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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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p 15

  마지막 구급차가 다 떠나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밤늦게 사람들이 모두 잠든 후에야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탈의 부모님은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그분들이 내게 말을 걸었더라면, 나는, 때로 내가 꾸는 꿈속에서의 진실을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꾸는 꿈속에서 잔디 봉지를 구멍에 빠뜨리는 것은 탈이 아니라 나라고. 어떤 때는 내가 녀석을 밀어 넣는다고. 한 번은 내가 녀석에게 내려가 보라고 부추겼다고.

  그것이 진실이에요, 하고 나는 그분들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Agalma) 우리가 꿈(무의식)에서 좋아하는 성질 중 하나는 이미 일어난 일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다는 것. 의식 또한 무수히 자기 암시로 진실을 왜곡하고 있음에도 부족한 것이다.

 

 

 

「코요테」

p 18

  아버지에게 분명히 있기는 했던 조금의 재능은 단지 좌절의 원천으로만 작용하며, 실현되지 않은 막연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상기시킬 뿐이었다.

 

p34

  "나와 같이 갈래?" 잠시 후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내게 그런 초대를 한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그러겠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어머니가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수영 팀에 있어요." 나는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 팀이라."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그렇구나. 물론 그래야지." 그런 다음, 그것이 우리 사이의 차이점을 영원히 설명이라도 해줄 것처럼 아버지는 내 어깨를 두드리고 테라스로 통하는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사라졌다.

 

*(Agalma) 길들여지지 않는 코요테처럼.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p 94~95

  "그런데 뭐에 홀려서 우리한테 그런 문제를 내신 거예요?"

  그가 빙그레 웃었다. "자만심은 물리학자에게 가장 큰 방해요인이지요." 그는 스토브에서 주전자를 들어 도자기 포트에다 뜨거운 물을 옮겨 부으며 말했다. "뭔가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발견의 기회를 없애버리게 되니까요."

 

p96~97

  나이가 들면 역설에 환멸을 느끼기가 쉬워지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젊어서는 도전뿐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저 피곤해지거든요. 모든 물리학자에게는 자기 너머 수준의 사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와요. 자기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들도, 보어조차도 그 지점에 도달했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음악과 같아요. 재능과 연습은 음악가를 멀리 나아가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굴드의 열광적인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상승으로 가는 아르페지오, 굉음을 향해 가는 크레셴도. "내 말을 이해하겠어요?"

 

p127~129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ㅡ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ㅡ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나는 콜린과의 관계에서 그런 식의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나의 일부, 나의 중요한 일부를 채워주고 있고, 로버트 역시 똑같이 중요한 나의 또 다른 일부를 채워주었다고 믿을 뿐이다. 로버트가 채워준 나의 일부는, 내가 생각하기론, 지금도 콜린은 그 존재를 모르는 부분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쉽게 파괴도 할 수 있는 나의 일부다. 그것은 닫힌 문 뒤에 있을 때, 어두운 침실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고 제일 편안하게 느끼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가 서로 숨기는 비밀에 있다고 믿는 나의 일부다. 로버트는 거의 10년 동안 내가 콜린에게 숨긴 비밀이다. 가끔은 그에게 말을 할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기를 10년이 되었고, 그동안 우리는 유산, 파산지경 그리고 시부모님의 죽음을 지나왔다. 이제 나는 우리가 함께 헤쳐나갈 수 없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내가 두려운 것은 그의 반응이 아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 그 사실을 내면화하여 속으로만 삭일 것이다.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내색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도 그는 아마도 내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왔을 테고, 내게서 로버트에 대한 감정을 듣는다고 해도 내게 상처 주지 않을 방법만 생각할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안다.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Agalma) 연애조언에서 빠지지 않는 말 중 내가 양 팔뚝을 감싸 안은 채 입술을 삐죽하는 것이 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라는 말, 나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금의 주저라도 있다면 거기서 멈추라고. 실패와 후회를 감당할 마음이 확고할 때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라고. 무슨 말을 듣든, 사랑의 교통사고 소식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다.

