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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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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밀착형 사회학 보고서 『독신의 오후』, 부제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우리는 누구나 독신으로 세상에 왔고, 단독자로 세상을 떠나야 한다. 한때 누구나 독신이었고, 원하든 부정하든 언젠가는 누구나 독신이 될 수 있는 운명에 처해있다. 과정이 무엇으로 채워지든 본질적인 인간 존재 조건의 평등함을 생각하면 인생을 메타적으로 바라볼 힘이 생긴다. 외국 영화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던 싱글 라이프가 흔한 삶이 되었다. 90년대 초반 방송국 PD들이 대가족으로 드라마를 만들면 배우 출연료가 너무 많이 나가서, 주인공 혼자 사는 드라마를 만든다고 농담처럼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미 1인 가구의 증가는 하나의 사회 현상의 전조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신 이야기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어떻게 관계 맺고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것인지가 독신의 오후를 결정한다. 신간『독신의 오후』를 읽으면서 무수한 영화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 또한 살아온 세월만큼, 많은 탄생과 죽음을 목도한다. 생각하지 못한 이유로 많은 지인들이 세상을 등졌고, 그들은 내게 인생교과서로 남아 있다. 종교, 성격, (정치적, 경제적) 조건에 따라서 불가피한 독신을 견뎌내는 힘과 방법에서 현격한 개인차가 존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 작인 영화 ‘환상의 빛’(1995)은 남편이 자살한 원인을 모르는 채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감독은 소소한 일상에 포커스를 맞추고, 사사로운 개인적 경험이 차원 높은 세계와 마주할 수 있도록 여백을 만들어 간다. 혼자되었으나 또 다른 삶과 관계가 기다리고 있다. 단 과거 남편에 대한 기억과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 한켠에 평생 머무르면서 환상의 빛이 된다.

 

허안화의 ‘심플 라이프’(2012)는 4대에 걸쳐 남의 집 일을 해주다가 요양원으로 옮겨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심플하게 다루고 있다. 정결한 한 여성이 요양원이라는 낯선 공간과 그곳 사람들에게 적응해가는 과정 또한 하나의 삶으로 자리한다. 가족은 ‘피’가 아니라, ‘추억의 공유’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독신의 오후』는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나 저자의 사적 경험을 주관적으로 늘어놓은 책이 아니다. 적어도 ‘생활밀착형 사회학 보고서’라는 것이 내 개인적인 평가다. 양적 자료와 데이터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독신 남성이 증가하는 원인, 세태, 향후 진행 방향과 대안 제시에 대한 저자의 혜안에서 평생 사회학자로 살아온 내공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초고령화가 진행 중인 동아시아”라는 공통점을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경제의 호황이 끝났다는 점에서, 국가에 기대할 것이 별로 없는 신자유주의에서 개인의 ‘노후’는 각자의 책임으로 남는다.

 

 “남자의 ‘불편’과 여자의 ‘불안’의 결합” - 결혼의 변화

 

나의 전공은 ‘사회학’이고, 현재 독신이다. 다행히 경제적인 ‘불안’을 해결하는 수준의 업(業)이 있고, 결혼을 통해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이 해결될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미래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적어도 향후 수십년의 삶이 ‘인간적’일 것이라는 희망도 없다. 삶을 최소화하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준에서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 페미니스트 작가 산드라 시스네로스의 『망고 스트리트』(2008.7)를 읽으면서 내가 왜 독신을 선택했는지 공감했다. 망고 스트리트의 나의 집은 한 여성이 오직 자신만을 위한 (심적, 물리적 공간으로서) ‘나의 집’을 꿈꾸게 한 유년의 공간이다. 우리에게 나만을 위한 실내화와 내가 어질러 놓은 상태 그대로 나를 기다리는 집이 필요하다. 엄마의 자궁과 같은 집이 필요했던 작가의 어린 시절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노력과 수양을 감히 짐작해보지만, 혼자 산다는 것 역시 끝없는 자기 수양과 성장을 요구한다. 독신은 “자기만의 시간”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않으면 타인들의 일을 대신해주고 고민을 처리해주는 쓰레기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직장, 가족의 시간이 아닌 나의 시간으로 부자라는 저자의 이야기에 동의한다. 싱글은 적절하게 시간 활용을 분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신’에 대한 편견은 내 주변 곳곳에서 나타난다. 같은 학문을 공부해도, 살아온 이력은 학문의 영역에 그대로 반영된다.

