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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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쓰기에 대하여 말하고, 말을 글로 옮겨 다시 말하다·Talk·

 

김영하, 문학동네, 2015. 3.

 

 

1980년대 중학생 시절, 전교생이 매주 월요일마다 일기장 검사를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여행이 수학여행, 재미없는 독서가 독후감 제출 독서, 재미없는 시험이 내신 시험이었다. 자발성 없이 이루어진 일은 배움은 있어도 재미는 없었다. 지나고 나면 모두 다 추억이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의지와 무관한 일들을 수없이 하면서 어른이 된다. 여수, 경주, 설악산은 의무적으로 가야하는 수학여행이 떠올라서 어른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그 근처도 가지 않았다. 교과서에 실린 소설과 시는 시험 문제가 떠올라서 오랫동안 문학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십대의 일기는 둘로 나뉘어졌다. 보여주기 위한 것과 치유 받기 위한 것. 진솔한 일기는 대부분 편지가 되어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퍼져 나갔고, 보여주기 위한 일기는 다른 반 검사가 끝나면 검사 끝난 친구의 것을 내 일기장으로 속여서 검사 받는 식이었다. 다행이 선생님께 걸리지 않았다. 일기를 빌려준 친구의 이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안지아. (화교학교에서 전학 왔던 영민한 그 친구는 지금도 안녕하겠지? 부디 그러하기를.) 친구에게 빌려온 일기장을 내가 그냥 돌려 주었을리 만무하다. 유사 문자 중독 증상이 농후했던 나는 친구의 일기를 읽는 첫 번째 독자로서 영광(?)을 누렸다. 지아 역시 보여주기 위한 일기를 썼겠지만,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일은 일기 내용과 무관하게 흥미로운 경험이다.

  

내게는 치유의 일기장이 따로 있었다. 사춘기가 시작된 중학교 1학년은 미움도 분노도 모두 일기장에 기록했다. 기록은 언제가, 누군가에게 들키게 되어 있다. 음악실에 두고 온 일기장을 발견한 한 아이가 교실에서 큰 소리로 내 일기를 읽었다. 사소한 장난은 여러 사람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화인(火印)을 만들었다. 친구들에겐 비방이었고, 내게는 치유였던 글들은 다시 나를 찌르는 비수가 되어 되돌아왔다. 친구들에겐 모욕이었고, 내게는 실연이었다. 일기에 기록된 친구들은 그 날 이후 나에게 등을 돌렸다. 한동안 일기를 쓰지 않았다. 쓸 수 없었다.

  

일기를 쓸 수 없게 된 아이는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기 시작한다. 당시는 시험이 끝나면 전교생이 500원을 내고 영화를 보았다.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음은 같았지만, 영화는 언제나 즐거웠다. 보고 재미있으면 동생을 데리고 가서 다시 보기도 했다.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순진했던 시절이다. 그 습관은 오래도록 남아서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시험이 끝나면 (이제는) 자발적으로 영화를 보고, 서점에서 책을 사서 귀가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밤새 읽었던 책들, 도스트예프스키, 헤르만 헷세, 헤밍웨이의 장편 소설들, 안톤 체홉, 오 헨리, 앙드레 지드의 단편들, 삼중당 문고로 만들어진 한국 근대 문학은 자발성에 기초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자신의 일기와 같은 글들을 기꺼이 내어주는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 것이. 그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지적 허영이 결합하여 책은 꼭 사서 보았다. 빌려 본 책도 서점에 가서 구입했다. 그것이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를 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빌려보는 친구를 살짝 경멸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좋은 부모님 덕분에 책값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가난해도 책은 당연히 사서 읽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어설픈 교육열도 한몫 했던 것이다.) 어쨌든 영화와 책은 내 성장의 팔 할을 차지했다.