   

 

 

「외출」

p 170~171

  레이철은 맨발로 그 다리의 널판들을 가로지르는 경주를 좋아했다. 널판은 60센티미터 정도 간격으로 고르게 놓여 있었다. 보름달이 뜰 때는 쉬웠다. 발을 디디는 곳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밤에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그러면 앞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발을 디뎌야 했다. 한마디로 믿음이 필요했다. 믿음과 타이밍. 미끄러졌다 하면,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났다 하면 발이 널판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정강이뼈가 뚝 하고 부러질지도 몰랐고, 까딱 잘못하다가는, 만약 재수가 없어서 발이 쑥 빠져버리는 날에는 10미터 아래 강물 속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어리고 자신감이 넘쳤던 우리는 물론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빠지거나 비틀거려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리듬을 타면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요령이었다. 그렇지만 말했듯이, 정작 중요한 점은 믿음, 나무 널판이 내가 발을 디디는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맹목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그리고 널판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Agalma)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그 지점, 대책없던 시절. 

 

 

 

「머킨」

p 187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진행성 양쪽 귀 난청으로, 그 말은 태어날 때는 아무 이상이 없거나 한쪽 귀에만 문제가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양쪽 귀가 다 안 들리게 된다는 의미다. 어찌 보면 그 때문에, 애초 태어날 때부터 귀가 다 안 들리던 아이들, 자기들의 청력이 언젠가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희망을 품어본 적이 없는 아이들보다 가르치기가 더 힘겹다. 그러나 이런 모습, 자기들이 읽는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지 않은 발음으로나마 입 밖으로 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이 아이들을 견디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p198

  "안돼." 나는 그 아이들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그 녀석이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 녀석에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러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를 짓지만 나 역시 그 아이들이 호세의 모습을 보는 게 차마 괴롭다는 것을, 자기들 가운데 최고의 시인이 다른 사람들의 귀에 시를 들려줄 수 없는 유일한 시인이라는 사실이 아이들 마음에 낙담을 안긴다는 것을 안다.

 

*(Agalma) 말을 할 수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해도,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젠 못하게 되었어도 소통은 늘 힘든 일이다. 많은 말이 없이도 따뜻한 소설. 사실 온통 말을 글로 바꿨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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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칼 포퍼 지음, 허형은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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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역사와 정치에 관한 고찰

제1장 자유에 대하여

p26

  계몽주의가 자주적 의견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것은 존 로크 시대부터였다.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영국과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전쟁들의 직접적인 결과였고, 그러한 전쟁들은 '종교적 관용'이라는 사상을 낳았는데, 종교적 관용은 많은 이들(대표적 아놀드 토인비)이 주장하듯 그렇게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정신, 혹은 두려움이 사람들을 특정한 종교적 믿음으로 몰아넣지 못한다는 깨달음, 그 이상이다. 오히려 그것과 반대선상에 있는 개념이다. 강요된 종교적 일치는 철저하게 무가치하다는, 오직 자유의지로 선택한 종교적 신념만이 가치가 있다는 긍정적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거짓 없는 믿음에 대한 존중, 나아가 모든 개인과 개인의 의견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위대한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의 말을 빌면, 인간적 인격체human person의 가치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칸트가 말한 '인간적인 인격체의 가치'는, 모든 인간 그리고 그 사람의 신념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중략)…

  모든 합리주의자는 칸트의 지론에 동조해야 한다. 누구도 철학을 가르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철학적 사색을 할 수 있을 뿐이라는 지론이다. 그것은 곧 비판적 태도를 취함을 의미한다.

 

#(Agalma) 비판적 태도와 학습된 수용(세뇌)을 구분해 제대로 사유하고 사고하는 보통 인간을 보기가 힘든 시대. 합리적 비판보다 쉽게 동조하는 세태. '(신)자본주의' 탓을 하지만, 애초에 지배계층에 의해 구축된, 시스템 문제라고만 볼 수 있을까. 우리들 각자의 책임과 행동의 부재 탓은 아니고? 자본주의를 惡으로 본 마르크스의 후예들처럼 굴지 말자구. 이미 그러한가.