 

사례 1.회식

 

모두 무난한 결혼으로 중산층에 진입한 대학원생들(모두 여성이었음), 나만 독신.

 

그녀들 중 한 분이 말씀하셨다.

   그녀 : “나는 노처녀들이 영양제 챙겨 먹는 걸 보면,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심이 느껴진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노처녀는

             좋은 선생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그 이야기를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독신녀 (나)

    나 :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는 독립변인이 어디 ‘결혼’ 하나인가요? 신념, 성격, 교육제도, 교육과정, 사회적 조건 등등

           많은 것들이 영향을 미치죠. 저는 가족주의가 이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시 그분들의 공격

  그녀 : “저거 봐. 별거 아닌 걸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노처녀는 어쩔 수 없어.”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예민하고 까다로운 독신녀들에게 정 떨어졌던 각자의 경험을 일반화했을 뿐, 그녀들에게 악의는 없었다.

 

사례2. 신입생 환영회

 

겸양지덕을 겸비한 듯한 외양을 갖춘 중년의 대학원 신입생. 서로 알아가자는 의미의 Q&A 시간, 내 차례가 되었다.

    나 : “결혼 안하셨죠?”

    신입 : “어머. 제가 그렇게 능력 없어 보이세요? 저 꽤 괜찮은 남자랑 살아요.”

    나 : “네에. 저는 능력 있어 보이셔서 결혼 안하셨냐고 물었어요. 제가 결혼 안했거든요.”

 

이렇게 적고 보니 나도 만만찮게 따지기 좋아하고, 지기주장 굽히지 않는 ‘독신’임에 틀림없다.

 

사례3. 나의 지인(知人)들

 

    지인 : “뭐하나 부족한 게 없는데, 왜 결혼을 못하냐? 결혼만 하면 딱 좋을텐데.”

    나 : 나의 삶은 결혼하는 순간 180도 달라져. 이건 결혼을 안했기 때문에 가능한 삶이야.

   

이 사례들을 나열한 까닭은 결혼 유무 보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자기 배려의 윤리를 실현하는 삶을 사는 것, 조건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태도’가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조건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선택지는 ‘어떻게 반응’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남성 독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최선의 매뉴얼을 제공한다. 다소 저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으나, 저자의 진정성은 후기에 적힌 다음 이야기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은 결코 냉담하지도 매몰차지도 않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아내에게서는 “자, 당신 홀로 남겨두고 가지만 안심하고 떠나요.”라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고, 이혼한 전처에게서도 “당신 낯짝 따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아.” 같은 미움 대신에 “아이들 아버지로서 좋은 관계를 이어나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으면 싶다. ‘노처녀들’ 앞에도 매력 있는 남성들이 많이 나타나주었으면 좋겠다,“(295쪽)

 

‘독신 삶’의 질에는 철저히 남녀 차이가 존재한다. 결혼 이주여성의 증가가 그 예가 될 것이다. 여성 중에는 선택적 독신이 제법 존재하지만, 남성중에는 불가피한 독신이 훨씬 많다. 불가피한 독신이라 할지라도 행복을 유보할 수는 없다.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한 노력과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독신의 오후』는 그러한 고민을 풀어가기에 적절한 교재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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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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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 아닌 실천을 위한 (별을 바라보는) 하녀의 철학,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지음, 메디치미디어, 2014.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포스트모더니즘이 뜨거웠던 1990년대 후반, 현란한 언어로 포장된 경구로만 읽히던 니체를 제대로 읽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교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여섯 명의 스터디 멤버에게 니체는 탈근대를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거대한 산이었다. 『도덕의 계보학』,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즐거운 학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읽으면서도 니체 철학의 근간을 세우는 것이 우리에게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해석을 요구하는 니체 철학은 오독의 오독을 반복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보내던 시간이 꽤 흐른 후, 어둠에서 발견한 한줄기 빛이 고병권 선생님이 번역한 『한권으로 읽는 니체』였다. 그 이후 『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은 니체 원전을 읽을 때 옆에 두고 참조해야 하는 귀중한 책이었다.