  

김영하 작가의 신간 말하다·Talk·를 읽다보니 나의 어린 시절 치유와 상처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올라온다. 글쓰기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내가 쓴 글이 나를 겨냥한 칼날이 된 이후, 글을 쓸 수 없게 된 사태가 나의 존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떠오르면서 그냥 쉽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말라메르의 이야기처럼 나는 종이 위에서만 그것도 아주 조금 존재할 뿐이었다. 쓴다는 것은 많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는 것,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는 누구나 당연히 말하고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로 인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이 구성된다.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백 가지 이유가 아니라, 내가 글을 쓰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성찰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다. 글을 쓰는 순간, 내 삶은 약간의 품격을 갖추어 간다.

  

말하다·Talk·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면을 지켜라.

예술가로 살아라.

엉뚱한 곳에 도착하라.

기억 없이 기억하라.

  

2010년 이후 여러 곳에서 말해왔던 강의의 편집·왜곡을 바로잡고 싶은 작가의 결벽의 산물이고, 말은 글보다 불완전하다는 작가의 신념이기도 하다. 강의에서 들은 그의 도 좋았으나, 그의 육성을 가늠하며 읽을 수 있는 은 더 좋다. 그의 글과 사유는 낯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글은 나만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안함을 제거해준다. 오래전 연암 박지원의 책을 읽으며, 시공을 초월하여 성()도 다르고, 계급도 다른 우리가 같은 감수성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눈물겹게 감사했듯, 나와 같은 허무주의적 실존으로 살아가는 김영하 작가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실이 한없이 감사하다. (과한 펜심이라고 해도 실제 내 마음에 비하면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침범당하지 않는 고독한 개인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키워가도록 힘을 실어주는 말들로 가득하다.

 

언젠가 내가 책을 쓰면 쓰고 싶은 ‘Thanks to“는 다음과 같다.

 

문학이 절망의 순간에 나의 무기가 될 것임을 가르쳐준 작가 김영하,

자신의 재기와 천재성을 정의(正義) 실현에 유익하게 사용하는 총수 김어준,

세상에 중립이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앵커 손석희,

공공 건축을 통하여 공간적 사유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신 건축가 고() 정기용

 

그들 덕분으로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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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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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2008. 8.

 


 

    

월러스틴이 주장해 온 세계 체제는 근대 세계가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의해 팽창되어온 하나의 전일적인 체제를 의미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팽창과 보편적 보편주의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본다. 더 이상 보편성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만큼, ‘보편성에 대한 혐오는 도처에 존재한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만능성을 보편적 진리로 내세웠다. 근대 서구 기독교 문명은 비서구를 미개로 규정하고, 서구적 가치를 보편적 가치로 등치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인권, 민주주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성전(Great war) 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었다.

 

문명과 정체성을 폐쇄된 봉인된 실체로 보았던 사무엘 헌팅턴 조차 (문명의 충돌에서) 보편 문명이라는 개념은 서구적 개념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보편 문명이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단지 서구적 생각일 뿐이다. 이는 대다수 아시아 사회의 특수주의(particularism)를 볼 때, 그리고 하나의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차이에 대한 강조로 볼 때 서로 맞지 않다. “서구사회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가치가 세계적 차원에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현대 민주주의 정부도 서구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그것이 비서구 사회에서 발생할 때는 서구의 식민주의나 강제의 산물일 경우가 일반적이다.

 

유럽적 보편주의에서 월러스틴은 16세기는 자연법과 기독교, 19세기는 문명화 사명,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는 인권과 민주주의(55)를 보편적인 윤리적 가치로 내세우면서 세계 각 지역에 개입해 온 과정을 비판한다. 유럽이 절대적인 윤리적 가치로 내세우는 문명, 인권, 민주주의 등이 특수한 보편인 유럽적 보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보편적 보편주의’ - 다양한 보편들의 연대

 

