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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을 넘어 -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앤서니 앳킨슨 지음, 장경덕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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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유토피아,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제안

불평등을 넘어-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앤서니 B. 앳킨슨 지음, 장경덕 옮김, 글항아리, 2015. 5.

    

불평등을 넘어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은 후에 접했다. 소득불평등은 전 지구적 화두다. 피케티 이후,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아주) 조금은 높아지지 않았을까 기대하지만, 견고한 자본주의에 스크래치를 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케티 열풍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임금 격차뿐 아니라,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관계에 집중하게 되었다. 나 또한 자본 소득이 노동 소득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사실을 객관적 사례로 이해한 직후라서 문제의식을 충분히 공유한 상태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 앤서니 B. 앳킨슨는 우리가 통제 밖의 힘에 무력하지 않고, 미래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책은 1부 진단, 2부 실행, 3부 반대 논리 검토와 실행 가능성 평가, 3부로 구성된다.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저자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방정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독자 수는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스티븐 호킹의 금언을 인용하며, 방정식이 하나도 없으므로 끝까지 읽어줄 것을 당부한다. 이 글에서 눈치 챘겠지만, 읽기 녹녹한 책은 아니다. 진보 경제학자의 반세기에 걸친 경제학 성과를 쉽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염치없는 과욕일 것이다.

  

1부에서는 불평등에 대해 염려해야 하는 까닭, 불평등의 정도를 보여주는 증거, 불평등의 경제학을 검토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들을 알아본다. 저자는 자본소득의 역할과 소유권의 균형에 대해 끊임없이 재고해야 한다고 언급한다. 전쟁, 전후 몇 십 년 동안의 유럽, 최근 10년 동안의 중남미에서는 불평등이 줄어들었다. 이는 시장소득 불평등의 감소와 효과적인 재분배의 결과물이다. 시장소득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가능함을 잘 보여준다. 정부는 어떤 방법으로든 시장 소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부에서는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다섯 가지 방안을 다룬다. 첫째 기술 변화와 대항력이다. 기술 혁신에 따르는 이득의 분배 문제, 사라지는 일자리, 오늘의 결정이 미래에 미칠 파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정책 결정자들이 기술변화의 방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근로자의 고용을 높이고, 서비스 제공의 인적 측면을 강조하는 형태의 혁신을 장려해야 한다(171). 공공정책은 이해관계자 간의 적절한 힘의 균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188~189).

    

둘째 미래의 고용과 임금이다. 저자는 정부가 바뀌더라도 유지될 수 있는 자발적 임금 규칙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임금에 대한 윤리적인 접근을 구체화하고, 소득 분배에 관하여 국민적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공론의 장을 마련하여 광범위하게 논의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출발이다. 정부는 실업 예방을 위한 명시적 목표를 채택하고, 원하는 이들에게 최저 임금을 주는 공공부문 고용을 보장해줌으로써 이 목표를 뒷받침해야 한다(202). 법령에 따라 생활임금으로 정해진 최저임금과 최저임금 이상의 보수에 대한 실행규칙이 있어야 한다(211).

   

셋째, ‘자본 공유.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수익률(r)과 경제성장률(g)의 차이에서 부의 분배를 결정하는 핵심 원리를 찾았다.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 보다 높아지면 불평등이 확대된다. 개인이 일생동안 부를 유지하는 것은 전반적인 소득증가율에 달려 있지만, 여러 세대를 생각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또한 각각의 세대에서 수많은 사람 사이에 부가 얼마나 고르게 나눠지는지에 달려 있다(226).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상속을 보장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기초 자본의 지급, 국부 펀드를 방안으로 제시한다. 정부는 일인당 보유 한도를 둔 국민저축채권을 통해 저축에 대한 플러스 실질금리를 보장해야 한다(239).

 

넷째, ‘누진 과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최고세율의 효과를 살펴보고, 상속과 부동산에 대한 과세, 자가 거주자 주택에 대한 과세와 주민세를 개혁하고, 연간 부유세를 부과한다. 상속받은 재산과 생존자 간 증여 재산에는 누진적인 평생자본취득세 체계에 따라 과세해야 한다(275). 피케티가 주장한 글로벌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를 강화해야 한다. 또한 개인과 기업이 어떤 조세 감면을 받을 수 있는 세제상의 혜택을 제한하는 최저한세(minimum tax) 세법을 실시한다. 기업들은 정상적인 세금과 대안적인 최저한세 가운데 더 큰 금액을 내야 한다. 또는 세금을 관할하는 지역 안에서 이루어진 매출액을 바탕으로 정할 수 있다(288).

 

다섯째, ‘모두를 위한 사회보장. 자녀 수당을 지급하고 아동 빈곤을 해결해야 한다. 저자는 모든 어린이에게 상당한 금액의 자녀수당을 지급해야 하며 이를 소득으로 보아 세금을 물려야 한다(306). 기존의 사회적 보호 제도를 보완하고 유럽 연합 전역의 어린이 기본소득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나라별로 참여소득을 도입해야 한다(314). 사회 보험을 새롭게 해 급여 수준을 늘리고 적용 대상을 넓혀야 한다(323).

 

 

푸딩인지 아닌지는 먹어봐야 안다.

