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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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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림’이 아닌 ‘다름’, 반목이 아닌 평화의 관계의 가능성 『세 종교 이야기』

 

홍익희 지음, 행성:B 잎새, 2014. 8.

 


 

 

 

날라리 천주교 신자인 나는, 오늘 오전, 마주보고 앉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동료와 잠깐 종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해서는 안되는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 둘은 절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채, 팽팽한 평행선을 달렸다. 그녀의 질문은 내가 수십 년은 족히 들어 왔던 똑같은 질문이었다. 천주교는 유일신을 섬기지 않고, (마리아를 믿는 종교라는 표현까지 썼다.) 천주교의 성경은 기독교 성경과 다르다는 것이다. 중학교 세계사의 교과 지식을 곁들여 얘길 했더니, 종교는 지식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녀는 성당 주변에 가본적도 없고, 성당의 성경을 본 적도 없다. 워낙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그래왔던지라, 맘이 상하지는 않았다. 마무리는 내가 최근에 읽는 책이 홍익희 선생님이 쓴 『세 종교 이야기』인데, 종교인이든, 아니든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내가 사주지 않는 한, 그녀가 이 책을 가능성은 일단 1% 미만인 걸로 정리하자.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매력이 없을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들이 있다. 종교는 보편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지식과 관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종교인이 아니라면,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실 타종교의 교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종교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만, 종교 간에는 서로 다름이 존재할 뿐, 누가 맞고 틀린지를 가릴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동안 얽혀있는 종교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조금 다른 태도로 타종교를 수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세 종교의 역사에 대해서 나름 ‘상식’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렵지 않은 책이지만, 읽다보면 내 무지함을 구석구석에서 발견한다. 고전은 읽지 않았지만, 읽은 것 같은 책이라는 우스게 소리가 있듯, 이 책을 통해서 종교 또한 대체로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정말 모르는 분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깨침이 생겼고, 세 종교에 새롭게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 종교 이야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간의 믿음과 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9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세 종교의 기원, 유대교의 탄생과 정착, 기독교의 탄생과 정착, 이슬람교의 탄생과 정착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세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 반목과 갈등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한 가지에서 시작하여 각각의 영역을 분석하고, 다시 하나로 모아 오는 구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읽을 수 있는 강점이 있는 책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나온 이 세 종교는 모두 동일한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삼는다. 저자의 말처럼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만의 성지가 아니다. 한때 평화롭게 지내기도 있던 세 종교는 성전(聖戰)이라는 미명 아래, 오래 반목과 전쟁을 지속해오고 있다. 역사적 배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난 연후에야 종교 간의 분쟁을 이해할 수 있다. 이해의 지점은 화해가 열리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한 공명이 마음을 울린다. “역사를 보면 정치든 사상이든 관용성을 보이며 상대를 포용하면 융성했고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면 어김없이 쇠퇴를 불러왔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5쪽) 종교뿐 아니라, 우리 삶의 타산지석이 될 만큼 뼈 있는 말씀이다. 세월 호 참사 이후 희망이 없는 한국을 방문하셨던 교황 프란체스코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종교를 초월한 서로 간의 사랑이었다.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으며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7쪽)는 그의 말씀은 가히 혁명적이다. 교황의 말씀은 천주교인에 한해서만 해당하지도 않았고, 천주교인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다. 종교를 초월하여 수용해야 하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 한명은 기독교인이다. 그런데도 아직 세상이 이 정도라면,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탓이라고 (나를 세례해주신) 박중신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삼십년 전 들었던 이야기인데, 그 말씀은 슬프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에게는 가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는 이○○ 목사님이 계신다. 나 또한 개신교 이모를 따라서 새벽 예배를 보러 가는 것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 형식을 중시하는 성당 미사에 비해서 간소한 개신교 예배가 때론 더 좋기도 하다. 반대로 목사님은 경건한 성당 미시가 좋을 때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칠순을 넘어섰지만 워낙 진보적인 청년의 심장을 간직하고 사시는 분인지라, 그분과는 어떤 종교 이야기를 나누어도 불편함이 없다.