 

 

제4장 냉소주의적 역사관에 반하여

(1991년 5월 아이크슈타트 대학에서 한 강연)

p72

  우리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은 과거를 미래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판단함으로써, 어떤 것이 가능하고 어떤 것이 옳은지 배워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과거에서 풍조나 경향을 추론하려고 해선 안 된다.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다.

 

#(Agalma)"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말한 헤겔과 반대되는 입장인데, 헤겔의 관념론을 도덕적 대재앙이라 말할 정도니 당연하기도 하지. 칼 포퍼의 긍정주의는 과거 근절주의처럼 보인다. 평행이론을 단지 우연의 절묘함으로만 치부할 것인지? 또한 인간은 생존본능적으로 대비지향주의자이자 경험이라는 나침반을 이용하려는 호모파베르가 아닌가. 그의 사상은 禪사상처럼도 들린다. 내·외부로도 무장해제라니. 긍정주의가 아닌 인도주의에 더 가깝지 않나 했지만 그의 글을 읽을수록 느껴지는 합리성 추구와 정언적 감행력에서 보면 수긍이 되는 듯도.

  하지만 그 자신이 그의 주장에 반대되는 것도 같은 게, 아래 7장에서 과학과 난센 구호 활동에 대한 언급과 2부 10장에서 "식물도 마찬가지지만 동물들의 행태를 보면 모든 유기생물이 법칙이나 규칙을 좇도록 조건화되어 있"다고 말한 것에서 보면 우리가 삶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통해 반복의 발견을 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의 과학이론으로 봐도 '시행착오'(문제에 여러 가지 해解를 대입해보고 잘못된 것들을 제거하는 방식,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 해당 동물이 시도하는 시험적 행동들)를 통한 학습에도 해당된다.

  물론 칼 포퍼가 공격하는 점은 관념론의 提言적 성격임은 주지해야 한다. 또한  그의 말은 관념적 과거를  통해 내리는 확증이나 확정이 본질과 진실을 오도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임은 확실이다.

 

 

제2부 자연과학에 관한 문제들 

제10장 과학이론의 논리와 진화

(1972년 3월 7일 North German Radio(북독일)에서 한 강연)

p197

 

 과학은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산물의 체계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관념론이 들어맞았다. 그러나 관념은 실재에 부딪혀 시험당할 때 무너지게 돼있다. 이것이 실재론적 세계관이 옳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Agalma) 이 발언엔 동의할 수 없다. 시적 세계, 무의식의 영역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그 파급력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느껴진다. 증명되지 않는 것은 참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수긍하겠는데 실재=옳음이 될 수 있는가. 외양과 성질을 파악했다고 해서 어떤 것의 실재를 거론할 수는 있어도 실체와 실제 의미를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케플러를 비롯한 그토록 많은 과학자들이 종국에는 왜 종교와 미신에 빠져 들었겠는가. 칼 포퍼가 왜 자신을 합리주의자라고 하는지 확실히 알겠다. 헌데 15장 인식론에서의 제3세계(인간의 정신이 낳은 산물들의 세계)를 좀더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의 과학 - 인식 실재론적 세계관이 상반되어 보이기도 한다 .