    

3부에서는 이 제안들에 대한 반론을 숙고한다. 상호보완적인 공평성과 효율성, 국제협력의 가능성, 우리에게 그 많은 불평등 요소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제안들이 파이의 크기를 줄이지 않을 수 있음을 검토한다.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안들이 효율성을 저해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즉 공평성을 늘리면 효율성이 저해될 것이라는 가설은 증명되지 않았다. 둘 사이의 상관관계는 절대적이지 않다. 불평등이 효율성을 정말 떨어뜨릴 것인지는 해보지 않고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복지국가가 경제적 성과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가능성(364)과 같은 이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를 바라보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존재한다. 국제사회는 위기 상황에서는 서로 힘을 모았던 많은 역사적 사례를 가지고 있다. 국제 협력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은 가능성의 유무가 아닌 당위의 문제다.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담론이 형성된다면, 불평등은 극복할 수 없다. 역으로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정책이 실행될 수 있다는 믿음이 다수의 신념이 된다면, 불평등은 얼마든지 극복해나갈 수 없다. 평등은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수렴의 과정에 놓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평등을 없애고 평등을 확보에는 무수한 당위가 존재한다. 당위가 설정된 다음에야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저자의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에 대한 확신이 가지는 힘은 치밀한 논리와 자료에 있다. 불평등을 넘어는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실행해야 할 구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해결책도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사회문제에는 해결책이 있다. 이 책의 목적은 -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제시하기 보다는 -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고히 하는데 있어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불평등을 넘어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과 맥을 같이한다. 이 책의 전후에 피케티를 읽는다면 생각을 확장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피케티의 책이 보수, 진보 양 진영이 함께 읽을 수 있었던 것은 Marx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불평등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가 분배되는 역사적 동학을 잘 분석했다. 저성장 시대에서는 세습자본주의가 고착화된다. 피케티가 제시하는 대안은 조세 체제의 개혁이다. 또한 교육 개혁을 통해서 지식과 기술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불평등을 넘어서는 방안은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국경을 넘어 전지구적인 차원의 정책을 필요로 한다.

 

진보적인 세금에는 때로는 폭력적인 쇼크도, 때로는 큰 투쟁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 국제적인 차원에서 불평등을 넘어서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지 않고, 세습 자본주의를 강화한다면, 국제적인 차원에서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영국 보수당 의원 퀸틴 호크의 언급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만일 우리가 국민에게 개혁을 선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혁명을 선사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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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 동아시아 속 우리 건축 이야기
김동욱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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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보적이면서 독자적인 동북아 3국의 건축 이야기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김동욱 지음, 2015. 5. 김영사.

 

한번쯤 내 손으로 집을 짓고 싶은 생각을 한다. “울도 담도 쌓지 않은 그림 같은 집”. 내가 막연하게 꿈꾸는 소망이다. 미학적인 건축물을 보면 시선을 거두기가 어렵다. 언젠가 짓게 될 내 집에 대한 로망도 있고, 살림집을 닮은 카페에 가면, 스케치북에 엉성한 도면을 그려보기도 한다. () 자형으로 지어진 집의 마당에서 사계절을 느낄 수 있다면, 우울증이 깊어지지 않을 것도 같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고층아파트의 17층이다. 창 밖 세상과 분리된 느낌 탓인지, 여러 이유가 더 있기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삶을 관망하듯 살게 된다. 김훈 선생께서 자전거 여행에서 그 민짜 평면은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공간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하셨듯이, 공간은 생활 방식을 일정 정도 강제한다. 뿐만 아니라 평생의 수고를 집 한 채에 쏟아 붓는 강도 센 노동을 요구한다.

 

올 여름이 시작될 즈음, 지인께서 내 손으로 내 집 짓기’ 60차시 연수를 함께하자 하셨다. 산책 길 마주치는 주택이 예사롭지 않던 차에 마음이 동했지만, 개인 사정상 함께하지는 못했다. 안부 차 연수 잘 받으시고 계신지 여쭈었더니, 연수를 받으면 받을수록 집 짓는 일을 포기하게 된다고 하신다. 집짓기가 낭만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고민을 키우지 않는다면 십에 팔 할은 불만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한국 건축에 대한 신화를 극복하고자 이 책을 지필 하였음을 서두에 밝히고 있다. 세 국가의 건축을 비교함으로써 좀 더 객관적으로 한국 건축을 바라보려는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자문화 중심주의와 사대주의를 벗어나 자국의 문화를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랑할 가치가 있는 한국 건축의 장점, 그 이면에 가려져 있는 한계를 메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비교론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나무로 짓는 집의 이점

2. 부드러운 곡선의 미학, 지붕

3. 천변만화하는 목조건축의 백미, 공포와 화반

4. 고인돌에서 천상의 세계까지, 석조물

5. 구들과 확산과 좌식 생활

6. 바람이 불어오는 문, 창호

7. 휘황찬란한 아름다움, 채색과 조각의 세계

8. 엄정성과 역동성 사이, 공간 배치와 누각

 

건물의 재료, 지붕, 난방, , 누각, 공간 배치와 색채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하여 세심하게 다루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책에서 언급된 건축에 대한 전문 지식을 통해서 건축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전통 건축에 대한 무지를 통감하며 책을 읽었다. 석조 건물이 표현하지 못하는 나무의 부드럽고 섬세한 속성, 집의 대들보를 올리는 의식인 상량식, 넓은 공간을 만들지 못하지만, 기둥과 보에 의존한 동아시아 건축, 조망권을 확보한 중국 탑과 달리 상징으로 존재한 한국과 일본 탑, 3차원 곡선 지붕, 부드러운 처마를 고집하느라 변화에 뒤처진 조선, 임금 침전 위의 용마루 없는 지붕 등 건축의 변화 과정을 세세하게 다룬다.

 

세 나라의 건축이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의 건축은 단독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호교류를 통해 이루어낸 동아시아 건축의 성취. 모든 문화가 그러하듯 건축도 돌고 돌아서 한국 환경에 맞게 발전하였다. 의자는 불교와 간다라 지역 문화를 혼합한 인도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면 시작된 생활 문화다. 3세기경 의자에 앉은 부처 모습이 전파되면서 의자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거쳐 일본까지 전해졌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성어처럼, 전파된 문화는 토속 문화와 접촉하면서 취사선택되고,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낸다. 중국문화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고,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을 살리는 배치와 형태를 고집했다. 일본 역시 편백나무 일종인 히노키를 가지고 지붕을 덮었다.