 

 

몇 주 전 이 책과 더불어 역사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시민단체 특강에서 미시사학자 백승종 선생님의 ‘이순신’에 관한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가 연구한 이순신은 이전에 내가 알던 이순신이 아니었다. “달빛만 고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섬세한 시인이 가슴에 살고 있는 (불멸의 이순신이 아니라) 불면의 이순신”이었다. 7년 동안 스물세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전하였지만, 전쟁이 없는 시간이 훨씬 길었고, 대부분 노비출신인 병사를 먹여살려야하는 아버지 같은 자리에 이순신이 있었다. 탁월한 문장가, 선비적 감수성을 가진 그는 “경영의 귀재”이기도 했다. 수유연구실의 고미숙 선생님을 통해 들여다보았던 연암 박지원의 모습이 예전 내가 알던 인물과 달랐듯이, 이순신 역시 광화문 동상처럼 장엄한 군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물을 다차원적으로 줌인, 줌아웃하면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역사 교육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우문(愚問)에 백승종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역사는 우선 재미가 있고, 교훈이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가는데 꼭 거쳐야 하는 공부라는 것이다. 그 답변은 『세 종교 이야기』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이 책은 재미가 있고, 교훈이 있으며, 나의 종교관에 대해서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었기에 일독을 권할만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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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5-01-02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숲님, 잘 지내시죠?
여전하시네요...^^ 정말 보기 좋아요.
오랜만에 들어와서 찬찬히 리뷰를 읽었네요,,,`
지나간 시간들이 그립네요...
며칠 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13권의 책을 샀어요.
조금 설레더군요,...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어요....
예전의 그 설레임을 다시 찾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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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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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소나기에 자책하는 시인의 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그린비, 2014. 8.

 

시가 아름답기만 한 날들이다. 시는 아름다워야만 했다. 서향으로 빨리 사라지는 오후 햇빛 탓이고, 일찍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달빛 때문이다. 사념에 젖는 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만추가 다가오고 있다. 10월 가을, 볕은 더 없이 따뜻하고 숲 그늘은 머리를 맑게 할 만큼 서늘하다. 시인의 자작시평, 시의 배경이 된 에피소드를 읽는 소소한 일상이 가미된 에세이를 기대했던가? 이 책은 기대를 배반한다. 문학의 아토포스는 묵직했다. 10편의 소논문에는 시인 진은영이 바라본 지난 수년 동안의 한국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갈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존재를 전제한 현실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어디로든 가고, 무엇이든 되고,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우리가 가고 존재하고 말할 수 있는 존재임을 계시”(6)한다.

 

 

지난 주 일요일, 토론대회 심사에 참여했다. 고등학생의 “9시 등교 찬반 토론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상식을 넘어서지 못했다. 9시 등교가 등장하기 전후의 한국 사회 상황, 그것을 제기한 집단과 문제를 제기하는 집단이 내세우는 논거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채, 중언부언 답변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입론, 교차조사, 반박의 토론 절차도 무시한 채, 자기가 준비한 자료를 과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십대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제대로 된 의사전달에 어려움이 자주 발견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토론은 절대 상대를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토론으로 상대를 승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과도한 욕심이다. 토론의 과정에서 내 주장의 논거를 좀 더 튼튼히 세우는 것이 토론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또한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를 기를 수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사람은 말(또는 글)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괴테의 말처럼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우리는 배울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진은영의 글은 힘이 있다. 책상에서 펜으로 완성된 관념의 글이 아니고, 사랑을 품은 글이기 때문이다. 한 시인의 진지한 고민과 고뇌가 정치, 예술, 삶을 하나로 아우르게 만든다.

 

 

감성의 분할, 감성적 분배

     

이 책을 읽는 내내 고귀한시인, 진은영은 독자로 하여금 열패감을 느끼게 한다. 시인, 철학자, 실천가가 이루어내는 트라이앵글의 한 중심에 그녀가 있다. 문학과 정치를 어떻게 관계 지을 것인가에 대한 시인의 고민의 성과가 한권에 오롯이 담겼다. 참여시를 쓰는 것과 사회 참여 사이에서 시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문학의 아토포스- 그녀가 발견한 보물 쪽지 -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을 어떻게 읽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출발점이 되었다. 정치적인 것은 감각적인 것을 분배하는 활동,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이라는 랑시에르의 정의에 따르면, 낡은 분배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예술은 정치가 된다. 시인에게 정치는 감성적 혁명’(311)이다. 이러한 정의와 분석에서 예술과 정치는 이분법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공간의 트랜스포머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는 자신의 미학이 있고 미학은 자신의 정치가 있다.”(29)

 