 

                  

 

 

 

‘수유 너머’에서 잠시 뵈었던 고병권은 시간을 넘나들고, 공간을 변형하는 트랜스포머였다. 호모쿵푸스로 살아가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수유 너머는 공동체 운영의 방식을 벤치마킹할 수 있는 실험적인 공간이었다.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윤리적인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연구실이었다. 그곳에서 (거의 훔쳐보는 것에 가까웠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고병권 선생님은 젊은 철학자였으나,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무겁고 깊고 강직했다. 선생님의 역서와 저서를 통해서 니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만 겨우 전했을 뿐,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나, 젊은 철학자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의 책이 출판되면 빼놓지 않고 구해 읽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토록 멋진 철학자가 있다는 것에 위로 받으며 『철학자와 하녀』를 아주 천천히 읽었다. 때마침 만난 복음서와 같은 다소 격앙된 마음으로, 심장이 밑줄 긋게 하는 글들 행간에서 아주 오래 머무르며 이 책을 읽었다. 고병권의 글은 죽비가 되어 독자의 등을 내려친다.

 

 

별을 보는 철학자, 생계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녀, 그 둘이 바라보는 세계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넘나들 수 없는 경계를 이룬다. 저자는 하녀가 별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이 땅의 최소수혜자에게 철학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사회의 부품으로 순종하기를 강요하는 명령들에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 수 있는 힘이 철학에서 나올 것으로 믿는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인생을 전후로 가르는 큰 일을 치룬 지인의 여전한 모습을 보면서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지인께서는 십수년 동안 철학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특별한 목적을 두지 않았던 무사무욕적인 공부는 선생님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나 또한 힘든 시기의 초조함을 극복하기 위한 바탕을 만들어준 것이 니체와 함께 한 세월의 힘이었다. 내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만 갖게 된다면 벗은 시공을 초월해서 어디에서든 구할 수 있다. 나와 같이 비혼(非婚)을 선택한 사람들이 모이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사소한 사건 하나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예민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주적인 차원의 고민을 하는 것이 싱글의 삶이라고. 내 아이와 가족에 갇혀서 세상을 보지 않으므로 사해동포주의를 발휘하게 될 때가 참으로 많으면서도 성찰의 성찰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몽상가들이 많다.

 

“철학은 지옥에서 하는 것, 배움 이전에 배움이 일어난다.”

 

천국에서는 고민할 게 별로 없다. 선택하는 순간과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우리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시작한다.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공부”는 박학다식해 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애초에 답이 따로 잊지 않기 때문에 깨닫는 과정의 연속이다. 타자의 가치와 기준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면 항상 초조하다. 초조한 사람은 현재를 충분히 즐길 수 없다. 사다리는 오르고 올라도 정상이 없으니, 상승만을 향해 질주해야 한다.

 

“노파나 노인에게서 원숙미 같은 것을 보고, 아이들의 매력을 순결한 눈으로 본다.”(45쪽) 『무지한 스승』의 인용 글을 통해 저자는 선생은 가르칠 수 없어도 학생은 배울 수 있음을 언급한다. 학교는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배우는 곳이다. 세상은 배움의 수련장이고, 스승이 따로 없이 배움은 누구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능력이 불평등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 또한 새겨볼만하다.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3장에서는 “사물과 사람이 맺는 각별한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십삼 년 동안 탔던 자동차와 이별했다. 오래 탄만큼 잔고장이 많아서 경제적으로 손해가 커지면서 어쩔 수 없이 보낼 수밖에 없었다. 폐차 값도 안나온다는 반협박으로 차 값도 거의 받지 않고 팔았다. 그 이별의 마음은 인간의 이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힘든 주인 만나서 고생 많았을텐데, 이후에라도 다른 곳으로 팔려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맘이 들었다. 자동차는 혼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십여 년 동안 내가 겪었던 무수한 일에서 발생했던 나의 만 가지 감정을 다 알고 있는 사물이었다. 그러니 애완견과 가족이 되는 것인들 이해 못할 이유가 되겠는가? 그 이후에는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게 될 터이므로, 물건을 집에 들이는 일에도 여러 번 고민하고 결정했다. 사랑하는 것에 대체물은 없다. 사랑을 잃고 나면 그 슬픔은 내 안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불쑥 불쑥 밖으로 뛰쳐나온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각자의 자리가 있는 법이다.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루쉰의 글에서 힘을 얻었을 수 있었다. 좀 더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무수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랑귀처럼 타인의 평판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더러 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견뎌내지 못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데 무수한 이유가 있다고. 손익을 따져야하는 관계 때문일 수도 있고, 무엇을 유능하게 해내거나, 무능하기 때문일 때도 있다. 하다못해 과거에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한 사람과 닮았다는 이유로 싫어지기도 한다. 그 모든 것에 예민하게 굴다보면 옳은 소리를 낼 수 없을 때가 많아진다. 상당히(?) 많은 적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견뎌낼 때만 좀 더 윤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삶에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꿇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149쪽).