 

저자는 한국 건축은 명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 3국의 쇄국 정책이 19세기 까지 이어지면서 답습만 하게 되었다고 본다. 외부 자극 없이, 유교의 기술 천시 문화는 창의성을 사라지게 했다.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유교 이념은 왕실 외의 화려한 건축을 기피했고, 정교함과 기술적 완성도는 떨어졌다. 그럼에도 조선 건축의 미덕은 건물을 독자적으로 짓지 않고,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건축은 외부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우리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장인의 노력이 깃 든 누각

    

특히 누각에 대한 설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컵의 용도는 컵에 달려 있지 않다. 무엇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침실, 식당, 거실, 화장실이 분리된 서양 건축과 달리, 우리는 한 공간을 변형시켜 가며 침실로, 식당으로, 거실로, (때로는 화장실로까지) 사용한다. “소리를 통하여 듣는 것은 소리 없음에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형체를 통하여 즐기는 것은 형체 없음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서경덕,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 ). 누각은 용법이 한정된 건축물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무한의 용도를 만들어냈다. 마당이라고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축제의 장소이고, 모임의 장소이고, 사색의 장소이고, 자연과 조우로 이끄는 공간이다. 계절이 스치고 지나가며 방랑객의 발길을 이끌었을 것이다.

 

왜소해진 조선 건축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곳이 누각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마을의 가장 전망 좋은 곳에 누각이 자리 잡았다. 창덕궁의 주합루, 부석사의 안양루, 창녕 관룡사의 원음각 등은 우리의 심신을 맑게 하는 절경을 자랑한다. 규격화되고 정확하게 계산된 아폴론의 시선으로 잡히지 않는 공간, 누각에서는 넘치는 생명력을 품고 있는 디오니소스가 느껴진다. 천명의 사람에게 천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온돌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넘어갔으나, 온화한 기후 조건 때문에 곧 사라졌다. 습기를 잡는 것만으로 온돌을 구들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는 돌을 얹는 견고한 건축은 어려웠을 법도 하다. 한국에서는 12세기가 되면 전면 온돌로 발전한다. 아궁이까지 온돌은 한국 일반 주택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온돌은 좌식 생활 중심의 생활 패턴을 만든다. 의자와 침대가 사라지고 좌선을 하게 된다. 겨울밤 한 장의 이불에 발을 넣고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한국만의 문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온돌 덕분이었다. 온돌에는 상하 신분 구분이 없는 한국의 보편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한국 건축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문살과 창호다. 전북 부안 개암사를 특별히 사랑하는 것은 주변의 산세와 가까운 바다도 좋지만, 창살 때문이었다. 얼마 전 가보았더니 십년 전의 아름다운 길과 문창이 모두 바뀌어 있었다. 새로운 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과거의 그곳 문창살은 어떤 예술 작품보다 아름답고 소박했다. 절을 미학적으로 장식하는 방점이었다. 그 아름다운 문살을 덮고 있는 창호는 바깥 세계와 적절한 경계를 이루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빛과 소리를 흡수했다. 건축학적 관점에서 보면 덜 실용적일지 몰라도, 나 어릴 적 가을이면 겨울을 위해 두텁게 붙이는 창호에 마른 꽃잎 끼워 넣던 운치가 생각난다.

 

건설신화를 써내려갔던 개발 부흥의 시대가 종착역에 다다른 지금, 우리는 다시 (폐쇄적인 유교 문화 속에서 건축이 쇠퇴했던) 조선 건축에서 영감을 얻어야 할지도 모른다. 저성장(또는 마이너스 성장) 시대에는 욕망의 사이즈를 줄이고, 공간의 경계를 없애 함께 살아가는 방법만큼 경제적인 것도 없다. 집도, 건물도 소유가 아니라, 공유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건축가 정기용선생님의 집에 대한 사유가 내 집에도 담기면 좋겠다. 공공건축물은 아닐지라도,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눈에 띄지 않고 모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에 남긴 아쉬움 하나.

 

평생 우리 건축을 연구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우리 건축을 바로 보기 위한 노력에 존경을 표한다. 단 한. . . 건축의 비교를 통해서 상보적이고 독자적인 각 국가의 건축을 알 수 있었으나, 건축물과 연결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 없다. 각 나라마다 처한 역사적 상황과 지리적 여건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면, 그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다수의 삶은 어떠했는지를 역동적으로 엮어졌으면 좋았을 것이다. 삶이 배제된 건축 이야기가 건조하게 다가온다. 건축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희미하다. 또한 건축을 매개한 저자의 역사관, 동북아의 지정학적 관계, 또는 현재와 과거를 연결 지어 보려는 노력이 더해졌으면 좋았을 것이다. 과하게 객관적인 사실에 치중하다 보니, 건축을 바라보는 저자의 사유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건축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되, 그 건축에 대한 가치는 저자의 세계관에서 나올 것이다. 거시와 미시를 함께 엮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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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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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추동력 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 2015. 5.

 

이 책은 표지에서 한번 멈추고, 서문에서 다시 멈춘다. 우리 모두 불안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을 극복하라고 외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근원을 알 수 없는 이 불안이 사회에서 온 것인지, 나의 기질에서 출발한 것인지 파악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 불안에 대한 사회학적, 심리학적 분석이라니,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책은 사회학보다는 심리학에 살짝 치우쳐 있다. 최고의 미덕은 역사적인 사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를 포함한 예술작품까지 폭넓은 분석을 한다. 현재 우리의 한국 상황에서 읽어볼만한 의미 있는 책이다. 2015년 한국은 존재 자체가 불안이다.

 

나는 젊은 날, 아주 짧게 서울에 거주했다. 이후, 베이스캠프가 없는 서울에 올라가면 늘 친척과 지인 집에 신세를 졌다. 온전히 혼자였던 경험이 없었던 거다. 늘 사람들과 함께하는 곳이 서울이었다. 약간은 들떠 있고, 일상에서 비켜선 느낌이 있었다. 이 느낌을 살짝 비트는 경험이 이번 여름에 있었다. 전과는 다르게, 여행자적 시선으로 서울을 느껴볼 참이었다. 광화문에 호텔을 잡고, 시간 되는대로 청춘이 얼룩진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과거,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과거, 불안에 휩싸인 새파란 청춘의 가 서울에 있다. 이제는 어느새 지방도 서울을 닮아있다. 홍대, 북촌, 서촌은 지리적으로는 서울에 있지만, 유사 문화로써 지방 곳곳에 퍼져 있다. 서울이라고 해서 따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내게 유일성을 가진 공간으로 존재한다. 지금은 십년 후의 내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다. 퇴직을 원할 때가지 큰 이 이변 없이 가르치는 일을 생업으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십대 서울에서 나는 1%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 연애를 하게 될지, 결혼은 가능한지,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미래는 열려 있었으나, 손에 쥐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내게 미래에 대해 아주 조금만 팁을 준다면, 어떻게든 힘을 내어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젊은이들이 느낄 불안의 강도를 간접 체험하면서, 그들에게 미래는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레나타 살레츨의 불안들은 거기에 맥이 닿아 있다.

