륭한 책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옮긴이 중 한 분은 『해러웨이 선언문』의 번역자기도 하다. 난 그 번역자를 신뢰한다. 그러나 난 올해 더 이상 해러웨이를 읽지 않겠다.
해러웨이는 내게 라투르와는 다른 하이브리디즘의 가능성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정말 고맙게도 르 귄을 알게 해준 사람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에서 르 귄은 안 보인다. 책 한 권 읽고 실망했다고 손절하거나 그럴 일은 없다. 미심쩍은 번역은 따로 정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