월러스틴의 문제의식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일체의 거대서사 및 보편주의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하면 옥시덴탈리스와 오리엔탈리스트를 거부하면서 보편적 보편주의를 획득할 것이지가 중요한 관건이다.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은 유럽과 백인을 보편적 기준으로 보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잘못 대응할 경우 유색인 역시 자기중심주의의 나락으로 빠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파농은 절대적 보편성을 가진 개인이나 공동체는 없다고 보고, 각자의 폐쇄적 공간으로 퇴각하려는 상대주의 역시 비판한다. 월러스틴 역시 특수한 보편이 절대적 보편의 자기 모순적 주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특수한 보편주의를 넘어선 보편적 보편주의를 제안한다. 다양한 보편들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사회적 현실에 대한 본질주의적 성격 부여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모두를 역사화하며, 과학적인 것과 인문학적인 것을 단일한 인식론으로 재통합해야 한다. 공동체의 외부로 나아가는 것, 그리하여 보편의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무라고 말한 바흐친의 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월러스틴은 보편적 가치의 역사적 필요성을 세계체제 차원에서 연역하고, 보편주의가 가능할 수 있는 역사적·윤리적 조건들에 관해 사유하게 한다. 우리는 유럽적 보편주의뿐 아니라, 과학적 보편주의에 대해서도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월러스틴은 분과학문을 통합하여 모든 지식의 사회과학화 함으로써, 오리엔탈리즘과 보편적 과학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보편적 보편주의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대해서는 우리의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교사 역시 지식인으로서 반드시 세가지 차원에서, 즉 진리추구에서는 분석가로서, 선과 미의 추구에서는 윤리적 개인으로서, 그리고 진선미를 통합하는 데 있어서는 정치가로서 활동(139)해야 한다.

 

 

 주1> 에드워드 사드의 헌팅턴 비판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문명을 실체로 규정한 점, 둘째, 서구 대 비서구라는 냉전의 사고 방식이다.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로 대표되는 유럽 북미 문명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2> 강우성(2008), ‘역사적 보편주의의 가능성을 묻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저, 김재오 옮김’, 영미문학연구회, 안과밖 25, 20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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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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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더불어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된 아름다운 글자

 

한자의 탄생,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한문에 해박한 중년의 수학 선생님이 계신다. 말씀도 많이 하지 않지만, 가끔 하시는 이야기도 한학자처럼 고전적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수학을 느리고 묵직한 목소리로 가르치는 선생님을 요즘 아이들이 견뎌낼 수 있을까? 졸음 쏟아지기 딱 좋은 조건이다. 예상외로 반전이 있다. 선생님은 꽤 인기 있는 수학 선생이다. 수학 원리를 한자로 풀어가며 설명하는 선생님을 아이들은 참 좋아한다. 요란하지 않은 웃음소리가 교실에 번진다. 다양한 멀티미디어가 없어도 아이들 눈빛이 맑아진다. 한자가 품고 있는 이야기가 수학을 향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글자마다 고유성(개별성)을 지닌 갑골 문자는 각자의 형상에 알맞는 특별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글자마다 조형이 될 수 있었던 기원이 있다. 유사할 수 있어도 동일한 글자는 없다. 시간에 따라 글자의 쓰임이 바뀌고, 쓰임은 글자의 외양을 다르게 만들며 분화했다. 글자에 쌓인 의미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문자와 문자가 서로 다치지 않으며 의미의 호환을 이룰 수 있었다. 거북 뼈에 새겨진 글자는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사유 방식과 생활양식을 담고 있다. 글자를 도구가 아닌, 철학으로 바라보게 하는 까닭이다. 시간을 분절하여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시대에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소용되지 않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사멸하거나 정체된다. 태양이 중요한 농경사회에서는 태양에 관한 글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태양은 생존과 생산에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문자는 시간을 붙들려는 인간의 노력이다. 갑골 문자는 상형, 전주, 가차를 거쳐 왔다. 소멸하는 시간은 글자로 물화(物化)되어 새겨지면서 축적되었다. 인간의 사유 과정이 주체적 위치를 상실(22)하게 만들었을지라도, 문자는 인간을 소멸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 유산은 문자를 통해 켜켜이 쌓여왔다.

 

이 책의 미덕은 갑골 문자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자를 근현대의 문학·철학·미학과 연결하는데 있다. 사상가의 주장을 갑골문자 해석에 차용하는 방식이 놀랍고 재미있다. 꼬리 미()를 보고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자신의 아내이자 작가인 주텐신의 나는 법을 배우는 멍멍을 떠올리며 꼬리 가 아름답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사적인 감수성을 풀어낸다. 과도한 주관, 헤밍웨이와 보르헤스까지 들어가면 꼬리 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자로 표현한다.

