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우리팀 서랍이 새로 들어와서 전에 쓰던 서랍을 정리했다. 이것저것 버리고 채우고 하다 어느칸에 심드렁하게 던져져있는 2005년의 책상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2005년 한해 동안 참 울며불며 열심히 뛰어다녔구나.... 싶다. 그래도 나름 기억할 일이라고 몇군데 끄적끄적 해놓은 게 보인다.
01. 2005년 1월 11일-15일: 제주 출장.
한 겨울 제주의 바람이 그렇게 매섭고 추운지 몰랐다. 지금은 회사를 떠난 전 팀장님과 고생스럽게 일정을 진행한 일들이 떠오른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샤인빌에서 회색빛 하늘과 코발색 바다를 보며 늘어지게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그 춥고 신산스러웠던 겨울의 제주를 잊긴 어려울 것 같다.
02. 2005년 2월 26일: 결혼하고 미국으로 떠났던 M언니와 학교 앞에서 만난 날.
임신 7개월의 몸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언니와의 감격적인 재회. 타향에서의 외로움, 생명을 안고있는 충만함, 건실한 동반자와의 안락한 일상...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던 아스라한 시간.
03. 2005년 3월 12일: P와 S와 함께 이태원 시갈 드 몽마르뜨.
신혼의 달뜬 새색시 P. 재기넘치는 멋쟁이 S. 온통 쇼핑 이야기만해도 너희들과 만나면 알수없는 에너지가 샘솟아!
04. 2005년 3월 18일: 청담동 우림 씨어터에서 윤석화의 <Wit>를 B양과 함께.
전날 밤새 마감하느라 비몽사몽 상태. 윤석화의 매너리즘 충만 그 연기에도 질렸고, 감겨오는 두눈에 항복항복...
05. 2005년 3월 19일: 모니카버전 L양과 <조르디 사발> 공연을 보다.
나를 바로크의 세계로 인도했던 조르디 사발을 코앞에서 봤던 감격.
06. 2005년 4월 20일: 새벽에 들어가서 옷만 갈아입고 경복궁으로 출동. 좌담 정리하다 또 날밤새고... 이때부터 우당탕탕 웹진 만들기 시대로 돌입.
07. 2005년 5월 30일: 명동성당 제일 꼭대기 마룻바닥에 앉아 봤던 <바흐 칸타타>.
자리는 너무 불편하고 공기는 끈적거리고, 무대는 하나도 안보였지만... 영혼으로 스며드는 아름다운 음악엔 그저 감동. 지친 나를 한없이 위로해준 바흐. 그래서 당신을 사랑해...
08. 2005년 6월 24일-26일: 모니카 L양과 타이페이 여행
비정성시를 따라간 엎치락 여정. 타이페이의 회색빛 공기와 소박한 정취...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었다.
09. 2005년 7월 12일: 안성으로 그림책 작가 이억배 선생님을 뵈러간날.
무척 뜨거운 오후. 사진가와 둘이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이억배 선생님의 조용한 작업실로 찾아갔다. <솔이의 추석이야기>에 손수 해주신 싸인. 정겨운 웃음과 세상에서 가장 힘센 수탉을 그리는 정직한 손... 서울로 올라오는 길의 상쾌한 바람까지, 웹진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이런분을 만나서 기쁘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날.
10. 2005년 8월 1일: 청담동에서 서교동으로 회사 이전. 바야흐로 서교동 시대의 개막.
11. 2005년 9월 13일: 취재원으로 만난 문광부 직원. 그 선한 눈매와 성실하고 아직은 공무원의 때를 입지 않은 순수한 모습...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추가 취재를 핑계로 몇 번 전화를 하려다 그만 뒀다. 결국 그냥 지나간 바람이 됐다. 나. 밥팅이밥팅이...
12. 2005년 10월 19일: 양아치를 만나다.
미디어작가 양아치의 안국동 프로젝트 취재. 너무 똑똑한 이 인간. 참 원하는대로만 답을 주신다. 어르고 달래서 비주얼은 재미나게 나왔는데, 인터뷰가 너무 정답같다.
13. 2005년 11월 10일: 코엑스 일본영화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개막작. 후카츠 에리가 나름 열연을 펼치긴 했지만 원작보단 못하다. 넘 지루한 영화가 되어버렸어. 기대했던 <박사>보단 아무생각없이 봤던 <벚꽃동산>이 그야말로 수작. 바야흐로 일본영화의 세계로 고고~
14. 2005년 11월 25일-30일: 후배 S와 일본여행. 도쿄, 오사카, 교토, 고베 그리고 히메지와 나라까지.
이틀은 야간버스에서 자고, 1일 5식을 하며 열렬히 일본열도를 누비고 다닌 해병대버전의 여행.
교토의 은각사와 금각사, 기온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간사이를 다시 가보고 싶어.
15. 2005년 12월 23일: 드디어 웹진 마지막호 마감. 공명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넘기고 송년회를 겸한 회사 파티까지...
열 달 동안 내 생활의 알파와 오메가였던 아르* 웹진. 너 때문에 참 많이 웃고 울었다. 아니 울며불며 파란만장하게 만든만큼 2005년은 너로 인해 내가 참 많이 성장한 한해였어. 땡큐 그리고 굿바이.
16. 2005년 12월 25일-29일: 디자이너 B와 홍콩 여행.
XㅡMas in Hongkong. 콤콤한 블루치즈처럼 중독성이 강한 홍콩. 딤섬과 애프터눈티의 기묘한 조화처럼 알수없는 어울림과 대비로 끌어당기는 낭만의 공간.
한겨울의 홍콩. 그냥 유유자적 따뜻한 남국의 바람을 즐기면 그만. 가벼운 옷차림으로 맞이하는 성탄절이 조금은 색다른 기분을 전해주기도 했고.... 이렇게 2005년을 마무리하는 것도 괜찮다, 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