 

 

 

 

 

 

 

 

#

강연과 연설을 묶은 것이라 그의 이론과 신념들이 중복 제시되는 감은 있으나 칼 포퍼의 주요 저작을 읽기 전에 개요서를 본다는 생각으로 읽으면 적당하다. 이 책의 1부는 세계 현상에 대해서, 2부는 현상 뒤에 숨은 실재를 탐구하는 과정(그의 표현에 따르면  '진화론을 인정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론'ㅎ)에 대해 논하고 있다. ​

 

  칼 포퍼는 칸트의 진정한 후예는 쇼펜하우어라고 하지만 그 자신도 만만치 않게 그렇다. 유전학적으로 선험적인 지식에 의해 감각기관이 발달된 것이라고 논하는 진화론 · 인식론 章에서 특히 그렇다. 내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 기조는, 지식의 진화에서 자기비판적 태도와 객관적 진리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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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9-09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번째 이야기는 제가 보기에도 포퍼가 과거로 미래를 예측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고, 과거로 미래를 섣부르게 추측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같습니다`입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과학은 실재를 갖고 검증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관념이란 개념을 좁게 사용한 것 같습니다. 관념은 (이론적) 사실과 (실천적) 가치 두 개념이 혼재되어 있는데, 포퍼는 사실(실재)에만 한정하여 언급한 것 같습니다. 물론 `같습니다`입니다.^^

좋은 글 소개 고맙습니다.^^ 머리가 따끈해졌습니다.^^

AgalmA 2015-09-11 21:40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저도 적극 동감 :)
단상만 몇 개 올린 거라 칭찬 말씀은 과분하고 좋은 댓글을 달아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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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보 속 리듬을 듣듯이 따라가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시냇가의 디딤돌을 건너듯  단상을 거치는 소설이 있고,  돌이 쌓여 성벽이 만들어지는 걸 목격하는 소설도 있다. 백과사전은 소설이 될 수 없지만 소설은 백과사전이 될 수 있다. 이 말의 핵심은 제대로 된 백과사전 같은 소설쓰기란 백과사전이 소설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 백과사전이 소설보다 재밌는 사람에겐 다 난센스 같은 말이다.  더욱 절망적인  술주정,  동냥짓,  나쁜 습관이 몸에 밴 소매치기 같은 소설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눈을 감는다.

 

그런가 하면 거울을 보듯 문장을 보는 독자가 있고, 총구를 마주한 듯 느끼는 독자도 있으며, 잃어버린 일기장을 대하듯 하는 독자, 책을 집 삼아 파묻혀사는 중독자도 있다.

 

독자라 할 수 없는 부류도 있다. 독자로 가장하고 정복엔 필연적으로 약탈이 뒤따른다고 행하는 도둑, 독서를 비타민이나 음료수 정도의 소비재로 여기는 상인,  자신의 내·외적 가난함을 가리기에 적합한 저렴한 값의 악세사리로 책을 필요로 하는 속물, 생경한 이국요리나 해외여행처럼 기대심리로 다가가는 관광객, 꿈같은 소리라며 외면으로 대결하는 외골수, 장르국한주의자, 문학사절주의자 등이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걸 겪고난 뒤에야 우리는 어른 독자가 되는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소설의 독자란 사랑에 빠지는 존재다. 몇 시간 혹은 평생. 소설의 효용이나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숲속에 도착한 이후처럼 그저 읽을 뿐.

 

다소 장황한 이 이야기를 왜 했나면, 이 소설이 이런 이야기를 하게끔 만드는 백과사전 같은 소설이라서다.

 

 

 

 

 ㅡ Agalma

 

 

 

 


 

 

 

 

p 104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스와 사비나가 중절모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내가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의 모든 오솔길을 되짚어본다면, 그들이 작성한 몰이해의 목록은 두터운 사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조그만 어휘록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p10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그것이 지닌 순간성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심판도 내릴 수 없었다. 순간적인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지는 해를 받아 오렌짓빛으로 변한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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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5-06-0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강렬하네요. 책에 담긴 작가의 사유만큼..^^

AgalmA 2015-06-09 16:25   좋아요 0 | URL
님 덕분에 조금 고쳤어요. 고마워요ㅜㅜ 종종 체크하는데 오늘도 영락없이....
위의 생각과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는데, 문제는 엉성한 문장들.... 🐧
언제나 지금의 한계를 느껴요ㅜ
 
시네퐁주
자크 데리다 지음, 허정아 옮김 / 민음사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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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도 통감하다시피 번역이 매우 실망스럽지만 오솔길을 걸으며 떨어진 나무 열매를 발견하듯이 읽는다.