 

저자는 야만인의 신화 형성 과정을 연구한 레비스트로스를 차용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수선공이야기를 가지고 언어의 변천사를 설명한다. 수선공의 수선 과정은 이미 형성된 문자를 새로운 요구에 맞게 고쳐 쓰는 것을 의미한다. 제한된 공구를 가지고 원래 있던 사물을 다시 쓸 수 있게 수선하는 과정, 처음의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맞게 고쳐내는 것,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지만, 용도에 적합하게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내 손에 어떤 도구(글자)가 있는지의 한계 상황이 지배한다. 글자는 완제품의 형태가 될 수 없는, 어딘지 부족한 상태로 계속 만들어지고, 그렇게 쓰일 수밖에 없는 숙명에 처해 있다.

 

아인슈타인이 추구한 대리석 무늬 속의 세계는 부호 세 개로 구성된 투명하고 확고한 세계다. 이와 반하여 나무 무늬 속의 세계는 짐작하겠지만, 수선공이 머무는 세계로 우연을 통해서 끝없이 변주되는 세계다. 글자의 세계는 부서지고 못이 박히고, 박힌 못이 빠지고, 빠진 흔적에 나무 조각이 덧이어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매끄럽고 완벽한 빛의 세계가 아니라, 부서지고 고쳐 쓰는 불안한 어둠의 세계다.

 

보르헤스는 인간 세계에 완벽한 사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실 세계의 사물에 일일이 대응하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 가능성도 없다. 우리의 모든 감정과 우리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내는 개념과 창조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생각들을 재빨리 찾아서 신나게 표현할 수 있는 사전은 존재하지 않는다.(122) 나의 생각이 타인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미끄러질 때마다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갑갑함이 내면을 채운다. 결국 우리는 차선책으로 언어를 존재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분야를 넘나들었던 한가로운 구경꾼, 진정한 문인, 발터 벤야민은 탕누어가 꿈꾸는 진정한 학자인 듯하다. 암울했던 삶과 비운의 죽음 속에 밀봉되어 있는 벤야민의 글은 반세기 이후에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고대의 중국 글자를 대했을 때 벤야민이 어떻게 반응했을지에 대한 저자의 상상은 유쾌한 농담처럼 받아들여진다. 벤야민에 대한 저자의 연모는 나 또한 공감하는 내용이어서 여기에 직접 인용한다.

 

벤야민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파하는 사람, 가장 애석한 영혼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애석한 인물은 폐병으로 마흔넷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 체호프이고 그 다음이 반 고흐다. 고흐는 자신을 완전히 불태이고 나서총으로 자진했다.) 그는 좌익 유태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내내 게슈타포의 추적과 박해에 시달려야 했고, 생의 마지막에는 가난과 병이 한꺼번에 닥치면서 1940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서 절망적인 자살을 선택하게 됐다. 마흔여덟의 나이, 당연히 그의 사상도 가장 성숙했을 시기였다.”(160~161)

 

 

저자 탕누어는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는가?

 

빠르게 쓰기 위한 목적의 간편화가 진행되면서 표음&표의 문자. 과연 표음 문자는 부호화에 투항한 것일까? “어떤 세속의 권력도 문자를 통제할 수 없다.”(286)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질량이 가볍고 부호가 투명하며 운동 저항력도 적은 완벽한 언어 기록 도구”(50)가 되면서, 언어가 자주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6천종의 서로 다른 말들이 매달 두 종씩 사라진다는 데이비드 크리스털(언어의 죽음)이 맞다 하더라도 언어 역시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며 사멸해가는 유기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사유방식이 변화하듯, 언어 역시 인간과 함께 변화의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언어의 출발이 타인과의 의사소통,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하기 위한 기록에서 시작되었다면,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21세기 인류에게 공통의 언어는 연대의 힘이기도 하다. 그것이 모국어의 사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탕누어의 말대로 보호해야 할 것은 문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331)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어바웃 타임, About time>을 떠올린다. 집안의 특수한 유전자로 인해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에게 되돌린 많은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는다. 아버지는 명랑한 표정으로, 세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고 답한다. 그 아버지가 탕누어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탕누어는 시간을 회귀하여 고전을 읽고 또 읽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고대 문자와 현대를 접합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읽고 또 읽어도 새로운 의미를 가져오는 고전만 보기에도 인간의 시간은 매우 짧다.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 저자 탕누어의 책과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떤 일로 채워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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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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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대립 속에 존재하는 21세기 서울,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2014. 12.

