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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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으로 바로 서기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문학동네, 2015. 9.

 

신간에 뜨자마자 오랫동안 기억했던 책이다. 내가 읽는 개인주의자 선언이 벌써 5쇄라니, 독자의 반응이 대단하다. 사람들도 나처럼 개인주의 선언이 하고 싶은 모양이다. 조직에서 버티기로 마모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의 갑갑함이 크다. ‘는 작아지고, 사회적 지위와 역할의 무게는 점점 커져간다.

 

세대보다는 시대의 범주로 문제를 접근하는 문유석 판사의 접근이 훨씬 설득력 있게 나가온다. 장하성 교수가 쓴 신간 왜 분노해야 하는가(헤이북스, 2015. 12.)는 이십대의 역할을 강조한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아젠다를 세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법은 쉽지만, 한 세대를 하나의 집단으로 이해하는 장하성 교수의 태도가 몹시 불편하다. 세대로 묶으면 너무 많은 개개인의 편차가 희석되어 버린다.

 

인생에는 숱한 역설이 존재한다. 그것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든가, 세상이 비관적이기 때문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든가, 불행하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등에서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는 죽는 걸 알면서도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므로. ‘그러니까’, ‘어차피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살아야 한다.

 

저자 문유석의 글, 많은 부분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찌꺼기처럼 붙어 있는 잉여의 불편함이란 그가 너무도 당당하고 위악스럽게, ‘개인의 행복 추구.’,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직업.’을 말하기 때문이다. (서평을 쓰는 나의 비도덕성을 비난한다면, 당연히 할 말은 없다.)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위악을 떨 수 있지만, 자신이 악하다고 믿는 사람은 위선을 부릴 수밖에 없다. 문유석의 위악은 조금 조심스럽다. 반듯한 사람, 건강한 소시민, 그러나 딱 거기까지.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책을 팔려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리라고 하니, 비난해야 할 까닭도 없다.

 

지난 주 인터뷰에서, 앵커 손석희는 배우 황정민에게 마지막으로 어려운 질문을 하겠다고 했다. 관객 천만을 달성한 국제시장제보자들중 어느 쪽에 마음이 더 기우냐는 것이었는데, 대답은 아주 쉬웠다. 고민할 것도 없이, ‘국제시장의 아버지가 자신의 이상이라고 말했다. 어려운 질문에 쉬운 답이라니. 거기까지가 황정민이라는 배우의 한계라는 걸 알겠더라. 거기에서 나는 찝찝한 잉여가 남는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만도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279).”는 저자의 말에 이렇게 댓글을 달고 싶다.

한 개인으로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려하기에 전쟁같이 힘든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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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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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 셋에서 시작해서 별 다섯이 된 책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반비, 2015. 9.

 

이 책을 읽음으로 하루를 득템한 기분이다. 책날개를 젖히면 서문과 목차에 앞서 책에 대한 깨알 같은 찬사가 가득하다. 이 책은 독자 개개인의 불안증에 대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쓰여 있다. 전문 영역을 다루고 있지만, 쉽게 기술되어 있어서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번역자조차 자신의 삶의 경험으로 역자 후기를 채우고 있다. 리뷰를 쓰는 나 역시 나의 불안증에 집중해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스콧 스토셀 대신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의 평가를 별점 셋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 별 다섯을 준 이유다. 있는 그대로, 지금의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각자의 사적 역사를 들춰보아야 한다.

    

불안은 타인의 반응에 대한 과도한 의식일까?

 

내 불안증의 출발은 죽은 쥐를 만진 경험에서 출발한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1학년, 학교 봉사 활동으로 지역 정화 사업에 전교생이 참여했다. 새마을 운동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학교 앞 하수구 같은 하천에 들어가 젖은 쓰레기를 줍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나름 모범생이었던 나는 대충 청소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담임선생님의 체면을 세워주느라 꽤 열심히 쓰레기를 주웠다. 집게도 없었다. 오로지 손으로 오물을 집어 봉투에 담아야 했다. 질척거리는 흙속에서 뭔가가 잡혔다. 죽은 생쥐였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걸 쓰레기봉투에 버리고 나서 하루 종일 밥을 먹지 못했다. 그때부터 내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대상은 가 되었다. 결벽증도 심해졌다. 친구의 도시락 반찬도 먹지 못하고, 아무 곳에서나 화장실을 가는 것도 정신적으로 힘이 들었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 아이

 