 

저자 레나타 살레츨은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적 라캉주의 철학자. 런던정경대학에서 강의했다. 충분히 신뢰를 주는 이력이다. 저자는 불안이 사람을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 매개가 되는 바고 그 조건(40)이라고 말한다. 20004년 출판된 이 책에서 저자는 전쟁, 실패, 성공, 사랑, 모성, 증언과 관련된 불안을 밀도 있게 분석한다.

 

불안, 억압된 리비도

 

불안은 내적, 외적 위험으로부터 주체를 보호하려는 심리적 장치다. 불안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원인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적으로 불안은 거세 위협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사회적 좌표와 타인과의 관계는 늘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불안에는 불안정서와 불안 신경증이 있다. 불안정서는 외부를 컨트롤할 수 없을 때 나타난다. 하지만 둘은 강렬하게 연결되어 있다. 불안은 개인인 내가 느끼지만, 그 불안을 만드는 메커니즘은 보편적이다. 두려움은 사스보다 빠르게 퍼져(38) 간다.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유발한다. 불안은 근원을 모르기 때문에 공포다. 두려움은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불안과 우울 모두 대상 상실의 서로 다른 반응이다. 불안은 대상 상실로 인한 위험의 신호라면, 우울은 주체가 상실한 대상과 고집스레 동일시한다. ‘애도와 자살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애도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과 분리되는 과정(67)이지만, 이를 통해서 주체는 상실한 대상과 잘 이별할 수 있다. 애도하는 주체와 달리 우울증 환자는 상실과 결여를 혼동한다(70).

 

이 책은 라캉의 주이상스(joissance)’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라캉은 불안이 거세 위협에 대한 주체의 반응이라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한다. 주체의 형성에서 그런 의미의 불안은 욕망의 형성에 앞서는 무엇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주체가 말하는 존재가 될 때 언어는 주체를 특정 짓고 주체에게서 어떤 본질적인 주이상스를 빼앗는다. 언어 체계에 들어가는 상징적 거세 과정에서 몸에서 주이상스를 빼내 그것을 단지 가장자리의 부분 충동(partial drives)으로 남겨 놓으면 불안은 이후 이 상실된 주이상스를 지향하는 자극이 된다(68~69). 욕망은 늘 불만족과 연결되어 있는 반면, 주이상스는 주체를, 보통은 아주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대상 가까이 데려간다(108).

 

환상은 주체의 불안을 막아 준다(71). 대타자의 욕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체는 환상을 통해서 대타자의 욕망에 가 닿으려고 한다. 현실과 환상의 매개에 예술이 있다. 예술에서 불안이 사라지고 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예술가들은 서구 문명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며 맹렬하게 비판했다. 전쟁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심리적 외상을 평생 끌어안고 산다. 외적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할지라도, 전쟁 체험이 삶 깊숙이 자리 잡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지난 일을 극복할 것을 강권한다. 불안을 회피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에서 불안을 억압한다.

 

성공 역시 더없이 행복하고 조화로운 상태는 아니다. 성공한 사람에게 불안은 욕망을 계속 살아있게 하는 충동이 된다. 가진 게 많을수록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은 선택이 많아질수록 이상적인 결과를 끌어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욕망하는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소비 지상주의의 지배적인 마케팅이 된다. 특정 연애인이 광고하는 제품을 사용하면 그 연애인이 될 것 같은 욕망을 부추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효리가 떠오른다. 본인이 화장품 광고를 하며 겪었던 심적 고통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그 화장품을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효과를 과대 광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좋은 삶을 나누고 싶었던 그녀의 블로그를 다시 보긴 어려울 것 같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화된 자본주의 속에서 개개인은 개별화된 시장으로 존재한다. 제레미 레프킨이 언급했듯이 우리가 가진 대부분의 권리는 소비와의 접속에 있다.

 

그 당시에 마케팅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처럼 보이고 다른 누군가처럼 처신하도록, 즉 권위와 동일시하도록 납득시키고자 했다. 반면 오늘날의 광고는, 사람들이 여전히 역할 모델을 (예컨대 연애 산업에서) 찾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그런 모델들 속에서 과장된측면을 발견할 것이고, 시장의 지시에 따르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 기대고 있다. 그런데 이 새로운 마케팅 전략은 소비자들에게 많은 걱정을 야기하고 있다. 사실 주체에게 불안을 유발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117~118).

    

사랑 역시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우연히 서재를 정리하다가 오래 전 썼던 편지 묶음을 발견한 적이 있다. 각각의 편지는 수신자가 전제하지만, 수신자를 지운다 해도, 수신자가 동일하다고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내용들이다. 또한 수신자에게 닿지 못한 편지들이다. 대상 상실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는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에 가 닿기를 열망한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부분의 사랑은 병적이다. 연애편지는 사랑이 얼마나 정신병적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병적 증상이지만, 불치병이 아니다. 독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내성을 키운다. 불안과 우울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모성 역시 불안과 결부되어 있다. 불안은 때에 따라서 모성의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하다. 얼마 전 자신의 아이를 죽인 여자에 관한 뉴스를 보았다. 남편과 부부 싸움 후, 배우자에 대한 분노로 아이를 죽였다고 한다. 아이를 죽인 다음 여자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살인에 대해 자백했다. 우리 문화는 자식을 소유물로 보는 경향이 강해서, 생계 비관 자살에서 아이들이 먼저 사례되는 경우가 많다. 서구 문화권에서 일어나는 자살 중에는 여성이 자신에게 벌을 주는 방식으로 친자 살해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유아 살해가 가끔 등장하는 것은 만들어진(혹은 강요된) 모성에 대해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프로이트는 어머니 신분은 여성들이 결국 중요한 무언가 -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아이 -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결여를 극복하려는 하나의 방법(191)이라고 했다.