 


 

 이 도시를 굴러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면적 605.28, 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분석은 끝이 없다. 서울에 대한 분석은 한국 사회를 작동하는 모든 기제에 대한 분석을 동반한다. 서울과 서울 아닌 곳, 둘로 나뉘지는 21세기 한국은 서울에 대한 분석만으로도 사회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대부분의 거대 도시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 속에서도 서울만의 특수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고유명사 서울은 보통명사의 속성을 갖는다.

  

  

서울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 이후, 지식인 산책자들은 경성 곳곳에서 인문학적 성찰을 가져왔다. 작년 딱 이맘때 출판된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민음사, 2014. 1.)는 소설가 박태원에 의해 탄생한 구보와 벤야민의 산책자적 시선을 차용하여 2013년 서울을 산책한다. 객관적인 사실에 의존하기보다는 저자가 경험한 서울 속에서 여전히 차고 넘치는 자본주의 속성을 섬세하게 호출한다. 구보와 벤야민을 향한 헌정과도 같은 이 책은 다른 시공간 속에서 벤야민, 구보, 류신 세 사람이 함께 산책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동 속도와 시선을 낮추면서 서울은 맨얼굴의 실체를 드러낸다. 도시 거주자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도시 산책자의 눈에 게스탈트적으로 한꺼번에 속살을 드러낸다.(http://blog.aladin.co.kr/educaso/6918092) 서울의 밑 낯을 보는 일은 '산다는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탈주다.

 

 

넘쳐나는 서울에 대한 분석이 여전히 의미 있다는 것은 과잉 개발의 건조한 도시가 여전히 진화하는 생물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접근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해법도 다양해질 것이다. 경제학 교수 류동민의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류신과 다른 시점에서 서울에 접근한다. 시간과 공간, 구조와 개인의 교차점에서, 보편과 특수의 총체로서 서울을 바라본다. 경제학자의 인문학적 기술은 사이사이 분석을 요구한다. 낭만적 키워드나 (‘그땐 그랬지식의 어법을 사용하는) 추억의 말랑말랑함은 아니란 이야기다. 경제학과 민족지학이 결혼해서 한집에 사는 느낌이다. 류동민 교수의 감수성과 문체는 그가 얼마나 문학에 천착해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라는 부재는 구체적으로 저자의 관점을 드러낸다. 4개의 장을 구성하는 소제목은 좀 더 서울을 명확하게 한다. 배제와 물신, 남겨진 공간 & 사라진 공간, 등고선의 은유, 높이 날고 싶은 은유가 서울의 키워드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경험 하나가 떠오른다. 매번 서울에서 열리는 학회를 이번에는 참신하게(??) 지방에서 진행하자고 하여 전주에서 열렸다. 학회 참석한 교수님과 연구자들은 거의 여행자의 복장과 태도였다. 청명한 공기에 대한 찬사, 한상 번듯하게 차려진 음식에 대한 칭찬, 느린 삶의 방식에 대한 부러움,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아파트값에 대한 감동이 한참 이어졌다. 그리고 결론은 그래도서울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한국 사회에서 서울은 여전히 성공한 사람들의 베이스캠프다. 몇 배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번 벗어나면 재진입이 어려운 공간이다.