 

얼마 전 직장에서 함께 해결해야 할 숙제가 주어졌다. 직원들이 한동안 숙직과 야근을 책임져야하는 상황이었는데, 결정권은 남자 직원들에게 달려 있는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남자 직원들은 남녀평등 차원에서 함께 숙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몇몇 남자 직원은 남자 직원이 숙직을, 아이들이 있는 여직원이 야근을 맡아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남성의 배려 차원이었고, 여직원은 구차하게 그들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회의 분위기는 살벌했고,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 회의 바로 직전에 우리 모두 다문화연수 30시간을 함께 받았다는 것이다. 그 연수를 통해서 각 지역과 민족의 문화에 대하여 알게 되기는 했으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각성의 단초를 마련한 연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동안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대화가 오가기도 했는데, 그것은 단지 지식과 정보 수준이었다. 이해타산으로 굳어진 철옹성의 이기심에는 바늘 하나 뚫고 들어갈 구멍이 없었다. 앎과 삶이 정확히 분리되는 지점이었다. 그때 나는 『철학자와 하녀』를 읽고 있었다. 부조리한 세상, 모순된 인간들, 그 세상 안의 하녀인 나는 문득 하늘의 별이 보고 싶어졌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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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4-07-25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숲님, 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아, 깊고도 울림이 있구나 감탄했어요.
그냥 서평단으로 쭉 달려오셨군요...
그동안 제가 너무 많은 무심을 저질렀어요....
알라딘에도 무심했고..(책도 거의 구입하지 않았고..) 숲님을 비롯한 몇 몇 분들께도 무심했어요..
다른 곳으로 방을 옮겨 간 것도 아니고 그냥 모든 게 시큰둥해지다보니.....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잊지는 않고 있어요..
다음에 또 만날 날이 오겠죠?
그동안 건필, 건강..^^

더불어숲 2014-08-06 12:40   좋아요 1 | URL
어서 돌아오세요...
서평단의 내 유일한 벗님!
그대 메인 대문의 글 때문에...마음 숨이 잠시 멈추었습니다.
이번 가을엔 꼭 함께 읽고, 감상을 나누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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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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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히틀러의 철학자들』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여름언덕, 2014. 5.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아주 사적인 단상 1.

 

폴란드 크라코프(Krakow)에 가본 적이 있다. “하루에 24계절이 있다.”는 유럽의 속담처럼 그해 여름, 오슈비엥침은 가을처럼 서늘했다. 원주민들이 크라코프는 항상 잿빛 하늘,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고 얘기했다. 오슈비엥침까지 남은 시간 동안 이른 점심을 먹지 않았다면,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오슈비엥침을 다녀와서는 물 한 모금 넘길 수가 없었다. 때마침 여름방학이었던 유대인 아이들이 곳곳에서 기도하고 통곡 섞인 추모곡을 불렀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중국 하얼빈의 731부대를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제주도로 현장 체험을 떠나는 동안, 유대 아이들 대부분은 국가가 제공하는 비용으로 2주 이상 오슈비엥침에 머물면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의무 교육과정이 있다고 한다. 문제는 제주도 조차 4.3 항쟁의 역사적 장소가 아닌 관광으로만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슈비엥침은 유럽의 중심으로 유대인, 부랑아, 장애인을 모아오기 가장 최적의 장소였다. 히틀러라는 미치광이 한 사람이 이루어낸 참사가 아니라, 유럽인, 세계인의 노골적 지지와 암묵적 동의를 통해서 이루어진 인류의 씻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아주 사적인 단상 2.