 

아기를 낳은 직후, 출산 우울증을 호소하는 여성이 (생각보다) 많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임신은 내 몸에 이질적인 세포가 자리를 잡고, 임부의 영양을 뺏는 과정이다. 따라서 출산은 임산부를 힘들게 했던 세포가 떨어져 나간 것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 아이는 다시 엄마가 집어 삼켜버릴지도 모르는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엄마의 자궁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아폴론적 시선으로 문명을 건설했다고 한다. 때문에 성장한다는 것은 아이가 어머니와의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다.

 

인분 교수가 실시한 검색어 1위에 올라와 있다. 수년 동안 지도 교수로부터 언어, 신체 폭력 뿐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인분을 먹였다는 내용이 전 국민에게 전해졌다. 이는 갑질 논란 이상을 고민하게 한다. 교수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현재 기사로 알려진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도 한다. 한 개인에게는 아우슈비츠와 같은 고통이었을지도 모른다. 악은 그렇게 일상 속에서 조용히 일어난다. 피해 학생이 수감되어 있는 교수를 찾아갔다고 한다. 가해 교수는 너도 이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하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고, 피해 학생은 그러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나는 모든 진실을 밝힌 학생이 앞으로도 불안과 우울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가해 교수는 피해 학생의 대타자였을 것이다.

 

저자는 불안을 주체를 외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신호로 간주한다. 역으로 외상적 기억은 불안 상태를 극복하는 해결책(227)이 된다. 마지막 6장은 증언과 관련한 불안을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특히 영화 <인생의 아름다워>를 사례로 인상적인 분석을 펼쳐간다. 아들에게 수용소를 놀이터로 만들어 끝까지 살게 만든 아버지의 위대함은 환상 게임(252)에 있지 않다. 아이가 대타자의 욕망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돕고, 죽음으로써 대타자와 분리될 수 있도록 아들에게 자유를 준다. 아들은 침략자뿐 아니라, 대타자인 아버지로부터도 해방(252~253)을 경험한다.

 

불안 없는 사회의 불안

 

우리는 자기 계발, 심신수련, 힐링, 멘토, 웰빙, 웰다이가 범람하는 한국 사회에 살고 있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이미 오래 전 변질되었다. 불안한 사회에서 행복한 개인으로 살기를 강요한다. 모든 불안의 문제를 사적으로 환원한다. 사회적인 문제에 눈감게 한다. 소비를 통해서 좀 더 나은 삶이 가능할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있는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는 것, 나와 같은 불안을 경험하는 사람과의 연대를 돕는 것, 불안은 삶의 추동이자, 결과임을 직시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불안을 암세포로 취급하지 않은 것에서 출발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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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샹떼 - 세계 영화사의 걸작 25편, 두 개의 시선, 또 하나의 미래
강신주.이상용 지음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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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시선, 또 하나의 미래

씨네썅떼강신주·이상용, 민음사, 2015. 5.

 

반가운 책이다. 한번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영화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 책에 언급된 영화를 다시 찾아본다. 영화관 죽순이로 살았던 세월이 제 값을 한다. 씨네썅떼에 실린 스물다섯 편중에서 두 편,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을 제외하고는 한두 번 봤던 영화들이다. 이 책이 반가운 이유다. 일방적으로 영화에 대하여 기술하지 않고,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철학자와 평론가가 나누는 대화에 나를 초대해 준 느낌이다. 미디어 세대들에겐 대체로 그러하겠지만, 영화는 내게 학습의 장, 사회화의 공간이었고, 힐링이었으며, 때론 팝콘이었고, 예지 몽과 같은 미래의 주문이었다.

 

영화, 그리고 나

 

영화를 귀하게 구해 보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원한다면 언제, 어디에든 손쉽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중소도시라면 모를까, 면 동네에 극장이 흔치 않던 시절, 나는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영사실을 드나드는 행운을 누렸다. 우리 집은 영화관에 빵과 음료를 제공하는 도매상이었다. 배달 가는 리어카나 차에 실려 영화를 보러 다녔다.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성인 영화, 아동 영화 가리지 않고 모든 영화를 섭렵했다. 70년대는 대부분이 반공영화와 무협영화, 호스티스 영화였고, 80년대 들어서서 헐리웃 키드가 되었다. 다른 세계를 엿보면서 인간 군상의 보편성과 고유성에 대해 스폰지처럼 흡수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생과 사회인의 경계선에서, 취업은 유능과 무능의 기준이 되었다. 학생도 아니고, 취업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수년 동안 유지되었다. 책을 읽는 것은 사치였지만, 의지할 것은 책뿐이었다. 책이 읽히지 않는 시간은 거의 비디오를 끼고 살았다. 가끔 가다가 친구를 만나도 꼬여있는 마음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루저는 루저와 연결되는 법이다. 뒤룩 뒤룩 살이 찌고 처져 가는 몸뚱이처럼 정신도 둔해졌다. 그때 내 영혼을 지탱해준 버팀목은 비디오테이프이었다. <스크린> 같은 잡지를 길잡이 삼고, 전작의 취향을 살려 배우 중심, 감독 중심으로 영화를 섭렵했다. 집 앞에 있던 비디오 가게에서 한 번에 세 개씩 빌려다 봤던 비디오들이 오늘날 내가 살아가는 자양분이 될 줄을 그때는 진정 몰랐다. 인생은 그렇게 내리막길로만 이어질 줄 알았던 거다.