    

 

몇몇 공간에 대한 분석이 인상적이다. 스타벅스의 영업 방식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하게 한다. 다른 나라에서 문제가 되지 않은 스타벅스 컵 사이즈에 대한 논란이 한국에서 시작된 것을 보면, 고급문화를 지향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스타벅스를 선호하는 것 같다는 스타벅스 관계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한국의 소비자들은 스타벅스의 사이즈가 tall, grande, venti라는 것에 문제 제기를 했다. 스타벅스에는 아메리카노 short 사이즈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카페 short 사이즈와 스타벅스 tall 사이즈가 같다는 것. 나는 왜 한번도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냥 스타벅스 방식을 내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한 것이다. (이는 IKEA의 한국 상류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인이 값싼 가구를 좋아할 것이라는 분석은 정확했지만, 인터넷 정보력은 세계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 구매에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만만한 소비자는 아닌 모양이다.^^) 커피 한잔 주문하는데도 여섯 가지를 결정하도록 만듦으로써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곳(39)”이 스타벅스다. 우리 동네 카페도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레드, 블루, 엘로우 중 선택하라고 한다. 그야말로 선택 과잉이다. 명동 신세계 백화점의 버버리를 입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반백의 노인들이라면 모를까, 연로하신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의 도움 없이 오늘날의 한국 카페에서는 편안한 마음으로 커피 한잔 마실 수 없다.

    

 

대립이항의 분리 속에 존재하는 서울, 한국은 서울 아니면 모두 지방이다. KTX는 모두 서울에서 출발하고, 서울로 향한다. 서울은 지방을 외부로 분절되어 있고, 강북과 강남이 내부적으로 나뉘어 있다. 그 안에도 무수한 대립 항이 존재한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해결하려는 사람은 드물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61)

 

아파트가 여전히 부의 상징인 점은 한국 사회의 매우 특이한 점이다. 다른 선진국은 개발 초기 아파트가 부의 상징이었더라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면 교외 전원주택으로 상류층이 대거 이동해왔다. 한국은 산업사회를 넘어선지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부자들이 아파트를 선호한다. 모 아파트 광고에서 이민정이라는 배우를 처음 봤던 기억이 난다. 데려다 준 선배에게 자기가 사는 아파트를 가리키자, 선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아파트의 브랜드는 그녀의 사회·경제적 지위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고 성장했는지, 취향이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드러내준다. 그 이후에도 아파트 광고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보여주는 자격증이라고 홍보해 왔다. 서울을 벗어나면 주변 외곽일 거라는 기대를 깨고, 이제 서울은 일터, 제주를 삶터로 닦아가는 상류층이 늘고 있다. 제주도 땅값을 뒤흔드는 그들은 시공을 포갤 수 있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방과 바다를 넘어 제주도를 제2의 서울로 만들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을 글로 재현하는 저자의 어려움이 컸던 만큼, 읽는 독자의 감동은 컸다. “중의적이고 불투명한 글”, 그래서 발생하는 미학적 가치는 읽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문맥 사이 호흡도 길어지고, 말랑말랑하는 문장 속에서 맑스 경제를 떠올려야 한다. 때때로 저자가 읽은 문학과 영화가 곳곳에 적절하게 안배되어 있다. 저자가 자신의 경험에서 서울을 연구의 대상으로 변주했듯, 서울에 대한 개별적 경험은 보편적 문제의식에서 총체적으로 만난다. 잠시 서울에 머물고, 오래오래 지방에 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서울을 현재로 호출한다. 누군가를 좋아해도 매번 서툰 우리는 때를 기다리는 설레임 속에서, 언젠가 사람이 떠나도 장소는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명징한 확신을 한다. 서울은 그렇게 과거이자 현재로, 분석의 장소이자 느낌의 장소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공간 실천을 행동을 불러오는 특수성의 공간임에 틀림없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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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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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적인 세계, 비관적인 대안. 행복한 젊은이들

 

절망의 나라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저,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2011. 3. 11. 오후를 잊을 수 없다. 금요일 저녁 식사 모임, 식당 TV로 일본 대지진 상황이 방송되고 있었다. 세상의 종말 같은 느낌이었지만, 우리나라도 심각한 피해를 입을 거라는 염려도 했지만, 인류는 이제 2011년 대지진 전후로 나뉠 거라고 생각했지만, 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세계를 흔드는 가시적인 변화는 없는 듯하다.