 

대학원에서 한 학기 동안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공부했다. 『존재와 시간』을 밑줄 그어 읽어가면서 탐독했던 시간은 지적으로 성장하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섬세하게 그의 철학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철학으로 들어가는 관문 하나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자기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dasein)로서 -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인 - 인간은 늘 새로운 상황 속에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언어에 대한 철학에 대한 이해 없이 푸코, 메를로 퐁티의 철학적 기반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생태주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하이데거를 읽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탈은폐성과 지배적 기술을 통해서 자연과 세계에 대한 존재를 해명한다. 탈은폐의 방식을 하이데거는 부품(Bestand)라고 이름하는데, 왜냐하면 "어디에서나 즉시 가까이 지정된 자리에 놓여 있어야 할 것이 요청되고 있으며, 그것도 그 자신 또 다른 어떤 요청에 의해 대비 상태에 있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이다. 현대기술이라는 새로운 계기는 용재성과 전재성과 나란히 부품성이라는 새로운 드러냄을 보인다. 자연을 부품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세계를 이처럼 부품으로 드러나도록 도발적으로 닦아세우는 담당자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 일을 하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동시에 자신도 마찬가지로 도발적으로 닦아세워지는 자이다. "인간이 그 편에서 이미 자연 에너지를 채굴해 내라는 도발적 요청을 받고 있는 한에서만 이러한 주문 청탁하는 탈은폐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하이데거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지도교수님은 나치의 정치적 도구로써 철학을 제공한 그의 과오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이데거를 공부하지 않고 실존주의를 이해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특별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미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이광수, 이효석, 서정주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이다.

 

아주 사적인 단상 3.

 

학회에서 가끔 보았던 사회학 전공 교수님. 미국 유학 이후 대학을 자리를 잡은 젊은 교수는 학회의 중심에 있었다. 사회학에서 진보는 부르디외식으로 보면 크나큰 상징자본이 될 수도 있고, 그 학문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 삶의 궤적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사회학은 법학, 의학, 경제학과는 다르다. 학문과 실천이 불일치하는 순간, 그의 연구 성과 모두 거짓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섦과 동시에 인수위원회에 들어가서 이전에 그가 연구한 것과 다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이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세태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내가 옆에서 지켜보던 분의 변절을 보는 것은 학문한다는 것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부의 힘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신간 『히틀러의 철학자』는 그동안 당연하게 공부한 철학이 히틀러의 정치적 도구로써 어떻게 복무했는지 철저하게 규명하고 있다. “나치 입문서는 권위적이다. … 어느 한 개인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결과물이다(131쪽).” 그가 명명하고 있는 ‘히틀러의 철학자’는 홀로코스트 시기 히틀러 주변의 철학자를 통칭한다. 칸트에서 니체, 알프레드 보임러에서 마르틴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에서 발터 벤야민에 이르는 철학자들은 모두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고민했으며 이들의 삶은 서로 연관성이 많았다. 즉 그들은 학생이었고, 교사였고 동료였고 친구였으며 심지어 연인이기도 했다(7쪽).

성실한 사람일수록 나치 복무 역시 더욱 성실했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의 전범 아돌프 아히히만의 재판을 다루고 있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하고 있듯이 악의 평범성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악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니체주의자의 변명

 

니체를 공부하다 보면, 니체철학의 어떤 부분이 히틀러를 매료시켰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의지를 실현하는 위버멘쉬(초인), 끝없이 새롭게 변주되는 영원회귀, 연민과 약함에 대한 부정은 히틀러의 게르만민족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논리로 악용되었다. 인간을 벌주고 시험에 들게 하는 신(神)을 부정한 니체의 당시 기독교에 대한 혐오에 히틀러는 매료되었다. 사실 종교는 믿음이기도 하지만, 태도라고 했을 때, 니체가 부정한 신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신이었다. 니체는 예수에 대해서 최고의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천재라는 술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천재라는 술을 섞는 바텐더에 가까웠다.(57쪽).”는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의 말처럼 니체철학은 히틀러에 의해서 오인된 희생양이다.