삶을 미학적으로 가꾸는 것에 대한 고민은 그리스 이후 오래된 철학적 고민이다. 모든 사람의 삶의 목적이 자신과 인생을 미학적으로 가꾸는 일이라고 한다면, 감수성 남다른 시인의 삶은 어떠하겠는가? 시인은 서정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서정시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지나가는 소나기를 바라보며 자책한다.”(32) 진은영은 시를 쓰는 지게꾼의 전범인 박노해, 백무산, 김수영과 다른 방식의 혁명의 방식을 발견한다. 이 책의 제목이 언급하듯 문학의 아토포스(비장소성)은 문학이 특정한 공간에 해당하지 않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학적 기투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아토포스라고 불렀던 것을 닮아 있다. 아토포스(atopos)는 장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토포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여기에 ‘a'는 부정과 결여의 접두사로서, 아토포스는 비장소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단어는 어떤 장소에도 고정될 수 없어서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의미로 소크라테스의 대화자들이 그에게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문학은 문학이 이루어지는 특정한 공간이 따로 없다고 했을 때, 시인은 거리에서, 토론장에서, 시위에 참여하여 시를 쓴다. 공간이 변하면서 시는 온전히 시인 혼자서 쓰는 작업이 아닐 수 있다. 함께 쓰고, 단어를 선물하여 쓰고, 지인의 시로 트랜스하면서 변형할 수 있다. 주어진 공간의 경계에 틈을 만들고, 허무는 과정에서 미학은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 그 자신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문학은 시간에 고정되지도 않는다. 비공간성은 비시간성과 연결된다. 공간가 시간이 허물어지면서 일과 놀이의 구분이 사라진다면 사회적 지위와 역할의 경계 또한 서서히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다.

 

 

오래 전, 대학 1학년, ○○ 전자 파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참여했었다. 오랜 시간 체납된 월급으로 고생하고 있을 내 또래 여공들을 응원하는 시간은 쁘띠적 성향을 가진 나에겐 여러 가지로 힘든 시간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기대했지만, 여공들은 멋진(??) 대학생 오빠들과 유사 연애에 빠져 있었다. 당장 먹을 라면이 없다던 그녀들은 항상 꽃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들의 모습이 천박하다고 느꼈다. 아주 오래전 이 기억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떠올랐다. 투쟁에서는 투쟁만 해야 아름다운가에 대한 성찰이 일었다. 투쟁의 장소에서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고, 청춘을 가꾸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나의 왜곡된 결벽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은 천상의 것인가? 지상에 울려 퍼지는 노래인가? 진은영 시인을 통해서 다시 한번 가능성이라는 아름다운 말을 최선을 다해서 음미하는 일(321)을 경험한다. 손 안에 있음에서 눈 앞에 있음으로, 도구적 존재에서 현전하는 존재로 관계 맺는 것은 관념에서만 가능한 추상적인 일은 아니다.

 

 

다시한번 건드려지는 사족 같은 질문 하나.

 

가난은 왜 과거가 될 때 아름다운가? 가난은 왜 선택이 될 때 아름다운가? 가난하지 않아도 되는 시인의 가난은 아름답다. 가난하고 가벼운 시인의 글을 펼쳐 보니, 내 삶은 더욱 더 비곤해지고, 무거워진다. 할 수 있고, 가질 수 있으나 선택하지 않는 고고함을 원하는 나의 허영이다. 가난할 수밖에 없어 가난한 내 영혼을 꼭 안아주고 싶은 열패감이다.

 

그렇게 냉소하고 돌아설 예측이나 한 것처럼 신형철의 발문은 다시 발등을 꾹꾹 찌르는 압정이 된다. 그의 글은 핀으로 내 발등을 꾹꾹 누르며 원점으로 선회하게 한다. 세상을 다 삼켜버린 것 같은 검은 바다에서 남파선에 깜박깜박 신호를 보내는 그들의 등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다시한번 나에게 묻는다. (반복되는 가방끈 긴 사람들의) 랑시에르 참조였다고 생각하는지, 나의 무의식에 묻고 또 묻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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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시대 - 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알랭 드 보통 지음, 최민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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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어준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다.

뉴스의 시대-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알랭 드 보통, 2014. 7.