 

 

20127.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대지진 이후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평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처참한 대지진 우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수잔 손텍이 내전 중인 유고슬라비아와 보스니아를 여행하면서 고도를 기다리며연극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전쟁의 일상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쟁은 단시일에 끝나지 않는다. 수년간의 전쟁 속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야 한다. 대지진 이후에도 일본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단 패러다임은 변한 듯하다. 미래를 준비하던 이들이 이제 현재만을 살게 되었다는 것. 소비가 증가했다.

 

 

90년대 초반까지도 함께 우리나라와 세계의 평화와 인권을 염려했던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이 종교 속에서 구원 받았고, 명상과 수련을 통해서 삶의 평화를 얻었다.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진다. 정치를 삶에서 배제한 대부분의 지인들은 일단.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다. 내향적으로 끼리끼리 무리 짓기과정 속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자기 충족화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 나이가 되면 인간은 두부류로 나뉜다. 생존을 목적으로 살거나 개인의 안위를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 경계선에서 흔들리는 나와 같은 회색분자들은 위, 아래에 존재하는 클래스를 보면서 흔들린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즈음, 읽게 되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참으로 반가운 책이다. 어느 시대보다 최고의 풍요속에 살고 있는 저항하지 않는 젊은이들, 모두 함께 누리는 듯하지만, 과거보다 더 불평등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도쿄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에 있는 1985年生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젊은이의 탄생과 종언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하여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 일본을 위해 일어서는 젊은이들, 종국에는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를 차례로 분석한다. 젊은이의 젊은이 분석과 일본을 한국과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상 많은 일들이 그렇지만, 젊음 또한 상대적이다. 신인류. 젊은이의 개념이 시대별로 어떻게 변천했는지를 탐색한다. 얼마 전 뉴스 앵커의 스물여덟 어린 나이에라는 표현을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스물여덟을 어리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젊은이들, X 세대가 등장한 것도 이십 여 년이 지났다. 하지만 젊은이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어도 그 전형에는 변함 없는 속성이 있다. ‘버릇없는 젊은이, 당연한 듯 보이는 세상을 향해 문제를 던지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모든 젊은이들의 공통분모이자 전유물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 실제적인 사례가 풍부한 민족지학적 연구라는 점이다. 저자의 젊음에 대한 상투적인 표현이 필요할 듯하다. 역시 젊다. 상황이 나쁘다하더라고, 다행스러운 것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자세에서 희망을 찾는다. 쉽게 쓰였고, 매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책의 에필로그 뒤에 붙어 있는 주석 453개는 저자가 얼마나 성실한 사회학자인지 알게 한다. 핵심 질문은 간단하다.

 

첫째,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해야 하는가?

둘째,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진다면?

셋째, 적어도 우리가 낭만적일 수만은 없는 이유는?

 

해제를 쓰신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 대의 자화상의 저자) 오찬호씨와 같은 질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저항이 사라진 젊음에서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있고, 개인의 행복을 향해 끼리끼리 집단으로 들어가 버린 일본 사회의 문제를 우리도 누릴(?) 수 있을까? 체념의 행복이 한국에서는 불가능할거라는 불안이 몰려온다. 국가 없는 국민에 대한 공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을 잠식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결국 생존을 위해 살아가다 쓰러지는 젊은이를 훨씬 더 많이 보게 될까봐 두렵다. 그들이 맘껏 저항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미래 역량은 무엇일까? 생물학적 어른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책 끝머리에서 우리 의 목표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한다. 삶의 모든 과정은 나를 알고, 세계를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결국 삶을 미학적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필요하다. 세상을 이해하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노암 촘스키의 말처럼 세상에 새로운 아이디어는 없다. 읽고 쓰고, 사람과 부대끼는 접속을 통해서 세계는 나에게 다가온다. 이 땅에서도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처럼 세계와 접속할 줄 아는 불행한젊은이를 기대해보련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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