한 번의 사건으로 불안증이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역시 초등학교 1학년, 수업 시간이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소변이 마려웠다. 백번쯤 망설이다가 담임선생님께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선생님은 곧 수업이 끝날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사실 소변을 참느라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였다. 시계 초침 소리가 심장에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쉬는 시간이 시작되었으나, 이미 일어나기가 힘들 정도였다. 겨우 일어나려는 순간, 바지에 소변을 보고 말았다. 오줌싸개로 낙인찍히는 순간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 집에 전화하고, 엄마 가 와서 조퇴를 했다. 한 낮의 밝은 햇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이후 나는 수년 동안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지 않으면 불안해서 다음 수업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약도 꽤 오래 먹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역시 또 같은 시기였다. 면 동네에 살던 나는 엄마와 자주 전주에 나갔다. 시장에서 한 눈 판 사이에 엄마를 놓치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엄마를 찾아야하는데, 한참 어린 나는 발자국 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내가 발을 떼는 순간 엄마와 영영 이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그때 내 나이 여덟 살, 삼십 초반이었던 부모님은 거의 매일 싸웠다. 두 분의 성정의 문제라기보다는 그저 사는 일이 고단하고 강팍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밤낮없이 일을 다니셨다. 하루걸러 하루씩 부모님이 싸우면, 나는 매일 밤 불안했다. 두 분이 헤어지면 누구를 따라가 살지 어린 나이에 고민이 많았다. (당장이라고 이혼할 것 같았던 두 분은 47년째 부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또 사춘기부터 나는 동생들과 전주에서 자취를 했는데, 먹고 사는 일로 바빴던 부모님은 밤늦게 잠시 들러 음식만 주고 지체 없이 시골집으로 가셨다. 나는 부모님이 다녀가신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혹시 사고라도 나서 두 분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까하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불안으로 위로 받는 것은 무엇일까?

 

재미있는 것은 내가 자꾸 걱정을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성장하면서 나의 걱정과 불안은 점점 강화되었다. 걱정을 하면 할수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상 심리 같은 것이었다. 혹은 최악의 상황에 미리 적응하고 싶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최악만은 막아야 한다는 자세로 일한다.

    

마지막 반전이라니. 불안의 긍정 효과

 

불안은 창의성의 토양이다. 불안 없이 예술, 운동, 창작, 성취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불행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삶을 풍부하게 살아가야 한다. 일단 30년 전만해도 불안이라는 병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 앞에서 Freud에게 감사하다. (내가 가장 몰두하는 주요 환자는 나 자신일세.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빌헬름 플리스에게(1897. 8. 43) 또한 자신의 삶 자체를 임상으로 제공한 저자에게 감사하다. 그는 기대 이상의 위로를 독자에게 제공했다. 불안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자신을 아는 일에 한걸음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나 또한 느끼고, 깊어지기도 전에 정리되었던 몇몇 사랑에 대해서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의 특별한 경험이 때론 누구나 경험했거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점이 놀랍지 않은가.

 

평생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지 싶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현란한 지적 삶을 사는 것이 유희나 목표가 아닐 것이다. 나를 알고, 세계를 좀 더 이해하는 것, 그것이 사는 일이지 않을까 싶다.

 

글을 쓰는 행위는 적당한 두려움과 떨림을 수반한다. 이를테면 불안 그 자체이지만, 꽤 근사한 흥분 상태이기도 하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끊임없이 메모하고, 그때그때 문장과 사랑에 빠지는 이유다. 읽을거리가 없으면 불안해하던 과거의 나, 다시 그때의 내가 된 설렘이 있다. 요즘 도서관 책의 강점도 알게 되었다. 밑줄 긋는 즐거움을 포기했더니, 약속한 기일 안에 읽어내는 부지런함이 발휘된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적당히 불안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53)”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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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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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행위는 자유, 공개는 책임

페이스북 심리학, 수재나 E. 책세상, 2015. 9.

    

페이스북 심리학SNS(social network service) 중독성에 관한 문화기술 연구이다. 10년 이상의 임상 경험을 갖춘 소셜 미디어 전문가이자 비평가인 수재나 E. 플로레스(Dr. Suzana E. Flores)에 의해 쓰인 이 책은 - 손에서 핸드폰을 떼어 놓고 살 수 없는 - 현대인 모두에게 낯설지 않은 경험으로 꽉 채워져 있다. SNS의 모든 사례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위험 요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SNS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SNS는 실제의 사회적 교류가 가져오는 사회적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인정과 칭찬만으로도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싸이월드가 중국까지 영향을 미치던 2000년대 초기, 왜 이런 현상이 한국 사회에서 파급 효과가 가장 컸는지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있다. ‘마실 문화가 발달했던 한국인은 옆집을 기웃거리듯, 싸이월드 산책에 나섰다는 분석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작은 반도 국가에서는 사생활 보다는 공동체의 문화가 발달하기 적합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현상이 한국만의 특수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적인 추세로 자리 잡았다. 그에 따라 긍정적인 효과 만큼이나,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 책은 저자의 재기가 빛난다. 프롤로그의 재기발랄함을 끝까지 가져간다.