 

『히틀러의 철학자』은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철학을 조금이라도 읽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접했을 만한 하이데거, 아렌트, 벤야민, 아도르노 등이 책의 핵심에 등장한다. 역사적 기록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 중심의 구성은 소설을 읽는 듯한 편안함을 준다. 그러나 편안한 자세에서도 편안하게 읽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곧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전범(戰犯) 처벌에서도 하이데거 사상은 살아남았다. 전쟁 이후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의 축적된 의학은 미국으로 넘어 갔고, 전쟁은 마취학을 비롯해 20세기 지식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철학이 윤리적 기준을 세우지 못하면 어떤 학문이 그러한 기준을 세우겠는가?’

 

저자 이본 셰라트의 문제의식을 우리의 현재로 가져와야 한다. 윤리적 인간으로 진화하기를 거부한다면 인류가 만들어 놓은 문명과 종교가 소용될 일은 악을 평범하게 만드는 일 밖에는 없다. 2014년, 대한민국 국민은 세월 호 사건을 통해서 국가의 부재를 경험했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희생자 가족들과 시민의 요구를 의사자 대우나 세월 호 대학 특례 입학으로 물타기를 하는 현실 또한 답답하기만 하다. 『히틀러의 철학자』을 통해서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지침인 지식과 철학의 진정한 역할에 대하여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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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포도 7월입니다.

지난 달 추천한 고병권 선생님의 '철학자와 하녀' 를 받아들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담백한 글에 담긴 세상과 인간을 향한 진정성이라니요...

맑고 선한 - 동시대의 -  철학자의 정직한 글을 대면하는 기쁨은

정약용과 연암의 글을 읽을 때와 또다른 기쁨을 전해주었습니다.

읽는 내내 좋아서..여러권 구입해서 선물하고 나누기도 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 유목하듯 길 떠날 수도 있으나, 앉은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시공초월 여행. 독서보다 더 즐거운 여행은 없을 듯합니다.

신간을 뒤적이다 보니, 역시나 6월 보다는 7월에 쏟아진 책들이 양질에서 풍부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대사회는 책읽기 좋은 계절이 가을보다 여름인가 봅니다.

 

『젠더와 사회- 15개의 시선으로 읽는 여성과 남성』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동녘, 2014. 6.

 

 

 

 

 

 

 

 

 

 

 

 

 

 

성에 대한 이해는 자기중심을 벗어나기 어렵다. 퀴어 영화와 책들을 통한 간접 경험이 LGBTQ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지만, 성적 소수자의 입장에 설 수 없는 이성애자의 선입견이 여전하다는 것을 안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은 아무리 넓히고 넓혀도 자기중심적일 때가 태반이다. 예를 들어 게이,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는 나에게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또는 제 3자를 이해하는 방식과 나와 체온을 섞고 함께 세월을 만들어 온 사람일 경우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만들어진 성에 관한 국내 연구자 15명이 분석하였다고 하니, 한국적 토양에서 성적 소수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꼭 일독하고 싶은 책이다. 성 소수자 문제는 우리 사회 모든 불평등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사회를 말하는 사회 - 한국사회를 읽는 30개 키워드』 김민웅 외 지음, 북바이북, 2014. 6.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가 가진 부조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리트머스지였다.”

책 소개 글이 모든 것을 말하는 듯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 참사 속에는 한국 사회 끔찍한 부조리와 모순이 함축되어 있다. 이 사회에 대한 이해와 성찰 없이 다음은 존재할 수 없다. 다양한 이력의 저자들이 풀어내는 한국사회 키워드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나침반과 화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현대 정치철학의 테제들』, 연구모임 사회 비판과 대안 엮음, 사월의책, 2014. 6.

 

 

 

 

 

 

 

 

 

 

 

 

 

 

『현대 정치철학의 테제들』은 사회비판총서 3부작의 완간본이라고 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 포스모던 테제들, 그리고 현대 정치철학의 테제들이다. 롤즈의 정의론에 기반한 현대 영미철학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독해야 할 듯하다. 규범적 정치철학의 포문을 연 존 롤즈에서 출발하여 공동체주의자, 자유지상주의자, 실용주의자 등 8명의 사상가를 다룬다. 저자들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명암인 불평등의 문제에 천착해왔다고 한다.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4. 6.