 

바야흐로 뉴스의 시대다.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관계도 아니지만, 뉴스의 중심에 있는 셀리브리티는 더 이상 우리 삶과 무관한 외부자가 아니다. 나의 주변에서 일상을 주고받는 지인처럼, 때론 지인보다 더한 심정적 근접 지점에서 우리와 함께한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가 되어 우리에게 살아있는 'real'이 된다. 하루에도 무수한 사건이 일어나지만, 뉴스에 세팅된 아젠다만이 실제가 될 수 있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방송을 들으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게 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쟁점을 분석한다. 그가 보여주는 세계가 내 시선의 프레임을 형성한지 십 수 년이다. MBC 시선집중을 13년 듣는 동안, 그는 몇 번의 휴가도 떠나지 않았던 ‘성실한’ 앵커였다. 그가 며칠 휴가를 떠났을 때 방송을 들으며 느꼈던 어마어마한 존재감이라니. 나의 삶과 무관한 ‘샐리브리티’인 그의 부재가 미치는 영향이 상당했다. 그가 종편을 선택했던 시기는 공중파 3사의 문제점이 정점을 찍을 즈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누가 나오든 혹시 실수로라도 종편 채널이 열리면 화들짝 놀라며 다른 채널로 zapping하던 나는 한동안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진 연인을 찾아가듯 슬그머니 JTBC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자본이 빚어낸 종편에 승선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수치심을 감내해야 했을 만큼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채널이 없다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혹 손석희씨가 ‘시선집중’을 떠나면서 말했듯, 그의 선택은 ‘훗날’ 평가될 것인지도 모르겠다. JTBC 만큼 세월 호 보도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종편과 언론 매체가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가 하는 말이 허투루 내뱉은 말은 아닐 것이다.

 

 

직업 특성 상 나는 뉴스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위치다. 만일 ‘뉴스’를 알지 않아도 되는 업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서, 뉴스를 멀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스마트 월드의 스마트 기기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뉴스를 수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십 년 전만 해도 한 달 내외의 배낭여행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를 때 접하던 신문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모국어로 쓰인, 내 나라의 기사를 읽다 보면, 그제서야 안도감이 찾아왔다. 보통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느새 나에게 ‘뉴스’가 종교 자리를 차지한 것일까? 아침과 저녁 기도가 이루어질 시간, 나는 뉴스를 읽는다.

 

 

영국 사람은 외출할 때 세 가지를 챙겨가지고 나간다고 한다. 아파트 키, 지갑, 책 한권. 그렇게 간단한 소지품을 가지고 노팅힐의 어느 카페에서 마주칠 것 같은 잉글리쉬맨이 알랭 드 보통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수학(修學)했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모두 유럽인일 뿐이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종적 분류에 어려움이 있는 아시안이기 때문에.) 나도 주 이상을 보통의 책을 손에 들고 다녔다. 처음부터 끝까지 탐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어디를 펼쳐도 첫 페이지가 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보통은 자신과 뉴스와 마주치는 순간(17쪽)을 모았다. 소소한 사적 경험에 따른 단상이 모여서 한권의 책을 이루고, 하나의 철학을 완성한다. 일상에 대한 성찰이 이룩한 산물, 그것인 보통의 책이다. 뉴스에 대한 단상을 모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하다. 뉴스는 독자에 의해서 다시 한번 가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지점이다.

 

 

뉴스는 ‘정상성’을 가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를 강조한다. 뉴스가 다루고 있는 것은 정상성 좌우에 있는 비정상을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삶과 이질적인 것일수록 메인 뉴스가 될 수 있다. 정상성이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듯, 객관적인 보도 또한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편향에 대해서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는 보통의 주장은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에서 중립은 없다.”는 은유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뉴스는 두려움과 공포를 양산한다. 재난, 질병,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관한 보도는 나의 미래를 두려움과 공포로 만들어 버린다. 끔직하고 잔인할수록 뉴스의 가치는 높아진다. 강력 범죄에 내성이 생기기 때문에, 보도는 더욱 자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서 잔혹한 범죄가 이루어진 과정을 여과 없이 보도하는 것을 보면, 뉴스가 추구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때가 많다.