 

내가 정말로 자기들 이야기를

책으로 쓸 건지 궁금해하던

모든 페친들에게

(미안, 정말로 써버렸어)

 

사람들이 페친을 끊는 열 가지 이유(104)’에서는 저절로 웃을 수밖에.

누구나 이 열 가지 이유 때문에 페친을 끊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1. 지나치게 많은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부적절한 포스팅

2. 정치적 혹은 종교적 동맹 강요

3. 페이스북 막장 드라마

4. 지나친 자기 비하

5. 나 혼자 착한 척

6. 밥 먹듯 셀카 올리기

7. 수다 대마왕

8. 날마다 인용구 날리기 (좋은 이야기를 매일 읽는 건, 정말 지루하다.)

9. 무의미한 업데이트

10. 비열함

 

인터넷에 올리는 것과 일기에 기록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지금 내가 쓰는 도 블로그에 올라가서, 사람들의 평가를 기다릴 운명을 갖고 있다. 예전에는 일기장과 편지로 기록되던 모든 것들을 인터넷에 올린다. 쓰기 쉽고, 읽기 쉬운 접근성이 보여주기 위한 삶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접근성만큼 잘못 올린 글 몇 줄에 인생 종치는 것’. 인터넷에서 글을 올리는 것은 한 순간일 수 있지만, 뒷감당은 평생 갈수도 있다. 나 또한 술을 마시고, 올렸던 사진 한 장으로 아찔해졌던 경험이 있다. 정신 차리고 아무도 보기 전에 - 재빨리 지우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진땀나는 경험이다. 직장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관리자를 욕하려고 친구에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게 미운 사람을 계속 생각하다 보니 그 관리자에게 보내버린 적도 있다. 한동안 서로 얼굴 보기 힘들었던 악몽같은 사건이라 잊혀 지지 않는다. (참고로, 나는 실수 또한 나의 무의식이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튀어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일을 털어낼 수 있었다. 사람 미운 맘을 어떻게 감출 수 있었겠는가? 튕겨 나오는게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이렇게 적다 보니, 내가 저질렀던 SNS상의 문제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의 실수담은 여기서 그만. (이 또한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므로.)

 

일상의 소소한 경험이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기록된다. 음식의 맛이 느끼는 것보다 어떻게 SNS에 사진으로 남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보다는 어떤 사진으로 남는지가 더 신경 쓰인다. 문학 또한 이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경향이 문학 일부에도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는 만큼 쓴다.”는 말이 있듯이 문학 작품의 일부는 개인의 사적 취향을 나열하는 것으로 점철된다. 맥주를 마신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에일인지, 라거인지, 버드인지, 호가튼인지, 4X인지, 그 맥주 맛은 어떤 것인지 묘사하는 것으로 족히 몇 페이지를 쓴다. 음악으로 멋을 부리고, 음식이 라이프 스타일이 자리 잡는다. 이는 칙릿 소설만의 경향은 아니다. 문학계의 보편적 현상으로 느낀다.

 

맥락 없는 한 컷의 사진은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맥락 없이 편집된 사진으로 구축된 정체성이 과연 나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람들만 느꼈을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일반인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또는 포장된 모습으로 비춰지는 연예인도 일상에서 일반인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들의 특별함의 토대 역시 인간 삶의 보편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두 개의 전혀 다른 삶이 개인의 정서에 미칠 영향을 가늠해보게 된다.

 

성형 효과와 같은 SNS 전시 효과

 

의사 선생과 얘기 나누던 중에 내가 성형효과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외모 때문에 상처와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적당한 스트레스로 자신감을 갖는 것이 정신 건강에는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톡스 같은 간단한 시술로 젊어진다면, 이 또한 긍정적이지 않을까? 의사 선생은 당장은 성형수술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도 한시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때 느끼는 공허함과 우울증이 더 심각할 것이라고 했다. 성형처럼 SNS 또한 내적 상실감으로 나타날 것이다. 보이는 삶과 실제의 삶의 괴리가 커질수록 정신적으로 힘들질 것은 당연하다.