 

 

 

 

 

 

 

 

 

 

 

 

 

 

 

우리나라에서 강준만 교수님처럼 읽고 쓰는 일을 고단하게 하는 분은 없을 것이다. 본인의 모든 에너지를 한국 사회를 이해와 성찰을 제공하는 저작활동에 쓰는 국보급 학자다. 매번 신간이 나올 때마다 추천하지만, 수 년 동안 한번도 신간평가단에서 선정되지 못했다. 어느 때가 위기가 아니었을까만은 2014년 한국 사회는 오래도록 세월호와 함께 기록될 것이기에 이번만큼은 왜 우리가 이렇게 사는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민해보고 싶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와 50개의 질문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밑 낯을 드러내고 성찰의 절절한 필요를 주장한다.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 최성만 지음, 길, 2014. 6.

 

 

 

 

 

 

 

 

 

 

 

 

 

 

 

여름휴가를 발터 벤야민과 함께 더없이 의미 있을 듯하다. 그가 파리를 외부자적 시선으로 관찰하였듯이 우리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지 않을까? 책은 크게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어도 읽어도 어려운 벤야민이지만, 그의 생애, 저작, 사상을 통사론적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다. 벤야민을 총체적으로, 텍스트 중심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추천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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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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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생각의 결을 바르게 다듬는 시간 『다산 정약용 평전』,

박석무, 민음사, 2014. 4.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다.”

 

다산 정약용의 평전을 읽는 시간은 나의 마음결을 고르게 하고, 생각의 결을 바르게 다듬는 시간이다. 다산은 75세의 인생을 회고하며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다.”라고 자신의 인생을 결론지었다. 평생을 다산 연구로 보내신 저자 박석무 선생님의 말씀처럼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큰 위인, 현자(賢者)로 대접받는 다산의 인생으로 보면 그의 판단이 옳았다(620쪽)고 생각할 수 있다. 한 평생 세파에 시달렸음에도,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품어낸 대가의 회고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을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나 모순 덩어리다. 세상은 항상 부조리하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번 생에서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아야 할 꽤 많은 명분이 있을 것이다. 다산의 삶과 철학을 읽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서 어떻게 윤리적 삶을 완성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자문자답 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생각을 정리하고, 불안한 삶을 지정시키기 위해서 상담 관련 책을 읽는 것보다 다산을 읽는 일이 내겐 훨씬 더 유용하다.

 

 