 

 

보통이 예견한대로 대중의 수만큼 다양한 뉴스 채널의 세계(278쪽)를 기대해도 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자신의 취향이 고려된 맞춤형 방송이 세팅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나 또한 손석희의 방송을 통해서 정보를 얻고, 김어준의 파파이스, 뉴스타파 등의 팟캐스트를 통해서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을 제공받고 있다. 종편 JTBC는 이번 주부터 ‘뉴스룸’으로 개편하면서 8시부터 9시30분까지 30분 연장 방송을 시작했다. 하루에 1시간 30분 동안 보도할 뉴스거리가 있을지에 대한 염려는 첫 방송에서 해결되었다. 뉴스라고 하기엔 깊이 있는 정보 분석까지 곁들여졌다. 다만 보통의 말대로 각자가 필요한 뉴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격을 ‘대중’ 이 갖출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든다. 지난 수년 동안 나타난 언론의 행태와 대중의 정치적 선택을 보면, 공적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중의 진화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스의 수명은 짧다. 많은 사람들은 매번 새로운 뉴스를 원한다. 세월호를 지겨워하는 사람들의 증가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월호에 대한 우리 각자의 책임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었고, 사람들에게 세월호는 뉴스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이 지점에서 방문 내내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하며 세월호를 현재의 시점으로 호명한 프란체스코 교황께 감사할 뿐이다. 제도화된 기억상실증(288쪽)은 우리에게 도덕 불감증을 가져다준다. 보통의 주장처럼 뉴스 의존증에서 벗어나서, 상상 속에서만 연결되어 있는 타자와 실제 연결망을 형성하는 것이 우리 삶을 더욱 독창적으로 만들 것이다. 결국 자신의 윤리와 가치 속에서 각자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일상에 관한 단상이 모이면, 우리 역시 각자가 추구하는 각자의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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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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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을 호출하는 대한민국 치킨 정은정, 따비, 2014. 7.

 

지난 봄, 아는 지인이 키우던 닭을 조류독감으로 모두 매장했을 때도, 우리 집 닭장 속의 암탉들은 살아남았다. 아는 분에게 분양받은 오골계 병아리 열 댓 마리 중 몇 마리는 마당에서 개에게 잡혀 먹었지만, 나머지는 부모님의 보살핌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서 유정 란을 매일매일 생산했다. 그중 몇 마리는 지난여름 복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다섯 마리가 닭장을 지키고 있다. 일 년 동안 우리 집 마당에 가축 냄새가 진동하고 있지만, 한울타리에 여러 생명체가 함께 지내면서, 농촌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배우는 바가 컸다.

 

 

대한민국 치킨 을 읽는 시간은 유쾌했다. 수준 높은 지식이 주는 무게와 앎의 통찰 때문에 마음 살을 앓기 보다는 맞아, 맞아의 공감을 던지며 함께 수다 떠는 기분으로 책에 붙어 읽었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 무지에 대한 통찰, 다름에 대한 각성 보다는 맞장구치며 공감하고 싶은 때가 훨씬 더 많기는 하다.) 번역체도 아니고, 낯선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며, ‘별에서 온 그대의 연인 천송이가 사랑한 치킨의 미시사였으니 몰입은 기본이었고, 간간히 웃을 수 있는 포인트도 가득했다. (가령 저자가 다루고 있는 것은 프라이드 치킨이 아니라, ‘후라이드 치킨이라는 것 등등) 한동안 거리의 치킨집이 눈에 들어왔고, 엘리베이터의 치킨 냄새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6학년이 될 때까지 면단위 시골에서 살았다. 이후 부모님의 교육열 덕분에 도청소재지인 전주로 전학을 갔다. 자녀 셋을 자취방(집이 아니라, 방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에 두고, 시골로 내려가시는 부모님은 가장 큰 서점인 홍지서림에서 책을 사주셨다. (‘이 귀한 물건이던 그 시절에는 서점 자체도 하나의 브랜드인지라, 서점 마크가 곳곳에 찍혀있는 포장지로 책표지를 싸주는 것이 서점의 기본적인 서비스였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낡아버린 포장지를 버릴 때, 책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런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면, 이제 당신은 중년이다.) 정신의 일용할 양식 옆 가게는 몸을 살찌우는 영양 식당, ‘영진 통닭꼬꾜 통닭이 있었다. 전기 그릴에서 회전하며 기름을 뚝뚝 떨어뜨리는 닭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는 촌년이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한 냄새였다. 미끄러운 촉감이 싫어 벗겨먹던 껍질조차 바삭거렸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부모님은 둘 중 더 유명한 꼬꾜 통닭에서 닭을 사주시려고 했으나, 나는 끝까지 영진 통닭을 고집했다. (촌년의 눈에는 꼬꾜도꾜로 읽혔던 게다. 일본인이 하거나, 일본을 좋아하는 가게라고 추측했으니, 민족주의의 강한 신념을 가진 열 세 살의 선택은 확고했다.) 이후에 서점을 드나들며 내가 상호를 잘못 읽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수년 동안 꼬꾜 통닭은 우리 가족의 만남의 장소였다. 엄마는 아빠가 어디에서 월 30만원만 벌어 와도 너희랑 살고 싶다고 했다. (지나고 보니, 그 당시 30만원은 제조업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었다.^^) 한 달 동안 만나지 못한 엄마와 치킨과 칼국수를 먹고 난 후, 터미널에서 헤어지는 시간은, 지금 떠올려 봐도 명치끝이 저릿하다.