역자 해제에 데리다 인터뷰와 용어 해설도 수록되어 있어 퐁주 뿐 아니라 데리다 파악에도 도움이 되었다. 해제를 먼저 읽고 본문으로 들어가는 게 이롭다.

자크 데리다의 문체를 한국어로 제대로 구현하기엔 무리수도 있다.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는 그의 발화에는-그 유명한 해체적 텍스트 읽기, 브레히트의 '낯설게하기'와 친구맺으셈ㅋ<)! 나도 끼어들기 빠질 수 없지ㅎㅎ)- 정신사납고 정나미 떨어지는 성미가 느껴져; (하지만 그 '대상 유희'(퐁주가 개발하고 데리다가 적극 수용한)에서는 격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프랑시스 퐁주 작품 분석이 프란시스 퐁주보다 난해하면 어쩌자는 건지; 그러나 퐁주식으로 데리다답게 읽어내려가는 방식이 가장 적절한 퐁주 읽기라는 것엔 반박하기 어렵다. 해체주의 만세? 데리다가 선호한 퐁주, 블랑쇼, 바타이유, 아르토, 조이스 등의 비전통적 현대 작품들엔 멋지게 들어맞는 방법론 같지만 모든 작품 분석에 적절할 지는 글쎄. 비슷한 문제의식과 궁리를 하는 작가와 문학 비평가의 궁합 문제라고나 할까. 독자가 <지적 세수:글쓰기>에 적극 가담할 의욕도, <독특한 어떤 것>을 발견할 감식력도 없다면 이 해체론적 글읽기가 가능하겠는가. 문학과 텍스트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고대인 혹은 중세인들이 지금의 문학을 이해는 커녕 독해 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멀리 볼 것도 없이 보통의 독자가 퐁주를 읽고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여기서, 문학은 훈련된 독자를 원하고 있지 않은가. <초월적 글읽기>의 허와 실.

프랑시스 퐁주 시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자크 데리다 비평을 보니 복잡해보이긴 한다. 번역으로는 파악되지 않던 것을 원문 비교해 몰랐던 부분을 상당히 알게 되고, 꽤나 불편하게 하는 예리한 정신 분석이기도 한 그 방식에서 문득 드러나는 것을 만날 때의 쾌감이 있다. <쾌락 없는 해체란 없으며, 해체 없는 쾌락이란 없다>

데리다는, 깨끗함과 순수함을 추구한 프랑시스 퐁주가 헤겔은 읽고 손을 씻어야만 한다고 말했다며, 그걸 밝히면서도 굳이 프랑시스 퐁주에 대한 철학 분석 설거지를 하고 있다. 신빙성 있는 분석임에도 그 추임새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건 막을 수 없다. 그 방식 또한 형이상학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다.

 

p45

에로틱한 장면은 항상 이 양쪽을 겨냥한다(세탁 대야 앞에 선 그는, 그가 없이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는 세탁 대야를 묘사하고 있는 세탁 대야이다). 이제 헹구기를 살펴보자.)

 

p46~47

(의미나 개념을 떠나) 무의미한 것 속에서 스스로를 의미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서명하기가 아니겠는가? 그는 어딘가에서 무의미한 것이 <위생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우리에게 계속 도움이 될 것이다.

 필연적으로 세탁물이나 신선한 것(그러나 언제나처럼 <세탁물>과 <신선한 것>이라는 말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에 집착하여 생기는 깨끗한 것에 대한 욕망, 그것이 바로 작품 속에 항상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지금으로서는 세탁물이라는 말에서 세탁물이나 목욕 타월을 빨래 집게와 함께 집어주는, 여러 다른 하위 결정 중의 음성학적, 의미론적, 도식적인 복선은 무시하기로 한다. 그는 기다려주리라).​

 

p86 ​

입 안의 빵, 그것은 모든 숭배로부터 면제되었다고는 해도 역시 하나의 단어이며, 그 구술적 소비가 <죽은 나무>를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나무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죽은 나무, 즉 소나무 말이다(<프랑시스 퐁주에 의해 주목받았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라고 말해졌을 앞의 송림 부분을 볼 것).