‘실천적’이라는 수식어가 정약용(1762~1836)에게 따라 붙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성정(性情)과 능력을 제대로 인지한 정조(1752~1836)가 없었더라면 다산이 자평했듯 “게으른 천성대로 놀면서(33쪽) 한평생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에 가정법이 있을 수 없지만,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정약용의 삶과 조선후기에 미칠 영향은 어떠했을까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정조와 함께했던 18년의 시간 동안 다산은 문리(文理)뿐 아니라 물리(物理)를 다루는 기술 관료로서 큰 역할을 해냈다. 그 시기 동안 다산은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축조하였다. 최고 권력자의 총애를 받았으나, 아첨하는 간신이 되지 않았다. 다산 없는 정조, 정조 없는 다산(287쪽)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 임금에 그 신하였고,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벗이기도 했다. 정조는 다산에 대하여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증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온축이 깊고 넓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겠는가(17쪽)”라고 평하였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 박석무 선생님께서 다산에 대하여 정확하게 정리하고 분석하는 일이 누군가 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고 하였으나, 독자로서 나는 박석무 선생님 이외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다산을 읽고 해석하고 성찰하면서 서슬퍼런 80년대를 군부통치를 견뎌낼 수 있었으리라. 저자는 다산의 일생을 수학기, 사환기(벼슬하던 시기), 유배기, 정리기(고향 생활)로 나누어 연대기적으로 서술한다. 제 3의 객관적 시선에서 나오는 중립이 허구라는 입장에 서서 보면 저자의 다산 편향이 책이 담고 있는 본질을 훼손할 만큼 치명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산의 그 자체도 큰 의미가 있으나, 타락하고 부패한 현실에 대한 고민의 윤리학과 방법론으로 다산을 새롭게 읽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와 다산과의 첫 만남을 주선한 것은 유홍준 선생님이셨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가 불을 지핀 남도 기행은 다산과의 포문이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유배지 해남, 강진을 떠도는 거리에서 길벗을 만나서, 18세기 학자를 현재로 불러와 자의적인 해석과 주석을 곁들이며 호기를 부리던 시절이 그립다. 그가 주장하는 토지 제도가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정약용 선생을 급진적 혁명가라고 여겼다. 다산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해주신 유홍준 선생님은 “다산에게 유배란 강요된 안식년”이라고 평하는 혹자들에게 『명작 순례』에서 다음과 같이 쐐기를 박았다. “그의 18년 귀양살이에는 비록 ‘강요된’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해도 감히 ‘안식년’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 정약용 선생에게 ‘안식년’이란 표현은 어마어마한 상징적 폭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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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취향이겠으나, 나는 다산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연암 박지원이 함께 떠오른다. 다산이 이성적이고 윤리적 규범의 실천가라면, 연암은 깨뜨릴 수 없는 천진과 해학으로 시대를 통찰한 18세기 학자다. 오래 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며 통곡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 선생님이 재해석한『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웃음과 우정으로 노마드 하는 연암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시대적 조건이 확연하게 다른 이백 여 년을 건너 뛰어 연암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에 감동하며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유머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고수하며 진정한 호모 쿵푸스로 살아간 그가 온몸으로 절절하게 느껴졌다. 연암이 누나가 죽고 난 다음에 누나를 회고하는 글을 읽으면서 그의 성정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세가 기울어 집안 식솔을 거느리고 화전민이 되어 떠나는 매형과 조카들을 보내면서 누나 시집가기 전날 밤을 떠올리는 연암에게서는 학자 이전에 사랑스런 어린 남동생의 모습 이외에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약용 선생이 자신을 키워준 형수가 죽고 쓴 시에서도 이와 같은 성정이 전해진다.

 

시어머니 섬기기 쉽지 않나니 / 계모인 시어머니는 더욱 어렵네

시아버지 섬기기 쉽지 않나니 / 아내 없는 시아버지는 더욱 어렵네

시동생 보살피기 쉽지 않나니 / 어머니 없는 시동생은 더욱 어렵네

이런 모든 일 유감없이 잘했으니 / 이게 바로 형수의 너그러움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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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배교(背敎)가 다산 비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언행일치를 한평생 실천한 다산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배교했을 거라고 판단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한때 천주교를 사모한 것도 사실이고, 순교한 정약종과 달리 -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를 신앙이 아닌 - 서양의 학문 영역으로 연구하게 된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퇴계의 학설이 옳다고 주장하는 남인이었던 정약용이 율곡의 학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단호히 언급한 것을 볼 때, 거짓된 것을 사실인 것으로 우회하여 피할 성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 해답은 다산이 남긴 오백여 권의 저서와 다산의 삶의 궤적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천주교야 말로 대공지정하고 지극히 진실한 도리(316쪽)”라고 주장하며 순교한 형 정약종, 학문적으로 뜻을 같이했으나, 귀양살이 낸 그리워만 하다 만나지 못하고 사별한 형 정약전에 대한 정약용의 형제지정을 가늠할 길이 없다. 다산은 “골육이 서로 싸워 자기 몸과 이름을 보존한 것과, 순순하게 받아들여 엎어지고 뒤집혀서라도 천륜에 부끄럼 없게 했음이 어찌 같을 것인가. 뒷세상에 그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319쪽)”고 회고했다. 형과 뜻을 같이 할 수 없었던 회한과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금 뒷세상에서 그의 선택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다산의 선택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불가항력의 자의적 선택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남긴 무수한 글을 통해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위대한 인물의 등장은 시대에 빚지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 시대의 질적 변화의 지점을 선점한 자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반면 예기치 않은 돌출로 혜성처럼 등장하는 위대한 위인도 있다. 나는 다산이 후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시대보다 너무 빨리 당도한 천재, 그 시대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포섭될 수 없었던 사람이기에 우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다산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 세상의 부패와 부조리를 맞서 자신의 규칙으로 자기 윤리를 실천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다산은 영원한 큰 스승임에 틀림없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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