 

일상에 집중하는 삶

 

일반인은 연예인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연예인은 원치 않아도 대중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하지만 일반인은 노출을 최소화하여 자신의 사적 삶을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현실에 집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삶이란 원하는 모습만 편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SNS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다양한 사례도 고찰해야 한다. ‘엄지손가락의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독재 정권을 물러나게 했던 사례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또한 읽고 쓰는 강제력이 있다는 면에서 블로그는 상당히 유용하다. 익명의 누군가에게 나를 검토하고 평가하는 것은 싫지만, 읽고 쓰는 강제력을 획득하는데 이만한 매체도 없다. 다만 쓰는 행위가 편견선입견속에서 평가되길 바라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아는 사람에게 블로그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페이스북 심리학은 쉽게 읽히는 책이다. 다루고 있는 주제의 무게가 가볍다는 의미는 아니다. 익숙해진 정보화 사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쓰는 일은 자유, 공개하는 읽은 책임이라는 단순한 교훈 하나를 얻게 된다. 지워도 언제든 복구될 수 있는 인터넷 월드의 자료들. 좀 더 심사숙고하고, 메타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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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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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문학동네, 2014. 10.

 

최근 김연수의 에세이와 소설론을 읽으면서, 내가 그의 소설을 모두 읽었다는 것, 좋아하는 소설가 베스트 10’에 든다는 생각이 거짓임을 알았다.

그의 글을 읽던 시절, 나의 내적, 외적 조건이 소설에 집중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지나치게 바빴다.

문장과 문장의 빈틈을 사색으로 채울 여유가 없었다.

사회과학 서적을 읽듯, 플롯 중심으로 소설을 읽었다.

힘든 직장 생활, 대학원 수업 준비, 학위 논문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나의 여유와 감성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제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인지 충분히 알게 되었다.

아마도 이번 늦가을과 겨울은 온전히 김연수의 소설을 다시 읽는 일로 채워질 것이다.

적확하게 제대로 읽는 일, 작가와 독자가 벗으로 만나는 시간을 기대하며, 창작론과 소설론 또한 열심히 탐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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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살아계실 때 함께 할 것들
신현림 지음 / 흐름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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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살아계실 때 함께 할 것들, 신현림, 흐름출판, 2011.

 

이십 년 전, 임시직 첫 직장에서 낯도 익히지 못했던 사수가 내게 물었다.

 

좋아해?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좋아할 것 같은데

 

이십대 중반이었던 나는 김광석의 음악을 듣고, 최영미의 시를 읽는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지 가늠하지 못했다. 김광석은 이미 천 번째 공연을 향해 가고 있었고, 최영미의 시는 몇 십 만부가 팔렸을 터. 그들의 음악과 시를 나만의 고유한 취향이라고 믿었다. 나의 내면을 들킨 것처럼 깜짝 놀라며, 사수에게 경외감을 느꼈다. 이 정도로 나를 아는 직관이라면, 믿고 따르겠다는 충성심이 저절로 생겼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에서 이런 선배를 만나게 된 건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의 나는 -  순수했다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울 만큼 - 어처구니없는 청춘이었다.

 

최영미의 시만큼, 신현림의 <세기말 블루스>가 좋았다. 경계 없이 거침없이 넘나드는 세기말의 증후가 느껴지는 그녀의 시를 -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 읽고 또 읽고, 일기장에 필사했다. 이후 출판된 빵은 유쾌하다, 시간 창고로 가는 길도 좋았다. 하지만 <신현림의 싱글맘 스토리>부터 우리는 이제 저자와 열혈 독자에서 결별해야 할 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이번에 엄마 살아계실 때 함께 할 것들을 읽으며, 그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사진작가, 시인, 에세이스트. 세상의 규범에 포섭되지 않을 것 같았던 신현림은 착한 딸, 좋은 엄마,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행복을 찾는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 그 자체로 느껴졌다. 그녀의 생각에 딴지 걸 생각은 없다. 다만 젊은 미혼의 여성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시대가 아무리 변했어도 엄마들은 자식들 시집장가 보내는 일에 최고의 의미를 둔다. 이것은 부모의 본능이다. 자식이 제아무리 괜찮다 해도, 제아무리 잘 나가도 짝을 찾지 못하면 소용없는 일이 된다.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 그것만 잘해도 당신은 이미 효녀다.(173)”

 

보건복지부의 건강사회 캠페인 문구 같다. 마치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논리가 느껴진다. 저자는 결혼이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원하면,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인생의 과업이 결혼이었던가? 자녀의 결혼이 부모 행복의 필요조건임은 인정한다. 자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다. 둘은 상보적 관계에 있다. 부모든, 자녀든 서로가 어떤 상태로 살게 되더라도 존중하고 지지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 윤리를 실천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시절 인연이 다하면, 헤어져야 하는 모든 연인처럼, 독자도 떠나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니. “지루한 세상에 구두를던졌던 세기말 블루스의 저돌적인 신현림이 그립다. 나의 추억은 이만 접고, 하루하루 가족을 더 많이 사랑하고자 노력하며 결 고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신현림의 행복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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