 

 

 

 

§§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간 데리다가 미끼로 권한 붉은 사과를 먹는 덫에 빠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작가는 교활하다.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해 파놓은 구덩이에 미끼를 잔뜩 깔아놓고 독자를 기다린다. 독자가 구덩이에 빠지면 좋아하며 의기양양하게, 빠져나올지 말지는 그들의 뜻이자 자유라고 말한다. 정작 그 자신조차도 구덩이의 결과에 대해 예상도 못했으면서. 더 의심스러운 혐의는 독자가 그 구덩이 속에서 작가가 놓친 무언가를 찾아서 돌아오기를 염원한다는 것이다. <열쇠가 꽂혀 있는 열쇠구멍>같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간의 시스템은 그 원죄를 캐물을 수 없음으로 인해 모두에게 혐의를 물을 수 없다. 그로 인한 미스테리함이 떠돈다.

 

 

 

 

ㅡ Agalma

 

 

 

 ​

 

 

 ​* 이 이미지는 데리다가 에필로그에서 밝힌 사건을 패러디한 책의 마지막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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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예술작품의 초점조절 기능/

​p183

호메로스 시대에 살았던 보통 그리스인들에게는 이런 인물들 모두가 삶의 방향과 의미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중세의 대성당과 단테의『신곡』역시 비슷한 역할을 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그 작품들을 통해 구원과 파멸의 차원들을 이해했고, 그럼으로써 성자와 죄인을 구별할 수 있었다. 다른 시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 된 예술작품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p184

신전, 대성당, 서사시, 연극, 그리고 기타 예술작품들은 그 문화에서 장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만을 떠받들고 주목하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작품은, 부모가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을 보고 그 시절을 떠올리듯이 그렇게 무엇을 재현하는repersent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신전이 "아무것도 그려 보여주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히려 예술작품은 작동work한다. 즉 예술작품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주목시켜주는 일들을 한데 모아 보여준다. 모름지기 빛을 발하는 예술작품은 그런 삶의 방식을 비추고 주목하게 해주며, 자신의 빛으로 모든 사물을 빛나게 한다. 예술작품은 그 세계의 진리를 구현한다.

* (Agalma)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현대의 우리가 추앙하는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과거의 것이고, 현실에서 실제 작동하고 있는 예술작품의 위치에는 즉각적인 문화들(인터넷의 각종 매체들(쇼셜 네트워크, 유투브, 게임)과 싸구려 대중 문화들이기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통합되기 보다 오히려 고립되고 더욱 일시적이며 왜곡되어 있다.

또 한가지 지적이 필요한 것은, 신적 차원(自然과 애니멀리즘)이 그 자리를 대신해주고 있다고 예상할 수 있겠지만 특별한 예술작품이 없는 원시 부족이나 귀농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안분지족하는 삶에 대해서는 이 논리로는 완벽한 설명이 어렵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민/

​p202~203

기독교의 전통에서 '육화'가 갖는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이런 갈등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수의 삶은 실존의 한 본보기이기에 영원한 진리의 집합체로 환원될 수 없다. 예수가 특정한 시공간을 통해 세상에 왔다는 점과, 그가 행했던 방식대로 살아감으로써 사람들이 실존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은 기독교적 전통에서 정말로 중요하다. 그가 아가페적 사랑의 정조를 예증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그 정조를 붙들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정조는 철학적 관조를 통해 도달하는 보편적 원리들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정조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에 자신을 조율하는 방식 그 자체를 말하는데​, 우리는 그런 사랑을 예증한 본보기를 통해 그 정조에 접근할 수 있다. 기독교가 강조하는 이 '체현體現'의 측면이야말로 아가페적 사랑이라는 구원의 전조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이다. 기독교의 이 요소는 결코 그리스적인 철학 용어로 개념화할 수 없는 부분이다.      