 

 

이 책은 이렇게 나의 치킨에 얽힌 무수한 추억을 끝없이 호명한다. 또한 먹기가 함축하는 의미와 문화에 대해서도 성찰하게 한다. “음식을 먹는 것은 문화를 소비하는 일이다.-45) 살아서 무엇을 입에 넣어야 하는 것이 치욕이라고 느꼈던 경험도 떠올리게 한다. (대구 지하철 폭발로 고등학교 아들을 잃었던 어느 엄마가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다. 아들이 죽은 것도 슬펐지만, 자식이 죽었는데도 밥을 먹는 자신이 더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면, 뒤에서 누군가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래도 살겠다고 밥을 먹는 자신이 벌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니 김영오씨를 비롯한 세월 호 가족의 단식은 (단식이 정치인들 때문에 많이 퇴색되었긴 하지만) 억울함을 호소하는 최후의 순수한 수단일 것이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영업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나라, 미국 자영업자 한 사람이 버는 영역에서 네 명이 치열하게 돈을 벌어야 하는 나라, 군인 수만큼의 미용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적은 퇴직금으로 몸뚱이 하나로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의 생존 장이 치킨가게다. 대한민국 치킨 은 치킨의 성분, 역사, 한국인의 취향, 산업 구조까지 전방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리뷰에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치킨과 연관한 콩기름, 콘기름, 맥주까지 분석의 대상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왜 소비를 이념으로 해야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이 책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차기 연구와 연구자를 위한 참조로써 훌륭한 자료집이라는 생각과 함께, 조금 더 일관된 문제의식이 필요했다고 본다. 뒷장으로 넘어갈수록 동어 반복의 느낌이 읽기의 맥을 떨어뜨린다. 치맥이 떡볶이와 튀김, 라면과 단무지처럼 환상적인 음식 궁합 속에 숨겨져 있는 자본의 논리에 집중했어도 기막한 이야기가 구성되었을 것이다. 완전 독점의 맥주와 완전 경쟁의 치킨이 만난 절묘한 결합 속에서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생리를 부록으로 처리하기엔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하다.

  

사족 하나. 김수영의 시와 비평서를 읽었음에도, 그가 양계를 통해 생계를 꾸렸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글밭 일구어 글로 밥 만드는 삶을 꿈꾸는 대부분의 예비 문학가들에게 글쓰기의 권력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다른 생계수단을 찾았다는 사실에서 여러 생각들이 오간다. 어쩌면 서평과 영화평을 쓰는 우리의 유희가 그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읽고, 쓰고, 그것이 삶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호모쿵푸스가 되는 것, 이 책은 덤으로 그것까지 재고(再考)하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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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제프 블라터의 철권 통치, 『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돌베개, 2014.7.

 

EBS 지식채널e '축구공 경제‘를 보면 축구공의 경제 속에 감추어져 있는 불법 아동 노동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최첨단 과학으로 진화하고 있는 축구공은 100% 수공업 결정체다. 그라운드를 누비는 축구공의 70% 이상을 인도와 파키스탄의 값싼 노동력으로 생산하고 있다. FIFA는 축구공 생산 노동이 강요적이거나 구속적이지 않을 것을 표명하지만, 거대스포츠 기업 아디다스의 천문학적 수익, 황금발의 스타들 뒤에는 10만원 넘는 공을 만들기 위해서 하루 150원을 받는 아동 노동이 존재한다. 축구공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하루 8시간씩 축구공을 바느질한다. 이 정도가 내가 『피파 마피아』를 읽기 전에 축구에 대하여 알고 있는 일면이다.