 

접근성의 변화로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한때는 저작권에 대한 의식 없이 영화를 틀어주던 카페들이 더러 있었고, ‘비디오방이 대학 앞에 하나둘 들어서면서 술 마시기 전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정규직이 되어 십 수 년 정도, 휴일 아침 조조영화는 나만의 의례 행위였다. 혼자서, 커피 한잔 들고, 듬성듬성 앉은 드문 익명의 관객과 함께했던 시간 속에서 청춘이 조용히 흘러갔다. 평생 영화와 커피를 책임져줄 것 같은 사람과 짧은 만남을 같기도 했다. 현실의 삶에 서툰 나를 영화 속에서 숱하게 발견했다. 낮은 자존감에 스크래치 내는 일이 적어졌다. 진정한 영화쟁이들, 분석이 소름끼치는 평론가도 여럿 뵈었다. 역시 나는 제대로 읽는 독자, 제대로 보는 관객이 제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 여 년의 영화사 에 수작으로 회자되며 이름을 올린 영화. 대부분의 평론가의 이견이 별로 없을 스물다섯편의 영화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다. 일단 영화는 온전히 나와 화면으로 마주한다. 관객의 지평 안에서 읽히는 것과 놓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함께 본 사람이 있다면 그와의 대화 속에서, 혼자라면 평론가의 평론이 두 번째 대화가 될 것이다. 평론가의 글에 경도될 것은 없다. “끝내 영화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들(15)”이듯, 책을 완성하는 것은 독자들이므로. 영화는 감독, 배우, 스텝, 영화사의 입장이 골고루 반영되어 있다. 영화를 읽은 방식은 다양하다. 그럼에도 늘 개인의 판단은 위태하다. 지지든, 철회든, 타인의 생각과 내 생각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마련이다.

 

철학자 강신주 평론가 이상용

 

씨네썅떼는 우리 각자가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을 함께 분석하고 언어화하여 성찰할 수 있는 책이다, 철학자 강신주와 평론가 이상용이 함께 말하고 쓴다. 영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읽는 것이라면 이 책은 메타포 없는 사실로써만 그 의미를 함의한다. 6개월의 시간, 스물다섯편의 영화, 876쪽에 달하는 이 책에 대한 서평은 빙산의 일각이 될 것이다. 저자들의 수고로움이 우주라면, 서평은 운석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당연히 한꺼번에 읽을 책도 아니다. 두고두고 참조할만하다. 철학의 안받침 없는 영화 비평, 영화 문법에 대한 이해 없는 철학적 사유가 가지는 공허함을 최소화한 책이다. 드디어 우리에게 이런 책이 왔다는 기쁨, 철학적 깊이를 가지고 사유할 텍스트로써 영화를 바라본다.

 

영화가 만들어진 물리적 시간과 연대기적 시대의 정신을 결합하였는데, 그것이 그렇게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조에 포함되지 않는 동시성의 비동시성이 존재하겠으나, 여기 수록된 영화들을 네 갈래로 나누는데 특별한 무리는 없어 보인다. 1. 영화라는 테크놀로지(1895~1936), 2. 영화의 사려 깊은 의미(1939~1959), 3. 영화, 욕망을 발산하다(1960~1972), 4. 불안한 영혼, 방황하는 영화(1974~2004)는 각각의 시기를 설명하는데 주제문으로 타당하다. 저자들은 혁명, 전쟁, 운동 등을 오고가면서 사건으로서의 영화’(13)로 네 갈래를 나누었다. 스물다섯 편의 감독(director)이라기보다는 작가(author)’.

 

1. 영화라는 테크놀로지(1895~1936)

 

뤼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을 상영하면서 시작된 영화는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 놓았다. 영화는 <열차의 도착>과 함께 인류에게 도달했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상 기록은 다큐멘터리로, 멜리에스의 영화는 SF 영화의 시작이 되었다. ‘위대한 무표정(81)’의 버스트 키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현한 에이젠쉬타인, 인간의 무의식을 그려낸 표현주의 감독 프리츠 랑, 자본주의 잔혹 동화를 그려낸 찰리 채플린이 영화라는 테크놀로지를 완성한다. one scene one cut의 홈비디오가 아니라면, 영화는 조각조각을 이어붙인 누더기 천이다. 두 시간 분량의 영화에는 거의 5천 여 개의 cut이 들어 있다. 수없이 많은 정보가 들어있는 오늘날의 영화를 백 여 년 전 사람들이 본다면, 몇 분 안에 기절할 거라는 가정을 충분히 해볼 수 있다. 편집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를 보는 우리를 에이리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2. 영화의 사려 깊은 의미(1939~1959)

 

1, 2차 세계 대전을 통과하면서 인류의 실존이 화두로 등장한다. 복잡해진 인간관계, 관점은 사태를 다르게 드러낸다.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 삶을 진정으로 들여다보게 만들어 준 네오리얼리즘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 뮤지컬 영화의 시작 진 켈리, 가족 해체를 복잡하고 미묘하게 담아낸 <동경 이야기>(1953)의 오즈 야스지로, 서부에 길을 낸 <수색자>(1956)의 존 포드, 금지된 욕망을 그린 로베르 브레송 감독을 다룬다. 2부에 다루어지고 있는 거장 감독들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오마쥬로 인용되고 있다.

 

3. 영화, 욕망을 발산하다(1960~1972)

 

이제 영화는 욕망을 발산한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개인의 사적 삶과 내밀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육체를 탐색한다. 내 안에 자리 잡은 타인, 그것은 나의 욕망이다. 욕망은 자기 안의 분열을 야기한다.

 

look & gaze : 보다와 응시의 사이에서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게하는 히치콕의 <싸이코>, 여기에서 시선은 공포 그 자체이다. 370쪽 두 저자의 대화는 영화 내용에서 뿐 아니라, 영화 자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하여 사유하게 한다.

 

강신주 : look.의 주체는 나이고, gaze의 주체는 타인입니다. 어머니에게 청소하라고 잔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딸들은 결혼하고 독립하고 나서도 집 정리를 열심히 해요.