 

 *(Agalma) 프란체스코 교황님 생각이 절로 났다.

 

제 7장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

/테크놀로지, 현대 세계의 공식/

p363~364

테크놀로지는 기예의 필요성을 없애는 것만큼이나 의미의 가능성도 없애버린다. 숙련된 기예를 지닌다는 것은 그 분야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안다는 뜻이다. 이런 기예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차이들을 밝혀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런 차이들 각각의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책임감을 기르게 한다. 이런 기예의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테크놀로지가 우리 삶을 단조롭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런 단조로움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로, 이 단조로움으로 인해 세계는 점점 기술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즉 스터트가 나무에 대한 지역적 이해가 죽었다고 말한 것이 이 뜻이다. (…중략…) 질의 저하보다 더 나쁜 것은 차이를 설명하는 기술을 잃는다는 점인다. 기예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서 사라질수록 세계는 ㄷ욱더 가치의 구분을 잃게 된다.

두번째는, 세계가 의미를 상실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단조로워진다는 점이다. 사물에 대한 애착과 존경의 정조-어떤 분야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구분할 줄 아는 숙련되고 밀착된 관심-는 우리에게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Agalma) 테크놀로지는 빠른 커뮤니케이션과 대응이라는 장점이 있다. 지식에 한정해보자. 과거에는 각자가 열심히 자료를 찾고 읽는 자력의 사유 시간이 축적될 수 있었다면, 현대는 인터넷 서핑 등으로 각종 정보를 손쉽게 구할 수 있다보 사유보다 정보수집에 더 시간을 쏟는다. 게다가 무수히 쏟아져 들어오는 방대한 정보를 제대로, 적시에 알고 사용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단점 때문에 장점은 무용지물이 되거나 오히려 毒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저자들이 강조하는 "메타 포이에시스"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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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소개된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 David Foster Wallace의 소설이 국내에 한 권도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건 매우 유감스럽다.

호메로스와 허먼 멜빌 /모비딕의 훌륭한 해설서이기도 하면서 서양의 일신주의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20세기 신의 죽음을 명명한 니체의 저주를 이 책의 저자들은 '다신주의'를 불러옴으로서 회복을 꾀하려 한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시대에서 문제해결을 모색점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이 책의 저자들도 '그리스의 신화'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공통점이다.  ​

또한 저자들이 이 시대 허무주의를 타계할 다각도의 해법제시는 흥미롭긴 하다.

성스러움의 회복단계: 퓌시스physis(반짝임, 세상에 실재하는  사물들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방식), 포이에시스poiesis(기예 : 육성 or 창작활동), 메타 포이에시스meta-poiesis​(적시에 성스러움을 얻는 기술)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분석은 <재설정자와 해설자> 부분인데, 즉각적으로 세계의 방향을 바꾸고 정착시킬 수 있는 작동기제는 이것일 것이다. 2000년이 넘도록 막강한 일신주의의 힘, 마르크시즘의 혁명론이 이뤄낸 형국 등등을 볼 때.

그럼에도 못내 씁쓸한 것은 단테가 아퀴나스의 형이상학과 신학에 기초해 그 시대 속에서 노래할 수 밖에 없었듯이 ​우리 또한 니체와 하이데거를 계승해온 어떤 지점 속이라는 것이다. 이 시대는 닫혀가는 어떤 시대이지 열려가는 시점은 아닌 것 같다.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반짝이며 노래하는 새들이 좀더 많아져야겠지. 다윈과 프로이트와 니체가 있던 시대처럼. 믿음이 갈가리 찢긴 지금의 인간에게 어떤 기적이 작동할 수 있을지 낙담하며 고대한다.

​ㅡ 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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