 

나는 운동에 유난히 관심 없는 십대를 보냈다. 선생님이 공을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배구공과 농구공도 구분을 못해서 한참 망설였던 부끄러운 기억도 새삼 떠오른다. 양궁을 한번 해보겠느냐는 체육 선생님 말씀에 정중히 거절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공부’를 잘하는 것이 최고라는 세상의 기준을 내 가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운동은 다른 세계 이야기였을 뿐, 나의 운동에 대한 무지함은 장애가 되지도 않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대한 방송과 사람들의 흥분에도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 한국과 폴란드전, 미국전은 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직장에서 포르투갈 전을 볼 수 있도록 일찍 퇴근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TV로 포르투갈전을 보면서 완전히 축구에 빠져들었다. 축구는 그냥 경기가 아니라, 일상의 따분함을 한 순간 사라지게 만들었다. “축구공 하나로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이전 경기를 다시 찾아보았고, 실시간으로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스페인전은 길거리 응원까지 나갔다. 그때는 4강전을 보러 일본에 가겠다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축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말처럼 한동안 경기를 보면서 해석하기 위한 노력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익힌 유럽 축구의 구도가 여전히 내가 아는 축구 상식의 전부다.

 

『피파 마피아』는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 월드컵과 축구를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을 담고 있다. 스포츠 정치 분야의 탐사 전문 기자인 토마스 키스트너가 20년 동안 파고들었던 피파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겨 있다. 피파의 역사라기 보다는 범죄의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축구는 오락이 아니라 거대 산업으로, 제프 블라터를 중심으로 하는 피파 수뇌부는 개최국이 마지막 4강에 들어갈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스포츠의 자율성은 국가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는 방패막이가 되어 준다(48쪽). 토마스 키스트너가 파헤치는 국제스포츠계의 행태는 완전히 범죄 그 자체다. 피파는 “모든 것을 지배하지만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는 단 한명의 보스가 지배하는” 마피아 조직이다. 저자는 이 험난한 탐사 취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축구가 스포츠의 본질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 때문이다. 수조 원이 공익이라는 미명아래 제프 블라터 패밀리의 주머니에 들어가고 있다.

   

수많은 경기 중에서 왜 유독 축구가 전 세계를 하나로 응집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느낄때가 많다. 축구를 보도하는 기자조차도 객관적인 스탠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축구 팬으로서 경기를 바라보고, 촬영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하여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 하나하나까지도 슬로우 모션으로 담아내면서 시청자의 심장을 딱딱하게 만들었다가 뜨겁게 달구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 축구가 생산하는 경제적 이익이 유통되는 방식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사실 월드컵 대진표를 보다 보면 축구는 실력이 아니라 ‘대진 운’이라는 생각이 들때도 많다. 개최국은 대진에서도 항상 유리한 입장을 취해 왔고, 심판 역시 홈그라운드에 노골적으로 유리한 판단을 할 때가 많이 있었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는 2014브라질 월드컵을 보면서 나 역시 공감하는 바다. 축구가 브라질 경기(經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실제의 삶이 더 소중하다고 이야기한다.

 

“가난한 브라질 대중은 그 어마어마한 세금이 다른 곳에 쓰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학교, 병원, 대중교통에! 축구가 끝나고 진짜 인생이 펼쳐지는 곳이면 어디나 그 돈이 필요했습니다. 진짜 인생, 정작 소중히 지켜야 할 가치, 이는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마피아가 움직이고, 영상을 연출하는 탁월한 전문가들이 작정하고 덤빈다면 축구뿐 아니라 어떤 경기도 정치적으로 움직일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어디 FIFA만이 마피아들의 온상이겠는가. 돈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가능한 일이라는 점이 두려운 것이다. 마피아를 연상하게 하는 조직범죄의 진행과정을 우리도 현재 목도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세계의 허약함’(433쪽)은 늘 사건이 터진 이후에야 우리 시야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실제 봐야할 세계는 프레임에 갇힌 사각의 경기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공 하나에 얽혀있는 무수한 권력 비리를 눈감는다면 축구는 우리의 도덕과 가치를 잠재우는 아편이 될 것이다.

 

내가 자주 가는 미술관 앞에는 푸른 잔디가 깔린 축구장이 있다. 토요일 오후 유소년 축구단의 연습이 한창이다. 축구 꿈나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 연습 하는 것을 보니, 피파 마피아의 얼굴들이 오버랩되어 마음이 복잡해진다. 부디 이 아이들이 축구 선수가 되든, 축구 팬으로 남든 - 스포츠 본질인 경기 과정을 즐길 수 있을 만큼 - 조금이라도 정직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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