이상용 : 히치콕 영화는 look보다는 gaze 개념에 가깝습니다. 여러 인물들의 시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한곳으로 모입니다. gaze는 관음증적 욕망과 동시에 장차 받게 될지 모르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잘 설명해 주는 용어입니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는 자본주의에서 중산층의 속물근성과 단독자로서 그들을 해체시키는 하녀를 보여준다. 쥐를 잡아 죽이는 것과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다. 고깃덩이 육체를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다만 인간에게는 추악한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 <미치광이 피에로>(1965>로 장 뤽 고다르는 (카메라는 펜이라고 외쳤던) 누벨바그의 대표 주자가 된다. <확대>(1966)를 통하여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찍으려는 것과 찍힌 것 사이에 늘 간극이 존재한다.(470)”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이제 인간의 욕망은 좀비를 통해 드러난다. B급 감수성으로 현대인의 군상이 좀비로 형상화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은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물어뜯어 좀비가 되고, 죽은 육체는 다시 살아난다. 관습적으로 그들이 마지막 공격하는 지점은 (백화점 또는 월마트와 같은) 자본주의 생산품이 가득한 장소다.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기호와 취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판을 느긋하게 읽고, 와인을 감식할 수 있는 미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달리 말하면, 생산이 아니라 소비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부뉴엘의 바통을 홍상수 감독이 이어받았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4. 불안한 영혼, 방황하는 영화(1974~2004)

 

1970년대 이후, 영혼은 불안에 잠식당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무한 경쟁과 일을 찾아 떠도는 노마드 속에서 자연스런 현상이다.

 

이제 영화 속 인간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모든 것이 불안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살아가는 것, 우리 앨런은 말한다. 조증과 울증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고. 인간은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증상을 오고가는 방황하는 존재일 따름이다.(572)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같은 뉴저먼 시네마 감독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는 현실을 기록한다. 파시즘은 전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도처에 퍼져 있다. 일상을 수다로, 현실을 수다로 보여주는 것에 우디 앨런만큼 뛰어난 감독은 없다. 뉴요커는 로마, 파리, 바르셀로나와 같은 대도시를 전 방위로 뛰어다니며 사적 삶의 보편성을 포섭한다. 타르타코프스키의 영상 미학은 한 편의 시()가 된다. 친구에게 노트를 전달해주기 위해 오후를 다 보내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통해서 우리는 불안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불안은 희망과 상반된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 위치에 있다. 중국 5세대 감독 장예모는 <붉은 수수밭>으로 민중의 삶을 보여주며 중국 영화의 자존심을 세웠다.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는 자본주의의 깊은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소수자에 앵글을 맞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생물과 사물의 외형을 빌려 인간을 담는다. 이제는 배우보다는 감독으로 자리매김을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헐리우드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책날개를 덮으며

 

씨네썅떼는 앉은 자리에서 읽고 정리될 물성은 아니다. 도서관에서 빌려볼 책도 아니다. 서재에 꽂아두고 우울이 찾아올 때마다 영화 한편과 함께 참조할만한 책이다. 나 또한 한꺼번에 읽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한편씩 쪼개어 읽었다. 서평을 쓰는 부담만 없다면, 매주 한편만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봤던 영화 다시 보고, 그들의 토크 콘서트의 관객이 되고 싶었다. 후일 이 책을 가이드 삼아서 다시 한편씩 보고, 읽고, 쓰고 보고를 반복해보고 싶다.

 

인문학 강의가 넘쳐나는 시대다. 매주 시간을 내기 번거로운 이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은 고맙기 그지없다. 평론가 이동진 · 소설가 김중혁이 함께 쓴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은 팟 캐스트 빨간 책방에서 나눈 이야기를 기록했다.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그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들의 대화에 초대받은 듯 페이지를 넘긴다. 글 보다 말이 가까운 시대다. 원전보다 주석이 중요한 독서법이기도 하다. 그들은 바쁘게 페이지를 넘긴 독자가 놓칠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보석을 발견하여 빛나게 닦아 놓는다. 두 사람의 신뢰와 호흡이 대화의 질을 결정한다. 6개월 간 강신주와 이상용의 신뢰와 호흡의 결 또한 이에 뒤지지 않는다.

 

http://www.ala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SearchTarget=Book&SearchWord=%BF%EC%B8%AE%B0%A1+%BB%E7%B6%FB%C7%D1+%BC%D2%BC%B3%B5%E9&x=0&y=0

 

삶과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삶은 영화의 소재가 되고, 영화는 앞선 미래가 되기도 한다. 교육학을 전공한 교수님과 담소 중에 영화 몇 편을 추천해드리고 싶었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여쭈었더니, 수년 동안 영화를 본적이 없다고 하신다. 논문, 학회, 수업의 고된 노동 강도를 생각하며 이해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었다. 소설과 영화를 보지 않고 인간에 대한 연구가 가능한가? 혹시 그래서 이 나라의 인문학은 지식으로만 존재하거나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삶은 정제되어 있지 않지만, 영화는 정제된 삶을 가시화한다.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look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의 gaze. 대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메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통찰이다. 영화를 보는 것, 철학의 시작이다. 철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영화관을 찾아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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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여지도 - 두 발과 땀으로 써내려간 21세기 대한민국 노동의 풍경
박점규 지음 / 알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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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기록되어야 할 노동의 지도, 노동자를 위한 책

노동여지도, 박점규 지음, 알마, 2015. 5.

 

<내일을 위한 시간>(2014), <또 하나의 약속>(2014)

 

한반도 노동의 풍경을 써내려간 노동운동가 박점규의 노동여지도를 읽으며 계속해서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의 <내일을 위한 시간>을 떠올렸다. 실직 상태인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는 하루 종일 동료들을 찾아다닌다. 동료들이 각자 받아야 할 보너스 대신 산드라의 복직에 투표해줄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동료들은 보너스를 포기할 수 없는 각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산드라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동료의 복직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동료 가족에게 산드라는 불청객이 되어 있다. 모든 것은 상황의 문제다. 선택은 동일한 조건일 때 가능할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그들이 자유의지와 보편 선을 지켜낼 수 없도록 하는 힘이 외부에 존재한다. 동료들의 도덕성 너머에서 개인의 선택을 강제하는 힘,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내일 투표할 때, 보너스 대신 나의 복직에 투표해줄 수 있니?”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답답함이 길지 않은 러닝 타임 95분 동안 계속된다. 실직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는데 95분은 부족하지 않다. 동료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반복되는 이 동일한 대사는 조금씩 비틀어지며 긴장을 만든다. 머리는 이해하지만, 심정은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분노로 솟구친다. 그럼에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 몫을 포기하는 벗들이 던져주는 메시지. 제목처럼 현재는 내일을 위한 시간이 될 것이므로.

 

같은 해에 개봉한 또 한편의 한국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공화국에서 이십대 꽃다운 삶을 마감한 노동자의 삶에 대한 우리 각자의 책임을 묻는다. 거대한 골리앗 삼성 수원 1~3 산업단지 466개 업체에서 8,030명이 일하고 있지만,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거의 없다(15).” 얼마 전 택시를 탔더니, 택시 기사님이 아들 자랑을 하신다. 예의 상 응대의 질문으로 어느 회사 다니냐고 물었더니, “대한민국에서 최고 좋은 회사 다녀요.” 하신다. 삼성이다. 대한민국 최고 좋은 회사라는 삼성에 노조는 없고, 직업병으로 죽어도 사람들은 있다. “딸을 읽은 아빠와 아빠를 잃은 딸들 있다.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스무 살 어린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택시 기사 아버지 황상기씨는 삼성의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진실의 문을 여는 힘겨운 싸움을 홀로 시작했다. 숨진 딸을 태우고 태백산맥을 넘었던 아버지는 딸과의 약속을 7년 만에 지켜낸다. 아버지의 사투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만들었다. 이제 또 하나의 약속은 동료들과 시민이 함께 지켜내야 한다.

 

쌍용차 봐라, 회사 망한다.”(68)

 

2009년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이 기나긴 싸움에서 세상을 등졌다. 쌍용차 실직자 남편은 투쟁 중이었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들과 딸을 등교 시킨 후 아내는 베란다에서 그대로 뛰어 내린다.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러한 죽음이 계속 이어졌으나, 일면 뉴스로 보도되지 못했다. 사내하청노동자가 산에서 목을 매 자살한 이후 24명의 동료와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쌍용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멈췄던 숫자는 2014423일 스물다섯 번째 죽음으로 이어졌다. ‘쌍용호선장은 구명조끼도 없는 하청노동자들을 가장 먼저 배에서 내몰았고, 배가 위험하다는 가짜 방송을 하며 정규직들에게 배에서 내리라고 했다. 노동조합은 함께 살자라며 싸웠다(73~74). 투쟁이 길어질수록, 길어진 싸움은 희망을 절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정부는 나쁜 일자리를 늘리는 데(72) 우리는 세금을 사용했다. 2009년 여름, 77일 전쟁의 상흔은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우리는 희망버스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지역 본부 지도위원, 김진숙씨는 2011년 한진중공업 35m 크레인에서 309일 고공농성을 벌이며 사투했다. 바싹 마른 몸, 강단 있는 눈빛으로 신념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으나, 그녀는 단지 세상과 사람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따뜻한 사람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집을 정리하고 떠날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녀의 선택은 내일을 위한 시간이 되었고, 희망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남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끌어안을 때 가능한 것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박점규 노동운동가는 수원, 울산, 인천에서 시작해서 28개 도시들을 발로 뛰며 노동현장을 온몸으로 경험한 기록했다. ‘노동여지도라는 제목답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전국의 노동 현장을 기록하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지역의 노동 역사를 두 페이지에 걸쳐 기록하여 객관성을 유지한 다음, 자신이 발로 뛰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현실을 풀어나간다. 객관과 주관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 단 연재된 글 모음의 한계는 있다. 책을 읽다보니,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독서 삼독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한국 노동 역사와 현실을 텍스트로 읽고, 필자인 박남규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숨결을 읽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규직인 내가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 인종주의를 읽는다. (정말 무의식적인 순간에) 비정규직 직원을 비정규직으로 대한다. 무기계약이 그들의 특권이 되었다는 듯 의식하며, 사소한 문제에도 그들의 인성을 탓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정규직은 정규직 편이 된다. 비정규직은 조직 내에서 권력의 소수자일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적다.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는 한, 비정규직은 유령처럼 존재한다. 잠시 긴장을 늦추는 순간 노동 현실은 타인의 문제로 멀어진다. 자기 문제에 몰입하는 반복적인 삶이 계속되면 개인은 파편화되고, 불행은 개인의 책임으로 남게 된다. 연대는 와해된다.

 

썬 전자 파업 노동자는 안녕 할까?

 

언젠가 블로그에도 올린 적이 있다. 대학 1학년 봄,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서 파업 현장에 동참했다. 학교가 끝나면 팔복동 썬 전자 파업 노동자들과 함께 지냈던 스무 살 봄은 회색으로 가득했다. 매연으로 가득 찬 을씨년스러운 공단에는 손톱만큼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로는 그들과 함께했지만, 가슴으로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죄스러웠다. 지나고 보니 (교육 받았던 대로) 자본가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평가했다. 그들 불행이 적어도 그들 책임에서 귀결되었다는 생각에서 한끝도 비켜서지 못했다. 생각은 어떻게든 들키게 마련이다. 선배들도, 동기들도 내가 가지고 있는 쁘띠적 성향을 이미 알고 있었다. 파업 중에도 나는 수업을, 학점을,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놓치기 싫었다. 선배들과 멀어지면서, 나에게 팔복동 썬 전자 노동자의 이야기는 언급해서 안 되는 금기가 되었다. 극히 짧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지만, 자책의 시간은 길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뼈아프게 경험했던 시간이었다.

 

소액주주자의 권리보호가 정의로운 경제를 실현할 수 있을까?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95316909

 

노동여지도를 읽는 동안 장하성 교수의 한국 자본주의를 함께 읽고 있었다. 소액 주주의 권리를 통해서 정의로운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어 답답한 지점에서 노동여지도는 정의로운 경제 실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해준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한국에서 소액 주주자의 권리가 실현된다고 해도 그것은 중산층의 이야기다. 노동 문제는 주주권리 보호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생산의 주체가 배제된 정의로운 경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주주 배당금 얘기 속에 빠져 있는 한국의 노동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망치가 주어진 손이 세상을 만든다. 노동에서 인간이 소외되지 않는 한국의 노동여지도는 언제쯤 그려질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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